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란지막시] Untruth

뱀파이어 합작


집을 나간 부친의 부재에 익숙해지고, 자식들을 내팽개치고서 나타나지 않는 것이 더는 화나지 않고, 생사조차 그다지 궁금하지 않게 되었을 때였다. 한밤중에 갑자기 웬 남자가 방문했다. 막시민은 그의 행색을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한 손에는 커다란 가방을, 다른 손에는 기름 램프를 들고 있었다. 몸에 두른 망토 아래로 끈을 단정하게 묶은 가죽 부츠가 보였다. 후드를 깊게 눌러 써서 얼굴은 자세히 보이지 않았으나 램프 불빛이 어린 붉은 눈동자만은 소스라치도록 선명하고 또 아름다웠다.

그래, 아름다웠다. 비록 돈이나 음식 외에는 인생에 하등 쓸모가 없다고 여기는 막시민이지만 아름다움을 느끼는 감각이 없지는 않았다. 그러나 대개는 오후에 서녘을 물들이는 노을, 햇볕이 내리쬐는 초여름 들판 따위나 보면서 느꼈던 감상을 사람에게서 느낀 적은 처음이라 순간적으로 얼이 빠졌다. 방문자는 노골적으로 관찰하는 시선 탓인지 잠자코 있었기에 막시민이 먼저 물었다.

“뉘쇼?”

“여기가 리프크네 씨 댁입니까?”

그리 높지도, 낮지도 않은 목소리에 정결하기까지 한 어조였다. 막시민은 말투만으로도 남자의 성격을 어림짐작할 만하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중요한 점은 그게 아니었다. 그가 말하는 ‘리프크네 씨’가 대체 누구를 지칭하고 있는지가 문제였는데, 막시민은 그 사람이 바로 자신의 아버지라는 사실을 직감적으로 알아차렸다. 십 년 동안 돌아오지 않는 작자 대신 이 허름한 집에서 갓난쟁이 동생들을 먹이고 키워온 장본인으로서 과연 이 집을 부친의 집으로 인정해줘야 할지 약간 고민이 되었다. 왜냐하면 이 방문자가 혹 아버지를 찾아온 빚쟁이라면 혈연관계임을 시인했다가 매우 골치 아파질 것이 빤하기 때문이다. 막시민은 입맛을 다셨다.

“뭐, 그렇긴 하다만, 이 집에 댁 같은 사람을 아는 리프크네는 없는데.”

“그럴 겁니다. 전 제가 아는 리프크네 씨의 부고를 전하러 왔습니다.”

실로 갑작스러운 소식이었다. 무덤덤하게 말을 내뱉은 남자는 손에 든 가방을 발 앞에 내려놓았다. 그의 유품입니다, 라고 덧붙이는 목소리는 여전히 차분해서 막시민은 도무지 현실감을 느끼지 못했다. 아버지가 죽었다고? 어디서 떠돌아다니다가 객사라도 했나? 묵묵히 가방을 내려다보다가 들어 올렸는데 예상 외로 굉장히 무거웠다. 막시민은 인상을 찌푸리고 남자를 흘끗 보았다. 망토로 가려져 있으나 밖으로 나온 손발이며 얼굴을 보아선 호리호리한 체격이었다. 그런데 이 무거운 가방을 아무렇지 않게 들고 있었다니, 보기보다 힘이 센 자였다.

“일단, 들어오쇼.”

여름엔 덥고 겨울엔 추운 허름한 집에 변변한 소파 하나라도 있을 리가 없다. 막시민은 다리가 삐걱거리는 나무 의자 하나를 내어주었다. 남자는 주위를 빙 둘러보더니 램프를 바닥에 내려놓고 앉아 후드를 벗었다. 막시민은 일순 말문을 잃었다. 갸름한 얼굴에 섬세한 이목구비, 밤인데도 묘하게 빛나는 하얀 피부. 그러나 꼭 다문 입술과 서늘한 눈빛은 오싹한 느낌을 주었다. 차분하고 절제된 분위기를 풍기는 남자를 보고 막시민은 신선한 충격을 받았다. 살면서 처음 보는 종류의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그를 일별하고 건네받은 가방을 열어보니 갖가지 물건이 들어 있다. 옷가지, 단검, 서적, 컵과 그릇, 석궁과 화살, 묵직한 나무한, 그 외 잡동사니들. 막시민은 무엇부터 물어야 할지 가늠이 안 갔다. 어떻게 죽었는지 묻는 게 순서겠지만 솔직히 가장 궁금한 점은 아버지란 자가 대체 뭘 하는 사람이었는지에 관한 문제였다. 막시민은 무거운 나무함을 열어보고 씁쓸하게 입맛을 다셨다. 안에 엘소가 한가득 들었다. 아버지에게 돈 한 푼도 받지 못했는데 결국 죽어서 유품으로 받게 되다니.

“전 란지에 로젠크란츠입니다.”

“아, 난 막시민 리프크네인데, 짐작하겠지만 그 리프크네 씨의 아들이요. 유품을 전해줘서 고마운데, 아버지랑은 어떤 사이인지 물어봐도 되나?”

란지에라고 이름을 밝힌 남자의 외양이 자신과 비슷한 나이대로 보였고, 본디가 예의라곤 말아먹고 사는지라 막시민은 은근슬쩍 말을 줄였다. 란지에 로젠크란츠는 조금도 신경 쓰지 않는 태도였다. 그는 의자에 등을 기대고 다리를 꼬았다. 시선을 내리깔자 긴 속눈썹 그림자가 진홍색 눈동자 위로 드리워졌다.

“리프크네 씨는…글쎄요, 친구, 라고 하는 편이 맞겠군요.”

아들 뻘 되는 나이에 친구라고? 아버지의 유품을 챙겨올 정도라면 필시 각별한 관계였으리라. 막시민은 도대체 어떻게 해야 그런 사이가 될 수 있는지 궁금했는데 남 일은 신경 끄고 사는 것이 상책이다. 그저 이 남자와 아버지 사이에 복잡한 사정이 있었으리라 여기고 그러려니 넘어갔다. 그다지 중요한 문제도 아니었다.

“뭐, 친구라면 알겠다만 그 양반은 집 나간 지가 십 년은 족히 되어서 말이야. 뭘 하고 살았는지도 모르는데 대뜸 유품만 돌아오니 참…현실감도 없고 황당하구만.”

“그러시겠지요. 궁금하신 점이 있거든 물어보십시오. 아는 것에 한해서 답해드리겠습니다.”

란지에는 어디서 좋은 교육을 받은 귀족 나리처럼 정중하고 예의 바르게 말했다. 코츠볼트에서 거칠게 굴러먹은 막시민이 제일 상대하기 거북해하는 종류였기에 이 적막한 밤에 마주하고 있는 상황이 썩 반갑지는 않았다. 그러나 물을 것은 물어야 했다.

“일단, 아버지 사인은 뭔데? 그리고 시신은 어디 있고?”

사실, 이 란지에라는 자를 덥석 믿기에는 수상쩍은 점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불쑥 찾아와 부친이 죽었다는데 그 말이 사실이라는 증거가 어디 있느냔 말이다. 유품도 진짜 아버지의 물건이라고 장담할 수 없었다. 란지에 로젠크란츠는 자신이 의심받고 있음을 눈치 챘는지 물끄러미 눈길을 보냈다. 잠시간 침묵을 지키던 그는 고개를 가볍게 끄덕였다.

“시신은, 안타깝게도 수습하지 못했습니다. 그는 뱀파이어 사냥꾼이었고, 뱀파이어에게 살해당했습니다. 시신도 그들이 가져갔지요.”

막시민은 얼이 빠졌다. 개 짖는 소리도 아니고 분명히 사람의 말인데 이해가 가지 않았다. 뱀파이어 따위는 쓸데없이 낭만을 좋아하는 이들이나 믿는 괴담이 아닌가? 막시민은 란지에에게서 광인의 기색을 찾으려고 애썼으나 그의 눈빛은 한결같이 침착하고 깊었다. 점잖 빼고 거들먹거리는 어중이떠중이보다 훨씬 그럴싸했으므로 막시민은 자신답지 않게 긴가민가하기 시작했다. 허무맹랑한 소릴 지껄이는 미친놈 보듯이 했는데도 표정 한 번 바뀌지 않는 모습을 보노라니 웬 헛소리냐고 무작정 몰아붙일 수가 없었다.

“나보고 그 소릴 믿으라고?”

“믿든 안 믿든, 사실입니다.”

당당한 태도와 또박또박한 어투는 듣는 이로 하여금 신뢰감을 심어주었다. 막시민은 일단 란지에를 믿기로 했다. 저런 거짓말을 해서 그가 얻을 것도 없어 보였다. 그러나 뱀파이어라니……. 가방에 든 물건을 다시 살펴보다가 석궁에 시선이 못 박혔다. 어째서 그런 일을 했는지, 왜 이제껏 한마디 언급도 안 했는지, 의문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그러나 막시민은 더 추궁하지 않기로 했다. 애초에 가족다운 애정도 없거니와 고작 유품만 보고서는 부친이 죽었다는 실감이 나지 않았다.

“사실이라 치지 뭐. 일부러 전해줘서 고맙수다. 볼일은 그게 다요?”

“아뇨.”

막시민은 혹여 이 남자가 소식을 전해준 것을 빌미로 무언가를 요구하지 않을지 긴장했다. 자리에서 일어난 란지에 로젠크란츠는 외투 주머니에서 동전 하나를 내밀었다. 막시민은 하마터면 이유도 묻지 않고서 손을 뻗어서 자신의 주머니에 집어넣을 뻔했다.

“부탁 하나만 드리겠습니다. 먼 길을 와서요. 사흘만 이 집에서 쉬다가 떠나도 되겠습니까.”

이 마을에도 허름하나마 여관이 있었으므로 거기 가서 묵으면 되잖으냐는 말이 목구멍까지 올라왔다. 그 말이 입 밖으로 나오지 않은 이유는 하나였다. 남자가 건넨 동전은 무려 금화였기 때문이다. 허름한 판자 건물에서 고작 사흘 머무르겠다면서 이런 거금을 내미는 까닭이 미심쩍어 쳐다보노라니 란지에가 별안간 손목을 잡아당겼다. 막시민은 반사적으로 손을 빼려고 했으나 놀랍게도 꿈쩍하지 않았다. 호리호리한 체구만 보아서는 상상하기 어려운 힘이었다. 당황한 사이, 그는 금화를 손에 쥐여 주었다.

“부조라고 생각하세요. 생전에 리프크네 씨에게 도움을 많이 받기도 했고.”

“흠…좋게 생각하고는 싶은데, 그래도 너무 많아서.”

“그럼 몇 가지만 더 부탁드려도 될까요.”

“요리는 못 해줘. 뭐, 사다줄 수는 있지만.”

금화를 받았으니 빵과 베이컨을 사다주는 번거로움 정도야 감수할 수 있었다. 별안간 란지에가 엷게 웃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고맙습니다. 점심과 저녁이면 충분합니다. 그리고 하나 더, 만약 누가 저를 찾거든 바로 떠났다고 말해주세요.”

마지막 부탁에서 위험한 냄새가 풍겼다. 곱다랗게 생겨서 도망자라도 되나? 금화를 척척 내미는 것을 보면 빚에 쫓기는 것 같지 않고, 죄를 지을 법한 사람으로도 안 보였다. 어떤 사정인지 몰라도 란지에 로젠크란츠는 누군가가 자기를 찾아오리라 확신하는 듯했다. 까딱하면 성가신 일에 휘말릴지도 몰랐다. 막시민은 눈앞에 확실히 존재하는 금화와 불확실한 귀찮음 사이에서 갈등했다. 그러나 원체 머리 아픈 것을 싫어했기 때문에 결정은 빨랐다. 그런데 막 입을 열려는 찰나, 란지에가 문으로 고개를 돌렸다.

“손님이 오셨군요.”

“엉?”

추측이 아니라 단언이었기에 막시민은 어리둥절했다. 누가 문이라도 두드렸나? 문을 돌아보고 귀를 기울였으나 별다른 기척이 나지 않았다. 아무도 안 왔는데 갑자기 손님은 무슨 손님. 기가 막혀서 가시눈을 뜨고 곁눈질하자마자 눈이 마주쳤다. 손에 쥔 금화에 생각이 미친 까닭에 막시민은 얼른 안경을 추켜올리고 시선을 돌렸다. 쾅쾅, 문 두드리는 소리가 난 것은 거의 동시였다. 란지에 로젠크란츠를 찾는 사람인가 하여 쳐다보았더니 그는 누가 왔는지 훤히 아는 사람처럼 고개를 저었다. 막시민은 잠시 그를 내버려두고 문을 열었다. 턱하니 버티고 선 방문자를 확인하자마자 표정이 형편없게 구겨졌다.

“뭐냐?”

방문자는 피터 데니슨과 디토 데니슨이었다. 옛날부터 사이가 좋지 않던 이웃집 형제로, 툭하면 부모가 없다는 점을 들먹이면서 버림받은 녀석이라고 조롱하곤 했다. 싸우기도 여러 번 싸웠는데 나이든 후로는 싸움박질하는 것을 그만둔 대신 무시로 일관했다. 그런데 이 늦은 시간, 형제가 나란히 찾아왔으니 절대로 좋은 의도는 아닐 터였다. 둘 중에 형인 피터가 거만한 태도로 팔짱을 꼈다.

“너, 해질 무렵에 우리 집에 왔었지?”

“어. 근데.”

막시민은 심드렁하게 대꾸했다.

“우리 집 닭장에서 닭이 세 마리나 없어졌어. 네 짓이지?”

이번엔 동생인 디토가 나섰다. 형보다 덩치가 크고 성격도 교활해서 언제나 상대하기 싫은 녀석이었다. 막시민은 기가 막혔다. 데니슨 형제는 이미 범인을 자신으로 단정하고 있었다. 그야 유년 시절에 워낙 먹고 살기가 막막해서 동네 사람들 닭장이나 밭 따위를 넘나들면서 서리를 하곤 했다. 그러나 지금은 목공인 게일 아래에서 잔심부름을 하며 푼돈이나마 벌고 있었다. 그네들 집에 찾아간 것도 게일이 고친 식탁 의자를 가져다주기 위함이었다. 가자마자 의자를 두고 바로 돌아왔는데 갑자기 의심을 받으니 어처구니없고 불쾌했다.

“무슨 닭을 세 마리나 가져가겠냐? 난 아니니까 엄한 사람 추궁하지 말고 딴 데 가서 알아봐라. 닭장 문을 제대로 닫았는지 그거나 확인하라고.”

“뭐? 네가 다녀간 뒤에 없어졌는데 어디서 발뺌…”

“아니니까 가라.”

단호하게 말을 자르고 문을 쾅 닫았다. 밖에서 피터가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으나 들은 체도 안 하고 란지에를 돌아보았다. 그는 무슨 일인지 관심 없다는 태도로 의자에 앉아 허공 어딘가를 응시하다가 천천히 눈을 돌렸다. 마치 자체적으로 빛나는 것처럼 붉은 눈동자에 아무런 감흥도 담겨 있지 않다. 그 무감함이 아름다우면서도 소름 끼치는 구석이 있었다. 문밖에서 시끄럽게 소란피우는 소리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둘은 침묵과 더불어 시선을 교환했다.

“제 부탁은 들어주실 겁니까?”

“…따라오쇼.”


*


집에 방이라곤 몇 없었기 때문에 막시민은 자신과 동생 둘이 쓰는 방을 란지에한테 내어주었다. 동생 녀석들은 부친의 부고에 슬퍼하기도 잠시, 우리 형편에 무슨 손님을 받느냐며 항의를 했다. 그러나 막시민이 보여준 금화를 보자마자 입을 꼭 다물더니 오히려 며칠 더 머물게 해서 숙박료를 받자며 다분히 사기꾼 같은 얘기를 쑥덕거렸다. 평소라면 막시민도 얼씨구나 그 계획에 동참했겠지만 이번엔 달랐다. 까닭 모르게 란지에 로젠크란츠가 꺼림칙했다. 더군다나 방에서 무엇을 하는지 다음날 내내 문을 꼭 닫고 나오지도 않았다. 부탁받은 대로 시장에서 식사거리를 사다가 챙겨주었더니 그것도 방안에서 혼자 먹었다. 지난밤에 대화한 바로는 낯가리는 성격이 아니었는데, 이상하게 사람을 피하는 느낌이었다. 막시민은 그가 못내 신경 쓰였으나 어차피 사흘만 지내다가 떠날 사람이니 깊게 관여하지 않으려고 했다. 그리고 이날 밤, 낯선 이들이 문을 두드렸다.

처음에는 데니슨 형제가 또 찾아온 줄 알았는데 건장한 남자 둘이 문 앞에 서 있었다. 막시민은 그들이 누굴 찾으러 왔는지 대번에 직감했다. 대강 짐작은 했지만, 생각보다 훨씬 위험한 분위기를 풍기는 자들이라 막시민은 내심 긴장했다. 방안에서 꼼짝도 하지 않는 란지에 로젠크란츠의 정체가 한층 궁금해졌다. 혹시 위험한 자라면 약속이고 뭐고 깨버릴 참이었다.

“누구쇼, 들?”

“여기가 리프크네 씨 집인가? 사람을 찾고 있는데.”

“맞긴 맞는데, 누굴 찾는 겁니까?”

유난히 인상이 차가운 남자가 낮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뱀파이어.”

하루 만에 저 단어를 또 듣게 될 줄은 몰랐다. 분명 이들도 부친을 아는 사람 같은데, 다짜고짜 찾아와서 뱀파이어라니? 어리둥절해서 쳐다보기만 하자 다른 남자가 헛기침을 하고 설명을 덧붙였다.

“거짓말이라고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우리는 뱀파이어 사냥꾼이야. 리프크네 씨는 우리 동료였는데, 뱀파이어에게 살해당했지. 도주한 놈을 추적하는데 방향이 이쪽이더군. 혹시 가족까지 노리는 게 아닌가 걱정이 되어서 부랴부랴 쫓아오는 길이지. 리프크네 씨 아들이지? 혹시 낯선 남자가 찾아오거나 집 근처에 나타나지 않았어? 얼굴은 눈에 띌 거야. 푸른 머리칼에 붉은 눈동자를 가졌거든.”

물론 찾아왔고 심지어 지금 집안에 있었다. 막시민은 갑자기 뒤죽박죽이 된 머릿속을 정리했다. 이들과 란지에가 한 얘기의 공통점은 아버지가 뱀파이어에게 살해당했다는 사실. 차이점은 란지에의 정체였다. 이 남자들은 란지에가 그 뱀파이어라고 주장하지만, 란지에는 본인이 아버지의 친구라고 얘기했다. 어느 쪽이든 무턱대고 믿기 어려웠다. 만약 란지에가 뱀파이어라면 아버지의 유품을 챙겨서 가져다줄 이유가 없다. 물론 이 집에서 머물게 해달라는 부탁부터 방에서 나오지 않는 것까지 수상쩍은 부분이 많았지만 그것만으로 그를 뱀파이어라고 단정할 순 없다. 하지만 이 남자들의 말이 사실일 가능성 또한 완전히 배제하기 어렵다. 막시민은 란지에의 얼굴, 특히 그의 차분하고 서늘한 눈빛을 떠올렸다. 알 수 없는 마력을 지닌 홍색 눈동자가 선연하게 아른거리자 가슴이 술렁거렸다.

혼란에 빠져서 아무런 말도 못하자 부친의 사망 소식에 충격을 받았다고 생각했는지 재차 말을 잇는다.

“아버지 일은 안 됐어. 우리도 안타깝게 생각하고, 그래서 복수라도 해주기 위해서 그놈을 쫓는 거야. 갑자기 찾아와서 뱀파이어 얘기를 늘어놓으니 안 믿기겠지만, 아는 게 있다면 말해줘.”

남자의 말은 진심처럼 들렸다. 마음이 흔들렸으나 사실을 밝히자니 입술이 떨어지지 않았다. 주머니에 든 금화의 무게 때문인가. 막시민은 잠시간의 저울질 끝에 마침내 결정을 내렸다.

“안 그래도 어젯밤에 찾아왔었는데, 어디로 갔는지는 잘 몰라서.”

잠자코 말을 듣던 냉랭한 얼굴의 남자가 불쑥 끼어들었다.

“왔었다고? 무슨 말을 했지?”

“아버지 부고를 알려주러 왔다고 하던데요. 그것뿐이었죠.”

“그것뿐?”

의심하듯 날카로운 눈초리를 보냈다. 실제로 거짓말을 했지만 뻔뻔하기로는 둘째가라면 서러울 자신이므로, 막시민은 도리어 불쾌한 티를 냈다. 안경을 추겨 올리며 겁 없이 남자를 쏘아보았다.

“대체 뭘 알고 싶은 건지 모르겠는데, 난 사실대로 말했거든? 솔직히 당신들, 머리부터 발끝까지 수상해. 어제 아버지가 죽었다는 말을 듣지 않았으면 대뜸 부친이 뱀파이어에게 죽었느니 하는 소릴 듣고 미친 사기꾼인 줄 알았을걸.”

“…허 참, 그 아버지에 그 아들이군. 이봐, 잭. 그만 가자. 아무래도 한 발 늦은 모양이야.”

잭이라 불린 남자는 무언가 더 말하고 싶은 기색이었으나 마지못한 티를 내며 돌아섰다. 상대적으로 유해 보이는 남자 쪽이 돌아서기 전에 한마디 더 남겼다.

“혹시 모르니 다시 만나거든 조심해. 놈은 사람을 유혹하는 데 능하거든.”

란지에 로젠크란츠의 외견을 떠올리면 아주 틀린 말도 아닐 것 같다. 막시민은 저도 모르게 수긍했다가 그를 숨겨준 자신이 그 '유혹'에 넘어간 것 같아 기분이 이상해졌다. 두 남자는 떠났으나 막시민은 골치가 아파졌다. 어쩌다 보니 란지에를 숨겨주었으나 사냥꾼들의 말을 아예 무시할 수도 없었다. 정말로 뱀파이어가 존재하나? 란지에 로젠크란츠는 뱀파이어인가? 확실한 사실은, 뱀파이어 사냥꾼이란 자들이 찾아오리란 것을 란지에가 알고 있었다는 점이다.

막시민은 뒤늦게 후회했다. 언제부터 남의 부탁을 잘 들어주었다고, 위험할지도 모르는 자를 숨겨주었는지 스스로 이해되지 않았다. 정말로 그 아름다운 외모에 홀리기라도 했나? 신경질적으로 머리를 헝클어뜨리고 부엌에 가서 식칼을 챙겼다. 막상 무기를 드니까 이래도 될지 망설여졌다. 진짜 뱀파이어라면 차라리 아까 그들을 다시 부르는 편이 나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남자들이 무고한 사람을 쫓는 거라면 섣불리 란지에의 존재를 알리는 것도 곤란했다.

“젠장, 그놈의 돈이 뭐라고.”

금화에 눈이 멀어서 덥석 부탁을 받은 게 실수였다. 막시민은 숨을 고르고 자신의 방, 지금은 란지에가 안에 있는 방 앞으로 갔다. 심호흡을 한 뒤, 식칼을 뒤에 숨기고 노크했다.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 벌써 잠들었나. 긴장해서 침을 꼴깍 삼킨 막시민은 문고리를 돌렸다. 도둑처럼 찾아온 방문자를 환영하듯, 문은 아무런 저항 없이 열렸다. 틈새로 보이는 방안은 캄캄했다. 발을 들일지 말지 고민하는 찰나.

“들어오셔도 됩니다.”

심장이 뚝 떨어져 터지는 줄만 알았다. 란지에의 담담한 목소리는 이 상황을 예측했다는 것처럼 들렸다. 돌아서기엔 너무 늦었음을 자각하고 안으로 들어가자 쪽창 앞에 선 란지에의 뒷모습이 보였다. 창틀과 잘 맞지 않아 열리지도 않고, 불투명한 싸구려 유리를 끼워놓은 창문은 달빛도 반쯤은 걸러냈다. 그럼에도 푸른 머리칼은 은하수처럼 빛났다. 손바닥에 땀이 맺혔다. 란지에의 등은 무방비했으나 그렇기 때문에 더욱 위험한 분위기를 풍겼다. 란지에가 고개를 조금 옆으로 돌렸다. 그의 갸름한 턱선은 창백하도록 희다.

“제 부탁을 잊지 않고 들어주셔서 고맙습니다.”

“…여기까지 얘기하는 소리가 들렸나 보구만.”

“귀가 밝은 편이라서.”

억양 변화가 적은 말투는 쌀쌀함을 넘어서 무미건조했다. 그는 느린 동작으로 몸을 돌렸다. 어둠 속에서도 그의 눈동자는 불티처럼 발갛다. 홍안이 자신을 직시하는 순간, 막시민은 뱀 앞의 개구리가 된 심경을 통감했다. 아무런 위협도 당하지 않았는데 혼자서 지레 겁을 먹은 것인지, 진짜로 눈앞의 존재가 신비롭고 위험한 조화를 부렸기 때문인지 판단이 서지 않았다.

“제게 하실 말씀이라도?”

“어, 크흠, 그게. 그 사람들이 그쪽을…뱀파이어라고 하던데.”

어차피 무슨 대화가 오고갔는지 다 아는 듯하니 솔직하게 묻기로 했다. 물론 손바닥에 배어나온 땀 때문에 쥐고 있는 식칼이 미끄러워서 조마조마했다. 란지에가 한 발짝씩 천천히 걸음을 옮기더니 침대 가장자리에 앉았다. 낡아서 버려진 침대를 가져와 푹 꺼진 매트리스 아래에 볏짚을 깔아둔 침대였다. 맨바닥보다 조금 낫다는 점을 제외하면 하등 좋을 것 없는 침대이건만, 란지에는 그것을 어느 화려한 성의 침대로 보이게 만들었다. 그는 고개를 숙이고 앞으로 쏟아진 머리칼 몇 가닥을 귓바퀴 뒤로 넘겼다.

“그 사실이 당신에게 영향을 끼칠 일은 없을 겁니다.”

너무 무덤덤하게 얘기하는 바람에 막시민은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떡일 뻔하다가 소스라쳤다. 지금 이 작자가 '사실'이라고 말했나?

“잠깐, 지금 그걸 말이라고 해? 그렇게 말하면 내가 '아이고 그러십니까 다행입니다'라고 말할 줄 아냐고!”

“어차피 당신은 뱀파이어라는 존재 자체를 확실히 믿지도 않잖습니까?”

정곡을 찔린 탓에 대꾸할 말을 잃었다. 확실히, 막시민은 그런 얼토당토 않는 이야기 속 존재를 무턱대고 믿는 성격이 못 되었다.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스스로 뱀파이어라고 밝히는 자를 앞에 두고서도 너무 비현실적이라서 믿기지 않았다. 혹시 알겠는가. 아까 찾아온 두 남자와 란지에 모두 훼까딱 맛이 가버린 자들일지 말이다. 식칼을 챙겨온 것도 공격하려는 의도가 아니라 갑자기 수상한 짓이라도 하면 위협해서 쫓아내려는 목적이었다. 막시민은 우두커니 서서 란지에를 쳐다보다가 퍼뜩, 아버지의 죽음에 생각이 미쳤다.

“우리 아버지는?”

밑도 끝도 없는 질문이었으나 그는 대번에 알아듣고 대답했다.

“제가 아닙니다.”

“그걸 증명할 수 있어?”

“제가 죽였다는 것 또한 증명할 순 없을 텐데요.”

란지에는 다리를 꼬고 무릎에 손을 올렸다. 막시민은 무심코 흠칫했다. 그러나 이 미지의 존재는, 마치 위험한 존재가 아니라고 주장하는 것처럼 침대에 앉아 꼼짝하지 않은 채 말을 이었다.

“하지만 제가 거짓말을 한 것은 맞습니다. 리프크네 씨는 뱀파이어가 아니라 같은 사냥꾼의 손에 죽었으니까요.”

“그건 또 뭔 소리야?”

“리프크네 씨는, 뱀파이어 사냥꾼이면서도 아주 선하고 인간적인 분이었습니다. 어린 뱀파이어인 저와 여동생을 차마 죽이지 못하고 보호했을 만큼. 오랫동안 저희를 잘 숨겨 주셨지만, 그 사실을 알아차린 사냥꾼들이 공격했고 당신의 부친께선 그들을 막다가 숨을 거두셨습니다. 말하자면, 저와 동생 때문에 목숨을 잃으신 거죠. 시신은 사냥꾼들이 가져가서 되찾지 못했지만 유품만이라도 챙겨 가족에게 전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죄송합니다, 막시민 리프크네 씨.”

대관절 뭐가 진실인지, 막시민은 머리가 터질 지경이었다. 지금은 이렇게 말하지만 나중에 또 말을 바꿀지 누가 알겠는가. 다만, 적어도 어제 한 이야기보다 분명하고 그럴싸했기 때문에 거짓말로 몰아붙일 수 없었다. 그의 이야기가 사실이라고 가정한다면 사냥꾼에게 쫓기는 이유도 납득이 갔다.

선하고 인간적인 분이라. 막시민은 콧방귀를 뀌었다. 정작 자식들은 내팽개쳐놓고 어린 뱀파이어를 보호해주었다니, 기가 막히는 일이다. 심지어 목숨까지 희생하다니, 대체 어느 쪽이 친자식인지 헷갈렸다. 아무리 부자간에 애정 따윈 없다고 할지라도 불쾌한 얘기다. 그러나 지금은 부정적인 감정이나 죽은 아버지보다 여기에서 살아가는 자신과 동생들의 안전이야말로 막시민에게 가장 중요한 문제였다. 란지에 로젠크란츠가 뱀파이어라는 이야기는 여전히 신뢰하기 어려우나 위험한 자라는 사실만은 분명했다. 막시민은 주머니에서 금화를 꺼냈다. 어두운 중에도 어렴풋이 반짝이는 금빛을 보노라니 속이 쓰리다.

“이거, 돌려줄 테니까 떠나라고. 그쪽은 나와 동생들에게 해를 끼치지 않을 거라고 장담하는데, 순진한 어린애도 아니고 그 소릴 어떻게 믿겠냐는 말이야.”

“돌려주실 필요는 없습니다. 그보다, 또 손님이 오셨군요.”

“손님?”

되묻기 무섭게 밖에서 누군가가 문을 두드렸다. 귀가 밝다더니, 설마 사람이 오는 발소리까지 들리는 건가? 막시민은 금화를 도로 주머니에 넣고 방을 나섰다. 어제부터 찾아오는 사람들이 많기도 했다. 이번에는 누구인가 싶어 문을 벌컥 열자 보기만 해도 짜증을 유발하는 데니슨 형제가 눈에 담겼다.

“또 뭐냐?”

말을 끝맺자마자 별안간 디토가 멱살을 잡고 밖으로 끌어냈다. 막시민은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디토를 밀어내려 했으나 피터가 발로 배를 차는 바람에 뒤로 나동그라지고 말았다. 대뜸 무력을 사용할 줄 몰랐기 때문에 막시민은 당황했고, 그 이상으로 화가 났다. 벌떡 일어나며 피터의 허리를 잡고 넘어뜨린 후에 녀석의 얼굴을 한 대 쳤다. 그러자 디토가 달려와 어깨를 걷어차는 바람에 옆으로 쓰러졌고, 다시 몸을 일으키려고 했으나 피터가 주먹질을 해서 안경다리가 부러져 떨어지고 말았다.

“형, 저기 안쪽으로 끌고 가자.”

막시민은 녀석들에게서 벗어나려고 안간힘을 썼으나 혼자서 둘을 감당하기엔 역부족이었다. 오솔길 옆 숲속으로 끌려들어갈 즈음에는 하도 맞아서 온몸이 욱신거렸다. 막시민은 바닥을 뒹굴며 헐떡거렸다. 피터와 디토가 연신 발길질을 해대서 일어날 수가 없었다.

“빨리 닭을 훔쳐갔다고 실토해, 이 도둑놈 자식!”

“계속 입을 다물면 더 쓴맛을 보게 될 줄 알아.”

“이 씹다 뱉은 개뼈다귀 같은 놈들아, 아니라고 했잖아! 귓구멍이 막혔냐?”

아무리 아니라고 해도 데니슨 형제는 들을 줄을 몰랐다. 오히려 욕설을 퍼부으며 얼굴만 피해가며 밟고 차기를 반복했다. 흠씬 두들겨 맞느라 소리를 지르지도 못했다. 이러다가 죽겠구나 싶어서 차라리 닭을 훔쳤다고 거짓말을 하는 편이 낫겠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피터가 씨근덕거리며 재차 추궁했다.

“야, 이래도 말 안 할래?”

막시민은 끙끙거리며 갈등했지만 이 상황을 타개할 방도가 없었다. 더러운 기분이었다. 퉤, 하고 피 섞인 침을 뱉고서 데니슨 형제가 원하는 답을 해주려는 찰나. 나지막한 목소리가 과열된 분위기를 싹둑 자르고 들어왔다.

“도와드릴까요?”

들어본 적 있는 목소리였다. 안경이 없어서 시야가 흐릿했고 쓰러져 있는 까닭에 누구인지 확인할 수 없었다. 얼마간 서늘한 침묵이 감돌았다. 기분 탓인지 밤공기가 갑자기 뚝 하락한 것 같았다. 몸이 으슬으슬해졌다.

“너, 넌 뭐야?”

피터가 물었으나 되돌아온 말은 대답이 아니었다.

“막시민 리프크네 씨, 도와드릴까요?”

이름 부르는 소리를 듣고서야 누구인지 알아차렸다. 란지에 로젠크란츠다. 어떻게 여기 있는지 의아했다가 이내 그가 보통 사람보다 훨씬 귀가 밝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아마 싸우는 소리를 듣고 쫓아왔으리라. 목소리가 들리는 방향을 찾아 고개를 돌리자 란지에의 실루엣이 흐리게 보였다. 그의 느린 발자취를 따라서 낙엽이 바스락거렸다.

“야! 누구냐고 물었잖아!”

무시당한 피터가 씩씩거리며 소리쳤다. 그러나 란지에는 여전히 아랑곳하지 않았다.

“리프크네 씨, 도움이 필요 없으십니까?”

“끄응…보면 모르냐?”

“그렇군요. 도와드리겠습니다.”

둘 뿐인 것처럼 태연하게 말을 주고받자 디토가 성난 개처럼 으르렁거렸다.

“이 자식들이 뭐 하자는 거야? 너, 누군지 몰라도…컥!”

“디토!”

“으아아악!”

비명소리, 피터와 디토가 서로를 부르는 소리, 무언가 둔탁하게 부딪치는 소리가 연이어 숲속에 울려 퍼졌다. 스산한 바람이 바닥을 휩쓸어 낙엽이 회오리치고 나뭇가지가 파르르 떨며 울부짖었다. 쓰러져 있는 탓에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확인할 수 없었다. 끙끙거리며 일어나려고 애썼으나 뼈에 금이라도 갔는지 꼼짝하지 못했다. 숨을 헐떡이던 막시민은 어느 순간, 숲이 고요해졌음을 깨달았다. 모골이 송연해졌다. 오싹한 바람소리만 귓가와 뒷덜미를 스치고 지나가며 알아듣지 못할 언어를 속삭였다. 이윽고 자박자박 낙엽 밟는 소리가 가까워졌다.

“꼴이 엉망진창이군요, 막시민.”

눈앞에 나타난 란지에가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았다. 차가운 손끝이 뺨에 닿아서 막시민은 움찔했다. 나쁜 시력 때문에 세상에 어렴풋하지만 붉게 빛나는 눈동자만은 확실하게 보였다. 그는 입가에 묻은 피를 엄지로 훔쳐서 제 입술에 묻히고 혀로 핥았다. 막시민은 처음으로 그가 뱀파이어라는 사실을 인식했다.

“…피터랑 디토는?”

그는 묵묵부답이었다.

“어떻게 됐냐고!”

“마침 허기가 지던 참이었습니다.”

속삭이는 말뜻을 알아듣고 막시민은 호흡을 멈추었다.

“사람의 피는 닭 피보다 훨씬 달콤하군요.”

“설마 없어진 닭이…아니, 질문에 대답부터 하라고! 죽였어?”

“일시적으로 기절했을 뿐입니다. 하지만 죽이는 편이 당신에게 이로울 텐데.”

막시민은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자신을 두들겨 팬 놈들이라지만 란지에한테 도와달라고 한 이상, 죽기라도 했다간 죄책감을 감당하기 어려울 것이다. 물론 데니슨 형제가 깨어나면 분명 무슨 일을 당했는지 떠벌릴 테고, 란지에의 정체를 추궁하러 마을 사람들이 몰려올지도 모른다. 산 넘어 산이라더니, 지금 자신의 상황이 꼭 그래서 막시민은 바닥에 이마를 박았다.

“상태가 많이 안 좋은가 보군요.”

“그건 모르겠고 앞으로 골치 아프게 됐다는 것만은 확실해. 도와준 건 고맙다만, 꼭 그래야 했던 건 아니잖아, 젠장.”

“착각을 하고 있군요, 막시민. 전 당신에게 선행을 베푼 것이 아닙니다. 모든 일에는 대가가 필요합니다. 제가 숨겨달라는 부탁을 하면서 금화를 드린 것처럼 말입니다.”

막시민은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하도 급해서 도움의 손을 덥석 잡았을 뿐인데 대가를 요구할 줄이야. 그런 건 미리 말해야 올바른 거래가 성립한다고 주장하려다가 심신이 피곤해서 그만두었다. 어차피 그가 먼저 말했다 한들, 그 상황에서는 거부하지도 못 했을 것이다. 가까스로 몸을 뒤척여 벌러덩 드러누웠다.

“공짜가 아니란 말을 길게도 하는구만. 뭐, 돈이라도 주면 되는 거냐?”

“뱀파이어에게 필요한 것은 돈이 아닙니다.”

“…기껏 살려놓고 피 빨아 죽이겠다고?”

란지에가 허리를 숙여 얼굴을 가까이 했다. 달처럼 은은하게 빛나는 눈동자가 시야에 가득 찬다. 눈을 느리게 깜박거리면 그의 긴 속눈썹이 나풀거리고, 형형한 안광이 모양 좋은 눈매에 관능미를 더한다. 막시민은 그에게서 시선을 돌릴 수 없었다. 문득, 집을 방문했던 사냥꾼의 말이 뇌리를 스쳤다.

‘다시 만나거든 조심해.’

‘놈은 사람을 유혹하는 데 능하거든.’

“당신은 리프크네 씨가 했던 일을 대신하면 됩니다.”

한 줄기 바람처럼 속삭인 란지에의 두 손이 뺨을 감쌌다. 막시민은 올가미에 걸린 짐승이 된 기분이었다. 란지에의 태도는 늘 그랬듯이 침착했으나 이제야 그가 얼마나 위험한 존재인지 피부로 느껴졌다. 온기라고는 철저하게 제거된 손이 천천히 내려가 목을 감쌌다. 막시민. 란지에의 음성은 마치 연인의 속삭임처럼 부드러워서 이성을 잃고 그에게 매료될 것만 같았다. 막시민은 억지로 인상을 찌푸려서 눈앞의 존재를 혐오하고자 노력했다. 그러나 빠른 심장 고동은 공포가 아니라 흥분에서 비롯되고 있었다. 어떤 속박도 받지 않았는데 제대로 말하기 어려웠다. 모든 통제력을 빼앗긴 것만 같다. 밀려드는 현기증으로 시야가 이지러져서 란지에 로젠크란츠의 얼굴조차 제대로 보이지 않는다.

오로지 목소리만이.

“피.”

“피.”

“피.”

계속해서 밀려들 뿐.

붉은 피, 뜨거운 피, 당신의 피,

기꺼이 주겠노라고.

평생, 영원히, 죽는 그 순간까지.

기꺼이 바치겠노라고.

뱀파이어의 종으로써.

기꺼이 헌신하겠노라고.

“맹세해, 리프크네.”

돌연, 내내 불던 바람이 멎었다. 그리고 막시민은 입술을 달싹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