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레이오는 눈을 깜박였다. 유월에 내리는 잔비는 성기고 가늘었으나 속눈썹에 고이는 수적은 아틀라스가 받은 형벌의 무게에 버금갔다. 빗방울은 마른 숨소리가 씨근씨근 새는 입술을 지나쳐 턱 아래로 흘러내린다. 피부를 미세하게 파고든 검의 얇은 면에서 빗방울 튀는 소리가 부자연스럽도록 크게 들린다. 토독, 토독.
클레이오는 다시 한번 눈을 깜박였다. 작열하는 금안은 희부연 물기가 촘촘이 어린 세계를 모조리 기화시킬 것처럼 뜨거웠다. 멜키오르는 모르겠지만, 비슷한 순간이 이전에도 한 번 쓰였다. 상황은 그때보다 훨씬 나빴다. 편집자 권한은 주어진 사용 횟수를 전부 소모했다. 신의 펜촉은 선행된 살해를 삭제했으나 종장에 이르러서는 앞으로 서술될 행위에 고작 마침표만 찍을 수 있게 되었으니, 멜키오르가 이 사실을 알면 틀림없이 기뻐할 것이다.
사실 클레이오는 이마저도 신이 완성하려는 서사시에 포함된 문장이 아닐까 의심했다. 칼리오페가 주인공이 바래지 않는 순수와 밤에 물들지 않는 빛을 품고 나아가는 인물이길 원했어도, 여덟번을 불태워 가면서 써낸 이 장대한 서사시의 최후에 쓰임을 다한 신의 대리인이 퇴장하는 전개는 꽤 고전적인 미학에 걸맞지 않나.
“그 애를 놓으세요.”
무심코 고개를 움칫 외트는 바람에 살갗이 더 깊게 베였다. 입만 벙긋해도 머리를 잘라낼 검이었지만, 클레이오가 아서를 보는 것은 저지하지 않았다. 멜키오르는 동생이 죽기 직전에 처한 마법사의 눈을 본다면 더욱 고통스러워하리라 기대했다.
아서는 클레이오의 가냘픈 육신이 멜키오르 손아귀에 매달린 모습을 보았다. 진창에 처박혀 꼼짝하지 못하는 무릎을 보았다. 공작의 완드를 떨어질 듯 말 듯이 걸고 있는 손끝을 보았다. 맥없이 뒤로 꺾인 새하얀 목과 빗물에 번지며 흐르는 피를 보았다. 에테르 고갈로 피를 머금어 붉은 입술을 보았다. 풀빛 돋아난 사월 대지가 집약된 눈을, 동공에 양각된 체념과 결의를 보았다. 그리고 클레이오도 아서를 보았다. 더는 괜찮은 가면을 쓸 수 없어 이지러진 낯을 보았다. 폭풍우 치는 청록의 눈과 잘게 떨리는 턱을 보았다. 강고한 영혼에 시시각각 생기는 균열을 보았으며 그 틈새로 스며들고 얼어붙는 고통이 신의 말씀처럼 선명한 것을 보았다.
“지금 그 애를 죽여서 뭐가 달라집니까.”
“너는 소중한 것을 잃을 것이다.”
목소리가 부드럽게 선언했다.
“파열된 마음을 겨우 이어붙인 척하며 고통을 숨기고, 지키지 못한 후회를 매일 곱씹으며 벅찬 생을 이어나갈 것이다. 나는 네게 통치와 친애 중 택일하라 말했고 너는 둘 다 가지려 했지만, 보아라, 아서.”
멜키오르는 악의 없이 조롱하며 청아하게 미소했다. 이건 아서에게 항복을 권유하는 조야한 인질극이 아니다. 거듭되는 생을 통해 멜키오르는 제 막냇동생이 어떤 인물인지 본인보다 더욱 잘 알았다. 아서는 신의를 지키는 자이고, 의무를 이행하는 자이며, 책임을 다하는 자이므로 결코 제가 짊어진 언약을 저울에 얹어서 마법사의 목숨값을 치르지 않으리라. 클레이오 또한 아서를 알았고, 그리하여 멜키오르 말대로 될 것을 알았다.
“아서—”
진언을 읊는 줄 알았는지, 일순 멜키오르의 검기가 꽤 깊이 파고들었다. 비가 온몸을 푹 적셔서 목에서 배어 나오는 피도 느끼지 못하던 클레이오는 그제야 빗물이 아닌 액체가 가슴으로 흐르는 것을 실감했다. 「이격」 덕분에 통증은 거의 느껴지지 않았다. 멜키오르가 백로 맺힌 속눈썹을 늘어뜨려 형형한 금빛 눈에 한 점 그림자를 드리우고 의아하게 내려다보았다. 그는 신의 사자가 마지막으로 토하려는 육성이 인간의 말일지 신의 말씀일지 궁금해했다. 고마운 호기심이었다. 설령 다음 순간에라도 마음이 내키면 곧바로 목을 날릴 위인일지라도.
“아서.”
“레이! 가만히 있어, 내가, 내가…….”
파리한 목소리로 희망을 주워섬기려던 아서는 끝내 입술을 앙다물었다. 울창한 암흑에서 한 발짝도 움직이지 못하는 지금은 어떤 약속도 감히 입에 담을 수 없었다. 그러나 아서는 견실하게 올바른 길을 걸어왔다. 거기에 증명이 필요하다면 피조물을 향한 창조주의 만족을 현현해 보이는 것이 마법사의 몫일 터였다.
“네가 약한 탓이 아니야.”
베그의 검을 으스러뜨릴 듯 움켜쥔 주먹이 움찔하더니 아서의 청록빛 눈에 애원이 물결쳤다. 뻣뻣하게 경직된 어깨와 볼품없이 젖어 가라앉은 금발을 응시하며 클레이오는 입술에 떨어지는 빗물을 핥았다. 멜키오르에게 붙들리기 전부터 탈진 상태까지 내몰린 육체로는 얄팍한 들숨을 육성으로 전환하는 과정조차 힘에 부친다.
“네가 더 강해지지 못해서가 아니야.”
처음에는 신의 억지력에 떠밀려서 아서를 숭고한 왕으로 세우는 책무에 복무했으나 어느덧 의무는 기원으로 갈음됐다. 따라서 제게 주어진 천명을 다하려는 연유는 예언자여서도, 신의 대리자여서도 아니다. 아서가 언제나 가장 어두운 새벽에 첫발 내딛는 서광이길 바라는 까닭이다. 세계의 근간인 저 빛을 전적으로 연모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클레이오는 아서가 있고 친구들이 있는 세계에서 살아남을 것이다. 풍미가 넘치는 음식을 먹으며 찬찬히 살을 찌우고, 말랑말랑한 고양이 뱃살을 문지르다 낮잠을 청하고, 왕이 된 아서에게 원할 때마다 원하는 만큼 리오그네스 와인을 뜯어내고, 종종 프란이 하는 일을 도와주고, 애들이 놀러 오면 피크닉을 가고, 제베디의 연구에도 손을 보태다가 왕실 마법감 자리를 얻어 편하게 놀고먹을 것이다.
“그게 그대의 유언인가?”
멜키오르의 질문은 클레이오에게 향하는 동시에 세계의 신을 겨냥했다. 클레이오는 눈앞에 떠오른 문자열을 읽으며 쉰 소리가 나는 목으로 답했다.
“유언은 아닙니다.”
—사용자의 서사개입도가 상승합니다.
누적 비율: 100%
귀속 아이템: 클리오의 약속
—‘약속’의 마지막 기능이 개방됩니다. 신의 ‘약속’은 반드시 이행됩니다.
왼손에 낀 반지가 용광로처럼 달아오르고 열이 전신을 불사르듯 휘감았다. 이변을 알아차린 멜키오르가 목을 베는 찰나, ‘약속’은 신이 기름 부은 황금빛 광채로 하늘까지 뻗어 나가 먹구름을 뚫고 대지에 여명을 불러들였다. 찬연한 빛살과 적요 속에서 클레이오는 눈을 깜빡였다. 빗방울이 느리게 역행하고 있었다. 야윈 목을 매끈하게 가르는 상처 일부가 봉합되면서 멜키오르의 검이 뒤로 조금씩 밀려났다.
편집자 권한을 발동한 때와 비슷해도 시간이 완전히 멈추지는 않았다. 팔림프세스트도 안 보이고, 무엇보다 주인공인 아서 역시 되감기는 시간의 예외가 아니었다. ‘약속’이 발하는 열기를 느끼며 클레이오는 무엇을 해야 하는지 직감했다. 그을린 최종고 위를 위태롭게 흐르는 서사가 한 뼘 여백에 생을 연명할 몇 줄의 붙임을 허락한다.
손끝을 까딱이자 요요한 깃을 땅에 늘어뜨리고 있던 공작의 완드가 소유자의 손안으로 마땅히 밀착했다. 레지나가 그랬던 것처럼 신체 일부를 희생해 물건을 창조할 수는 없었다. 마도구의 도움을 받아도 인간에게 가능한 일이라곤 피와 살을 대가로 용해된 약간의 에테르를 얻는 것뿐이다.
핏물이 올라오는 성대를 통과한 목소리가 더없이 세심하게 진언을 잣고, 맑은 찬가는 세계에 명향한다.
“[만일 내가 그곳에 앉아서
듣고 또 보는 오감을 지닌
무감각한 물질일 수 있다면
죽음과도 흥정할 수 있으리.]”
작게 펼쳐진 서클 안에서 평소와 비교하면 바람에도 스러질 듯 피어오르는 에테르의 빛. 그러나 극도로 정교해 수만 번을 되풀이해 겹쳐도 최초와 최후가 적확하게 일치할 마법식. 한계까지 실을 감아올린 시간이 본래 흐름을 되찾자 「이격」 을 분쇄하는 통증이 몸속에서 회오리쳤다.
의문 어린 눈동자가 검과 마법사 사이를 가로막은 것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나뭇가지 못잖게 가느다란 마법사의 목은 칼날 앞에서 한없이 연약했다. 근소한 검기로도 깨끗이 잘릴 것이 당연했으므로 멜키오르는 구태여 힘을 들이지 않았다. 그런 까닭에 한 방울 에테르로 발동한 [방어]로도 미끄러지는 날붙이를 막기에는 족했다. 일 초도 안 되는 사이에 어떻게? 멜키오르가 눈꼬리를 접으며 희미하게 미소했다. 유수히 반복된 삶이 편집과 왜곡으로 짓이겨진 에라토는 처절한 공허를 두르고도 아름답다. 그가 제대로 목을 자르려 들면 막지 못했을 텐데, 멜키오르는 실존에 진력이 난 눈빛으로 마법사를 주시했다.
“마지막까지 신은 내게 하찮은 즐거움조차 용납하지 않는군. 안 그런가?”
클레이오는 피를 왈칵 토했다.
“레이!”
아서가 기회를 놓치지 않고 달려들었다. 멜키오르의 손아귀에서 풀려난 몸은 그대로 중력에 순응했다. 클레이오는 어렴풋한 금빛 잉크가 너울거리며 번지는 하늘을 마주했다. 마지막 세계가 영속하기 위해 몸부림치고 있다. 신의 권능을 흉내 낸 육신은 과부하를 못 견디고 덜덜 떨렸으나 감각이 마비된 탓에 클레이오는 오히려 평온을 느꼈다. 빗소리가 서서히 멀어지고, 하늘도 가장자리부터 뭉개지기 시작한다.
얼마 후에 흐린 시야로 낯익은 이목구비가 나타났다. 바삐 달싹이는 입술로 보건대 무슨 말을 하는 것 같은데 들리지 않았다. 이런 상황이니 정신 차리라든가 조금만 버티라든가 하는 소리겠지.
아서. 난 죽지 않을 거야. 아마도 아주 오래 누워 있겠지. 내가 이 고생을 하고서 정작 네 대관식은 못 본다고 생각하니 화가 나는데, 몸이 이런 걸 별수 있겠냐.
도저히 목소리가 나오지 않아 하고 싶은 말은 입속에 고이기만 했다. 아서의 얼굴이 물에 빠진 수채화로 보일 즈음, 클레이오는 침잠하는 의식에 저항하기를 그만두었다. 빗방울이 연신 눈꺼풀을 두드려서 눈 뜨고 있기도 지난하다.
한숨 자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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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레이오는 긴 잠을 잤다. 간혹 꿈도 꾸었고, 현실인지 꿈의 연장인지 확신할 수 없지만 아세르 저택의 방에서 사람들을 볼 때도 있었다. 아서와 친구들은 예전처럼 푹 자고 나면 깨어날 거라며 서로에게 위안을 건네고, 베헤못은 웨옹거리며 언제까지 누워 지낼 셈이냐며 타박했다. 한참 과묵하게 얼굴만 들여다보고 가는 프란, 마치 클레이오가 다 듣기라도 하는 양 진지하게 사업 이야기를 펼치고 가는 디오네. 거의 무의미함을 알면서도 수시로 들러 마법을 걸어 주는 제베디. 아서는 야음을 틈타 테라스로 들어오는 습관대로 꼭 남몰래 찾아오곤 했다. 갈수록 그의 눈가에는 외로움이 늘었다.
대관식을 치렀는지 어느 시기부터 아서, 이시엘은 방문하는 빈도가 뜸해졌다. 뒤이어 리티도 보기 어려워졌다. 작위를 이어받은 것이겠지. 모두가 학생이어서 틈틈이 티타임을 가질 수 있던 시절은 예전에 끝났다. 그래도 첼은 자주 와서 다들 어떻게 지내는지, 새로 즉위한 왕의 평판은 어떤지 등등 클레이오가 틀림없이 궁금해할 소식을 길게 얘기하곤 했다.
한 번은 꿈에서 어머니를 보았다. 어머니는 어린 아들의 손을 잡고 해변을 거닐었다. 바다는 내내 잔잔했고, 침묵도 그러했다. 꿈에서라도 만나면 건네고자 생각했던 숱한 물음은, 뭍으로 치닫고 주저하며 뒷걸음질하는 파도에 휩쓸려, 모래 위에서 뽀얗게 만발하는 메밀꽃으로 화했다. 청록색 바다를 응시하다가 종종 가슴이 저려 걸음을 떼지 못하노라면 어머니도 잠자코 멈추고 맞잡은 손에 지그시 힘주었다. 저 대해가 아들 보기에 퍽 좋음을 아는 듯이.
드물게 몇 분이나마 의식을 찾으면 비몽사몽으로 대화를 나누기도 한 것 같다.
‘프란, 학교 연구실에 있는 재료는 마음대로 써. 금고에 돈도 넉넉히 넣어 놨으니까 필요하면 꺼내고.’
‘됐다. 네가 그러지 않아도 마석이든 연구 자금이든 충당할 데가 있어.’
‘진짜 뭐 하나 선뜻 받아주질 않네.’
‘아서에 관해서는 안 묻는 거냐?’
‘간간이 첼이 와서 말해줘. 신문도 읽어 주고. 게다가 국왕 근황을 너한테 묻기도 그렇잖아. 네겐 미안하게 생각해, 프란.’
아서는 좋은 왕이다. 녀석의 됨됨이는 그간 아서를 지켜봤던 프란도 인정할 것이다. 하지만 프란은 아서가 선량한 왕이기 때문에 더더욱 마음이 복잡할 터였다. 애당초 왕이란 선하든 악하든 혹은 유능하든 무능하든 존재하는 자체로 국민의 자유를 박탈하니까. 왕정제를 폐지하기 위해서라면 왕은 차라리 악하고 무능한 편이 낫다. 애석하게도 세계의 존립이 아서에게 달린 이상, 달리 선택할 여지가 없었다. 신이 밝히는 등불을 따라 왕위로 향하는 길만이 주어졌다는 점에서 아서 역시 같았지만, 프란에게 이해를 구하지 않았다. 불가피함을 받아들이라는 강요는 폭력적이다. 그는 그의 뜻대로 살아가면 된다. 만감이 머무는 표정으로 물끄러미 보던 프란은 퉁명스레 내뱉고는 떠났다.
‘빨리 일어나기나 해라, 아세르.’
그렇게 몇 분에 불과한 대화 끝에 클레이오 아세르는 재차 깊이 잠든다. 감각할 수 없는 시간의 흐름에 떠내려가면서 깨달았다. 레지나 머리카락으로 말미암아 행한 기적은 진정으로 신의 권능이었다. 에테르 한 방울을 얻으려고 신체를 소모한 인간은 지독히 느린 회복을 필연적으로 견뎌야 했다. ‘약속’과 공작의 완드가 아니면 숨이나마 붙어서 살아남지 못했으리라.
꿈, 무의식, 감각은 내내 깜깜한 우주에서 부유하는 반딧불이처럼 명멸했다. 그토록 오랜 잠인데 웬일로 꿈속에 한 번도 등장하지 않는구나 생각했던 민산은 클레이오가 짐작하기에 잠들고 상당히 긴 시간이 지났을 무렵에야 레지나 이스토리아의 모습으로 찾아왔다. 대주교는 침대 가에 앉아 있었다. 은은하게 빛나는 머리카락은 어깨를 간신히 넘기는 길이였다.
‘그 머리는…어떻게 된 거야?’
레지나는 그냥 빙긋이 웃었다. 얼버무리는 기색도 없이 시원스럽고 한편으론 숭엄한 미소는 대주교보다 민산이 자주 짓던 표정과 훨씬 밀접했다.
‘클레이오. 너무 늦게 보러 와서 미안하구나.’
‘사과할 일은 아니야.’
‘아니야. 너를 이런 모습으로 계속 놔두면 안 되었어. 내 본의가 아니었지만, 너는 기약 없는 날을 기다리느라 힘들었겠지.’
몸이 아팠던 것은 아니고, 누워 지내는 시간이 길어져 고통스러워하기엔 내내 무의식 저변을 헤맸다. 하지만 괜찮다고 둘러대지는 못했다. 꿈을 꾸면서도 클레이오는 고독에 괴로워했다. 아울러 두려웠다. 그리움이 낙엽으로 떨어져 마침내 마음도 앙상해질까 봐. 보통 사람과 비교해 한결 서늘한 체온이 왼손을 덮었다. 문득 공작의 완드를 얻고 끙끙 않는 때 도와주러 왔던 레지나가 떠올랐다. 대주교는 그날처럼 신성력을 쓰지 않았다. 손등을 천천히 어루만질 따름이다. 민산에게는 감히 바랄 수 없었던 촉감이었다. 클레이오는 동요했으나 결코 연정에서 비롯된 떨림은 아니었다. 레지나의 손길은 한 편의 서정시였다. 바흐의 칸타타였다. 차차 멀어져 가는 애가였다.
‘고된 책임을 완수해줘서 고마워. 내 자매를 대신해 네게 신의 지극한 감사를 전한다.’
‘나야말로…고마워, 레지나. 어머니와 한 약속을 지켜준 거.’
뒤늦게 대주교의 머리카락이 부쩍 짧아진 원인이 ‘약속’ 때문일지도 모른다는 가능성에 생각이 미쳐서 꺼낸 말이었다. 레지나가 고개를 가볍게 가로저었다.
‘신의 약속은 우주의 섭리처럼 어긋남 없이 지켜져야 온당한 것이니, 내게 감사하지 않아도 돼.’
‘신의 관점에선 그게 당연하더라도, 나는 사람이니까.’
세계의 존망이 걸린 원고 편집자 노릇에 주인공의 조력자 역할까지 맡아서 분투하느라 몸이 남아나지 않았지만, 클레이오는 제가 짊어진 어려움에 순응했다. 어째서 스러지는 역사의 세계에 저를 내버려 두지 않았냐고 신을 탓할 수 없었다.
이윽고 레지나는 손을 놓고 일어나서 어깨 앞으로 미끄러진 머리칼을 넘겼다.
‘너는 곧 일어나게 될 테니 걱정하지 않아도 돼.’
‘뭔가 한 거야?’
신비로운 눈동자로 어딘가를 돌아본 대주교가 곧 묘한 어조로 속삭였다.
‘밖은 벌써 칠월이란다, 클레이오.’
엉뚱한 대답에 의아할 겨를도 없이 생각했다. 아, 여름이구나. 잇따라 귓전에서 어렴풋이 서성거리는 어떤 소리를 알아차린 직후, 의식은 꿈에서 현실로 가뿐하게 도약했다. 클레이오는 눈을 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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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세르 저택, 고즈넉한 어둠에 감싸인 방은 침윤하는 빗소리에 귀 기울이고 있다. 잠이 들 때도 비가 왔는데 깨어날 때도 비라니, 끝내주는 수미상관이다. 밤일까, 새벽일까. 클레이오는 봄비가 자아내는 유물적 고요와 공간을 은은하게 감도는 부들레야 향기를 감각했다. 하도 사위가 조용하여 버릇대로 「지각」 을 펼치려고 했다가 스킬이 발동하지 않아 당황했다. 왼손을 눈앞으로 들어 올리고 나서야 어찌 된 영문인지 깨달았다. 사라져 버린 ‘약속’은 책무의 완결을 증명하는 동시에 이전 세계와의 완연한 결별을 의미했다. 가슴속으로 한 줄기 바람이 스쳐 흉금을 뒤흔들었다. 납득하고, 미련을 거두어도, 이별은 늘 황망하다.
뼈에 피부만 달라붙은 꼴이 영 볼썽사나워 다시 손을 내려놓았다. 좌우로 고개를 가누어 침대 주변을 살폈는데 베헤못의 펑퍼짐한 실루엣은 눈에 띄지 않았다. 비도 오는데 어딜 나간 거지? 드디어 깨어났는데 따끈따끈한 고양이를 끌어안을 수 없어서 약간 실망했다. 실내는 훈훈하고 건조했다. 벽난로에는 타고 남은 장작에 빨간 불씨가 두서없는 별자리처럼 성글게 남아 얼마 전까지 불을 땠던 흔적이 고스란하다.
감동적인 연출이 펼쳐지길 기대하진 않았지만, 야심한 시간에 남몰래 눈 떠서 멀뚱히 천장이나 쳐다볼 줄도 몰랐다. 그래도 오감의 부드러운 각성을 차근차근 실감할 수 있기에 클레이오는 자신을 묵묵히 받아들이는 적막이 편했다. 어차피 소식이 알려지면 온갖 방문객이 뜨거운 환영을 쏟아낼 테니까.
이불을 걷고 일어나 후들거리는 다리를 이끌고 테라스로 향했다. 문을 열자 활기찬 봄비의 무도가 피부에 생생하게 밀착했다. 오슬오슬해지는 찬결에도 불구하고 숨을 크게 들이마시며 클레이오 아세르는 살아있음을 온몸으로 느꼈다. 이 순간만은 생을 찬미한 시인들의 감수성에 깊이 공감할 수 있었다.
레이?
빗줄기 사이를 비집는 한마디에 클레이오의 세계는 목소리의 주인에게로 기울어진다. 저도 모르게 멈칫하는 찰나에 테라스로 날렵하게 뛰어 올라온 검사가 클레이오를 면하고 섰다. 망토만 뒤집어쓰고 빗길을 걸어온 모습이었다. 밤의 장막에 후드의 음영까지 더불어 그의 얼굴을 은닉해서 육안으로는 이목구비도 분간하기 힘들었다. 숨소리도 죽이고 우두커니 선 그는 마법이 풀리기만 기다리는 석상 같았다. 침으로 마른 목구멍을 적시면서 가라앉은 목소리를 인양하려 거듭 시도한 끝에야 이름을 불렀다.
“아서.”
그랬구나. 네 이름은 이토록 장엄한 울림으로 세상에 존재했구나. 새삼스러운 앎에 클레이오는 살짝 어깨를 떨었다.
“레이, 어떻게….”
의문형에서 인지로 넘어간 아서의 육성은 전율을 동반했다.
“어떻게는, 일어난 거야. 그만 깰 때도 됐잖아.”
레지나가 도왔는지, 아니면 더딘 회복이 마침내 의식을 유지할 수 있는 최소치에 도달했는지는 모르겠다. 그러니 충분히 잤다는 식의 답변에 다른 명쾌한 설명을 더 보탤 수도 없었다.
“그러는 넌 여기 어떻게 왔어? 무슨 예지라도 한 것처럼 딱 맞춰서.”
“…예지는 아니지만 알았어. 지금 아세르 저택에 가면, 널 만날 수 있다는 느낌이 들었거든.”
그걸 느낌이라고 칭해도 되나. 이제 예언자 칭호도 우리의 왕에게 넘겨야겠다. 클레이오는 아마 성흔도 사라졌을 손등을 문질렀다.
“안 들어올 거냐?”
그제야 마법에서 풀려난 아서가 붙박인 발을 뗐다. 한 발짝, 한 발짝, 천천히 들어오는 아서의 걸음은 흡사 생애 처음으로 육지와 접촉하는 물결이었다. 테라스 문이 닫히고, 아서가 무겁게 젖은 망토를 벗었다. 그러나 빗물에 물크러져 밤을 떠돌던 달빛마저 유리문에 막혀 완전히 어둠에 덮인 낯은 도저히 들여다볼 수가 없었다. 가까이 다가서려던 클레이오는 주저하며 잠자코 묵언했다. 하려던 말도, 나누려던 대화도 담장 아래에 떨어졌을 장미만큼 많았으나 지금은 아서의 목소리가 듣고 싶었다.
“레이.”
“그래.”
“난 괜찮지 않았어.”
도리 없이 말문이 막혔다.
“불안했고, 자책했고, 자주 네 꿈을 꾸다가 깼어. 밤은 매일 길었고, 너를 생각하기가 두려웠고, 그때 더 강해지지 못한 탓이 아니라던 네 말은 가끔 내 후회마저 불허하는 저주 같았어.”
빗방울처럼 떨어지는 말에 속절없이 젖는 기분이었다. 심장 언저리에서 언어가 되지 못한 감정이, 언어로 정제되어 상대에게 닿고자 절박하게 뒤챘다. 그러나 형상을 갖출라치면 분절되었으며 명사와 동사와 형용사로 절묘하게 나열되다가도 헝클어지고 말았다. 이윽고 감정은 무질서한 그대로 폭발할 듯 팽창한다.
비틀거리는 몸을 부드럽게 잡은 아서가 가냘픈 허리에 머뭇머뭇 팔을 감았다. 가만 놔두었다간 몸을 겹치는 데도 밤새 걸릴 법한 조심스러움이 괴로워서 클레이오는 먼저 그를 그러안았다. 오래 누워서 약한 팔이라 힘도 안 들어갔지만, 마주 포옹하는 아서의 두 팔은 그를 알던 어느 때보다 단단했다. 옷에 밴 한기는 맞닿은 가슴에서 금세 데워졌다. 클레이오는 습기 때문에 차갑게 내려앉은 금발을 슬며시 헝클었다. 얼마나 오래 잠들었을까. 아서는 못 본 사이 키가 조금 더 자랐다.
아서의 얼굴에 붙은 뺨으로 축축한 물기가 느껴졌다. 빗방울인가. 머리는 거의 젖지 않았는데. 그렇게 생각했다가 곧바로 알아차리고 클레이오는 외마디 탄식을 흘렸다. 스스로 고백한 대로 그는 괜찮지 않았다. 그래도 힘껏 괜찮은 척했을 테지. 실실거리는 쾌활한 웃음과 무던한 넉살을 지녔지만, 그게 아서의 전체는 아니었다.
머리를 쓰다듬던 손으로 얼굴을 만져 보았다. 약간 납작해서 더욱더 단단한 이마, 천성을 그대로 닮아 곧은 눈썹, 예리하게 오뚝한 콧대, 원숙해진 티가 역력한 볼, 면도해도 약간은 까칠한 턱 언저리, 꾹 닫힌 채 당장에라도 속에 담긴 울음을 와락 터트릴 것처럼 이지러진 입술. 겹겹이 쓰고 있던 허울을 벗고 감정의 날것이 폭로된 맨얼굴.
“얼굴 좀 봐.”
“나중에. 이따가.”
그러면서 아서는 깡마른 어깨에 제 얼굴을 묻었다. 뭐가 그렇게 부끄럽다고 다 들킨 마당에 수줍음 타는 사내애처럼 구는지. 클레이오는 울음으로 뜨끈뜨끈해진 그의 한쪽 뺨을 손으로 감싸서 자신을 돌아보게 했다. 막상 아서는 저항하지 않았다. 가느다란 손가락이 행여 고갯짓 한 번에도 꺾일까 염려하면서, 사실은 불가결하게 녹아내리는 눈물을 누구에게든 밝히고 싶었던 것처럼.
클레이오 또한 그랬다. 클레이오는 아서의 앎을 간구했다. 어떻게 꺼내야 좋을까. 정진의 세계였던 재와 강의 도시에 대해 말하고 싶었다. 어머니에 관해 얘기하고 싶었다. 익사해 죽을 뻔했던 클레이오에게 마법적 재능이 수여된 연원을 털어놓고 싶었다. 말할 수 없었던 것과 말하기 무서웠던 것을 전부 저 청록의 바다로 흘려보내, 그리하여 거짓 없이 아서를 대하고 싶었다. 어느덧 잘게 떨리고 있는 손끝을 꼭 쥔 아서가 속삭였다. 괜찮아, 레이. 얄팍한 위로를 초월한 받아들임에 육중한 고동을 빨아들인 언어가 여름의 장미처럼 타오른다.
아서, 널 사랑해.
열 오른 숨결이 새어 나오는 살갗에 입술을 겹치자 해풍에 실려 오는 소금처럼 짠맛이 났다. 클레이오는 눈을 감았다. 칠월에 내리는 비에 불필요한 말은 사위고 마침내 입술과 입술 사이에 군더더기 없는 숨만을 남겼다.
제목은 윤동주, 팔복 中
진언은 빈센트 밀레이(Edna St. Vincent Millay), 죽음(Moriturus) 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