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란지보리] 처음

가요합작 참여


아노마라드를 뒤덮었던 겨울이 한 발씩 뒷걸음질하는 시기였으나 추위는 여전했다. 란지에는 어둠이 깔린 벨노어 성 복도를 소리 죽여 걷다가 무심코 차가운 손을 문질렀다. 항상 건조한 냉기에 노출된 탓에 피부가 터서 손등이 약간 까칠했다. 란지에는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 하루하루 남을 돌보는 일만 하는 시종의 손이 보드라우면 그게 더 이상했다. 오히려 다른 시종이나 하녀와 비교하면 형편이 좋았다. 자신을 부리는 도련님은 귀족치고 독특해서 손이 적게 가는 타입이었다. 보리스는 이따금 시종의 존재마저도 깜빡하고 간단한 일은 스스로 해치워버리기도 했다. 심지어 혼자 있는 것을 훨씬 편하게 여겨서 어느 때이든 동생에게 다녀오고 싶다고 부탁하면 흔쾌히 받아들였다. 그가 배려해준 덕분에 란지에는 매일 밤 란즈미가 잠들 무렵에 곁으로 가서 재워줄 수 있었다.

문샤인 탑에 속한 보리스의 방에 도착해 노크를 했다. 들어와도 좋다는 허락을 기다렸으나 목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란지에는 의아해하며 문고리를 돌려 방문을 열었다. 어차피 이 도련님은 시종에게 들켜선 안 될 무언가를 하고 있을 사람도, 멋대로 들어왔다고 성을 낼 사람도 아니었다.

란지에는 뜻밖의 광경을 목도하고 멈칫했다. 벨노어 성에서도 손꼽히도록 화려하게 꾸며진 거실, 그 분위기와는 도통 안 어울리는 이곳의 주인은 의자에 앉아 졸고 있었다. 자그마한 소년의 머리통이 삐딱하게 기울어졌다. 란지에는 실소를 흘리곤 조용하게 문을 닫았다.

보리스의 무릎에는 펼쳐진 책이 놓여 있고 가까이에서는 벽난로 장작불이 느리게 호흡하듯 불씨와 훈기를 내뿜었다. 사위도 고요하니, 딱 잠들기 좋은 환경이었다. 그가 검술 선생과 검을 두고 대결하러 가기까지 아직 시간이 남아서 깨우지 않기로 했다.

주인이 잠들어 달리 해야 할 일이 없는 까닭에 란지에는 조금 떨어져 선 채로 보리스를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이런 때의 란지에는 동갑내기 소년을 모시는 하인에서 벗어나 독립된 개인이 되었고 보리스 또한 도련님이 아닌 관찰 대상일 뿐이었다.

시종이라는 위치상 무방비하게 잠든 모습은 몇 차례나 보았는데도 이렇게 꾸벅꾸벅 조는 모습은 처음이라 제법 신기했다. 늘 어린애 같지 않게 어딘가 우울함이 감도는 얼굴이 지금은 조금 귀엽게도 느껴졌다. 란지에는 문득 가슴속에서 느리게 싹을 틔우는 낯선 감정을 발견하고 주춤했다. 요즘 보리스를 볼 때마다 이랬다.

언젠가 동생을 데리고 이곳을 무사히 빠져나가려면 백작의 약점이 필요했다. 아주 사소한 것이라도 때로는 중요한 정보가 되기 때문에 란지에는 늘 주위의 모든 사람을 은밀하게 살피고 언동에 신중을 기했다. 그래서 누군가를 관찰하는 행위는 생존을 위한 몸짓이었다. 보리스가 뜬금없이 백작의 양자라고 나타났을 때, 란지에는 직감적으로 무언가 비밀이 숨겨져 있음을 알아차렸다. 소년은 그 비밀을 캐내기 위해서 지켜보아야 할 사람에 불과했으므로 그가 자신을 시종으로 택했을 때는 차라리 잘 되었다 싶었다.

겨울이 저물어가는 지금은 조금 달라져 있었다. 물론 란지에는 여전히 보리스의 모든 걸 관찰했으나 언제부턴가 그 동기에 개인적인 관심이 포함되더니, 이제 백작의 일과 무관하게 그를 바라보는 경우가 잦아졌다.

타닥타닥. 장작에서 튀는 불씨와 함께 정념도 연이어 튀어오른다. 란지에는 대담하게 지척까지 다가가 그 앞에 무릎을 꿇고 얼굴을 물끄러미 올려다보았다. 그는 깊이 잠들었는지 깰 기미가 안 보였다. 눈, 코, 입을 자세히 뜯어본 후에 책에 얹어진 손으로 눈길을 내렸다. 아직 어린 나이인데도 그의 단단한 손가락은 이미 검을 쥐고 살아가는 자의 것이었다. 약간이지만 피부가 희게 튼 손등에 다다랐을 때, 자연히 시선이 고정되었다. 눈에 띄지 않은 탓에 여태까지 눈치 채지 못했다. 란지에는 무심코 손을 뻗었다가, 도로 거두었다.

곰곰이 생각해보니 당연히 신경을 썼어야 하는 일이다. 아무리 귀족 도련님이라지만 날이 춥든 덥든 하루도 빼먹지 않고 낮에는 훈련, 밤에는 월넛 선생과 대결을 했다. 매일 거친 모래와 찬바람을 그대로 맞으니 여지없이 피부가 상할 수밖에. 란지에는 문득 떠올라 제 손등을 보리스의 손 옆에 두고 번갈아 보았다. 외양은 척 보아도 느낌이 완전히 달랐다. 그러나 분명히 닮았다. 그 사실을 깨닫자 내면에서 어떤 파동이 일었다. 생소하게 울리는 반향. 란지에가 저도 모르게 어깨를 움찔하는 순간, 보리스의 고개가 옆으로 움직이면서 그의 눈꺼풀이 잠깐 떨렸다. 그와 동시에 란지에를 에워쌌던 기이한 떨림도 환영처럼 사라졌다.

재빨리 자세를 바르게 고치고 시간을 확인했다. 슬슬 열한 시가 다가오고 있었다. 오늘은 오후 내내 눈이 내렸으나 보리스의 훈련도 밤에 벌어지는 대결도 날씨에 구애받지 않았다.

“도련님. 준비하실 시간입니다.”

반쯤 깨어나 있던 보리스가 그 소리를 듣자마자 스르르 눈을 떴다. 보리스는 느릿느릿 눈을 깜박이며 책과 자신의 시종을 번갈아보았다. 오래 지나지 않아 졸음기를 떨쳐낸 그가 손바닥으로 마른세수를 했다.

“나도 모르게 잠들었나 보네.”

“이번 책은 재미가 없으십니까?”

비꼬려는 의도는 한 톨도 없었다. 다만 보리스가 벽난로에서 나오는 따뜻함 때문이 아니라 책이 지루해서 졸았던 거라면 다른 걸로 골라주려고 했을 뿐이다. 그런데 보리스는 다르게 받아들였는지 눈에 띄게 당황하면서 도리질했다.

“아냐, 그냥 여기 앉아 있으니까 나른해져서.”

“혹시 재미없으시거든 억지로 읽지 마시고 말씀하세요.”

“걱정 마. 네가 골라준 책은 다 재밌어. 아! 지금 몇 시지?”

“마침 나가실 시간입니다.”

보리스는 곧바로 엉덩이를 털고 일어났다. 검은 따로 챙길 필요가 없었다. 그는 월넛 선생에게 호된 꾸지람을 들은 이후로 절대 몸에서 검을 떼어놓지 않았다. 창밖을 잠시 내다보는 얼굴이 어느덧 긴장과 결의로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오늘이야말로 제 검을 되찾아 오리라 마음을 다지는 것이리라. 그는 천천히 숨을 들이마시고 이어서 긴 날숨을 내보낸다.

“다녀올게.”

란지에의 배웅을 뒤로하고 보리스는 홀로 밖으로 나갔다. 본래 시종인 자신은 보리스가 어디를 가든 따라다니지만 그가 월넛을 만나러 갈 때는 아니었다. 누가 오지 말라고 해서가 아니고 그저 스스로 끼어들 만한 자리가 아니라고 여겼기 때문이다.

약 한 시간 동안 자유를 얻은 셈이지만 매일 그랬던 것처럼 자신의 도련님이 돌아오기를 기다리기로 했다. 보리스가 읽다 만 책을 손에 들고 그가 졸았던 의자에 앉자 훈훈한 장작불 열기가 넘실넘실 밀려와 몸을 감쌌다. 새 장작을 넣지 않아서 기세가 줄어든 불꽃을 응시하노라니 자연히 그 속에 보리스의 얼굴이 그려졌다. 매번 혼자서 그를 기다리면 언젠가 눈물 자국이 남은 얼굴로 돌아왔던 소년이 눈앞에 아른거렸다.

붉게 물들었던 눈가, 땀과 눈물과 흙으로 엉망이 된 뺨, 시선을 피하던 멋쩍은 표정.

묵묵히 응어리를 삼키는 자존심 강한 소년이 흘린 눈물에는 어떤 감정이 담겨 있었을까. 그걸 상상하는 것만으로 시계 바늘은 빠르게 움직였다. 란지에는 이따금 그의 볼을 적신 물기를 닦아주는 상상을 하곤 했다. 한 번도 보지 못한 그 눈물이 소매를 적시면 영영 마르지 않을 것만 같다.

란지에는 어색하게 자신의 소맷부리를 만지작거렸다. 누군가를 생각하는 데만 전념해서 시간을 흘려보내는 자신의 모습이 낯설어 그만두려고 해도 잠깐뿐인 보리스의 빈자리가 자꾸만 상념의 가운데로 이끌었다. 자기 힘으로는 어찌할 도리가 없는 상황은 수없이 겪었으나 이건 정말로 특별했다. 보리스 하나로 머릿속이 꽉 차서 옴짝달싹 못하는 것이 싫기는커녕 설레기까지 했다.

소매 단추를 푸르고 마른 깃을 손끝으로 문지르며 눈을 감았다. 눈꺼풀에 번지는 빛이 생각을 더욱더 깊이 가라앉게 했다. 설핏 의식이 멀어지는 듯했다.


*


돌연 서늘한 기운이 훅 끼치는 바람에 정신을 차려 보니 불 꺼진 벽난로가 눈에 들어왔다. 잠깐 의자에 앉아 생각에 잠긴다는 게 그만 깜빡 잠든 모양이었다. 그러나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 채 확인하기도 전에 둥그렇게 뜬 눈으로 자신을 보는 보리스와 얼굴을 맞닥뜨렸다. 아까 어깨에 스쳤던 차가운 바람은 그가 들어올 때 열린 문 사이로 불어온 거였다.

“죄송합니다, 도련님.”

자기 방에서 잠깐 졸았다고 화낼 사람이 아님은 잘 알아도 재빨리 사과하며 일어났다. 그러다 무릎에 놓았던 책이 바닥으로 떨어지고 그걸 잡으려고 급히 움직이다가 의자 다리에 발이 걸린 찰나.

“아, 조심…!”

삽시간에 앞으로 튀어나온 보리스가 팔을 꽉 잡았다. 애초에 넘어질 정도로 균형을 잃은 게 아니라서 란지에는 도리어 강한 손힘에 끌려갔다. 란지에의 어깨와 보리스의 가슴팍이 가볍게 부딪쳤다. 그건 둘 사이에 최초로 일어난 접촉이었다.

보리스의 손은 차가웠으나 란지에는 그 손에 잡힌 부분이 뜨겁다고 느꼈다. 한참 바깥에 있다가 들어온 보리스에게서 메마른 겨울바람과 시린 달빛 냄새가 풍겼다. 엷고 시원한, 그러면서 어딘가 무겁고 쓸쓸한 체취가 온몸을 흠뻑 물들이고 마음을 사로잡는다.

란지에는 시종이라는 입장조차 잊고 새삼스러운 눈빛으로 보리스를 응시했다. 처음으로 그가 현실의 복잡한 사정에서 완전히 동떨어져 나타난 한 인간으로 느껴졌다. 지금 보리스는 벨노어 백작과의 관계나 비밀하곤 무관하게 존재 그 자체로 자신에게 유의미한 어떤 사람일 뿐이었다.

얼굴에 드러난 보리스의 감정은 잠깐 사이에 놀라움에서 당혹감으로, 다시 미미한 놀라움으로 변했다.

“란지에 네가 나보다 작았던가?”

그 소리를 듣고서야 란지에는 보리스의 시선이 자기보다 위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처음 이 성에 왔을 적만 해도 자신이 더 컸는데 어느새 보리스는 훌쩍 커져 있었다. 한창 자랄 때이고 꾸준하게 충분한 운동과 식사를 하니까 당연한 일인데도 란지에는 예상치 못한 사고를 당한 사람처럼 당황하고 말았다. 심장이 다 익은 열매처럼 뚝 떨어져 터지며 달콤한 과즙을 퍼뜨렸다. 그와 동시에 코끝으로 스미는 보리스의 체취가 미묘하게 변화했다.

시종으로서는 굉장히 무례한 태도로 손을 뿌리치며 물러났으나 가슴속에서 시작된 동요는 걷잡을 수 없이 퍼져나가고 있었다.

“죄송합니다. 씻으실 물을 가져오겠습니다.”

“피곤해 보이는데 그냥 쉬어.”

“아뇨. 휴식은 제 할 일을 끝내고 난 후에도 충분합니다.”

단호하게 대꾸하자 보리스는 뭐라고 말할 듯이 입을 벌렸다가 도로 다물고 고개를 끄덕였다. 란지에는 떨어진 책을 주워 테이블에 두고 밖으로 나왔다. 잰걸음으로 고요한 복도를 걷다가 얼마 못 가 멈춰선 후에 참았던 숨을 길게 토해냈다. 차디찬 벽에 등을 기대고 풀린 소매 단추를 단단히 잠그고 나서야 비로소 평정심을 되찾을 수 있었다.

데운 물을 가지고 다시 방으로 돌아간 란지에는 여느 때처럼 무덤덤하게 시중을 들었다. 세수를 마친 보리스 앞에 동그란 통을 내놓고 뚜껑을 열었다. 달콤한 꿀 냄새가 방안에 확 퍼졌다. 보리스가 물기를 닦고 나서 불투명한 누런색 크림을 들여다보고 묻는 눈빛을 보냈다. 아까 손등이 희게 튼 걸 보고 가져왔다는 설명에 보리스가 난색을 표했다. 시종을 부리기도 어색해하던 그가 손 관리 따위를 반길 것 같지는 않았다. 보리스는 제 손등을 문질러보고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렇게 신경 쓸 정도는 아니야.”

“몰랐으면 모를까 알고도 두면 제 의무를 소홀히 한 게 됩니다. 백작님께 추궁을 받을 수도 있고요.”

이런 식으로 말하면 거절하지 못할 걸 알고 있었다. 자그마한 일로 고집을 부려 자신의 시종이 질책을 받을 만한 모를 꼬투리를 만들 사람이 아니었다. 예상대로 보리스는 마지못해 한다는 티를 내면서도 결국 받아들였다.

“바르면 되는 거지? 내가 할게.”

“아뇨, 제가 하겠습니다.”

“이 정도는 혼자 할 수 있어.”

“제가 하는 편이 더 빠릅니다.”

란지에는 강경한 태도로 손을 잡아다가 미끈한 크림을 듬뿍 퍼서 손등에 발랐다. 사실 이쯤은 보리스가 하게 두어도 괜찮은데 왜 직접 하겠다고 억지를 부렸는지 스스로 이해가 안 되었다. 만약 아노마라드의 평범한 귀족들 같았으면 건방지게 주인을 이기려 든다고 화를 냈을 일이고, 보리스가 그들과 다르다는 사실을 아는 까닭에 할 수 있는 행동이었다. 한마디로 말해 방금 자신은 시종답지 않았다. 그러나 부드럽게 손을 문지르기 시작하자 고민은 온데간데없이 날아갔다.

손끝이 크림 묻은 살갗 위를 미끄러지면서 낯선 피부의 감촉은 물론이고 곧게 뻗은 손등의 뼈대와 손가락 마디마디의 단단함, 손톱 모양까지 낱낱이 느꼈다. 남의 손을 이토록 집중해서 바라보고 만진 적은 처음인 탓인지 란지에도 마냥 메마른 감정으로 대하기가 어려웠다. 어쩌면 아까 마음이 흔들렸던 여파가 아직도 남아 영향을 끼치는지도 몰랐다. 어쨌거나 란지에는 동갑내기 소년의 손을 매만지는 동안 그가 자신과 얼마나 다르고 또 얼마나 비슷한지 실감했다.

문득 보리스의 표정이 궁금해져서 흘끔 눈길을 주었다. 뜻밖에도 보리스는 담담해 보였다. 그저 침묵을 입에 담은 채로 제 손을, 혹은 제 손을 문지르는 손끝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노라니 도리어 만감이 교차했다. 띄엄띄엄 솟아나던 감정이 금세 뒤엉킨 실타래가 되더니 이리저리 굴러다니기 시작했다.

“처음에 월넛 선생님은 나무 막대를 들고 날 상대하셨어. 나는 검을 들었는데도 흠집조차 내지 못했지. 방금 네 손을 보면서 왠지 그 막대 같다는 생각을 했어. 검과 부딪쳐도 부러지지 않을 만큼 단단해 보인다고…….”

예상치 못한 칭찬이라 그만 말문이 막혔다. 보리스의 말을 듣고 자신의 손을 보니 괜스레 생소하게 다가왔다. 그저 마른 손이라고만 생각했건만 누군가에는 다르게 보일 수도 있다니.

“…감사합니다.”

“손 내밀어 봐.”

마른 수건으로 적당히 닦아주고 물러나려는데 보리스가 손목을 낚아챘다.

“도련님?”

“보니까 네 손등도 하얗던데.”

그는 아직 뚜껑을 닫지 않은 통에서 크림을 떠서 제 시종의 손등에 묻혔다. 깜짝 놀라서 손을 빼려고 해도 보리스의 힘을 당하지는 못했다.

“저는 이런 걸 써도 되는 위치가 아닙니다.”

“내가 말하지 않으면 아무도 모르잖아. 바르기 싫은 걸 네 고집에 따라 줬으니까 이 정도는 마음대로 하게 해줘.”

란지에가 했던 것처럼 손 구석구석에 바르고 마른 수건으로 닦아낸 보리스가 엷게 웃었다.

“그리고 신경 써줘서 고마워.”

의무이기 때문에 그랬을 뿐이라고 말하려 했으나 다문 입술이 떨어지지 않았다. 뒤늦게 자신이 시종이 아니라 보리스에게 호감을 지닌 한 사람으로서 그를 걱정했음을 자각한 까닭이다. 란지에는 그 사실을 인정했으나 차마 드러내지는 못했다.

눈을 내리깔고 보리스와 마찬가지로 매끈하고 촉촉해진 손등의 살결을 어루만져 보았다. 메마른 피부에 스며든 소년의 향기가 뜨거운 피에 섞이는 듯했다. 그리고 온몸을 돌아 마침내 심장에 다다르면 또 어떤 감정을 꽃피우겠지. 한 걸음 물러난 란지에는 옷매무시를 가다듬는 것처럼 가슴께를 쓸어내렸다. 어떤 예감 따위가 쿵쿵 뛰어대는 심장을 약속처럼 옭아맸다.

아마 보리스와 헤어져 오랜 세월이 흐르더라도 그 손의 감촉만은 절대로 잊지 못하리라. 그리고 재회한 때에는 그에게 이날 느낀 감정의 파편이나마 전할 수 있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