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러분. 이거 하나씩 받으세요.”
정오 즈음, 동료들을 찾던 김독자는 때마침 점심 때라 옹기종기 모여 식사하는 그들을 발견했다. 덕택에 한 명씩 찾아가는 수고를 덜 수 있었다. 메인 시나리오 막간이라 모두 오랜만에 긴장감에서 벗어나 귀한 자유시간을 만끽하고 있었다. 각자의 방식으로 반겨주는 이들에게 가볍게 인사한 다음, 코트의 아공간에 넣어둔 것들을 꺼내기 시작했다.
“와, 사탕이다!”
“갑자기 웬 사탕입니까?”
“오늘이 화이트 데이더라구요. 별거 아니지만, 사원 복지 차원이라고 생각해주세요.”
일행의 막내 두 사람을 필두로 모두가 차례차례 사탕 꾸러미를 건네받았다. 화색 띤 표정들을 보노라니 사기를 잘했다 싶어 김독자는 희미하게 웃었다. 여태껏 발렌타인 데이니 화이트 데이니 하는 기념일을 챙겨본 적 없고, 지금 사탕을 받은 동료들 중에도 이런 것에 무감하던 사람이 적잖을 것이다. 하지만 예전에 어떠했든, 이런 세계에서는 소소하게 웃을 거리, 떠들 거리 하나가 무척 귀해졌다. 소중한 사람들과 보내는 순간순간의 즐거움이 켜켜이 축적되면, 비록 당장은 체감하지 못하더라도 어느 때고 막막한 절망과 고통을 견디게끔 돕는 지지대가 되는 법이다.
“아저씬 오늘이 화이트 데이인 줄은 어떻게 알았대?”
이지혜기 사탕 껍데기를 벗기며 굉장히 의외라는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다른 일행의 시선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세계가 멸망한 이후로는 시나리오가 언제 끝나고 시작하느냐가 중요할 뿐, 하루하루 날짜를 세는 행위는 무의미해졌다. 달력은 몇 주, 몇 개월, 몇 년 단위로 시간의 흐름을 어림잡는 용도에 불과했다. 오늘이 며칠이고 무슨 요일인지 확인하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다양한 차원과 시간선을 넘나드는 세계에서 날짜란 냉소적인 체념만 불러일으킨다. 생일조차 잊고 지나가는 사람이 부지기수이니, 어쩌면 3월 14일에서 화이트 데이를 연상하는 자체가 누군가에겐 속편한 사치로 보일 것이다. 김독자는 어설프게 웃었다.
“어쩌다가 알았어.”
아까 도깨비 보따리를 열지 않았으면 끝까지 모르고 지나갔으리라. 단지 다음 시나리오 공략에 필요한 아이템이 있을지 둘러보려다가 최상단에 뜬 ‘새 상품 입고’를 호기심에 확인했을 뿐이다. ‘화이트 데이 한정!’ 이라는 문구가 번쩍대는 사탕 꾸러미가 나올 줄 누가 알았으랴. 도깨비의 상술이란.
“오, 이게 뭐야?”
심지어 코인 아이템이랍시고 나름의 효과까지 붙어 있다. 그저 장난감 수준에 불과했지만.
“이거 봐요, 아저씨! 무지개가 나와요!”
김독자는 호랑이 모습으로 식당을 질주하는 한수영, 늑대인간으로 변한 이지혜, 무지개 광선이 뿜어져나오는 롤리팝을 휘두르고 다니는 유승이와 길영이를 훑어보았다. 정희원은 물론이거니와 이현성과 유상아도 제법 들뜬 기색으로 사탕을 까고 있었다. 어쨌든 다들 즐거워하니 됐지.
“근데 사부 거는?”
예기치 못한 질문이라 김독자는 내심 움찔했으나 내색하지 않았다.
“그놈이 화이트 데이 사탕을 흔쾌히 받기나 하겠어? 어디 있는지도 몰라.”
단 하루도 허투루 쓰지 않는 주인공께서는 늘 어딘가를 바쁘게 돌아다녀서 잘난 얼굴 보기가 하늘의 별 따기였다. 식당 밖으로 나오며 코트에 주머니에 넣은 손으로 무언가를 만지작거리기도 잠시, 김독자는 한낮의 밀회 메시지 창을 열었다.
[유중혁. 어디야?]
곧 회신이 도착했다.
[무슨 용건이지.]
순순히 답해주면 어디가 덧나나. 짧은 텍스트에 유중혁 특유의 냉정하고 견결한 태도가 또렷하게 새겨져 있다. 괜히 이야기를 질질 끌었다가는 무시당할 게 빤하다. 김독자는 살며시 말아쥔 주먹으로 입가를 가린 채 메시지 창을 뚫어져라 응시했다. 답변을 어떻게 보낼지 궁리하느라 여러 차례 쓰고 지우길 거듭했으나 결국 평범한 말밖에 할 수 없었다.
[오늘 화이트 데이라서 사탕 주려고.]
그렇게 보내고는 곧장 하나를 더 덧붙였다.
[김독자 컴퍼니 사원들한테 돌리는 중이야.]
절대 거짓말은 아닌데 왜 이리 변명 같을까. 잽싸게 창을 닫자마자 건물에서 빠져나온 이마 위로 청량한 빛살이 쏟아졌다. 3월의 한반도는 아직 쌀쌀했다. 번갈아가며 흐렸다가 맑아지고 또 우중충해지던 날씨는 오늘 다시 쾌청해졌다. 빛이 눈부셔 손바닥으로 차양을 만들었다. 공단 이름이 쓰인 비석 뒷면을 면하고 멈춰선 김독자는 기단에 걸터앉았다. 그제야 눈앞에 메시지 창이 떴다. 짧다고도 길다고도 못할 미묘한 간격이었다.
[그딴 것에 허비할 시간 없다.]
이토록 유중혁다운 반응을 쉽게 예상했으면서도 막상 야멸차게 나오니 배알이 뒤틀린다. 그놈이 여기에 있었다면 필시 한심한 눈초리로 쏘아보았겠지. 만에 하나 선선히 받아줄 가능성을 고려해 녀석의 몫까지 준비했지만, 역시나 사람 호의를 등한시하는 데 일가견이 있었다. 이제껏 몇 개의 시나리오를 함께 거쳤는데 그깟 사탕 얘기 꺼냈다고 대번에 경멸스레 쏴붙이다니.
[김 독자 실 연당 하 다]
제 4의 벽이 이죽였다. 이상한 소리 말라고 녀석을 노려보고서 습관처럼 스마트폰을 쥐었다. 아니꼽지만, 유중혁 말이 맞다. 다음, 다음, 또 다음. 연속해서 다가올 시나리오를 헤쳐나가기 위해서는 철저한 대비가 필요했다. 혹여 놓친 부분이 있는지 꼼꼼하게 읽고 확인해도 모자라다고, 머리로는 이해하면서도, 가슴 한 구석의 어리숙한 감정이 좀처럼 가라앉지 않았다. 유중혁에게서 비롯되는 정념은 어그러진 글자처럼 막연하다가도 때때로 아찔하게 뇌리를 찌른다. 그러나 늘 그랬듯, 김독자는 이내 침착해졌다.
비석에 기대고 앉은 동안에 많은 이들이 스치고 들르고 머무르고 떠났다. 그들과 대화하거나 수련을 돕고, 어느 때는 저들끼리 떠들고 옥신각신하는 양을 지켜보고, 홀로 상념에 몰두했다. 명쾌한 낮이 서서히 어스름에 흔들렸다. 석양으로 한 번 타오르지도 못하고 바스러진 잿가루에 덮인 하늘. 이윽고 어둠은 땅끝까지 흘러내린다. 김독자는 저 구태의연하고 무수한 별빛을 애증 어린 눈길로 일별했다.
“너 유중혁 기다리냐?”
“뭐?”
깜짝 놀라서 고개를 외틀었다. 어느새 나타난 한수영이 볼에 사탕을 물고 비석 옆에 서 있었다. 어쩌면 이 세계에서 누구보다 간단히 자신의 속내를 들여다볼 수 있는 사람. 한수영의 예리함은 시시로 김독자 자신조차 알아채지 못한 것까지 꿰뚫는 듯하다. 군데군데 부서진 도시 건물이 무질서하게 늘어선 지평선으로 시선을 옮겼다. 엄지손가락이 스마트폰 액정 표면을 느리게 서성거렸다.
“시나리오 생각하고 있었어.”
“야, 웃기지 말고. 무슨 생각을 집 나간 주인 기다리는 개처럼 앉아서 해? 미련한 새끼.”
결단코 유중혁을 기다리던 중이 아니라서 억울한데 왠지 반박할 수 없었다. 스마트폰을 주머니에 넣으며 일어나니 온몸이 뻐근하다. 거진 반나절을 꼼짝하지 않았으니 당연하다. 무심코 반대편 주머니 속 물건을 건드리자 달그락거리는 잡음이 났다. 대번에 눈치챈 한수영이 곁눈질하며 쯧쯧 혀를 찼다.
“너 여기 있어 봐야 그 자식이 보면 빈둥거린다고 욕만 먹어.”
할 말이 없다. 유중혁이라면 분명 그럴 테니까. 김독자는 부정하지도 못하고 그저 못마땅한 어투로 응수했다.
“너야말로 나랑 단둘이 있는 거 보이면 이상한 오해 받을걸.”
꽤 오래된 기억이 떠올랐다. 디오니소스 때문에 본의 아니게 유상아와 야릇한 분위기를 조성했다가 하필 유중혁에게 들켜 사랑하는 여자 어쩌구 하는 소리를 들었지. 물론 그때야 오해할 만한 상황이었고 지금은 전혀 다르지만, 한수영이 진저치리며 도망가주기를 바라고 한 얘기였다. 헌데 웬걸, 되레 씩 웃더니 한 발짝 성큼 다가서는 게 아닌가.
“이러나 저러나 걔는 나 싫어해. 오해를 받아서 곤란한 사람이 너지 나겠냐?”
한수영의 검지가 한쪽 볼을 꾹 눌렀다. 손가락에 밀려 얼굴이 돌아갈 정도였다. 눈살을 찡그리며 그 손을 떼어내려는 찰나, 저만치에서 낯익은 실루엣의 사내가 걸어오는 모습을 발견하고 멈칫했다. 단호한 걸음걸이, 아무런 연출 없이도 근사하게 펄럭이는 코트 자락. 전신에서 압도적인 여유와 위압적인 기세가 넘쳐흘러서 바라보기만 해도 속수무책으로 휩쓸릴 듯하다. 숨막히게 멋진 주인공 같으니. 넋 놓고 그를 바라보는 사이, 한수영은 진작 유중혁을 피해 건물 안으로 들어가는 중이었다. 멀어지는 뒷모습을 확인한 후, 반대로 가까워지는 이에게 손을 흔들어 보였다.
“중혁아. 이제 와?”
성큼성큼 보무도 당당하게 지척까지 다가온 녀석이 우뚝 멈춰 섰다. 매서운 눈이 이쪽을 위아래로 훑는다. 김독자는 저도 모르게 제 차림새를 살폈으나 평소와 다른 점은 없었다.
“김독자. 여기서 뭐하는 거지?”
“바람 쐬면서 시나리오 공략 고민하고 있었지.”
유중혁의 표정은 흡사 그대로 박제된 작품처럼 일말의 변화도 없었다. 김독자는 초조감을 숨기며 전지적 독자 시점 스킬을 사용했다.
[거짓말이군.]
곧바로 들려오는 그의 속마음이 예리하게 가슴을 찔렀다. 거짓 간파 스킬을 염두에 두고 교묘하게 대답했건만, 설마 스킬도 안 쓰고 단정할 줄은 몰랐다. 거짓말할 때 티가 많이 난다는 소리를 여러 번 들어서 이번에는 잘 감추려고 의식적으로 노력했는데 허사였던 모양이다.
[한수영. 그 여자와 시간을 보내고 있었나?]
잠깐, 뭐? 뒤이어 들리는 생각에 김독자는 황당해져 눈을 끔뻑거렸다. 딴사람도 아니고 한수영이다. 어느 모로 보아도 그럴싸한 분위기가 아닐 텐데 이 자식은 무슨 로맨스의 클리셰 같은 오해를 하고 있는지 어처구니가 없다.
“이만 들어가겠다.”
“야, 가긴 어딜 가! 너 기다렸는데.”
순식간에 옆으로 스쳐 지나는 녀석의 코트를 확 움켜쥐노라니 서늘한 시선이 미간에 꽂힌다. 빙그레 웃으니 그의 가지런한 눈썹에 균열이 생겼다. 월나라의 서시는 찡그린 얼굴마저 아름다웠다는데, 유중혁이 딱 그 짝이다. 이렇게 반듯하니 잘생긴 외모로는 무얼 해도 멋지겠지. 부러운 한편, 까닭 모르게 기분이 들뜬다.
“아까 메시지 보냈잖아. 오늘 화이트 데이라고.”
“그래서.”
김독자는 내내 주머니에 들어 있던 것을 꺼내 내밀었다. 손바닥 반절 크기의 갈색 종이 상자. 겉면에는 복고풍 폰트로 ‘반짝반짝 별사탕’이라고 큼지막하게 쓰여 있다. 대체 어떤 도깨비가 제안한 기획일까. 이 세계에서 ‘별’이 차지하는 의미를 고려하면 아작아작 씹어먹을 수 있는 ‘별사탕’은 성좌들에게 간접적으로 유감을 표현할 수 있는 수단처럼 느껴진다.
“받아. 이래봬도 도깨비 보따리에서 파는 아이템이야.”
사탕 상자를 물끄러미 내려다보는 사내의 생각이 머리로 흘러든다.
[어이가 없군. 도깨비들 장삿속에 장단이나 맞추다니.]
그러면서도 사탕은 또 가져간다. 그 유중혁이니 빈말로라도 고맙다는 말은 기대하지 않았다. 필요없다고 내치지 않은 것만으로도 한수영 말마따나 미련하게 기다린 보람이 있다고 봐야겠지. 잘각잘각. 녀석이 상자를 가볍게 흔들어 본다. 김독자는 새삼스레 유중혁의 면면을 살폈다. 검정 일색의 옷차림. 스킬과 스탯에만 의지하지 않고 스스로 단련해 초월좌에 오른 몸은 유연함과 단단함을 아우른다. 그래선지 냉혹하게 적을 베어 넘기는 손과 깜찍한 사탕 상자의 간극이 묘하게 명치께를 간질간질하게 만든다.
“그거 사용 효과도 있어.”
무려 성좌와 도깨비의 간섭을 완벽하게 차단하는 공간으로 이동할 수 있는 아이템이었다. 사기적인 기능이기 때문에 제한도 덕지덕지 붙기는 했다. 사탕 한 알에 3분. 그리고 1인 1개로 구매 제한 및 소지 제한까지 붙었다. 그나마 시간 중첩이 가능한데 한 상자에 열 개입이라 사실상 30분짜리 아이템이다. 하지만 잠시나마 세계를 관음하는 시선에서 자유로워질 수 있다는 점만으로 엄청나게 매력적이고 사기적이다. 구구절절 설명한 김독자는 마지막으로 가장 중요한 사항을 알려주었다.
“근데 화이트 데이 한정 상품이라 오늘까지야. 자정 지나기 전에 써.”
설령 구매 제한이 있더라도 이런 아이템을 메인 시나리오 중에도 사용하게끔 내버려둘 도깨비들이 아니니, 당연하게도 유통기한이 있다. 내일이면 아이템이 아닌 단순한 별사탕이 될 것이다. 요약하자면 1만 코인짜리 한정 사치품인 셈이다. 이걸 한수영한테 들킬까 얼마나 조마조마했던지. 그 녀석이 행여나 심연의 흑염룡이라도 닦달해 무슨 아이템인지 알아내기라도 하면 난처해진다.
“쓸모는 없지만 받아두겠다.”
“고맙다고? 그럼 쓸만한 아이템이나 하나 나눠주라.”
짐짓 넉살을 떨었으나 유중혁이 깔끔하게 무시하고 별사탕 하나를 꺼내 깨물었다. 설마 지금 당장 내가 없는 곳으로 사라지고 싶다는 뜻인가? 헌데 별안간 유중혁의 표정이 심상찮게 굳어졌다.
“김독자. 이건 뭐지?”
“뭐가 뭐야?”
“아이템 설명 읽은 거 맞나?”
“당연히 읽었으니까 샀지. 왜? 무슨 일인데?”
도깨비 보따리에 올라온 상품이니 사기일 리가 없는데 왜 이런 반응인지 의아해졌다. 읽다가 놓친 부분이 있더라도 기껏해야 이벤트용 아이템이라 사용자에게 해가 될 효과는 전혀 없을 텐데. 다시금 스킬로 유중혁의 속내를 읽으려다가 생각을 바꾸었다. 도깨비 보따리를 열어 확인하면 될 일이다. 더 이상 구매하지는 못해도 상품 설명은 읽을 수 있으니까.
“잠깐만. 지금 다시…어?”
난데없이 시스템 창이 반짝 떠올랐다. 화신 유중혁의 초대에 응하겠냐고? 무슨 초대? 어리둥절해서 팔짱 끼고 주시하는 녀석을 마주보았다.
“유중혁. 이게 무슨…”
“수락해라.”
“아니, 뭔지 알아야 하지.”
“해라.”
완전히 명령조였다. 이럴 때의 유중혁에겐 이러쿵저러쿵 떠들어야 씨알도 안 먹히므로 순순히 따르기로 했다. 시나리오를 공략하는 중이라면 절대로 따라주지 않았겠지만, 이런 때에 별일이야 있겠는가. 시스템 창에서 ‘YES’를 택한 순간, 수명이 다 된 형광등이 깜빡이듯 세상이 새카매졌다가 불이 들어왔다. 김독자는 멀거니 주변을 둘러보았다. 모든 별이 꺼진 우주처럼 까마득히 검은 입방형 공간. 그러나 사방에 은은한 빛덩어리가 둥실둥실 떠다니며 별빛 대신 어둠을 밝혔고 허공에는 작은 카운트다운 표시가 떠 있다. 02:55, 02:54, 02:53…….
직감적으로 여기가 어딘지 깨달았다. 스타 스트림의 이야기 속에 잠겨 있는 감각은 여전하나 영혼까지 훑어낼 집요하고 폭력적인 관찰에서는 완벽히 차단된 상태. 별자리의 연회에서 쓴 적 있는 ‘비밀의 방’처럼 특별하게 만들어진 공간이다.
고요 속에서 유중혁과 눈이 마주쳤다. 이 밀실이나 다름없는 곳에 단둘이라니. 뿌연 주홍색 빛들이 조명 노릇을 하는 덕택에 유중혁은 여느 때보다 훨씬 심장에 해로운 모습이었다. 이 ‘초대’가 별사탕의 부가 효과라는 사실, 반딧불이 같은 광원이 어우러지며 자아내는 분위기. 슬슬 어떤 목적으로 만들어진 아이템인지 얼추 짐작됐다. 화이트 데이라 그거지. 김독자는 쥐구멍에라도 얼굴을 처박고 싶은 심경이었다. 그러나 민망함도 잠시, 한 줄기 의심이 뇌리를 스쳐 등줄기로 오한이 흘렀다. 설마 이놈이 날 흠씬 두들기려고 데려왔나.
“김독자. 시간 없다.”
아니나 다를까 멱살이 잡히다시피 해서 휙 끌려갔다. 코앞에서 지나치게 잘생긴 얼굴을 맞닥뜨리자 공포와 설렘이라는 양가감정이 뒤죽박죽 섞여 심장이 요란스레 고동쳤다. 김독자는 다급하게 그의 팔을 거머잡았다.
“자, 잠깐! 진정하고 말로 하자, 중혁아.”
사탕을 줄 때만 하더라도 30분이면 썩 긴 시간도 아니라고 여겼는데 지금은 3년처럼 길게 느껴진다. 인간의 시간 감각이란 이렇게 제멋대로였다. 어느덧 앞자리가 1분으로 내려간 카운트다운을 흘깃거리자 유중혁이 사탕 하나를 더 입에 넣었다. 설탕 덩어리가 부서지는 소리와 동시에 앞자리가 다시 바뀌었다. 김독자는 창백해져서 책갈피 스킬을 불러왔다. 공간 제약이 있으니 바람의 길은 적절치 않고, 야수왕의 감수성이나 아니면…….
빠르게 돌아가는 사고를 정지시킨 것은 유중혁의 얼굴이었다. 아니, 오뚝하니 높은 콧대였다. 아니, 심연 같은 눈동자, 냉막한 표정과 대조되는 온기, 그의 입술, 소스라치게 부드러운 입맞춤. 당혹감으로 벌어진 틈새로 몹시도 신중하게 들어오는 혀끝. 달콤한, 아찔한, 혼란스러운 키스. 유중혁의 팔을 붙든 손아귀에서 힘이 탁 풀렸다. 기다린 듯이 코트 앞자락을 놓은 그가 대신에 허리를 그러안는다. 예민하게 곤두선 오감이 유중혁으로부터 비롯되는 모든 것을 탐식하며 탐미하고 있었다.
그를 밀칠 수도 있었다. 그러면 유중혁이 물러날 거라는 기묘한 확신을 받았다. 하지만 옴짝달싹하지 못했다. 믿기 어렵도록 상냥하게 엉클어지고, 손잡고 징검다리 건너듯 천천히 이끌어주는 혀의 움직임 때문이다. 또한 맞닿은 가슴으로 녀석의 맥박이 미미한 진동으로 전해졌기 때문이기도 하다. 까닭은 한 가지만에 국한되지 않으며 그 전부였다.
잠시 떨어진 입술로 그새 가빠진 날숨이 잘게 떨리며 흘러나왔다. 체감하기로는 극히 짧았는데 카운트 다운은 제법 많이 줄어 있었다. 담담하게 얽히는 눈길은 속눈썹이 오르내리는 깜빡임에 따라 급작스레 농밀해졌다. 비유하자면, 그건 이미 시선의 키스였다. 김독자는 당분과 타액이 섞여 축축하면서도 끈적거리는 입술을 핥았다. 그에 응하듯, 별사탕을 머금은 사내의 입술이 겹쳐진다.
아직 원형을 유지해 울퉁불퉁한 별이 저쪽에서 이쪽으로, 이쪽에서 저쪽으로 옮겨다니며 천천히 녹아내린다. 별의 크기가 줄어들수록 김독자는 불가사의한 해방감에 사로잡혔다. 이미 알고 있던 사실이 한층 분명하게 인지됐다. 여기엔 자신과 유중혁, 단 둘뿐이라는 것. 어깻죽지에서 화끈거려 김독자는 스스로의 의지로 그의 견고한 어깨를 느리게 훑은 다음, 두 팔로 목을 감아 당겼다. 자극을 받아 미세하게 꿈틀대는 근육이 온몸으로 전해졌다. 삽시간에 밀려드는 열기에 떠밀려서 선선히 혼몽한 흥분 속으로 뛰어들었다.
중혁아, 유중혁, 유, 중…중혁…아……. 이 잘난 남자는 이름조차 관능적이라 단지 부르기만 해도 등허리가 찌릿하게 떨린다. 그의 뺨을 어루만지며 키스 사이사이 이름자를 읊는 육성은 점차 헐떡이는 호흡에 잠겨 흐려지고 있었다. 그때가 되어서야 자신이 오랫동안 언어와 이성이 불필요해지는 순간을 얼마나 고대했는지 알았다. 어느덧 형체 잃은 사탕을 더듬어 찾듯 유중혁의 혀와 입술을 핥다가 김독자는 가늘게 눈떴다. 길고 촘촘한 속눈썹 아래, 아름다움의 집약 같은 검은색 동공. 현기증 나도록 선명한 욕망이 둘 중 누구의 마음을 대변하는지 분간하는 것은 무의미했다.
“중혁아, 시간.”
씨근거리는 숨소리 탓일까. 이계의 언어도 아니건만, 자신의 말은 신음이나 탄성에 가까웠다. 잠자코 응시하던 사내가 굳게 여문 손끝으로 턱을 추켜 들었다. 남은 걸로 충분하다. 나지막한 음성에 내포된 감정의 파랑이 기대만큼 거칠고 달큰해, 김독자는 입술을 벌려 기꺼이 받아 삼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