[란지막시] Truth 외전

포유님 생일 선물(뱀파이어 합작-커미션 연작의 외전)


닷새 만에 도시에 들어와 여관을 찾았을 때는 종업원 한 명만 카운터에 앉아 꾸벅꾸벅 조는 밤이었다. 서둘러 2인실 값을 치르고 올라와 앞만 보고 달려드는 전투마처럼 저돌적으로 침대를 향해 쓰러졌다. 문을 열고 들어와서 눕기까지 대략 5초. 막시민은 그 짧은 사이에 옷과 신발을 모조리 벗어 던지는 묘기를 선보였다. 베개에 머리를 대자마자 비명에 가까운 기쁨의 신음이 절로 나왔다. 뱀파이어와 여행하는 것은 미친 짓이었다. 란지에는 저녁부터 새벽까지만 이동할 수 있었고, 낮 동안에는 움직이지도 못할 뿐더러 갓 태어난 새처럼 무방비한 까닭에 눈 뜬 채로 주변을 경계해야 했다. 요컨대 막시민은 낮이건 밤이건 잠을 이루지 못했다. 나날이 시커메지는 눈 밑을 보고 란지에는 자기가 알아서 옮길 테니까 밤에는 편히 눈을 붙이라고 제안했다. 아주 합리적이었다. 하지만 막시민은 란지에의 품에 공주님처럼 안기는 자기 자신을 상상하고 진저리를 쳤다. 아무리 피곤해도 그 꼴로 어떻게 잔다는 말인가. 따라서 닷새간 밤샘을 고집했고, 여관에 당도하자마자 기절하기로 결정했다. 아등바등 들고 있던 눈꺼풀을 놓치기 무섭게 수마가 덮쳤다. 꿈도 안 꾸고, 몸을 한 번 뒤채지도 않은 완벽한 꿀잠이었다.

다시 일어났을 때도 여전히 방안은 어두컴컴했다. 꽉 닫혀 있는 나무 덧창 때문이었다. 덧창이 안 달린 여관도 많았고 커튼 역시 대부분 얄팍하기 그지없었다. 그들은, 정확히 란지에는 여관에서도 방에 들어오는 햇빛을 차단하기 위해서 노숙 시 사용하는 두꺼운 천으로 창문을 철저히 가리곤 했다. 방문도 잠금쇠를 채운 데 더해서 테이블이나 의자로 막아 놓았다. 아무것도 없으면 심지어 침대를 옮겨서 문에 붙였다. 물론 막시민과 순조롭게 교대해서 잠드는 평상시에는 그렇게까지 하지 않았다.

어쩐지 위가 빚 독촉하는 고리대금업자 저리 가라 소란을 떨더라니, 의자를 치우고 나갔더니 태양은 중천을 지나 벌써 서쪽으로 뉘엿거리며 석양을 퍼트렸다. 막시민은 제일 빠른 요리를 시켜 허겁지겁 쓸어 넣은 후, 기름진 고기와 맥주를 해치웠다. 모르긴 몰라도 죽은 생선이 동질감을 느꼈을 눈깔에 비로소 생기가 돌아왔으리라. 내친김에 목욕물을 요청해 꼬질꼬질해진 몸도 말끔히 씻었다. 최근 막시민은 란지에의 주머니를 헤프게 여는 재미에 빠져 있었다. 사실 처음에는 돈을 쓸 때마다 찜찜했다. 백수 뱀파이어 녀석이 어디서 돈이 생겨 주머니 가득 금화와 은화를 짤랑거리고 다니겠는가. 아무래도 의심스러워 넌지시 물었을 때, 그는 솔직하게 대답했다. ‘세상엔 돈이 많으면서 뱀파이어보다 사람 고혈을 잘 빨아먹는 부류가 많지.’ 그래서 막시민은 더 캐묻지 않았다. 아무나 습격해 강도질을 했으면 모르되 남을 갈취해서 재물 불리는 작자들이 뱀파이어한테 털리든 말든 알 바가 아니다. 그런 동전을 이용한 소비 활동이야말로 사회의 미풍양속에 보탬이 되는 일이 아니겠는가.

오랜만에 푹 자고 청결해졌더니 다른 데 신경을 기울일 여유가 생겼다. 방으로 돌아가 얌전하고 반듯하게 누운 란지에를 들여다보았다. 잠들기 전에 씻었는지 뺨이 보송보송하고 희미하게 비누 냄새까지 났다. 이론적으로 뱀파이어는 죽은 존재일 텐데, 란지에는 노상 달짝지근한 향기를 풍겼다. 마치 벌을 유혹하는 꽃처럼 생겨서 실상은 꿀로 옭아매 집어삼키는 거미 같다. 저를 해치지 않으리란 사실을 인지해도 그의 게걸스러운 아름다움에는 이따금 머리털이 쭈뼛했다. 침대에서 물러난 막시민은 게으르게 짐을 뒤졌다. 그리고 이틀 전 숲을 지나다가 나뭇가지에 걸려 옆단이 찢어진 코트를 꺼냈다. 이미 실과 바늘은 여관에 부탁해서 어찌저찌 빌려 왔다. 까짓것 버리고 새로 사면 그만인데, 음식 따위의 소모품엔 아까운 줄 모르고 동전을 쓰면서 옷은 버리기가 안 내켰다. 뜯어진 옆단만 기우면 멀쩡한 코트를 왜 버리겠는가.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막시민은 바늘구멍에 실을 꿰는 제가 어처구니없어 속으로 구시렁거렸다. 돈이 있어도 뼛속까지 밴 가난뱅이 근성은 쉽게 세탁되지 않는구만.

어디까지나 겸사겸사였다. 햇빛이 완전히 자취를 감추기 전까지는 방을 지키는 편이 좋았고, 시간을 때울 소일거리는 마땅히 없었으니까. 촛불에만 의지해서 바느질하자니 눈이 침침해졌다. 양말처럼 얇은 피륙도 아닌 까닭에 바늘 꽂기도 쉽지 않아서 박음질이 비뚤배뚤했으나 개의치 않았다. 남에게 내보일 것도 아니고 제가 걸칠 옷인데 엉망이면 또 어떠랴. 그래서 무성의한 손놀림으로 대강 깁는데 얼마 지나자 지루해서 하품이 다 나왔다. 쿨쿨 자는 뱀파이어 근처에서 미간을 찡그리고 바느질하는 꼴이라니, 아주 주인놈과 하인이 따로 없다. 급기야 막시민은 누가 시킨 적 없는 노동을 자발적으로 시작했다는 진실도 외면하고 볼멘소리를 중얼거렸다.

“저놈은 바늘이나 잡아 봤을까?”

“너보다 잘할걸.”

“아오, 깜짝이야!”

무심결에 고함을 질렀다. 삽시간에 심장이 발가락까지 추락했다가 튀어 올랐다. 어느새 란지에가 눈을 뜬 채 쳐다보고 있었다. 천장을 향해 누워서 고개만 이쪽으로 돌린 자세가 솔직히 약간 소름 끼쳤다.

“너 제발 좀…”

“막 일어났어. 이게 기척을 낸 거야.”

나른한 눈빛으로 미루건대 거짓말은 아니었다. 녀석은 인간과 살아 움직이는 원리가 달라 충분히 밤이 깊지 않은 시간에는 시들시들했다. 그래도 겉보기에는 평범하게 잠이 덜 깬 모습이다.

“바느질을 할 줄 아네.”

“내 형편에 옷이 좀 찢어졌다고 새로 사거나 수선을 맡기면서 살았겠냐? 근데 네가 나보다 잘 한다고?”

“나도 원할 때마다 옷을 사러 나가고, 수선집에 들를 형편은 아니지.”

당연한 이유를 들으니 할 말이 사라졌다. 머릿속에 ‘란지에는 뱀파이어’라는 도식이 또렷하게 박혀 있지만, 인간이 아닌 존재의 삶을 자연스럽게 상상하기 어려웠다. 입을 다물고 바늘이나 계속 움직이자 란지에가 몸을 옆으로 눕혀서 물끄러미 응시했다. 촛불의 묽은 빛을 한 점 포획한 빨간색 눈에서 반짝반짝 윤이 났다. 한창 의식이 날카로울 때, 그는 높게 깎아지른 얼음 단면을 연상시켰다. 투명하고 매끈한 형상에 홀려 손댔다간 눈치도 못 채고 살이 베일 듯한 분위기였다. 그런데 저렇게 이불 속에 파묻혀서 동그란 머리를 내놓고 팔다리는 옹그린 채 눈꺼풀만 느슨히 미동하니까 영 딴판이었다. 미쳤나? 토끼도 아니고 왜 귀엽지? 어금니를 꽉 물고 녀석을 의식하지 않으려 애썼으나 그럴수록 더 수렁에 빠졌다. 두어 번은 흘끔거려 신경 쓰인다는 티를 냈으나 번번이 눈이 마주쳐서 그만뒀다. 막시민은 마른침을 삼켰다. 이 바늘이 뚫는 대상이 코트인지 허공인지 제 평정심인지 헷갈리는 지경에 이르렀을 즈음, 정말로 엉뚱한 걸 뚫고 말았다. 넋 놓고 있다가 외마디 비명을 찔끔 질렀다. 엄지에 금세 핏방울이 맺혔다.

젠장, 머저리 같이 굴다가 이럴 줄 알았지.

스스로에게 면박을 주고 나서야 퍼뜩 란지에한테 생각이 미쳤다. 고개를 드니 아니나 다를까 녀석의 기색이 일변했다. 늘쩍지근하던 눈이 형형해져서 손가락을 직시했고, 내면의 허기와 탐욕은 당장에라도 허술한 피막을 찢고 나올 야수처럼 어슬렁거리며 그림자를 내비쳤다. 방안의 기운이 첨예해져 피부를 찔렀다. 저런 모습에도 그럭저럭 익숙해졌기 때문인가. 섬찟해서 목덜미가 서늘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묘한 흥미가 돋았다. 엄지를 뚫어지게 쳐다보는 시선이 흡사 먹이를 쥔 손에 집중하는 짐승처럼 간절하고 또 얌전하다. 슬쩍 손을 움직였더니 따라오는 눈길을 보라. 그새 더 배어 나온 피가 흐를 것 같아서 관망은 접어 두고 엄지를 앞으로 내밀었다.

“어차피 나온 거 맛보려면 맛봐라.”

눈동자에 강렬한 조바심이 응집됐다. 란지에는 기다렸다는 듯이 일어났으나 그 몸짓은 연인을 맞이하러 나오는 신사처럼 품위가 있었다. 아울러 보는 사람이 되레 초조해질 만큼 느린 동작이었다. 발자취도 안 내고 의자 앞으로 걸어온 란지에가 팔걸이를 두 손으로 짚었다. 허리를 숙인 그의 얼굴이 코앞까지 근접했다. 입술이 닿을 듯, 그러나 스치지도 않고 손으로 향했다. 피에 사로잡힌 시선은 집요함을 넘어서 찰나라도 눈을 떼면 그대로 증발할까 두려워하는 것처럼 보였다. 란지에의 긴장이 전이되어 무의식중에 팔을 움츠렸다. 그건 마치 도망가기 직전의 먹잇감 같았다. 저조차 그렇게 느꼈으니 뱀파이어는 오죽할까. 고개를 숙이던 란지에가 눈만 가만히 치뜨고 응시했다. 손목을 우악스레 낚아채지도 않고, 탐식을 드러내 완곡하게 위협하지도 않는다. 그에게선 도도한 장난기마저 엿보였다. 어디 해보라는 듯이 팽팽하게 당겨진 실을 밀고 당기지만, 너무 당겼다간 널 어떻게 할지 모른다고 소곤거리는 눈빛. 의미심장한 무언이 오가는 동안에도 란지에의 머리는 아래로 내려간 손을 천천히 쫓았다. 향긋한 머리칼이 콧등을 살짝 건드리고 다음 순간, 뱀파이어는 허리를 낮춘 그대로 인간의 발치에 무릎을 꿇었다. 막시민은 뻣뻣하게 굳어 버렸다. 이내 말캉한 혀끝이 궁지에 몰린 엄지에 닿았다.

뇌리가 작열하는 것 같은 전율이 일었다. 란지에가 조용히 터트린 숨결에서 그를 집어삼킨 희열을 고스란히 느낄 수 있었다. 체온보다 차가운 입술이 아예 손가락을 머금어 핥았다. 말이 맛보기였지 바늘에 찔린 상처에서 피가 나와 보았자 쥐뿔만도 못할 텐데, 혀와 입술은 아랑곳하지 않고 엄지를 쪽쪽 빨았다. 얼굴에 열이 몰려서 눈알까지 뜨거웠다. 숨도 제대로 못 쉬느라 어깨는 꼼짝도 안 했다. 멍청하게 입만 벌리고 있던 막시민은 겨우 띄엄띄엄 말마디를 꺼냈다.

“차라리…깨물든가…그만, 좀…적당히…!”

그러자 란지에가 야릇한 혀놀림으로 엄지를 훑고서 떨어졌다. 아쉬운 양 입술을 핥으면서도 기분 좋은 기색이 완연했다. 입꼬리가 엷은 웃음기로 물들었다.

“나중에.”

다시 무릎을 펴고 서는 그에게 나중에 허락해줄 것 같냐고 핀잔할 참이었다. 하지만 아직 팔걸이에서 손 떼지 않은 뱀파이어가 귓가에 키스하는 것이 더 빨랐다. 나는 널 아껴 먹는 게 좋아. 간들간들하고 오싹한 목소리였다. 비로소 란지에가 물러나며 코트와 바늘을 가져갔다. 막시민은 속으로 교활한 뱀파이어를 욕하며 타액에 젖은 엄지만 쏘아볼 수밖에 없었다. 얼굴이고 귓바퀴고 터질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