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괜찮아. 여긴 안전해. 심해가 아니야.
이따금 소스라쳐 잠에서 깰 때면 그렇게 되뇌며 침대에서 내려가 방바닥에 누웠다. 바닥은 등이 배기도록 단단하고 건조했다. 항상 반을 열어 놓는 방문도 유심히 지켜보았다. 어둠에 가려진 사물들은 자세히 안 보였으나 자신이 어디에 있는지 확신할 만큼은 분간이 됐다. 자다가 깬 바다가 침대에서 뛰어내려서 앞발로 얼굴을 뭉개거나 명치를 묵직하게 때리면 더더욱 확실해졌다.
그러고도 안심이 되지 않는 날이면 아예 밖으로 나갔다. 4천 개에 한참 못 미치는 계단을 여유롭게 딛고 내려가서 두 발로 땅을 꾹 누르고 서노라면 이때는 비로소 안도감이 들었다. 엄청나게 두꺼운 지각 위에 있음을 실감하고자 일부러 걷기도 했다. 늦은 시간에 멀리 갈 순 없어서 아파트 앞을 서성대는 정도였다. 새벽 특유의 바스락거리는 공기는 부산스러웠던 낮이 탈피하고 남긴 껍질 같았다. 심호흡을 깊고 느리게 반복하여 껍질에 불안을 싸매 내버린 후 서둘러 집으로 되돌아갔다. 박무현으로서는 부득이한 행위였지만, 누군가의 눈에 띄면 얼마나 이상해 보이겠는가. 이상한 사람으로 취급받는 건 당연히 달갑지 않다. 거기에서 그치면 차라리 다행이지, 행여 경찰에 신고를 당하거나 의도치 않게 주민을 겁주는 사태가 벌어지는 건 사양이었다.
이 방법이 언제나 반드시 통하지 않음을 알게 된 때는 여름이었다. 뉴스가 초강력 태풍 ‘토끼풀’이 한반도를 향해 돌진하고 있으며 내륙을 관통할 예정이라고 보도했다. 태풍에 작고 약하고 부드러운 것의 이름을 붙이는 까닭이 조금이라도 이름만큼 약화되길 바라는 의미라는데, 그래도 ‘토끼풀’은 이름을 잘못 붙인 것 같다. 위성 지도로 확인한 태풍은 바다에서 하얗고 탐스럽게 피어난 토끼풀꽃처럼 보였다.
태풍이 내일 밤 한국에 상륙한다는 일기예보를 보고 잠든 날이었다. 침대에서 떨어져 깨어난 후 배낭을 챙겼는데 문틈으로 물이 너무 빠르게 들어왔다. 얼른 태블릿으로 경보를 울리고 복도로 나갔는데 아무런 인기척이 나지 않았다. 음산한 비상등과 소름 끼치는 적막이 전부였다. 이상하리만치 물이 빨리 차서 잠깐 사이에 가슴까지 찼다.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물을 헤치며 복도 끝을 향해 허우적허우적 걸어가며 외쳤다. 아무도 없어요? 다들 이미 방에서 나가신 거예요? 대답은 없었다. 근데 왜 복도가 안 끝나지? 왜? 헐떡이는 숨에 울음이 섞이기 시작하고 물이 턱까지 올라왔을 때였다. 갑자기 뭔가가 목을 친친 감아 소스라치며 떼어내곤 그것의 정체를 확인하고 비명을 질렀다. 치렁치렁한 금발이었다. 일순 바닥이 훅 꺼지면서 물에 완전히 잠겼다. 그리고 꿈에서 현실로 돌아왔다.
사방이 시끄러웠다. 식은땀을 훔치며 잠깐 주위를 둘러보고 나서야 상황을 파악했다. 폭우가 내리붓는 와중에 밖에서 자동차 경보음이 삑삑 아우성치고 있었다. 오늘 밤부터 비가 내린다는 걸 잘못 봤나? 가물가물했다. 일기예보가 틀렸을 가능성도 높았다. 이상기후가 심각해지면서 날씨는 더더욱 예측하기 어려워졌다.
삐익, 삐익, 삐익, 삐익. 누구의 차인지 경보음이 지속됐다. 자주 침대에 올라와 잠을 청하는 고양이가 안 보여 거실로 나갔더니 반대편에 빗물이 흐르는 통유리 창호에 바짝 붙어서 밖을 내다보고 있었다. 촘촘한 빗줄기로 무자비하게 분절된 가로등 불빛이 흐릿하게 번졌다. 엄청난 비였다. 하늘이 무너져 갈라진 틈으로 물이 콸콸 쏟아지는 듯했다. 검고 숨 막히는 우주에 그대로 덮쳐질 것 같다. 삐익, 삐익. 삐익……. 제발 경보음을 꺼 줬으면 좋겠다. 저도 모르게 따뜻한 고양이를 끌어안았지만, 이 물컹한 동물은 젓가락에서 미끄러지는 올방개 묵처럼 두 팔 사이를 후루룩 벗어나더니 캣타워 꼭대기로 올라가 버렸다.
거실 바닥은 계절치고 서늘하면서 습도 때문에 약간 축축했다. 맨발을 천천히 내디뎌 침실로 돌아가 핸드폰을 보았다. 한밤중인 줄 알았는데 머지않아 해가 뜰 시간이었다. 다시 잠들기는 글렀구나.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침대에 누워 보았지만, 혹시나가 역시나였다. 다시 거실에 나가 컵에 찬물을 가득 따르고 식탁에 앉았다. 어느새 자동차 경보음이 멎었다. 의자 위에서 맨발을 꼼지락거리다가 바닥으로 자리를 옮겼다. 2인용 소파에 기대고 앉아 멍하니 빗소리를 듣다가 깜빡 조는 와중에 발등이 차갑게 젖는 감각에 화들짝 깼다. 물컵을 엎지른 거였다.
날이 너무 더디게 밝았다. 수심 깊은 곳에서 허우적거리며 겨우겨우 빛이 보이는 수면으로 올라가는 기분이었다. 엉금엉금 움직여 욕실로 들어갔다. 문을 완전히 닫지 않고 씻었더니 바다가 문틈으로 유심히 지켜보더니 살금살금 앞발을 들이밀었다가 물기를 감지하고는 금방 도망갔다. 어깨도 눈꺼풀도 무릎도 무거웠다. 커피를 마셔야 했다. 어느 때보다도 얼음을 꽉꽉 채워서 목덜미가 서늘할 만큼 차가운 아메리카노가 필요한 아침이었다.
바다의 아침밥을 챙겨 주고 커피 한 잔을 다 마셔도 비는 잦아들 기세가 아니었다. 일찌감치 호우경보가 뜬 까닭에 여느 때의 출근 시간에 맞춰 문자 메시지를 보냈다.
소원 씨, 박무현입니다.
비가 너무 많이 내려서 오늘은 치과 문을 닫는 게 좋겠습니다. 출근하지 마시고 댁에 계세요. 안전에 유의하시고 태풍이 지나가는 추이를 봐서 내일 다시 연락드리겠습니다.
덧붙여 이나영에게도 전달을 부탁했다. 문제는 예약 환자들이었다. 예약 관리는 소원 씨가 했기 때문에 오늘 환자가 몇 명이 올지 몰랐고, 아무리 소원 씨라도 그들의 이름과 연락처를 다 외울 리가 없다. 비가 이렇게 쏟아지는데 설마 치과에 오겠느냐고 생각하면 좋겠지만, 여긴 한국이다. 천둥번개가 치든 우박이 쏟아지든 폭설이 내리든 등교와 출근을 하고 배달까지 하는 나라. 학교나 직장은 선택권이 없으니 불가피하다손 쳐도 미루면 될 예약인데 꼭 진료를 받으러 오는 사람들이 있다.
정기 진료를 받는 환자 중에는 연로하신 분들도 꽤 있어서 우려스러웠다. 근데 날씨가 이러면 미리 전화하시지 않을까? 한참 안 받으면 오늘은 진료를 쉬는구나 판단하실 것 같은데…….
한층 밝아진 바깥을 관찰하다가 부랴부랴 옷을 챙겨 입었다. 환자가 헛걸음할 가능성이 있는 이상, 집에 얌전히 틀어박혀도 좌불안석이리라. 혹시 침수된 곳을 지나야 할지도 모르니까 복장은 긴 바지에 튼튼한 운동화가 좋다. 장화는 걷기도 불편할뿐더러 안에 물이 들어가면 정말 끔찍해진다.
준비를 마치고 호기롭게 나선 것까진 좋았다. 하지만 막상 아파트 밖으로 나가 빗발이 일으킨 물안개로 희부옇게 흐린 광경을 마주하노라니 몸이 저절로 움츠러들었다. 빗물받이를 통해 빠지는 정도가 강수량을 따라가지 못하는지 아스팔트 바닥은 벌써 물바다였다. 사납게 낙하하는 빗방울이 우산만이 아니라 피부까지 때리는 착각이 들었다. 무력한 개구리가 된 심경이었다. 그나마 바람은 심하지 않아 비가 가로로 내리거나 위로 역행하거나 우산이 뒤집힐 수준까지는 아니었다.
빨간색 불이 켜진 건널목 앞에 멈춰서 불현듯 주변을 휘휘 둘러봤다. 사람이라곤 머리 터럭 한 올도 안 보였다. 도로 상태가 이러하니 당연히 지나다니는 자동차조차 없었다. 오늘 꾼 꿈이 떠올라 등골이 선득했다.
내가 여기서 뭘 하고 있지.
현실감에 희미한 안개가 끼는 찰나, 신호등이 초록색으로 바뀌었다. 퍼뜩 정신을 차리고 길을 건넜다. 일부러 발을 구르는 게 아닌데도 걸을 때마다 첨벙첨벙 물장구치는 소리가 났고, 운동화 안에 찬 빗물이 출렁거렸다. 양손으로 우산 손잡이를 꽉 쥐고 치과에 도착하자마자 할 일을 머릿속으로 정리했다. 사실 예약 환자들에게 일괄 연락만 하면 되지만, 혹시라도 더 필요한 일이 없을까 계속 생각했다.
모진 빗발을 뚫고 치과 건물에 다다랐을 때는 바지가 무릎 위까지 흠뻑 젖어 있었다. 잠시 숨을 고르고 나서 우산 꼭지를 탁탁탁 끌며 계단을 올랐다. 긴바지가 물을 먹으니까 무겁고 종아리에 달라붙어 거추장스러웠다.
치과에 들어가 서둘러 예약자 명단을 확인한 후 태풍이 지나갈 때까지 휴진한다는 안내를 일괄 발송했다. 일터라고 해도 치과는 익숙한 만큼 편한 장소인데 신경이 곤두서서 가라앉지 않았다. 하도 적막해서 그럴까. 환자를 진료한 기억보다 사람들이 죽었던 기억이 더욱 선명히 남은 심해의 치과로 돌아온 것만 같아 마른침을 삼켰다. 서둘러 치과를 나서려고 할 때 바닥에 흥건하게 남은 발자국을 알아차렸다. 젖은 신발 때문이었다.
근데 왜 발자국이 두 쌍이지?
등골이 섬뜩해지는 순간이었다.
“무현 씨.”
“헉…!”
헛숨을 들이키며 뒤돌아보니 잘 알아서 친숙하고 매일 봐도 새로운 얼굴이 있었다.
“저 때문에 놀라셨습니까. 죄송합니다. 물 자국이 치과로 이어져 있어서 확인하러 들어온 차였습니다.”
차분히 설명하는 목소리가 놀란 가슴을 쓸어내렸다.
“휴, 그러셨군요. 비가 이렇게 내리는데 체육관을 열러 나오신 거예요?”
“아닙니다.”
“예? 그럼 어쩐 일이세요?”
신해량은 대답하는 대신 어둑어둑한 치과 내부를 둘러보더니 물었다.
“출근하신 겁니까?”
“아, 잠깐 볼일이 있어서 왔다가 막 돌아가려던 참이었어요.”
“그렇군요. 그럼 나가시죠.”
얼결에 신해량과 나란히 치과를 나섰다. 뜻밖의 만남에 당황한 터라 1층으로 내려간 다음에야 신해량이 이쪽의 질문에 답하지 않았음을 상기했다. 그래서 체육관을 열 것도 아니면 왜 여기에 있는 건데? 신해량은 건물 출입구 안에 비스듬히 세워진 장우산을 들었다. 이 남자의 손에 잡히니까 장우산도 턱없이 작아 보였다. 뒤늦게 행색을 확인하니 저와 별반 다르지 않았다.
“댁까지 바래다드리겠습니다.”
“어, 안 그러셔도 되는데요. 비가 더 심해지기 전에 해량 씨도 얼른 귀가하셔야죠.”
“안색이 안 좋으십니다.”
“제가요…?”
무심결에 얼굴을 문질렀다.
“잠을 좀 설쳐서 그런가 봅니다. 정말 괜찮아요.”
“바래다드려야 제가 편할 것 같습니다.”
재난 상황도 아닌데 다 큰 남성을 챙기려 들다니 어지간히 낯빛이 별로인가 보다. 신해량이 먼저 우산을 펼치고 나가서 잠자코 기다리는 바람에 더 사양하지 못하고 걸음을 옮겼다. 장대비가 우산을 후두두 때렸다. 폭포가 쏟아지는 듯했다. 도로는 발목까지 잠길 깊이로 물길이 형성되어 흘렀다. 이대로면 얼마 안 가서 보도블록으로 물이 넘어올 것 같았다. 여전히 지나다니는 사람은 한 명도 발견하지 못했다. 만약 신해량을 만나지 않았으면 생생한 꿈을 꾼다고 착각했을지도 모른다. 앞장서서 걷던 남자가 별안간 휙 돌아보았다.
“괜찮으십니까?”
“네? 그럼요. 안 괜찮을 일도 없…!”
보도블록 중간에 생긴 물웅덩이를 디뎠다가 예상했던 높이보다 발이 훅 들어가는 바람에 삐끗했다. 단단한 손아귀가 허우적거리는 팔을 재빨리 잡아채 당겼다. 휘청이느라 우산이 잠깐 옆으로 누운 사이에 얼굴은 빗물로 세수한 꼴이 됐다. 차라리 다행이었다. 괜찮다고 말하자마자 넘어질 뻔한 부끄러움을 손으로 물기를 훔치는 척하면서 숨길 수 있었으니까.
“고맙습니다…….”
“물이 고인 곳은 피해서 걸으십시오.”
다시 앞선 신해량이 한층 느린 속도로 걸었다. 그의 등을 바라보면서 걷는 것도 오랜만이었다. 신해량은 항상 맨 앞이나 맨 뒤에 있는 사람이고 그런 위치가 참 자연스럽게 어울렸다. 그런데 오늘은 문득 혼자 걸어 나가는 신해량의 뒷모습이 조금 고독해 보인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은 총으로 무장한 이들이 나타날 상황도 아니니까 나란히 걸으면 더 좋을 텐데. 옆에서 같이 걷자고 하려다가 턱 밑까지 올라온 말을 간신히 삼켰다. 당사자는 이게 편할 수도 있는데 강요하지 말자. 아마도 이토록 넓은 길에 둘뿐이라 공연한 감상이 드는 것이리라.
“사람이 신기할 정도로 없네요.”
“보통 이런 날씨엔 외출하지 않으니까요.”
담백한 사실에 도둑이 제 발 저리듯이 뜨끔했다.
“그게, 일기예보엔 오늘 비 소식이 저녁부터 있어서 진료 예약을 받았거든요.”
혹시나 비를 뚫고 치과에 오는 사람이 있을까 봐 휴진한다고 안내할 필요성을 느꼈다는 해명에 신해량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게 사정을 이해했다는 의미가 아니라는 것은 이어진 말로 알았다.
“그래도 집에 계시는 편이 나았을 겁니다. 아직 보행하기 위험한 수준이 아니지만, 이런 강수량이면 수위가 금방 높아질 수도 있습니다.”
새삼스럽게 흙탕물이 흐르는 도로를 돌아보았다. 신해량의 말이 옳았다. 치과에 오래 머물지 않았는데도 아파트를 막 나섰을 때보다 지금이 두드러지게 물이 찬 상태였다. 그제야 뒤통수를 한 대 맞은 것처럼 얼떨떨했다. 그런가? 혹시 안전불감증처럼 굴었던 걸까? 곰곰이 되짚어 보면 해저 기지에서 겪었던 경험이나 뉴스에 으레 나오는 침수 상황과 비교하면서 막연히 이런 비로는 문제가 없을 거라고 믿었던 것 같다. 안이했던 판단이다.
여긴 심해가 아니다. 지상이다.
그러나 물은 어디서나 사람의 목숨을 앗는다.
당연한 사실과 함께 앞에 있는 남자가 어떤 사고로 연인을 잃었는지 떠올랐다. 여긴 계곡이 아니거니와 적어도 지금은 위험하지 않다. 그러니까 신해량이 좀 예민하게 구는 걸지도 모르지만, 그걸 지나친 걱정이라고는 감히 말할 수 없었다. 시선을 내려 묵직한 흰색 운동화와 축 늘어진 바짓자락을 멍하니 보았다. 어느새 티셔츠도 마르다 만 빨래처럼 눅눅하게 습기를 머금었다. 왜 이렇게 많이 젖었지.
“…제가 정신이 없었나 봐요.”
수면 부족이 문제였을까. 역시 사람은 일고여덟 시간을 푹 자고 일어나야 침착한 사고 판단이 가능하다. 큰 실수라도 저지른 기분이 들어 가슴 한구석이 서늘해진 차였다. 너무 크지도, 작지도 않은 목소리가 또렷이 조밀한 빗줄기 사이를 유연하게 넘어 귀에 도달했다.
“그럴 수 있습니다.”
움칫하고 고개를 들었다.
“그런가요.”
“예. 큰일은 아닙니다.”
그의 담박한 긍정에 흉곽 안쪽으로 응결하던 그늘이 단숨에 사르르 해빙되었다. 걸음이 약간 가벼워지고 집을 나선 이래로 목덜미에 맴돌던 추위도 조금 누그러졌다. 신기하지 않은가. 주변의 사물은 그대로인데 타인이 건넨 가벼운 말 한마디로 감각이 변하다니. 울퉁불퉁하게 흐트러진 형태로 배회하던 마음까지 매끈해져서 서서히 몸 전체로 고루 퍼졌다. 성난 폭우에 둘러싸여 물밖에 느껴지지 않는데도 이제야 제대로 지상을 걷고 있다는 실감이 들었다. 흔들고 후려치고 위협할지언정 절대 무너지지 않게 받쳐주는 이 대지.
“저, 해량 씨. 불편하신 게 아니면 옆에서 걸어도 될까요?”
“제 걸음이 빨랐습니까?”
“아뇨, 그냥요. 보통은 일행끼리 앞뒤로 떨어져서 걷진 않잖아요.”
짧은 침묵 후에 신해량이 보도 가장자리로 비켜서서 공간을 내주었다.
“습관이 됐나 봅니다.”
그의 왼편으로 자리를 옮기자 뒤에서만 따라가는 것보다 안정감이 들었다. 단지 쓸쓸한 등 대신 보폭을 맞춰 주는 발을 볼 수 있어선지, 그냥 거리가 줄어든 덕인지 불확실했다. 신해량은 원체 단단한 사람이다. 저보다 어린 사람에게 너무 의지하지 말자고 다짐해도 함께 있으면 솔직히 안심됐다. 비록 그의 일면이 냉혹하고 폭력적이라 해도 또 다른 면에는 다정함이 있음을 아는 까닭이다. 우산을 오른쪽으로 비스듬히 기울여서 신해량을 곁눈질하는 때였다.
“혹시 이런 상황이 또 온다면 그땐 절 부르십시오.”
“집에 있으라면서요?”
이젠 앞뒤가 안 맞는 신해량의 말에 픽 웃으며 반문할 여유가 생겼다. 그가 푸른색 우산을 한 뼘 높이며 슬쩍 돌아본다.
“무현 씨는 그래야 할 이유가 생기면 오늘처럼 행동하실 테니 차라리 제가 동행하는 편이 나을 것 같습니다.”
농담인가? 이 남자는 서지혁처럼 능청을 떨거나 장난치는 경우가 없으니 진지한 제안이겠지. 하지만……. 입을 몇 번 달싹이다가 감쳐물었다. 하지만 그들은 사적인 용건으로 쉽게 불러낼 사이는 아니잖은가. 예전의 신해량은 직장 동료였고, 지금은 같은 건물의 다른 층에서 일하는 이웃이었다. 그래서 뭐라고 축약하면 좋을까. 지인? 동네 친구? 잘 아는 사이? 끈끈한 동료? 어떤 단어로 관계를 이어 붙여도 그것은 과히 얄팍하거나 잘 맞물리지 않았다. 죽다 살아난 사람끼리 맺은 유대가 있다고 한들 몇 번이나 생사고락을 되풀이하며 누적된 친밀의 밀도는 혼자만의 것이다.
그러한 사실에 적막한 심경을 안 느낀다면 거짓말이지만, 동시에 그들 기억에 모든 고통이 기록되지 않아서 다행이라고도 생각했다. 모두가 공평하게 괴로워할 필요는 없다. 단지 저와 상대방이 품은 감정의 높낮이 차이를 가늠하지 못하고 부담스럽게 굴까 봐 때때로 염려됐다.
“자주 잠을 설치십니까?”
“네?”
느닷없는 화제에 무심코 되물었다가 아까 안색이 나쁘다던 신해량의 말에 제가 뭐라고 답했는지 상기했다.
“어, 가끔요. 해량 씨는요?”
질문을 돌려받은 것이 뜻밖이었는지 그는 입을 살며시 벌리고 쳐다보았다. 곧 정면으로 눈을 돌린 신해량은 말마디를 다소 느리게 내려놓았다.
“저도 가끔 잠을 설칩니다.”
그들은 빨간색 불이 켜진 사거리 횡단보도 앞에 섰다. 비가 얕은 강을 이루고 흐르는 도로는 본래의 기능을 상실했지만, 둘 중 누구도 차가 없으니 그냥 건너자고 말하지 않았다. 잠자코 신호가 바뀌길 기다리면서 신해량의 또렷하고 반듯한 옆얼굴을 흘끔거렸다. 그리고 양발에 무게를 지그시 실었다. 온통 젖은 운동화, 양말은 무시하고 발바닥과 땅바닥이 서로 압박하고 밀어내는 감각을 느끼려고 애썼다.
“전 자다 놀라서 깨면 맨바닥에 누워 버려요. 너무 차갑고 딱딱한데 그땐 바닥이 불편한 게 오히려 마음 편하더라고요. 그래도 마음이 술렁대서 계속 뒤척이는 날엔 아예 밖으로 나가기도 합니다. 내가 땅에 서 있구나. 여기선 엎어지고 굴러도 살이나 까지거나 멍드는 게 다겠구나. 한눈팔고 다니다가 뒤로 넘어져서 머리가 깨지지 않게 조심하기만 하면 돼. 운이 나쁘면 어디가 부러질 수도 있지만, 사는 게 다 그렇지 뭐. 이런 생각을 되뇌다 보면 어느 순간 다시 집으로 올라가서 침대에 눕고 싶어져요.”
갑작스러운 충동 때문에 누구에게도 못 했던 주절주절 떠들고 나니 신호등이 초록으로 변경됐다. 첨벙첨벙. 유속이 느리고 깊이가 얕아도 물의 저항을 받으면서 나아가리란 쉽지 않았다. 익히 아는데도 실감할 적마다 물이 미워졌다. 물론 하늘이 청명해지면 금세 휘발될 미움이다. 초록색 불이 깜빡깜빡하며 걸음을 재촉했다. 빨간불로 바뀌는 동시에 횡단보도 반대편 보도에 올라섰다. 신해량이 불쑥 고백했다.
“전 뜨개질을 합니다.”
“도움이 되나요?”
“대체로 그렇습니다.”
“도움이 안 될 때는요?”
“플로깅을 합니다.”
뜨개질과 플로깅처럼 건전한 방법과 비교하니 방바닥에 드러눕거나 새벽에 아파트 단지에 우두커니 서 있다가 들어오는 쪽이 많이 이상해 보인다.
“저도 뜨개질을 할까 봐요.”
길에서 쓰레기 줍기는 실천할 수 있다. 그런데 출근하기 전에 러닝이라고? 어림도 없었다.
“용병 일을 하다 보면 트라우마를 가진 사람을 많이 보고 공황, 불안증, 수면 장애는 더 흔합니다. 정석적인 치료 방법인 약물과 상담을 제외해도 저마다 이겨내는 방식이 다양하게 있더군요. 술이나 마약류 등에 손대지 않는 선에서 본인에게 맞는 대응법을 찾기 위해 여러 가지를 시도하는 건 괜찮다고 봅니다. 뜨개질을 해 보시겠다면 집에 남는 실과 바늘을 드리겠습니다. 아무 생각 없이 뜨개실을 사들였더니 너무 많군요.”
이렇게 길게 말하는 신해량은 오랜만에 본다. 대바늘로 누굴 죽이겠다는 내용이 아니고 친절한 권유였기에 즐거운 기분으로 웃을 수 있었다.
“좋아요. 대신 제가 밥 살게요.”
뜨개질 용품에는 문외한이라 가격대를 몰라서 식사 한 끼로 충분할지 긴가민가했지만, 호의로 주고받는 물건에 값을 따지는 것도 예의는 아니니까 나중에 몰래 알아보기로 했다. 그런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어느새 아파트 입구에 도착했다. 집에서 나와 치과로 가는 길은 유난히 멀었는데 귀갓길은 신해량과 동행한 덕분에 짧게 느껴졌다. 심지어 날씨가 이런데도 빗길을 걷는 게 제법 즐겁기까지 했다.
1층 공동 현관 앞에서 우산을 접노라니 신해량이 바로 말했다.
“그럼 전 가보겠습니다. 들어가 쉬십시오.”
“이대로 가시게요? 와서 커피라도 한 잔 드시지.”
“폭우가 계속될 것 같으니 일찍 돌아가는 편이 낫겠습니다. 옷도 많이 젖어서 폐가 될 겁니다.”
그렇지. 지금도 도로가 잠긴 판국에 미적거리다간 돌아갈 적기를 완전히 놓치고 만다. 그게 아니어도 왕래가 없던 사이에 갑자기 집에 오라고 하면 불편할 테니까 강요할 수 없었다. 이해하지만, 마음은 깔끔하게 물러나지 못했다. 주저하는 사이에 신해량이 칼 같이 몸을 돌렸다. 혼자여서 속도를 조절할 필요가 없어진 그는 큰 보폭으로 성큼성큼 걸었다. 쭉쭉 멀어지는 뒷모습을 눈으로 좇다가 결국 차양 바깥으로 뛰쳐나갔다. 뒤로 빠르게 접근하는 발소리를 들은 신해량이 기민하게 멈췄다. 뒤돌아선 그는 자기 우산 밑으로 냅다 뛰어 들어온 불청객을 쫓아내는 대신 가만히 비를 막아 주었다.
“저, 해량 씨, 그래도 이렇게 가시면 제가 걱정돼요. 밤사이 태풍이 지나간다니까 하루 묵고 가세요.”
한 번 사양했다고 집 앞까지 바래다준 사람을 홀랑 보내는 건 도리가 아니다. 비가 너무 내렸다. 아무리 낮은 확률이래도 혹시 모르지 않나. 겁도 없이 외출한 입장에서 할 말은 아니지만, 안전제일이다. 신해량이 거절하더라도 최소 두세 번은 붙잡아 봐야지.
“이런 날에 돌아다니는 건 아니라면서요. 그건 해량 씨도 마찬가지예요.”
그러고 보니 이 사람은 체육관을 열려는 것도 아니면서 왜 나왔던 걸까. 느지막한 의문 위로 목소리가 덮였다.
“혼자 있기 불안하십니까?”
생각지도 못한 질문이었다. 제 상태와 집에 오면서 나눈 대화를 종합하면 신해량이 오해할 만했다. 그래서 자문해 보았다. 내가 지금 불안한가? 신해량이 염려되어 머물다 가라고 청하는 게 아니라 단지 누군가가 필요하기 때문에 신해량이 가지 않기를 바라나? 짧게 숙고한 끝에 답을 내렸다.
“아닙니다. 불안한 건 아니에요.”
불안은커녕 그 반대였다. 하루만 잘 숨어 있으면 지나갈 재해였다. 여긴 지상이고 태풍 때문에 아파트가 무너질 리는 없었다. 간간이 뉴스를 확인하고, 바다가 무서워하지 않는지 들여다보고, 태풍이 한반도를 통과하는 동안 인명 피해가 적어야 할 텐데 걱정하겠지만, 바람이 창문에 대고 난폭하게 울부짖을 때마다 놀라겠지만, 두려움에 매몰되어 바닥에 찰싹 달라붙어 있지는 않을 것이다. 따뜻한 물로 다시 씻고 나서 제대로 밥을 챙겨 먹어야지. 어머니와 동생에게 안부 전화를 걸어야지. 한국에 있는 지인들에게 하나하나 문자를 남겨야지. 낚싯대와 장난감을 몽땅 꺼내서 바다와 놀아 줘야지. 거실에서 스트레칭도 해야지. 그렇게 하루를 보낼 거고, 그럴 수 있었다.
“전 그냥 해량 씨가…….”
정말로 그가 걱정됐다. 신해량은 대단한 사람이지만, 안 다치고 안 죽는 사람이 아닌 걸 뼈저리게 보고 겪었으니까. 그리고 그의 친절에 조금이나마 보답하고도 싶었다. 마른 옷으로 갈아입고 따끈따끈한 차를 마시는 신해량을 보면 좋을 텐데. 식사 전이면 아침도 대접하고 싶다. 식탁에 마주 앉아서 이 사람이 밥 먹는 모습을 보고, 오는 길에 그랬던 것처럼 대화를 나누면 즐거울 거다. 뜨개질하는 방법도 듣고, 집에서 쉬는 시간에는 뭘 하는지 묻고, 치실은 잘 사용하는지 확인하고……. 단순히 타인을 필요로 하는 마음과 달랐다. 신해량이어서 그러고 싶었다. 신해량이 어쩌면 저를 보려고 치과에 왔을지도 몰라서, 제 상태를 곧장 알아차릴 만큼 예리해서, 불안하냐고 묻는 사람이어서, 묵묵하게 친절하고 다정해서, 존재만으로 위안이 되어서, 비애의 물살을 조용히 끈기 있게 견디고 흘려보내는 사람이라서, 숱한 반복에서 만났던 신해량이 늘 한결같은 신해량이어서.
“해량 씨가 좋아요.”
말에서 자각이 부화했다. 내가 신해량을 좋아하는구나. 스스로 한 말에 어안이 벙벙해서 신해량을 멀거니 쳐다보던 중이었다. 흐리고 뿌연 세상에 백광이 번쩍했다. 그게 번개라는 사실을 인지하는 동시에 우레가 대기를 찢어발겼다. 지각을 쾅 찍어 내리는 진동이 온몸으로 전이되어 심장까지 떨렸다. 우산이 하늘을 가렸는데도 무의식중에 위를 올려다보았다가 도로 신해량에게 시선을 옮겼다. 그는 조금 더 길게 우산 너머의 하늘을 꿰뚫어 보듯 응시하다가 고개를 내렸다.
“무현 씨. 하루만 신세 지겠습니다.”
우산을 접고 집으로 올라와서 신해량을 먼저 욕실로 보냈다. 먼저 묵고 가라고 말은 꺼냈으나 막상 누구를 집에 들이자니 눈에 거슬리는 구석이 한두 군데가 아니었다. 나름 깨끗하게 산다고 하는데도 평일엔 너무 피곤해서 신경을 못 쓴다. 간밤부터 시작된 비 때문에 온 집안이 눅눅해서 걸을 때마다 발바닥이 달라붙어 쩍쩍 소리가 났다. 에어컨부터 돌리고 젖은 옷은 빨래 바구니에 넣은 다음, 낯선 사람이 들어와서 캣타워에 올라가 경계 태세를 갖춘 바다에게 뇌물로 간식을 주었다. 자질구레한 물건들은 구석에 밀어두었고, 급한 대로 눈에 띄는 곳 위주로 먼지를 훔친 뒤 잽싸게 청소기를 돌렸다. 때마침 샤워기 물소리가 그쳐서 허겁지겁 신해량에게 줄 옷도 꺼냈다. 무진이가 노티 나는 와이셔츠 좀 그만 입으라고 보내줬던 박스 티셔츠와 허리 고무줄이 빠져서 헐렁헐렁한 트레이닝 바지였다. 동생에겐 미안하지만, 솔직히 큼직한 그라피티가 인쇄된 티셔츠는 저한테 어울리지 않아 한 번도 안 입었다. 신해량에겐 잘 어울리겠지. 아직 이십 대인 데다가 그 얼굴에 뭐가 안 어울리겠어.
조용한 욕실 문 앞에 반듯하게 갠 옷가지를 두고 똑똑 노크했다.
“해량 씨, 앞에 옷 둘게요.”
그러고 작은 장롱을 열어 이불을 미리 확인했다. 혹시 몰라서 요와 이불을 사두기 잘했다. 봄에 깨끗이 빨고 바삭바삭 말렸는데 혹시 몰라서 냄새를 맡아 보고 나서야 안심하고 거실로 나갔다. 그때 신해량이 욕실에서 나왔다.
“잘 썼습니다, 무현 씨. 빌려주신 옷은 세탁해서 다음에 돌려드리겠습니다.”
“안 그러셔도 괜찮아요. 그냥 옷인데요. 다행히 사이즈가 그렇게 작지 않네요. 그래도 제 거라서 불편하시겠지만…….”
“편합니다.”
제가 보기엔 약간 작은 듯했지만, 본인이 그렇다니까 수긍했다. 신해량에게 커피를 내주고 씻고 나오니까 바다가 경계심을 조금 풀었는지 캣타워에서 내려와 있었다. 우리 바다, 순하기도 하지. 바다가 등을 쓸어내리는 손에 꼬리를 비비고 지나갔다. 해저 기지를 탈출할 때 배낭에 얌전히 들어가 있던 고양이는 같이 살아 보니 의외로 활달한 말썽쟁이였는데 여간해선 스트레스를 잘 받지 않고 매사 무던했다. 바다를 가만히 지켜보는 신해량에게 낚싯대를 건네 보았으나 그가 바로 사양했기에 대문짝 같은 남자가 자그마한 고양이 장난감을 흔드는 모습을 한 번 구경하려던 속셈은 좌초되었다.
솔직히 신해량과 단둘이 집에 있자니 불가피하게 어색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약간의 긴장감에도 익숙해진 바람에 결과적으론 소파에 나란히 앉아 오전 9시 뉴스를 볼 만큼 괜찮아졌다. 점심에는 냉장고에 몇 안 되는 식재료를 꺼내 간단히 요리했고, 지난 주말에 썰어서 냉동실에 넣은 수박도 꺼내 놨다가 반쯤 녹았을 때 나눠 먹었다. 바다가 근처를 지나갈 적마다 신해량의 시선이 잠시 따라붙는 걸 지켜보는 게 재밌었다. 때로 누군가의 자동차 경보음이 들렸으나 새벽처럼 듣기 힘들지 않았다. 둘 다 공통으로 아는 이들에 대한 소식을 나눴고, 1층 빵집에서 제일 맛있는 빵이 무엇일지 순위를 매기다가 모든 빵에 1위를 붙이고, 김재희가 모델을 하는 쇼핑몰을 구경하고, 치과는 요새 어떻고 체육관 운영은 할 만한지 같은 이야기로 시간을 보냈다. 집에 카드가 없어서 아쉬웠다. 서지혁은 신해량과 카드 게임을 하지 말랬지만, 아무것도 안 걸고 재미로 하는 카드놀이에서 신해량이 굳이 속임수를 쓸 것 같지 않았고 오히려 그의 손기술이 궁금했다. 다음이 있다면 꼭 카드 게임을 하자고 말해야지. 카드를 사놔야겠다. 저녁에는 한 번 천둥번개가 크게 친 후에 짧게 정전이 됐다. 어두컴컴해진 거실에서 신해량이 말했다. 금방 복구될 겁니다. 그래서 반쯤 농담으로 물었다. 엔지니어로서 말하시는 거예요? 신해량은 긍정했고, 그가 농담을 받아 준 건지 아닌지 판가름할 겨를도 없이 불이 다시 켜졌다.
밤이 깊어질 무렵, 거실에 신해량이 누울 자리를 폈다. 손님에게 침대를 권하는 게 예의일 텐데, 아무리 봐도 침대 사이즈가 신해량을 감당하지 못할 성싶어서 말도 꺼내지 않았다. 불을 끄고 침실로 들어가기 전에 신해량에겐 바다가 자다 깨서 돌아다니다가 몸 위로 올라오거나 지나갈 수 있으니 놀라지 마시라고 부탁했다. 그러고 나서 침대에 누웠다. 태풍이 가까워질수록 빗발은 오히려 약해졌고 차차 매서워지는 바람이 아파트 외벽과 창문에 대고 몸통을 뒤틀어대는 윙윙 소리가 섬뜩했다.
잠이 오지 않았다. 난리법석을 떠는 태풍 때문에 혼자였으면 틀림없이 악몽에 시달렸을 밤이지만, 눈이 말똥말똥한 원인은 날씨가 아니었다. 오전에 우산 아래에서 신해량에게 내지른 고백 때문이었다. 일을 저질러 놓고 이대로 어영부영 하루를 넘기면 안 되는 거 아닌가.
일말의 눈치도 없이 불쑥 고백을 터트리고 수습하겠다며 장난이라고 넘어가는 황당한 사건을 인터넷에서 종종 접했다. 볼 때마다 비겁하다고 생각했다. 고백받은 사람은 그 짧은 사이에 얼마나 많은 생각을 했겠는가. 사람이 내뱉었으면 책임을 져야지, 단박에 말을 번복할 만큼 가볍게 전하는 마음은 정말 초라한 것이고 고백받은 사람한테 무례를 저지르는 거였다. 나이가 어려도 변명이 안 되는 짓인데 하물며 저는 서른이 넘은 어른이다. 연하를 상대로 나잇값도 못 하고 그러면 안 된다.
벌떡 일어나서 반을 열어둔 방문 사이로 머리를 내밀었다.
“해량 씨, 주무세요?”
“아직입니다.”
“잠깐 얘기할 수 있을까요? 잘 시간에 죄송합니다.”
다행히 신해량은 흔쾌히 시간을 내주었다. 어쩌면 제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 그는 이미 예상했는지도 몰랐다. 캄캄한 거실로 걸어가 이부자리의 모서리에 슬쩍 앉았다. 불을 켜지 않은 건 박무현이라는 사람에게 남은 한 줌의 비겁함이었다. 미안합니다, 해량 씨. 환한 빛 아래에서 얼굴을 보면 제대로 말을 못 할 것 같아요.
“해량 씨. 제가 아침에 고백했던 거요. 저도 모르게 나간 말이라 갑자기 그런 소릴 들을 해량 씨 입장은 생각을 못 했어요. 게다가 하필 주무시고 가라는 얘길 한 다음에 그런 말을 해서 이상하게 들렸을 거 압니다. 근데 다른 뜻은 정말 없었거든요. 죄송합니다. 하지만 좋다는 말은 진심이에요.”
신해량이 잠깐 무언을 지킨 채 바라보기만 했다. 이목구비도 간신히 분간할 정도로 사위가 어두웠으나 제게 꽂힌 시선만은 분명히 느껴졌으므로 손바닥에 땀이 쭉 배어 나왔다.
“저야말로 죄송합니다.”
바로 거절이구나. 예상했지만, 어쩔 수 없이 심장이 철렁했다. 그런데 이어지는 말을 들으니 뭔가 달랐다.
“제가 먼저 답을 드렸어야 맞는데, 고민하느라 늦었습니다.”
“어, 고민이요?”
“저 같은 사람은 무현 씨에게 어울리지 않습니다.”
입이 저절로 떡 벌어졌다. 이 사람, 진심으로 하는 말인가. 밖에 나가서 열 명을 붙잡고 물어도 열 명이 다 신해량이 아깝다고 할 텐데 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아니, 해량 씨가 왜요? 잘생기시고, 몸도 좋으시고, 운동도 잘하시고, 믿음직하시고, 성실하시고, 다정하시고, 은근히 주변 잘 챙기시고, 거기다 뜨개질 잘하시지, 잠수도 할 줄 아시지, 엔지니어 경력도 있고, 경험 많으시고, 젊은 나이에 어엿한 체육관 관장이시고……. 아무튼 해량 씨 어디가 어때서요. 그런 말 마세요.”
한참 연하에게 고백을 날린 이쪽이야말로 양심이 없다고 봐야 했다. 앞자리부터 다르면 나이 차이고 뭐고 그냥 도둑놈이 된 기분이란 말이야.
“전 무현 씨의 그런 부분이 좋습니다.”
원래도 나지막하니 듣기 좋은 목소리에 엷게 웃음기가 배자 저절로 귀가 솔깃해지고 맥박이 빨라지는 효과를 발휘했다. 사적인 감정이 없던 사람도 순식간에 호감 이상의 마음이 싹틀 법한 순간이었다.
“그렇게 말하시면 제가 오해할 수도 있는데요.”
“오해하신 게 아닙니다. 무현 씨와 같은 의미로 한 말입니다.”
숨을 삼킨 채로 다시 내쉬지 못하고 고개를 살짝 수그렸다. 혹시 아까 침대에 누웠을 때 잠들어서 꿈을 꾸는 중이면 어떡하지. 형언하기 어려운 기분이 들어 손바닥으로 괜히 저릿저릿한 명치께를 문질렀다. 뱃속이 막 술렁거리고 앞가슴과 목덜미에서 열이 올라오고 있었다. 고백을 들었는데 왜 고백했을 때보다 훨씬 민망하고 부끄럽지. 어디서 숨어서 머리를 처박고 심호흡하고 싶을 정도였다. 이럴 땐 뭐라고 대답해야 적절하지? 고맙습니다? 아니야. 칭찬을 들은 것도 아니고 이상하잖아. 태풍처럼 빙글거리는 마음을 진정시키려 애쓰는 와중에 신해량의 손으로 눈이 갔다. 앞으로 모아 가볍게 말아쥐어 다리 위에 얹은, 느슨하고 다소 굳은 듯한 주먹.
“손을 잡아 봐도 될까요?”
신해량이 자기 손을 내려다본 후 천천히 펼쳐서 내밀었다. 잠깐 주저한 것처럼 보인 까닭은 어둠이 불러일으킨 착각이었을까. 조심스럽게 손바닥을 겹치고 약한 힘으로 붙잡아 보았다. 어지간한 성인 남자의 손도 어린아이로 만들어 버리는 크기였다. 체온은 따사하다 못해 뜨겁다는 감상이 들었다. 하던 일이 일이었다 보니 뼈대가 엄청 단단하고 군데군데 굳은살이 많이 박였다. 손등에 희미한 상흔이 몇 개 있다. 눈에 보이지 않고 손끝으로 문질러 봐야 비로소 알아챌 수 있는 흔적이다. 피부가 거칠고 질긴 느낌이지만, 생각보다는 훨씬 부드러워서 놀랐다. 마치 땅 같았다. 비가 잔뜩 내린 뒤 햇볕에 잘 마르고 다져진 대지처럼 안정감을 주는 촉감이 순간 바깥의 태풍까지도 완전히 잊게 했다. 양껏 만지작거리고 나서야 지나치게 주물럭댔나 걱정돼서 겸연쩍게 손을 놓았다.
“해량 씨는 몸이 뜨뜻한 편인가 봐요.”
말하기 무섭게 후회가 밀려왔다. 괜히 분위기만 한층 묘해진 탓이다. 다행히 신해량이 특유의 담박한 어조로 수습해 주었다.
“남들에 비하면 그런 것 같더군요. 남은 얘기는 밝을 때 차차 하고 더 늦기 전에 주무시는 게 좋겠습니다.”
맞다. 아침이 오면 날씨는 언제 난동을 부렸냐고 시치미를 뚝 뗀 듯이 온화해질 테고, 직장인은 맑게 갠 하늘을 즐기기는커녕 출근해야 한다. 무미건조한 현실을 의식했더니 급격히 눈꺼풀에 무게가 실렸다.
“네, 해량 씨도 푹 쉬세요.”
인사를 남기고 막 일어나려는 참이었다. 낮게 이름이 불리는 동시에 신해량이 팔을 지그시 잡아당겼다. 솜이불이 가슴을 누르듯이 부드러운 중력이었다. 이 사람은 정말로 체온이 높았다. 맨살에 밀착한 손바닥으로 나른하리만치 기분 좋은 온열이 전해졌다.
“만약 자다 깨서 바닥에 눕고 싶어지실 때는 제가 여기 있는 걸 기억하십시오.”
서른을 넘긴 뒤로 외롭다고 느낀 적이 드물었는데 신해량의 말을 듣고서 알았다. 실은 조금 쓸쓸했나 보다. 오랫동안 불안과 두려움은 묵은 충치처럼 명료한 반면, 외롭다는 감정은 투명하도록 어렴풋했으므로 누가 옆에 있으면 좋겠노라 바라지도 못했다. 이십 대 내내 한가하게 고독에 젖을 때가 아니라고 자기 자신을 많이 다그쳤다. 어디선가 사이비는 외로워 보이는 사람을 주로 노린다는 얘기를 주워듣고 더 괜찮아지려고 애썼다. 그래서 신해량이 건넨 말에 하마터면 몰래 눈시울을 붉힐 뻔했다. 살다 보면 혼자보다 둘이어서 나을 때가 있고, 이따금 누군가를 바라는 마음 자체가 잘못된 것이 아님을 새삼 깨달아서.
“해량 씨도 혹시 잠들기 힘드시면 저 깨우세요. 뜨개질감은 못 드려도 뜨개질 얘기는 할 수 있어요.”
“무현 씨를 깨우진 않을 겁니다. 그래도 가까이 계신 게 큰 도움이 되겠군요.”
이렇게 단호한 면까지 좋아서 웃음이 실실 새어 나오면 답도 없는 거겠지. 피차 편히 잠을 이룰 수 있기를 바라며 침실로 돌아와 누웠다. 어디에 있다가 나타났는지 바다가 가슴팍에 올라와 털실처럼 동그랗게 몸을 말았다. 이제 태풍이 제멋대로 지나가는 소란은 이불 밖으로 밀어두고 눈을 감았다.
바람이 휘몰아쳐도 땅은 견고하고, 비가 무진 쏟아져서 범람한 물은 시간이 지나면 천천히 빠질 터였다. 굴러떨어지거나 넘어져서 못 일어나도, 가만히 머무르거나 서성대고 또 배회해도 지상은 한결같이 몸을 떠받치리라. 그러다가 자칫 휩쓸릴 뻔할 때는 손을 붙들어 줄 사람이 저기에 있다.
난 괜찮아. 여긴 안전하고, 심해가 아니야.
그러니 오늘은 깊은 잠을 청하자. 아무런 나쁜 꿈도 꾸지 않는, 단단하게 굳은 잠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