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현세건] SCRATCH

현건 단편집 <POINTAGE > 의 선입금 특전 단편


Part. 한세건


Day 1.

뜬금없이 시작된 꿈이었다. 그러나 꿈이라기엔 지나치게 생생하고, 현실이라기엔 너무 비현실적이었다. 모든 사람, 사물, 풍경이 모노톤 덩어리라는 사실을 제외하면 평범한 도시였고 갑자기 괴물이 튀어나오거나 누가 죽는 등의 드라마틱한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꿈이라고 인식한 까닭인지 마음대로 움직일 수 있었기 때문에 세건은 도시를 돌아다니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지하철과 버스가 운행되고 있어서 혹시나 하고 아르쥬나를 찾아가 보았지만 가게는 물론이고 근린공원도 존재하지 않았다. 강남이며 여의도며 이름은 버젓이 존재하는데 막상 가보면 알고 있는 풍경과 다른 장소였다. 아마 가상의 도시인 모양이라고 결론 내리고 카페의 야외 테라스에 앉아서 지나다니는 이들을 무감하게 관망했다.

자신만은 이 세계에서 유일하게 색을 지녔으나 회색 사람들은 이쪽을 조금도 눈여겨보지 않았다. 어차피 꿈속, 모든 것이 모노톤인 마당에 이상한 점 한둘쯤 뭐가 대수겠는가.

세건은 칙칙하기 그지없는 하늘을 권태롭게 올려다보았다.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지만 이곳에서 나가는 것만은 의지대로 되지 않았다. 뚜렷한 목적지 없이 자리에서 일어나 거리의 사람들 속에 합류했다. 차라리 어디로든 흘러가는 편이 마음은 편할 것 같다. 무의미한 눈길로 주변을 훑으며 걷던 중, 건너편 길을 보았다가 이 꿈에서 가장 독특한 존재를 발견했다.

아마도 사람인 것 같다. 단정하지 않는 까닭은 그것이 사람들 틈에서 사람을 닮은 형태를 갖고 있었으나 마치 검은색 종이 인형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회색 사람들은 그 또한 이상하게 여기지 않았다. 세건은 그것이 꿈과 관련되어 있다는 직감이 들었다. 도로가 사이를 가로지르고 있었지만 꿈에서 공중도덕을 지키는 것도 우스운 일이었다. 달리는 차는 아랑곳하지 않고 건너려는 순간, 마치 만나려는 것을 방해하듯이 꿈이 깨져버렸다.



Day 2.

다시 그 꿈을 꾸었을 때, 세건은 그 자리에 그대로 있었다. 그러나 정체가 불분명한 검은 형체는 보이지 않았다. 그것을 찾기 위해 한참을 헤매고 다녔지만 아무 소득이 없었으므로 세건은 곧 단념했다. 아무리 같아 보이는 꿈이라고 한들, 이전에 보았던 것이 이번에도 나타난다는 보장은 없다.

그보다 이 꿈, 사실 꿈이라고 칭하기엔 의혹이 많은 이 세계에 대한 의문이 생겼다. 같은 꿈을 연달아 꾸는 경우는 가끔 있는 현상이지만, 이번만은 위화감이 들었다. 아인소프 오올 이후엔 마법의 힘이 강해진 탓에 이전에는 본 적 없던 종류의 마법이 많았다. 그러니까 세건은 이것이 어떤 마법의 일종이 아닌지 의혹이 들었다. 다만, 지난번에 깨어났을 때는 이상한 점을 전혀 느끼지 못했다. 이것이 누군가가 의도적으로 저지른 짓이라면 목적이 있을 게 아닌가. 그냥 이런 꿈만 꾼다고 자신에게 무슨 해가 될 것이며 그 누군가가 얻는 바는 무엇일지 짐작가지 않았다. 굳이 꼽자면 기분이 나빠지는 효과 정도?

하릴없이 지나는 길에 공원이 있어 들어가 보았다. 본격적인 공원이 아니라 인근 아파트 주민들을 위한 광장에 가까웠다. 중앙에는 바닥에 분수 구멍이 설치되어서 물줄기가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그 사이를 어린애들이 깔깔거리며 뛰어다녔다. 아예 돗자리를 준비해온 가족들이 곳곳에 보였다. 이제 보니 이곳은 여름이었다. 여태껏 세건은 계절을 눈치 채지 못했다. 풍경이 모노톤이기 때문만은 아니고, 추위나 더위 따위가 전혀 느껴지지 않은 까닭이다.

앉을 벤치를 찾다가 근처에 있던 개가 눈에 띄었다. 색깔이야 모르지만 생김새가 꼭 골든 리트리버였다. 빤히 바라보다가 개와 눈이 마주쳤다. 마치 웃는 것처럼 입을 벌리고 헥헥거리는 모양새를 보노라니 저도 모르게 미소가 지어졌다. 앉아서 핸드폰을 들여다보고 있던 주인이 이쪽을 알아차리고 빙긋 웃었다.

“우리 포니 예쁘죠? 가까이에서 보셔도 돼요. 착하거든요.”

세건은 머뭇거리다가 천천히 다가갔다. 귀여운 이름을 지닌 녀석이 앉은 채로 코를 내밀어 킁킁 냄새를 맡았다.

“만져보실래요?”

주인이 흔쾌히 허락하기에 거절하지 않았다. 몸을 낮추고 앉아서 천천히 코앞으로 손을 내밀고, 부드러운 털을 쓰다듬었다. 주인 말대로 퍽 얌전했다.

“개를 좋아하시나 봐요.”

“예전에 키웠습니다.”

과거형에서 지금은 없다는 사실을 짐작했는지, 주인은 더 캐묻지 않았다. 따뜻한 체온이나 부들부들한 감촉이 현실과 똑같았다. 평화롭다면 평화로운 꿈인데, 왜 하필 흑백일까. 고민에 잠겨 바라보는 시선을 되돌려 비추는 까만색 눈동자. 거기엔 상대를 향한 한 가닥 의심조차 깃들지 않았다. 그 순진한 눈을 보노라니 잔다르크가 떠오르고, 그 다음에는 기가 막히게도 회색 눈의 괴물이 떠올랐다. 이토록 착하고 예쁜 녀석에게서 그놈을 연상하다나, 개에게 사과해야할 일이다.

픽 웃음을 터트리자 포니가 낑 소리를 내더니 손등을 날름 핥았다. 세건은 곧 서현의 어떤 점이 개와 닮았는지 깨달았다. 신뢰를 보내는 저 눈빛이다. 지독한, 고통스러운, 무자비한 그의 신뢰.

무심코 얼굴을 일그러뜨린 순간, 갑자기 개가 벌떡 일어나 왈왈 짖었다. 자신의 표정 때문인 줄로 착각하고 당황했지만 다행히 개는 다른 곳을 향해 짓고 있었다.

“착하지 포니야, 쉿, 쉿! 갑자기 왜 그래?”

의아해서 개를 따라 고개를 돌린 세건은 깜짝 놀라며 몸을 일으켰다. 그곳에는 아까 한참을 찾았던 검은 형체가 있었다. 그것이 멈칫하고 이쪽을 바라보았다고 여긴 찰나, 꿈이 끊겼다.



Day 3.

이번에는 바다라니, 참 대중없는 장소 선정이다. 세건은 엷게 푸르스름한 기가 도는 바닷물을 보다가 퍼뜩 고개를 돌려 사람들을 확인했다. 계속 회색이었던 그들에게 다른 색이 희미하게 배어 있었다. 물을 흠뻑 머금은 물감처럼 거의 투명에 가까운 색이지만 분명한 변화였다. 갑자기 어찌 된 일인지 몰라도 답답하던 세상이 조금이나마 달라지니 기분이 한결 나았다. 지난번에 마주쳤지만 결국 잡지 못한 검은 것을 오늘이야말로 찾을 수 있으리란 예감이 들었다.

장소는 바뀌어도 아직 여름인지, 바닷가는 인파로 넘실거렸다. 세건은 잠시 해변을 따라 걸으며 감회에 잠겼다. 바다를 보기는 오랜만이었다. 마지막으로 보았던 때는, 공교롭게도 서현과 함께였다. 헌팅 때문에 근처까지 왔다가 꼭 보고 가자며 놈이 고집을 피워서 기어이 겨울바람 쌩쌩 몰아치는 바닷가에서 거칠게 포말을 일으키는 파도를 마주해야 했다.

그러나 기억에 남은 광경은 잇달아 몰려오는 파도가 아니라 나달거리는 잿빛 머리칼이었고, 바람을 사이에 두고 곧게 마주쳤던 오드아이였다. 아무런 거리낌 없이 응시하던 서현 특유의 눈동자…….

돌연히 팔을 붙잡힌 바람에 세건은 머릿속을 채우는 회상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고개를 돌리자마자 그토록 쫓던 검은 형체를 맞닥뜨리고 깜짝 놀라고 말았다. 찾는 수고를 덜어 다행인데 설마 그쪽에서 먼저 접근할 줄은 미처 몰랐다. 그것은 정작 잡아챈 주제에 아무런 반응도 내보이지 않았다. 잠자코 기다리던 끝에 먼저 말문을 열었다.

“당신, 누구지?”

그림자에 가깝긴 하나 행동을 보아 분명히 사람이었다. 저런 모습인데도 누구 하나 신경 쓰지 않고 있었다. 아마 그들에겐 보이지 않거나 역으로 자신에게만 이런 모습이리라.

“왜 당신만 다르지?”

“다르다니, 무슨 소리야?”

마침내 검은 사람이 말했다. 희한한 목소리였다. 마치 어설프게 음성변조를 거친 느낌인데 까끌까끌한 사포처럼 투박했다. 썩 듣기 좋은 목소리는 아니다.

“어째서 당신만은 오로지 검은색이냐고.”

“그럼 다른 사람들은 무슨 색인데?”

“회색이었지. 오늘은 이상하게도 희미하게나마 색이 보이기…응?”

무심결에 주위를 훑었다가 얼이 빠졌다. 있는 둥 마는 둥했던 색깔이 어느새 훨씬 짙어졌다. 어떻게 된 영문인지 몰라서 바다며 하늘이며 사람들을 쳐다만 보노라니 검은 사람이 의아해했다. 점점 색이 날아남에도 이 자는 한결같이 검었다. 갑작스럽게 일어난 변화를 설명하노라니 검은 사람은 다급하게 주변을 둘러보다가 어느 순간 돌변해서 잠잠해져서 미동도 하지 않았다. 세건은 그 이상한 행동을 가만히 주시했다.

“아무래도 우리가 마주치면 무언가 바뀌는 것 같군. 참고로 나는 세상에 온통 흐릿하게 보이고 소리도 잘 안 들렸어. 그런데 저번에 당신을 본 뒤에는 흑백이긴 해도 모든 게 또렷하게 보이기 시작했고, 오늘은 소리가 제대로 들려. 당신도 날 만난 다음에 생긴 변화 아냐?”

그건 미처 고려하지 못한 부분이었다. 이 사람의 말대로 타이밍이 딱 그러했다. 단지 상대를 보기만 해도 변화가 일어난다면 처음 거리에서 발견하고 나서부터 변해야 했지만, 반드시 서로가 서로를 인지해야만 변화가 일어난다고 가정하면 틀림없다

세건은 팔짱을 끼며 눈을 내리깔았다. 역시 이 세계는 평범한 꿈속이 아니며 눈앞에 선 정체불명의 존재가 확실히 연관되어 있다. 또한 지금으로서는 검은 사람이 자신을 이곳으로 끌어들인 원흉이 아니라고 단정 지을 근거가 없다. 그 점을 확인하기 위해서라도 이 자를 더 만나야할 필요가 있었다.

“여기서 당신을 몇 번 더 만나면 색이 완전히 돌아오겠군.”

“…나를 계속 만날 셈이야?”

그는 의외라는 양 물었다.

“글쎄. 내 의지로 이곳에 오는 건 아니지만, 다시 오게 된다면 적어도 이런 일이 왜 벌어지는지 알아낼 참이다. 솔직히 그쪽이 가장 의심스럽지만.”

구태여 속내를 숨기지 않고 드러내자 손을 내저었다.

“억울하네. 나도 왜 이런 곳에 자꾸 오는지 궁금해 죽겠다고.”

태도만 보아선 진심 같았다. 희한하게도 갑자기 그 말을 믿고 싶어졌다. 베일에 싸여 아무런 정보도 없는 자를 선뜻 신뢰하려고 들다니, 자신답지 않은 감정이다. 스스로가 낯설어서 몸서리친 세건은 의식적으로 경계심을 일으켰다. 정체가 무엇인지, 어째서 여기 들어와 있는지 알기 전에는 일체 긴장을 놓아선 안 된다. 능청스럽게 연기를 하는지, 아니면 정말로 자신과 같은 신세인지야 두고 보면 알겠지.

“난 한세건이다. 넌?”

난, 하고 운을 떼었으나 그는 얼마간 침묵을 흘린 뒤에야 재차 말했다.

“난 이름이 없는 자다.”



Day 4.

이번에는 찾을 필요도 없이 바로 만날 수 있었다. 바로 횡단보도 맞은편에 있었으므로 단번에 눈에 띄었다. 자기를 이름 없는 자라고 밝힌 그는 오늘도 검었다. 혹여나 예상과 다른 성별인지 확인하려고 만나자마자 물었더니 어처구니없다는 투로 남자라 못 박았다.

“한세건, 오늘은 어떻게 달라졌지?”

오자마자 그를 마주친 후, 모노톤으로 뒤덮였던 세상은 언제 그랬냐는 듯이 사람마다 사물마다 저마다 좋을 대로 색을 띠었다. 바람에 실려 온 더운 공기도 느껴져서 그제야 여기가 여름이란 사실을 실감했다. 여기에 처음 왔던 날과 비교하면 극적인 변화였다. 이대로라면 다음에 만났을 때는 현실과 다름이 없으리라. 그렇게 되어도 이 꿈 아닌 꿈은 계속될까? 세건은 이름 없는 자를 곁눈질했다. 색깔이 검을 뿐만 아니라 얼굴조차 제대로 갖춰져 있지 않으니 그가 무엇을 생각하는지 조금도 짐작하기 어렵다.

“밝고, 선명하군. 넌?”

이름 없는 자가 이쪽을 바라보더니 간격을 약간 떨어뜨린다.

“나도 조금 밝게 보여.”

세건은 그의 뒤쪽으로 지나가는 사람을 잠깐 시선으로 좇았다. 회색일 때는 아무리 말하고 행동해도 엉성한 페이퍼 인형극 같았는데 이제는 너무 생생해서 차라리 현실 같다.

“아무리 변해도 너만은 그대로군.”

“그래? 난 이 세계에 속한 사람이 아니니까 다르겠지.”

본인만 검은색인 이유를 그다지 중대하게 여기지 않는지, 그는 무척 담담했다. 일리 있는 주장이었지만, 만약 이 세계에서 이방인이라는 이유로 완전한 형체가 아니라면 자신도 이 자의 눈에 검게 보여야 마땅했다. 그렇지 않은 까닭이 무엇인지가 그의 정체 못지않게 신경이 쓰였다.

이곳에서 만나 보이는 세계에 변화를 주는 목적은 달성했더라도 다시 깨어날 때까지 할일이 없기 때문에 그들은 정처 없이 걸었다. 이름 없는 자는 말수가 적었다. 본래 성격이 과묵한지, 저 혼자 머리를 굴리고 있는지 몰라도 수다스럽게 귀를 따갑게 하는 자가 아니어서 좋았다.

“당신, 진짜로 이름이 뭐지? 왜 알려주지 않으려는지 무척 수상쩍은데 일단 뭐라고 부르긴 해야 할 것 아냐.”

“마음대로 불러. 가명이라도 붙이든지.”

“마음대로? 멍멍이라고 불러도 괜찮다 그건가?”

“멍멍이 귀엽네. 멍멍.”

스스로 얼굴이 경직되는 것을 확연하게 느꼈다. 세건은 입을 앙다물었다. 이름 없는 자의 태도가 누군가와 너무 비슷해서 순간적으로 가슴이 철렁했다. 그만큼 뻔뻔한 놈이 또 있었다니. 정작 녀석은 여기 있지도 않건만, 이곳에 오면 별것이 다 서현을 떠올리게 한다.

지금쯤 그는 뭘 하고 있을까. 꼴 보기 싫다고, 성가시게 하지 말고 꺼지라고, 괴물의 감정 따위 알 바 아니라고 퍼부었던 날에 서현의 눈빛이 뇌리에 똑똑히 아로새겨져 있다. 제아무리 폭언을 던지고 냉소를 지어도 진심이 아니리라는 믿음, 날카로운 이빨을 가진 괴물 주제에 온순하게 보내는, 그 전폭적이고 잔인한 신뢰.

“맞장구 쳐줬더니 왜 그런 표정이야?”

“…됐다.”

멍멍이는 애당초 농담이었고 설령 진담이었던들 공연히 머릿속에서 서현을 맴돌게 하기 싫었기 때문에 가명 붙이기는 관두었다.

마냥 걷다 보니까 골목이 거미줄처럼 뻗은 어느 동네에 진입했다. 주위에는 빌라와 상가가 뒤죽박죽으로 선 가운데, 이런 주거단지 근처에 으레 있을 법한 가게는 물론이고 카페와 베이커리도 보였다. 그 사이를 지나다가 멀찍이 눈에 익은 건물 한 채를 발견하자마자 세건은 벼락을 맞은 듯 뻣뻣하게 굳어서 우뚝 멈추었다.

“왜 그래?”

세건은 터지려는 한숨을 가까스로 삼켰다. 이제 보니 아인소프 오올 이전에 서현이 지내던 동네이고, 저 상가 건물 옥탑방이 그놈과 녀석의 부하들 집이었다. 본의 아니게 몇 번인가 오갔던 탓에 주변의 세세한 풍경까지 동일한지는 몰라도 옥탑방이 있는 건물 생김새만은 확실히 기억했다.

“…내가 알던 데랑 비슷해서.”

“얼버무리지 말고 얘기해봐. 지금까지 아는 장소가 나왔던 적 있어? 뭔가가 달라졌다면 그렇게 변화한 의미가 있을 거라고 보는데.”

“아는 놈이 살아서 가끔 왔던 동네가 이렇게 생겼어. 그뿐이야.”

이름 없는 자가 몸을 약간 들썩였다.

“표정을 보니 싫어하는 놈인가 보네.”

세건은 실소를 흘렸다. 다른 뱀파이어나 괴물들처럼 싫어했다면 차라리 낫다. 서현을 향한 감정은 단순한 호불호로 표현하기가 불가능한 문제였다. 까마득하게 깊고 돌아버리게 복잡해서 회피하고, 무시하고, 매도하고, 학대하는 데 안간힘을 쏟아도 그 감정은 구태의연하게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시험 삼아서 가보는 게 어때? 현실에서 아는 사람이 이런 곳에도 있을지 궁금하고, 알아볼지도 궁금한데.”

“만나고 싶지 않아. 다른 길로 가지.”

“왜 만나기 싫은데?”

“남의 일에 관심이 많군. 보기 싫은데 이유가 있나? 그리고 있더라도 왜 너한테 말해줘야 하는데?”

“남의 일이라.”

이름 없는 자가 나지막이 중얼거리더니 한 발짝 성큼 다가왔다. 무심결에 뒤로 물러나자 팔을 콱 움켜쥐고 잡아당겼다. 순식간에 시야를 가득 채운 검은 형상이 흡사 불꽃처럼 일렁거리기 시작했다. 그 모습이 어찌나 위압적이던지, 무슨 짓이냐고 쏘아붙이려던 것도 잃어버린 세건은 기이한 기시감에 휩싸였다. 이름 없는 자의 검은색에서 조금씩 재가 떨어지기 시작했다.

“내게 당신이 어떻게 보였는지 알아? 그 공원에서, 모든 것이 회색 신기루처럼 어른어른한데 오직 당신만은 선연하고 모든 색을 갖고 있었지. 이 세상에서 유일하게 살아 숨 쉬는 존재처럼. 그리고 지금도, 당신만이 찬연해서 미쳐버릴 것 같아.”

훼손되고 거칠어진 음성이 거슬리게 들렸다. 그러나 세건은 귀를 막을 엄두도 내지 못했다. 듣지 않으려고 아무리 애쓴들 고막을 때리는 천둥소리를 완벽히 차단할 수 없었다.

“하지만 네 눈에 나는 일부러 칠한 것처럼 새카만 존재일 뿐이었어. 이제는 그 이유를 알 것 같다, 한세건.”



Part. 서현


Day 1.

희한한 곳으로 흘러들어왔군. 서현은 주위를 둘러보다가 어깨를 으쓱였다. 온통 회색으로 칠해진 세상도 세상이지만 사람으로 추정되는 것들은 마치 신기루처럼 형태가 흐릿해서 도저히 개개인을 구분하기 어려웠다. 사람뿐만 아니라 빌딩이며 자동차며 무엇 하나 뚜렷한 갓이 없었다. 옆을 스쳐 지나가는 말소리부터 늘어선 가게에서 흘러나오는 음악까지 노이즈가 섞였다. 그나마 다행인 점은, 오직 자신만은 제대로 된 모습을 갖추고 있다는 점이다. 자려고 누웠으니 꿈인 것 같은데, 또 꿈이라고 하자니 석연치 않았다. 그러나 아직까진 해가 될 일이 없다고 판단하고 무작정 돌아다니기로 했다. 꿈이라면 언젠가 깰 것이고, 아니라면 그때 방도를 강구하면 되겠지.

그저 발길이 닿는 대로 나아가던 서현은 이내 아무도 자신에게 눈길 한 번 주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닫고 의아해졌다. 눈에 띄는 외모 때문에 어디를 가든 쳐다보는 시선이 느껴지곤 하는데 지금은 투명인간이 된 기분이었다. 혹시 여기 유령 같은 자들에겐 자신이 안 보이는 건가. 걸음을 멈춘 서현은 쇼윈도를 찾아 자신의 모습을 확인하고 눈을 휘둥그레 떴다. 거기엔 검은색 그림자 같은 것이 뭉뚱그려진 형상으로 존재하고 있었다. 혹시나 하고 다른 쇼윈도에 비춰 보아도 마찬가지였다.

“이게 대체 뭐야?”

서현은 손으로 몸을 더듬어 보았다. 검은 형상도 따라서 팔을 움직인다. 여기에 가면 하나면 씌우면 일본 애니메이션에 나오는 요괴랑 비슷할 듯하다. 쇼윈도에 스치는 다른 이들은 눈에 보이는 모습과 다를 바가 없었다. 그렇다면 자신만 이 모양인데 모두 예사롭게 풍경인 듯이 지나간단 말이지.

점점 흥미로워진 서현은 시험 삼아서 쇼윈도를 향해 주먹을 날렸다. 와장창, 순식간에 파편이 된 유리들이 바닥으로 쏟아졌고 길 가던 이들이 비명을 지르며 멀찌감치 떨어졌다. 서현은 웅성거리는 그들의 얼굴이 자신에게 쏠려 있는 것을 확인했다. 투명인간은 아니라는 증거다. 가게에서 누가 뛰쳐나오기에 얼른 달아났다. 현실 세계가 아니니 기물을 파손했다고 미안해 할 필요 없으리라.

뒤에서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는데 노이즈가 섞여서 뭐라고 하는지 알아들을 수도 없다. 들으나마나 거기 서라, 어딜 도망 가냐, 그런 뜻이겠지. 한참 사람들 사이를 헤치고 달려가다가 더는 쫓아오지 못 할 즈음이 돼서야 속도를 줄였다.

주먹이 통유리를 깨부수는 감각을 되새겨보는데 희한하리만치 생생하다. 이게 정말 꿈인가? 아니면 이상한 마법에라도 걸렸나? 고개를 기우뚱하고 골몰하는데 느닷없이 어딘가로 쑥 빠져나가는 느낌이 들었다. 그리고 잠에서 깨어났다.



Day 2.

두 번째로 유령 도시 같은 이곳에 들어왔을 때, 서현은 일단 꿈이라고 가정하기로 했다. 아직은 우연일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고 당장 문제가 있기 전까진 이 세계가 이루어진 방식을 파헤치는 것은 보류하기로 했다. 게임이 저장되듯 지난번 끊어진 장소에서 시작했다면 더 신기했겠지만, 눈앞에 펼쳐진 풍경은 달랐다.

서현은 육교 위에 서 있었다. 뒤로는 여러 아파트 단지가 보였고 앞에는 공원이 있었다. 흐릿하게 흔들리는 나무는 언뜻 불타는 것처럼 보인다. 망설임 없이 공원으로 내려간 서현은 물씬 풍기는 나무 냄새를 폐 깊숙이 들이마셨다. 시각 정보는 터무니없이 엉망이면서도 피부에 스치는 바람이나 주변의 냄새는 너무 사실적이다. 반면에 소리는 또 라디오 잡음 같으니 도무지 종잡기 어려운 곳이었다. 전방에서 이상한 소음이 들려 걸음을 빨리하자 이내 광장에 다다랐다. 바닥에서 무언가가 솟구쳐 올랐다가 흩어지며 떨어졌다. 워낙 형체가 어른어른해서 더 가까이 가서야 분수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이제껏 월등히 좋은 시력을 갖고 살았던 서현에게 시야가 어리어리한 경험은 처음이었다.

답답해서 한숨을 내쉬고 분수를 향해 다가가는데 근처에서 큰소리가 들렸다. 여전히 노이즈가 겼지만 이번에는 개 짖는 소리라는 것을 단번에 알았다. 이런 공원이니 당연히 개를 데리고 산책 나온 사람도 있겠거니 하며 무시하려 했건만, 이상하게 뒤통수가 따끔하여 서현은 결국 뒤를 돌아보았다. 그리고 모든 것이 흐리멍덩한 이 꿈속에서 처음으로 실제적인 모습과 선명한 색을 지닌 자를 발견했다. 놀랍게도 그는 한세건이었다.

특별한 반응을 하기도 전에 세건은 홀연히 사라졌다. 너무 순식간이라 잘못 보았는지 눈을 의심했지만 서현은 곧 고개를 저었다. 그렇게 선명했는데 착각일 수가 없었다. 잠깐이나마 보였던 그의 얼굴엔 놀란 빛이 선명했다. 어째서 세건이 여기에 나타나고, 또 자신을 보자마자 놀라고, 만나자마자 사라지는지 의문투성이다. 여전히 이쪽을 향해 짖어대는 개를 일별하고 돌아서는데 속에서 만감이 교차했다.

오랜만에 보는 한세건이었다. 걸핏하면 암살자를 보내는 한니발 때문에 어디 한 군데 붙어 있지도 못하고 골머리를 앓다가 그놈을 쫓아 외국까지 나갔다가 한국에 들어오고, 그 짓을 반복하는 사이에 한세건은 조금 이상해져 있었다. 처음에는 바쁜 줄 알았다가 나중에 가서야 그가 마주치는 상황을 피하고 있음을 눈치챘다. 대관절 까닭을 모르니 주위를 빙빙 돌기만 했고, 한세건이 갖은 신경질을 부린 이후로는 굳이 찾아가지 않았다. 시간이 지나 꼬인 속이 풀리든 안 풀리든 언젠간 불가피하게 맞닥뜨리게 될 운명이라 믿고 있었다. 그래도 이렇듯 몇 개월 만에 가까이에서 보니 마음이 술렁거렸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꽤 그리워했던 모양이다.

하여튼 방금 한세건은 꿈속의 존재가 아니라는 확신이 들었으므로 서현은 이곳에 관해 알아볼 필요성을 느꼈다. 어지간한 환술은 통하지 않는 몸이다. 테트라 아낙스 정도 되면 꿈에 잠시 개입할 수도 있겠지만 이 세계엔 그런 존재가 없다. 서현은 미간을 좁히며 한숨을 터트렸다. 아카식 레코드에 접속하는 것은 마법을 쓰는 것보다 힘들어서 썩 내키지 않는데.

바람이 앞머리를 흔들고 지나가 문득 고개를 들었다. 무성한 나뭇잎이 부드럽게 춤추는 광경이 눈에 들어와 멀거니 바라다보던 서현은 짧은 탄성을 터트렸다. 내내 식별 가능할 정도로 형태만 어렴풋하게 보이던 풍경이 또렷해져 있었다.



Day 3.

서현은 깍짓손을 베고 누워서 회색 하늘을 하염없이 올려다보았다. 예상한 바대로 이곳은 단순한 꿈이 아니었다. 말하자면, 아인소프 오올 이전과 이후 세계가 겹쳐지면서 생긴 약간의 부스러기가 뒤엉켜 만들어진 곳이었다. 정보의 먼지 덩어리라는 점에서 별다른 문제는 없으나 완전하게 가상 세계라고 하기도 어렵다. 누군가 의도적으로 저지른 짓이 아닌 것만은 다행이다.

아마도 자신이나 한세건이나 두 개의 세계와 연결고리가 남은 탓에 이곳에 접속할 수 있었다고 추측된다. 다만, 왜 하필 둘인가 하는 점만은 아직 알 수 없는 부분이다. 아무래도 좋으니 부디 한니발이나 앙리 유이를 만나지 않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었다.

허리를 세워 앉아 모래를 털고 내달려왔다가 하얗게 부서져내려 미끄러져 물러나는 파도를 응시했다. 이번에는 뜬금없이 바닷가였다. 주변이 제대로 보이게 된 것은 좋은데 아직 소리에는 노이즈가 박혀 있다. 이래서는 한세건을 만나도 제대로 얘기나 할 수 있을지 걱정이었다. 비록 지금은 넓은 모래사장, 수많은 사람들 때문에 만남이 성사되기부터 만만치 않았다. 그러나 근처에 있기만 하면 그 선명함을 결코 못 보고 지나치지 못하리라.

그래, 바로 지금처럼.

마침내 회색으로 점철된 세상에서 유일무이한 유채색을 발견하자마자 달려가서 팔을 확 잡아챘다. 손가락에 잡히는 이 느낌, 절대로 환상이 아니었다. 흠칫하고 돌아본 한세건의 눈이 동그랗게 커진다. 그들은 잠시간 서로를 바라보며 아무 말도 꺼내지 않았다. 먼저 물꼬를 튼 쪽은 한세건이었는데, 그건 서현이 상상하지 못한 말이었다.

“당신, 누구지?”

혼란에 빠져 무어라 대답할 수 없었다. 설마 한동안 못 보았다고 얼굴을 잊었단 말인가? 아니면 눈앞의 한세건은 진짜가 아니라 이 세계에서 만들어진 가상의 존재인가?

“왜 당신만 다르지?”

“다르다니, 무슨 소리야?”

“어째서 당신만은 오로지 검은색이냐고.”

아찔한 충격이 뒤통수를 때렸다. 서현은 쇼윈도에 자신이 시커멓게 비추었던 것을 상기하고 아연해졌다. 오히려 제대로 들릴지 걱정했던 한세건의 목소리는 명료한데 정작 그는 이쪽이 누군지도 모른다니! 저번에 세건이 놀랐던 까닭은 그저 달랐기 때문이다. 서현은 입술을 깨물었다.

“그럼 다른 사람들은 무슨 색인데?”

“회색이었지. 오늘은 이상하게도 희미하게나마 색이 보이기…응?”

한세건이 갑자기 주위를 둘러보기 시작했다. 그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눈을 깜박거리다가 눈살을 찌푸렸다. 서현도 세건을 따라 두리번거렸으나 특별히 눈에 띄는 것은 없었다.

“갑자기 왜 그래?”

“…조금 전보다 색이 더 짙게 보여.”

한세건은 그렇게 말했지만 서현의 눈에는 모두가 여전히 회색 일색이다. 혹시 시간이 지날수록 풍경이 현실과 비슷해지는 건지 궁리하던 중, 허공을 선회하는 갈매기 울음소리가 귀에 확 박혔다. 그제야 갈매기뿐만 아니라 사람들 말소리도 분명하게 들리고 있음을 깨달았다. 조금 전까지만 하더라도 지직거리던 노이즈가 깨끗이 제거되어 있었다.

서현은 비로소 변화의 원인을 알아차렸다. 한세건은 점차 색깔이 보이기 시작하고, 자신은 시야와 소리가 말끔하게 갰다. 모두가 이곳에서 둘이 만난 뒤에 벌어진 일이었다. 정확한 이유는 아직 베일에 가려져 있으나 분명한 사실만은, 그들이 만남을 거듭할수록 이 세계가 보다 현실적인 풍경으로 바뀐다는 점이다.

한세건에게는 자신이 누구인지 숨긴 채로 이 사실을 얘기했다. 그는 얼마간 곰곰이 생각해보더니 고개를 끄덕여 동의했다.

“여기서 당신을 몇 번 더 만나면 색이 완전히 돌아오겠군.”

세건은 정말로 이쪽의 정체를 눈치도 못 챘다. 하다못해 낌새라도 알아차렸더라면 절대로 저런 얘기를 하지 못할 위인이었다.

“…나를 계속 만날 셈이야?”

“글쎄. 내 의지로 이곳에 오는 건 아니지만, 다시 오게 된다면 적어도 이런 일이 왜 벌어지는지 알아낼 참이다. 솔직히 그쪽이 가장 의심스럽지만.”

“억울하네. 나도 왜 이런 곳에 자꾸 오는지 궁금해 죽겠다고.”

지금까지 수없이 보고 말했던 주제에 까맣게 모르는 것이 섭섭하지만 좋게 생각하기로 했다. 오랫동안 대화는 고사하고 얼굴도 못 보았던 한세건을 이렇게나마 만나게 되어서 기뻤다.

“난 한세건이다. 넌?”

대수롭지 않게 통성명이라니. 서현은 입술을 달싹여 겨우 한마디만 내뱉고서 기어코 울상 같은 미소를 지었다. 어차피 한세건에겐 보이지도 않으리라.

“난 이름이 없는 자다.”



Day 4.

두 번째 만남에도 한세건은 여전히 알아차리지 못했다. 구태여 다른 사람인 척하려는 의도도 없었는데 아예 가능성을 생각조차 안 하는 듯했다. 자신이 그토록 세건에게 존재감이 없었다니, 속이 쓰리다.

“밝고, 선명해. 너는?”

한세건이 보는 세계는 이제 회색에서 아주 벗어난 모양이었다. 그의 질문을 받고 서현은 고개를 틀어 곱상하고 얼굴을 응시했다. 오늘 무엇이 바뀔지 무척 궁금했고 아마도 세건이 겪는 변화처럼 세상이 다채로운 색을 띠기 시작하리라 예상했다. 그러나 이 세계는 고집스럽게 회색만 보여주었다. 그러나 한세건은 오히려 지난번보다 훨씬 실제에 가까웠고, 마치 그에게만 스포트라이트가 쏟아지듯 밝게 빛나고 있었다.

세건은 왜 앞에 있는 자만이 검은색인지 무척 의아한 모양인데, 궁금하기는 서현도 마찬가지였다. 이 가상 세계 바깥의 존재라는 조건은 동일하다. 그런데 처음에 보는 풍경이 다르고, 일어나는 변화가 다르고, 서로가 바라보는 모습은 극명하게 대조되었다. 우연의 일치가 아니라면 무언가 의미가 있으리라. 서현은 잡힐 듯 말듯이 떠돌아다니는 답을 잡기 위해서 골몰했다.

침묵을 고수하며 걷는 사이, 그들은 어느 주거 구역에 들어섰다. 길이며 주변 상가 등이 익숙했기에 서현은 곧 어디인지 깨달았다. 예전에 루스킨, 빼또쥬와 살던 집 근처였다. 지금까지는 한 번도 가본 적이 없는 장소만 나왔는데 별안간 기억 속에 실재하는 곳이라니. 이 또한 한세건과 만남으로써 생긴 변화인가?

사실, 세건의 반응은 별로 기대하지 않았는데 뜻밖에도 그 역시 금방 눈치챘다. 한세건은 대번에 꺼림칙한 티를 냈다. 생각만으로도 신물이 날 만큼 혐오스러운 건가? 그래서 한사코 피해 다니나? 정작 자기랑 얘기하는 사람이 그토록 만나기 싫은 대상인지 알지도 못하는 주제에.

인상을 찌푸린 세건이 다른 방향으로 몸을 틀었다.

“만나고 싶지 않아. 다른 길로 가지.”

“왜 만나기 싫은데?”

“남의 일에 관심이 많군. 보기 싫은데 이유가 있나? 그리고 있더라도 왜 너한테 말해줘야 하는데?”

당사자를 코앞에 두고 타인 취급하는 한세건의 태도를 지켜보노라니 부아가 치밀었다. 서현은 이를 악물었다. 외견이 다르다고 알아보지 못하는 것은 백보 양보해 그럴 수 있다고 치지만, 정작 세건은 현실에서도 피하는 까닭을 명확하게 일러준 적이 없다. 그가 한 번이라도 제대로 마주한 적이 있기는 한가? 서현은 언제나 그를 보는 반면, 한세건의 눈에는 자신의 모습이 비치지 않았다.

세건의 팔을 붙들고 그의 눈동자를 쏘아보았다. 겨우 이 정도 거리였다. 내쉬는 숨결까지 낱낱이 느껴질 만큼 가까운데 보이지 않는다는 얘기는 끔찍한 기만이며 존재를 잔인하게 부정하는 짓이다.

“내게 당신이 어떻게 보였는지 알아? 그 공원에서, 모든 것이 회색 신기루처럼 어른어른한데 오직 당신만은 선연하고 모든 색을 갖고 있었지. 이 세상에서 유일하게 살아 숨 쉬는 존재처럼. 그리고 지금도, 당신만이 찬연해서 미쳐버릴 것 같아. 하지만 네 눈에 나는 일부러 칠한 것처럼 새카만 존재일 뿐이었어. 이제는 그 이유를 알 것 같다, 한세건.”

한사코 눈을 가리겠다면 강제로라도 보게 만들 수밖에.

“네가 나를 보는 것을 거부하기 때문이야.”

서현은 정신을 확장했다. 순식간에 얼기설기 엮여 있던 가상 세계의 정보가 머릿속으로 쏟아져 들어왔다. 실제 세상과 비교하면 턱없이 자그마한 곳이고 존재하는 정보들이란 허공에 부유한 파편에 불과했다. 비록 재조립하는 행위는 카타볼릭 상태가 아니더라도 어려우나 아예 파괴하는 일은 어렵지 않았다. 아슬아슬하게 엉겨 붙었던 정보들 흩어지자 회색 세계가 빠르게 무너지고 솟아오르고 갈라지고 찢어지기 시작했다. 불타고 남은 재가루가 휘날리듯 했다.

“이게 무슨…!”

당황해서 주위를 돌아보는 세건을 흔들어 눈을 마주치게 했다.

“나를 봐, 한세건. 내 모습을 봐. 내가 누구인지 당신 두 눈으로 똑똑히 봐.”

한세건의 눈빛에 혼란이 섞이기 시작했다. 그는 멀거니 시선을 보내다가 이내 눈살을 찌푸리며 고개를 흔들었다. 그리고 필사적으로 손을 뿌리치고 뒷걸음질 치더니 양손으로 얼굴을 쓸어내렸다.

“몰라. 네가 누구인지 알려고 해도 그저 새카맣게 보일 뿐이야.”

“아니, 너는 이미 내가 누군지 알고 있어. 알고 있어서 보지 않으려고 하는 것뿐이야. 하지만, 한세건. 결국에 당신이 날 보게 되리라 믿고 있어. 그렇게 될 거라는 사실을 알아. 얼마나 길고 복잡한 곁길로 빠져서 멀어지더라도 내게 도달하게 될 거야. 설령 바로 앞에 서 있는 내 모습이 보이지 않더라도!”

그러자 한세건의 낯빛이 창백해졌다. 그는 입술을 벌리고 숨을 헐떡이기 시작했다. 크게 뜬 눈에 경악의 빛이 파도친다. 그들을 사로잡았던 세계는 이미 산산조각으로 부서져 남은 거라고 현실에 존재하는 둘뿐이었다. 한세건이 뺨을 일그러뜨렸다.

“너는…!”



Final Part. 한세건, 서현


점차 색을 갖기 시작했던 세계가 눈 깜짝할 틈에 사라졌다. 세건은 암흑뿐인 공간에 서서 한참 동안 마주한 이와 시선을 얽었다. 검은 사람, 이름 없는 자, 누구이기에 이곳에서 조우해 회색 세상을 점점 다채롭게 물들이도록 하는지 의아했던 존재. 그를 감추었던 까만색 아래에는 종종 눈에 아른거렸던, 그의 상징과도 같은 색깔이 선명하게 칠해져 있었다.

“서현, 너였군.”

그의 얼굴을 제대로 바라본 날이 언제였는지 가물가물할 정도로 오랜만이었다. 서현은 늘 그랬듯이 절대적인 신뢰를 가지고 똑같은 모습으로 서 있었다. 어떤 일이 있더라도 헤어지지 못한다는 것을 자연의 섭리처럼 여기는 서현의 무자비한 믿음은 매의 발톱처럼 날카로웠다. 그 예리함이 내면을 할퀴고 긁힌 자국을 만들었다. 그 각인은 변하지 않으리라는 증거이자 약속이지만 세건 자신에겐 길들여진다는 두려움이었다. 하지만 그 흔적을 그리워하리란 사실을 스스로 알고 있었다.

“잘도 속였군. 여긴 네 짓이었나?”

“말 그대로 까맣게 몰랐던 주제에. 내가 왜 힘들게 이런 짓을 하는데? 그렇게까지 해서 널 만나려고 할 줄 안다면 큰 오산이야.”

“하긴, 사람 못 먹고 비실비실해서 그럴 능력도 안 되겠지.”

예전에 자주 그랬듯이 독설을 주고받노라니 여태껏 서현을 멀리했던 날이 환영처럼 아스라해진다. 그만큼 외면했으니 제아무리 서현이라도 정을 떼었으려니 여겼으나 그 감정의 온도는 전혀 사위지 않은 모양이었다. 지긋지긋한 놈이라고 욕하면서도 세건은 못내 안도하고 있었다.

“당신이 왜 날 피하는지 아직도 모르겠고 궁금해서 미치겠는데, 그 성격에 이유랍시고 말해봐야 분명 기가 막혀서 화만 더 날 것 같으니까 묻지 않겠어. 요리조리 고개 돌리면서 피해도 헛짓이라는 점만 알아둬.”

쫓아오면 달아나기라도 하고, 억지로 잡아두면 몸부림이라도 칠 텐데 서현은 갈 테면 가보라는 듯이 오만했다. 세건은 눈을 내리깔았다. 무슨 현상이었는지 몰라도 이곳이 부서졌으니 서현과의 만남도 마지막이었다. 현실에서는 앞으로도 그를 피할 수 있었고, 그런다고 서현이 무작정 들이닥치진 않으리라. 마치 주도권을 쥔 것처럼 착각하게 되지만 늘 끌려다니는 쪽은 자신이었다.

“할 말은 끝났나?”

“솔직히 더 하고 싶은데 참도록 하지.”

“하, 건방진 새끼. 어디 다음에 두고 보자.”

“유치하게 되다 만 악당이나 하는 소리를 하고…뭐? 다음?”

서현이 눈 휘둥그레 뜨고 쳐다보았지만 고개를 돌렸다. 그의 말마따나 결국 돌아가게 된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언제일지 정하는 것만은 자신의 몫이었다. 그러니 세건은 서현에게 ‘다음’이 내일일지 한 달 후일지, 그도 아니면 일 년 후가 될지 말하지 않기로 했다.

“여긴 먼지 한 톨 안 남고 없어졌는데 왜 안 깨는 거야? 설마 네가 수작부리는 건 아니겠지.”

의심스러운 눈초리를 쏘아 보내자 서현이 머리를 긁적였다.

“얘기 좀 하려고 그랬지.”

“아, 그래? 얘기 끝났으니까 당장…”

말을 채 끝내기가 무섭게 눈앞에서 서현의 모습이 사라지고 세건은 자신의 침실에서 눈을 떴다. 여느 때처럼 살풍경하고 무미건조한 방이었으나 현실은 어디든지 생생한 색깔로 가득했다. 몸을 일으켜 지난 며칠 그랬듯이 거울 앞에 서자 회색도 검은색도 아닌 사람의 모습이 비춰졌다. 그 위에 이름 없는 자의 형상이 희미하게 겹쳐졌다가 사라진다.

그 보잘 것 없는 회색 세계에서, 겨우 색깔을 띠기 시작해 불투명한 세계에서 떠오른 거라곤 서현뿐이었다. 어쩌면 서현을 거기까지 끌어들여서 기어이 만날 수밖에 없도록 만든 사람은 자신이 아니었을까, 세건은 생각했다.

얼마간 자신의 모습을 들여다보다가 거울 표면에 난 기스를 손톱으로 훑고, 머리맡에 두었던 핸드폰을 들었다. 때마침 진동이 울리더니 익숙한 발신자 번호가 떴다. 다음에 언제가 될지는 말한 적 없다. 내일 혹은 한 달 후, 아니면 일 년. 만약 내키기만 한다면 오늘이 될 수도 있으리라. 세건은 전화를 받는 대신 다시 핸드폰을 침대에 던져놓고서 방을 나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