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슈란지] 개화

캐롤라인님 커미션


사감실에서 나온 란지에는 연갈색 포장지에 싸인 소포를 상하좌우로 돌려가며 관찰했다. 끈을 십자 형태로 둘러 묶었고 직사각 모양, 높이는 한 뼘. 무게는 제법 나가는 편이고 살짝 흔들어도 조용하다. 다음으로 얼렁뚱땅 찍힌 우편국의 빨간색 특급 도장, 하단에 적힌 발신인과 주소를 확인했다. 카를 아벤트. 어느 지역에나 한 명씩은 반드시 있을 흔한 이름이다. 물건은 아라종에서 발송됐으나 척 봐도 와인은 아니니 란지에는 모든 정보가 얼버무려진 소포에서 오직 그 용도만 어림짐작할 수 있었다. 애당초 자신이 네냐플에서 지내고 있음을 아는 이들은 한정적이었다.

도토리 빌라의 세 룸메이트는 전부 외출 중이었다. 비록 바깥에선 동장군의 칼바람이 무차별적 공격을 자행할지라도 휴일 대낮에 방에 틀어박힐 위인들이 아니다. 란지에는 거실에서 소포를 뜯기 시작했다. 지금 친구들은 시원한 맥주에 한창 절여지고 있을 무렵이니 굳이 방문을 잠그고 노심초사할 필요는 없었다.

포장지에 감춰진 물건은 예상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두꺼운 서적 두 권은 각각 아노마라드의 원시 신앙 연구, 고전 음악 이론을 다루는 책이었다. 둘 사이에 연관성이라곤 요만큼도 없으며 받는 사람의 취향을 고려한 흔적도 엿보이지 않는다. 심지어 새 것도 아닌 듯, 군데군데 모서리가 접혔고 종이색도 바랬다. 그러나 란지에는 실망하는 대신에 책 밑에 반듯이 깔린 열흘 전 신문을 뒤적였다. 신문지도 모서리가 접혔을 뿐, 그 외에 눈에 띄는 특징은 없다. 접힌 페이지엔 숫자, 희한한 언어, 부호 따위가 교묘하게 섞여 있었다. 이쯤 되면 어디서 왔는지 빤했다.

란지에는 얕게 한숨 쉬며 책을 내려놓았다. 클럽의 암호는 철저하고 복잡해서 해독하는 사람의 머리털을 줄이기에 안성맞춤이었다. 다행스러운 점은, 암호문 내용을 알아내려고 애쓰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이다. 그새 평화로운 학생 생활에 익숙해져 까맣게 잊었다가 이제야 떠올랐다. 클럽의 연례행사인 간부 모임. 말만 거창하지, 연초에 모여서 몇 시간씩 회의하는 날이었다. 지난해를 정리하고 앞으로의 활동 방향을 의논하는 일도 이런 조직에서는 중요하니 불만은 없다. 하지만 올해는 불참할 예정이었다. 학생 신분으로 얌전히 공부하겠다고 지스카르와 약속한데다가 정말로 그 말을 지키느라 클럽 활동은 일체 중단했다. 간다고 뭘 보고하겠는가. 괜히 일전의 실패로 벼르던 사람들에게 트집이나 잡히겠지.

책과 신문지는 옆으로 밀어놓고 마지막으로 맨 아래에 깔린 엽서를 집었다. 검은 밤하늘 배경으로 유연한 선으로 그린 여성이 시푸른 물병을 안은 채 별자리를 붓는, 은은하게 빛나는 수채화였다. 영롱하도록 아름답다는 은유가 아니라 실제로 반짝였다. 기분 탓인가 해서 테이블에 고인 햇빛으로 옮겨 들여다보니 물감 과립이 오묘한 광택을 낸다. 아주 정성 들여 그려진 것만 알 뿐, 그러한 사실에서 특별한 감흥을 느끼지 못해 무감각하게 주의를 떼려는 찰나.

기척을 뒤늦게 알아차린 까닭은 아무도 들어오지 않으리라 안심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미미한 움직임의 결을 확실히 따라잡기도 전에 조금 서늘한 손이 눈언저리에 닿았다.

“내가 누구게?”

즐거워 못 견디겠다는 양 장난치는 천진함, 그윽하며 농밀한 다정함을 육감적이게 아우르는 목소리가 밝은 운율로 오르내린다. 곤란할 정도로 익숙하기 때문에 더욱 놀라고 말았다. 생각보다 손이 먼저 튀어나가 탁자 위의 물건을 수습하려 했다. 그러나 란지에는 눈이 가려진 형편마저 깜빡했고, 결과적으론 손이며 팔에 걸린 것들이 와르르 떨어지면서 둔탁한 소란을 일으켰다. 덩달아 놀란 손이 거둬지고 다시 시야가 트였다. 허둥지둥 뒤를 돌아보자 마주친 눈동자에 단박에 흥미가 감돌았다. 옆으로 갸름한 꼬리가 은근하게 접히고, 그의 발그레한 입술이 미소를 머금는다.

“뭘 보고 있었는데 그리 놀라? 러브레터야?”

그러더니 바닥에 널브러진 책과 신문지를 간추리기 시작했다. 귀퉁이 접힌 페이지가 대놓고 펼쳐진 꼴을 발견한 란지에는 당장 주저앉아 이리저리 팔을 뻗었다. 하필이면 가장 위험한 사람에게 들키다니. 뭐가 떨어지거나 말거나 그냥 무시해주면 좋겠는데 조슈아는 실로 친절했다. 누굴 탓하랴. 부주의했던 자신을 원망할 수밖에. 과민 반응해봐야 긁어 부스럼이라 조슈아 팔에 안기는 서적과 말쑥한 옆얼굴만 몰래 흘깃거렸다.

포장지를 낚아채니 그새 아래에 깔렸는지 모를 엽서가 팔랑 떠올랐다가 소공작 앞에 떨어졌다. 미감이 뛰어난 그의 관심이 물병자리 그림으로 향한 것은 지극히 당연한 수순이었다. 란지에는 조슈아의 시선이 엽서에 붙박인 겨를에 얼른 물건을 정리했다. 어지간히 그림에 정신이 팔렸는지, 조슈아는 제 팔에서 책을 빼가거나 말거나 신경도 안 썼다.

간신히 숨 돌리고 일어나니 그림 관찰에 여념이 없던 그가 곁에 섰다.

“이 그림은 웬 거야? 선물?”

구겨진 신문지를 펴는 체하며 혹여 놓친 것 없는지 테이블과 바닥을 샅샅이 훑느라 조슈아의 질문에는 건성으로 대답했다.

“받았는데, 별거 아니야. 마음에 들면 가져.”

“그래도 이거 꽤…란지에?”

빠짐없이 챙긴 것을 확인하기 무섭게 자신의 방으로 향했다. 행여나 보낸 사람이며 출처까지 시시콜콜 캐물었다간 난처해진다. 의도치 않았더라도 책을 줍는 과정에서 무언가를 보았을지 모르잖은가. 그의 주의를 돌리기 위해서 그까짓 엽서 한 장쯤 줘버린다고 대수로운 일도 아니다. 혹여 붙잡힐세라 잰걸음으로 방에 들어와 문을 닫았다. 다행히 포장지로 물건을 얼추 꾸릴 때까지도 조슈아는 노크 한 번 하지 않았다. 여간해선 쉽게 떨어지는 법이 없건만, 그림이 소공작의 마음을 옭아맬 만큼 대단한 모양이다. 햇살에 비춰보았던 별자리가 어른어른 떠올랐으나 이내 뇌리에서 지우고, 다만 무사히 넘어갔음에 안도하며 골칫덩이 꾸러미는 옷장 속에 처박았다.


*


그리고 저녁. 왜 예감하지 못했을까.

“거기 갈 거야?”

란지에는 정말 안심하고 있었다. 더 솔직히는 도토리 빌라에서 잠깐 벌어진 해프닝에는 깜깜하게 신경을 껐고, 그 대가는 고작 저녁 샌드위치가 분리된 정도로 끝날 수 없게 됐다. 접시에 흐트러진 빵과 내용물을 잠시간 내려다보다가 짐짓 태연한 손놀림으로 합치기 시작했다. 그리고 맞은편에 앉은 조슈아에겐 눈길도 주지 않고 되물었다.

“어디를 가?”

“이 초대장 말이야.”

초대장? 빠르게 동요를 갈무리하고 바라보니 조슈아의 손에 아까 준엽서가 들려 있다. 어리둥절하기도 잠시, 등골이 서늘해졌다. 무언가를 알아낸 것이 분명하다.

돌이켜 따져보니 그렇다. 명색이 간부에게 보낸 물건이 겨우 감상용에 불과하겠는가. 경황 중이었대도 클럽 정보가 유출될 만한 단서를 조슈아 손에 넘겨버리다니, 변명할 도리 없는 실책이다. 그나마 이쪽을 멀뚱멀뚱 응시하는 태도로 미루어 보건대 대단한 비밀을 손에 쥐었다고 단정하긴 어려웠다.

묵묵히 내민 손으로 엽서가 살포시 올라왔다. 이미 살펴봤던 그림은 얼추 훑고 뒤집으니 아니나 다를까 귀퉁이에 숫자와 기호가 선명하다. 기호는 몰라도 숫자는 집회 날짜가 분명하다. 관자놀이가 지끈했다.

“여기가 어딘 줄 알고 갈 셈이야? 장소는 어디에도 안 적혔는데.”

“물론 적히지 않았지만, 찍혀 있잖아.”

“찍혀…?”

“뒷면에 날인, 일종의 기념 도장인데 어디에서 쓰는지 알거든. 여기서 멀지 않은 도시의 미술관이야.”

이제는 두통을 넘어서 뒷골까지 당긴다. 이 엽서를 끼우기로 결정한 자에게는 잘못이 없다. 대관절 누가 미술관 날인까지 외우겠느냔 말이다. 오직 데모닉 소공작만이 그렇게 했다.

“그래, 장소는 알겠어. 헌데 거길 왜 가려고?”

“그 그림에 쓴 파란색 물감, 아노마라드의 특정 지역에서만 채굴되는 광물을 갈아서 만든 거야. 색깔이 맑고 과립이 아름답기로 유명한데 워낙 희귀한 광물이라 굉장히 비싸거든. 게다가 그림도 봐, 아주 환상적이야. 수채의 농담과 깊이 표현은 물론이고 물감 특성을 노련하게 이용해서 반짝이는 과립 무늬를 만들었어. 분위기도 밤하늘이 꿈꾸듯 신비롭지?”

예술이라면 사족을 못 쓰는 소공작이 신나서 술술 설명했고 란지에는 잠자코 듣기만 했다. 고개를 끄덕여야 마땅한 분위기였음에도 묵묵부답으로 일관했지만, 조슈아는 개의치 않는 기색이었다.

“이렇게 우아하고 세련된 초대장이라니, 호기심이 생길 수밖에.”

누구 안목인데 감히 그림의 가치에 이견을 제시할까. 하물며 자신은 예술이 뭔지 논할 의향도, 소질도, 관심도 일절 없다. 더구나 클럽의 집회 장소를 한눈에 파악하고 심지어는 함께 가고 싶다는 아르님 소공작에게 태평히 맞장구나 칠 형편이 아니잖은가. 하릴없이 시원한 물만 들이키며 바짝바짝 타는 목구멍을 축였다.

“장소랑 초대장을 봐선 전시회겠지. 그림의 원본이 걸려 있을 테니까 직접 보고 싶어.”

아르님의 뼈아픈 배신을 기억하는 공화주의자들 앞에 소공작이 나타난다고? 그건 불안하기 짝이 없는 인내심 시험이 될 것이다. 간부 중에는 망명 의회의 과격하고 급진적인 노선에 적극 찬동하는 이들이 꽤 많다. 더구나 소공작을 한 번 죽이려다가 실패하고 그리 오래 지나지 않았다. 그 계획을 수행한 장본인 주제에 우습긴 하지만, 안전을 장담하기 어려운 줄 빤히 알고도 보낼 순 없다. 무엇보다 집회의 정체, 간부들 인적사항이 발각되면 조슈아가 마음만 먹어도 간단하게 민중의 벗을 끝장낼 수 있다.

“굳이 그럴 필요가 있을까. 똑같이 베껴 그린 거면 내가 준 그림으로 충분할 텐데.”

하등 중요치 않은 물건인 것처럼 엽서를 내려놓고 그대로 조슈아에게 밀었다. 전하려는 의사는 명백했다. 이윽고 완만하게 휘움한 눈썹이 퍽 애처롭게 처졌다.

“정말 안 돼? 조용히 따라갈게.”

초대에 응할 의향이 없다. 혹은 같이 가기 싫다. 과연 무어라고 말하는 편이 조슈아를 막기 유리할지 궁리하면서도 어설픈 변명으로는 설득이 가능하리라 기대하지 않았다. 소공작은 유독 예술품에 집착하는 경향이 있다. 망설임이 길어질수록 까만색 눈동자가 기대를 품고서 그림의 별빛처럼 반짝거린다.

“그렇게 가고 싶어?”

“응.”

“내가 안 간다고 해도?”

이번엔 조슈아가 묵묵히 고개를 기울였다. 깊은 눈빛이 속내를 가늠하듯 주시한다. 오로지 그림을 보고 싶은 소망만으로 여념이 없던 표정에서 의혹이 설핏 새어나왔다.

“네가 안 가면 참석하지 못하는 자리야?”

그건 가능하다면 혼자라도 가겠다는 뜻이자 전시회 초대장이 맞는지 완곡하게 의문을 표하는 화법이었다. 공연히 완강한 태도를 취했다가는 얻어질 이득보다 불필요한 의심이 많아질 시점이었다. 명료한 사실은, 당장 그를 단념시킬 방도가 궁하다는 점이다. 란지에는 손가락에 묻은 빵부스러기를 털어내고 샌드위치 모서리를 베어 물었다. 목표로 향하는 길은 때로 에둘러야 훨씬 효과적일 때도 있다.

“그건 아니지만, 초대받은 사람이 동행하는 편이 좋겠지. 같이 갈게.”

긍정적인 대답에 조슈아의 얼굴에 화색이 돌더니 냉큼 엽서를 챙긴다. 그림 하나 보는 것이 그리도 기쁠까. 아름다움에 집착하는 심경을 일평생 이해하지 못할 란지에는 그저 앞으로 일이 복잡해지리란 예감 때문에 심란해졌다.


*


단단히 여민 옷깃 위로 드러난 목이 시렸다. 네냐플은 비교적 온난한 남부였지만, 한겨울을 얄팍한 외투 한 겹으로 버텨도 될 만만한 추위가 아니다. 무방비하게 노출된 손등이 서리가 어린 양 따끔거리고, 미세한 통각이 뇌까지 전이되어 이성을 뾰족하게 벼린다. 그래서 궁리할 때는 추워야 좋다.

묘책이 떠오르면 좋으련만, 공연한 의심을 피하면서 조슈아의 주의를 사로잡기란 까다로웠다. 소공작은 집념이 강하고 좋아하는 마음을 숨기지도 못한다. 또한 간단히 포기하지도 않는다. 끈질기게 주변을 맴도는 그에게 바늘 끝 통과할 틈조차 내주지 않으려 애쓰면서도, 일말의 조급함 없이 한결같은 태도에 내심 혀를 내두르기도 여러 번이었다.

차라리 엽서를 빼돌려 파기할까. 아니, 이미 장소를 알아냈으니 엽서의 유무는 아랑곳하지 않고 찾아갈 확률이 높다. 조슈아가 미술품보다 더욱 좋아하고 집착할 법한 것. 지금은 그게 필요했다.

“란지에, 조심해!”

팔을 잡아당기는 손길에 퍼뜩 상념에서 깨어났다. 생각에 골몰하다가 계단 앞까지 온 줄도 모르고 넋을 놓고 있었다. 한 발짝만 더 움직였으면 그대로 굴렀을 것이다. 란지에는 코앞을 스치고 지나간 위기보다 지금 등에 맞닿은 포근함에 신경이 쏠렸다. 돌아보지 않고도 누구인지 알았다. 이 풍부한 품위를 지닌 체취, 허리에 포말처럼 감겨드는 팔. 그에겐 늘 하릴없이 빠져든다. 고운 모래에 맨발이 파묻히듯 부드럽게.

“뭘 그리 골똘히 고민해. 위험할 뻔했어.”

나지막한 목소리에 애정이 노골적으로 만개한다. 감응하듯 내면에서 피어나는 전율로 머릿속이 번뜩였다. 어리석게도 이제야 깨닫다니. 무엇보다 소공작의 관심과 정성을 독차지하는 것이 늘 가까이에 있었는데. 천천히 뒤돌아 까만 동공에 비춰진 얼굴을 보았다.

자신의 표정은 조슈아를 대면하는 이라면 으레 가질 호불호는 물론, 일체의 사사로운 감정이 배제되어 무미건조하리라. 여느 때라면 네냐플 한복판에서 그가 밀착하게 허락하지 않았겠지만, 지금은 되레 필요했다. 란지에는 자신의 마른 정념 위에 인위적인 색을 덧입혔다. 만곡을 그리는 입술이 알싸한 유혹으로 보이고, 새하얀 숨결이 추위를 피해 이리 오라는 속삭임으로 들리도록.

“내 수호자를 자처하는 누군가가 나타날 거라고 믿었지.”

“아, 그 수호천사! 나도 잘 알아. 아주 잘생기고, 천재적이고, 어느 모로 보나 근사하잖아.”

본인을 태연하게 천사라고 칭하며 자화자찬하는 뻔뻔함에 감탄하기엔 그에게 너무 익숙해졌다. 잠자코 바라보노라니 조슈아가 빙긋이 웃으며 제가 감은 목도리를 풀었다.

“뒤에서 보는데 목덜미가 쓸쓸하더라.”

계속 추위에 내놓았더니 체온 어린 털실이 감기자마자 나른한 감각이 사르르 번진다. 조슈아가 머리칼을 훑어 목도리 밖으로 빼주고 단정하게 빗어주는 것도 잊지 않았다. 란지에는 그 손짓을 담담히 받아들인 다음, 굵은 꽈배기 무늬로 폭신폭신 짜인 목도리에 고개를 묻었다. 털실에 밴 체취를 차근히 들이마시고 눈만 은근하게 치뜬 것은 의도적이었다.

“…고마워. 따뜻하네.”

날렵한 눈매가 동그래졌다.

“별일이구나. 란지에 로젠크란츠가 분위기에 쉽사리 휩쓸리는 사람은 아닌데 말이야.”

진심으로 놀라워하지만, 퍽 기뻐하는 낌새는 아니다. 란지에는 티끌이나마 묻어나던 가책을 지웠다. 요컨대 적극적이고 약삭빠르게 소공작을 꾀어내기로 작정했다는 말이다. 스스로 훌륭한 배우라 소개할 순 없지만, 겉과 속이 다른 사람으로 변하는 일엔 능숙하다.

“내가 감사 표현에 인색하다고 비꼬는군.”

“설마. 입발림을 모르는 솔직함이 네 매력인데 마음에도 없는 소리를 바라겠어? 대체 어디서 봄바람이 불어와 쌀쌀맞은 가슴에 훈기를 넣어 주었는지 궁금해서 그래.”

“어느 날 싹이 움텄다고 봄이 하루아침에 찾아왔다고 할 순 없지.”

어렴풋이 변화를 눈치채고 조슈아의 눈빛이 바뀌었다. 더욱 확실하게 동요하길 바랐던지라 조금 실망했지만, 그의 믿음이 중요하다. 요건은 충분히 갖춰졌다. 햇빛과 양분을 듬뿍 받은 덕에 호감이 발아할 가능성, 나아가 사랑에 가까운 형태로 성장할 합리성. 누구나 자신의 애정이 보답받기를 기대한다. 소공작의 반짝이는 지혜도 내면에서 정교하게 축조된 감수성을 무너뜨리지 못하며, 도리어 증폭시키고 때론 아예 터트리기도 했다. 하물며 희망은 약간만 자극해도 거세게 불어나 금세 판단력을 휘저어서 흙탕물로 만든다.

“연구실에 가던 길이야. 목도리는 이따 돌려줄게.”

란지에는 옆구리에 얹힌 손을 떼어냈다. 마침 적절한 구실을 얻었으니 이쯤에서 후퇴하는 편이 좋겠다고, 지극히 전략적으로 판단했다.

“네가 기숙사로 돌아올 즈음이면 아주 깊은 밤일 텐데.”

“알아. 다들 잠들 시간이지. 물론 너는 아니겠지만.”

조슈아는 방문이 열리기만 기다릴 것이다. 그건 예측도 상상도 아닌 사실이니까. 연구실 쪽으로 발을 내디뎠다가 다시 돌아보니, 소공작은 여전히 같은 자리에서 이쪽을 주시하고 있었다. 아주 일상적인 모습으로.

“내가 노크를 해야 하나?”

그는 웃는 낯으로 어깨를 으쓱였다.

“언제나 열쇠는 네 손에 쥐여져 있는걸.”


*


잔머리를 그러모아 묶고, 풀고, 다시 묶었다. 그러나 종국에는 풀기로 결정했다. 그러는 편이 조슈아를 사로잡기 좋았다. 그는 자신의 머리를 매만지기 좋아하니까. 입학한 후, 굳이 다듬을 필요 없어 기르기 시작한 머리카락이 뒷목을 가릴 무렵부터 시시때때로 목덜미로 집요한 시선이 느껴졌다. 마치 장막 너머로 욕조를 훔쳐보듯 은밀하고 관능적이었다. 감춰질수록 더 흥미가 생긴다는 것처럼.

습관적으로 노크하려 손을 눈높이까지 들었다가 내리고 둥그런 문고리를 쥐었다. 문틈으로 불그스름한 빛이 희미하게 새어나오고 있었다. 철컥, 적막한 복도에 걸림쇠 돌아가는 소음이 긴장을 일으켜서 란지에는 잠시 숨을 들이켰다. 천천히 문을 열어젖히자 촛불로 발그레한 얼굴이 나타난다. 그는 여행자를 위한 도달점인 것처럼 미소하고 있었다. 스스로 정착지가 될 것을 예감하고, 그래야 마땅하다는 과시가 사뭇 너그러워서 무릎에서 힘이 조금 풀렸다.

“늦게 왔네.”

책망하는 어조는 아니었다. 그를 애태우려고 일부러 늑장을 부렸는데 담담한 음성만 듣노라면 마냥 차분했다. 그는 유리창 앞에서 무엇을 하고 있었을까. 바깥은 이슥한 어둠에 침수되어서 뿌연 달빛, 세계의 불명확한 외곽만 얄팍하게 드러나 있다. 그런 풍경을 들여다봐도 끝내 마주하는 것은 자기 자신뿐이다.

“목도리를 돌려주기 아쉬워서.”

북탑에 들어서자마자 이곳으로 직행했으므로 폭신한 털실은 아직도 목을 에워싸고 있었다. 조슈아가 창틀에 놓인 황동 칸델라브라의 긴 목을 잡고 테이블로 걸어갔다. 사뿐한 발자취는 도톰한 카펫에 그대로 녹아 미세한 소리조차 남지 않는다.

“차라리 네게 물욕이 있으면 쉬웠을 거야. 그럼 뭐든 품에 안겨주며 날 사랑하게 했을 텐데, 너는 필요한 물건 외엔 원하지 않잖아. 애당초 필요로 하는 것조차 아주 한정적이고. 그러니 목도리가 탐난다는 뜻은 아니겠지?”

심지에 맺힌 촛불이 흔들려 조슈아의 얼굴에서 빛과 그림자가 무규칙하게 춤추었다. 손에도 잡힐 선명한 아름다움, 저항을 바스러뜨리는 매혹에도 말뚝 버금가게 꼿꼿한 스스로가 가끔은 매우 조잡한 존재 같았다. 여기저기 부품이 빠지고 겉만 멀쩡한 기계처럼 말이다.

“그래. 내가 탐나는 건, 목도리가 아니야.”

촛대를 내려둔 조슈아가 테이블의 가장자리를 훑으며 건너왔다.

“목도리가 아니면, 뭘까.”

“무엇이길 바라는데?”

“꼭 선물을 뒤에 숨기고 맞히면 주겠다는 사람 같네. 얄밉기도 하지.”

“강요하진 않아. 도로 가져가면 그만이니까.”

그는 닿을 듯 말듯이 근접한 거리까지 오고서야 멈췄다. 남은 간격은 이제 걸음으로 좁힐 수 없었다. 긴 속눈썹이 모호한 정념을 팔랑거리며 깜빡거렸다. 그 아래의 눈동자는 실로 고요하다. 가만 응시하는 조슈아와 눈을 마주하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가슴에서 두근거리는 박동이 조금씩 커졌다. 자신이 긴장했음을 뒤늦게 깨달았을 때, 조슈아가 느슨한 목도리 매듭을 세심하게 풀어냈다.

“가져가도 돼, 란지에.”

굵은 털실이 목덜미에 가볍게 미끄러지며 주인의 손안으로 돌아갔다. 온기가 떨어져나간 목으로 서늘한 공기가 스미자 팔에 소름이 올라왔다.

“목도리 빌리고 싶으면 언제든지 찾아와.”

조슈아는 빙긋이 웃더니 뺨에 입을 맞추고 물러났다. 그의 담백함에 적잖이 당황했다. 의도와 달리 갈수록 안달이 나는 사람은 자신이었다. 평소에는 늦은 밤에 단둘인 자리에서 소공작이 점잖게 굴어 다행이라고 여겼겠지만, 그를 홀리려는 목적으로 찾아와서 이렇게 싱겁게 물러날 수 없었다. 그럴싸한 기회만 주면 알아서 끌어당기려니 했는데, 지나치게 낙관적인 계획이었나?

말문이 막혀 우두커니 섰노라니 조슈아는 태연히 목도리를 돌돌 감아 테이블에 두고 뒤돌았다. 란지에는 그의 등을 쳐다보니 심지어 유기된 기분마저 들어서 기어코 조슈아의 팔을 붙잡았다. 확연히 커진 눈을 맞닥뜨리고 무언가에 등 떠밀리듯 다음 순간으로 나아갔다. 이것만은 예상치 못했겠지.

가끔씩 겹쳐질 여지를 내비치면서도 일절 그런 적 없던 입술이 소스라치도록 또렷한 감촉을 선사했다. 키스는 처음이 아니지만, 조슈아의 숨은 각별했다. 아니, 그의 몸짓 일체가 특별하다. 허리를 끌어안는 팔. 뒷목을 받치며 머리카락을 그러쥐는 손짓. 입술을 핥고 혀를 빨아 당기는 탐욕. 그 모든 우아함과 애틋함이라니. 몸에서 찬기가 걷히고 뱃속부터 열기가 치솟았다. 어색한 감각에 반사적으로 뒷걸음질했지만 한갓 시도에 불과했다. 단단한 벽에 등이 닿고서야 속수무책으로 떠밀린 걸 알아차렸다. 뜻한 결과인데도 실수로 물을 엎지른 것처럼 당혹스러워 그를 밀어내는 것과 기꺼이 응하는 것, 무엇도 택하기 어려웠다. 빠르게 가빠진 호흡이 사고를 송두리째 뽑아냈다.

“조슈, 하, 잠깐…아직, 하아, 말을…”

“말?”

그가 축축한 제 입술을 헐떡이는 입술에 문지르며 나지막한 음색으로 웃었다. 달콤한 흥분으로 여실하게 달아오른 미소. 다급하게 조슈아의 어깨를 짚었으나 그 손은 맥없이 미끄러져 앞자락을 움켜잡았다. 이곳이 밖이었으면 둘의 입김이 누구 것인지 가려내지 못하게 섞이는 모양이 온 세상에 발각됐으리라.

“말보다 확실한 수단을 이미 썼잖아.”

그 말대로, 키스까지 한 마당에 무슨 말을 하러 왔는지 모를 조슈아가 아니었다. 단순하게 도리 없이 그에게로 미끄러지는 상황에서 벗어나서 중심을 잡고 싶었기에 그를 지그시 밀어냈다. 자신이 어디쯤에 섰는지를 확인한 다음에는 솔직히 안도감부터 들었다. 여차하면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갈 수 있는 위치였으니까. 영리한 조슈아는 상대가 달아나게끔 성급히 굴지 않겠지만, 적어도 팔만 뻗으면 된다는 사실로부터 심리적 안정은 얻었다.

“때로는 말하려는 내용보다 전달하는 행위 자체가 중요하지.”

조슈아는 구겨진 앞자락을 만지작거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관점에는 나도 동의해. 언어는 인간의 아름다운 산물이고, 타인에게 나를 표현하려는 시도도 그렇지. 들을게. 말해줘, 란지에.”

그의 머릿속에서 엽서와 거기에 적힌 날짜를 걷어내기 위해 한동안 거짓말하기로 했다. 막상 관계를 시작하니 즐겁거나 편치 않았다고 둘러대면 된다. 고작 며칠 만에 이별을 통보받아서 화날 조슈아를 납득시키는 문제는 어렵겠지만……. 란지에는 눈을 길게 감았다 뜨며 잡념을 눌렀다. 지금은 민중 클럽의 비밀을 지키기에만 전념할 때였다.

“너를 좋아해.”

“내가 널 좋아하는 만큼?”

그 질문에는 침묵했다. 원하는 바를 건네자니 새삼 죄책감이 들어서는 결코 아니었다. 정작 묻는 조슈아도 기대하지 않는데 일부러 거짓말해서 분위기를 깨뜨릴 까닭이 있겠는가. 설령 진정으로 그를 사랑하게 된들, 감정의 무게가 비등해지리란 상상은 안 된다.

“널 좋아해, 조슈아.”

그래서 되풀이한 고백은 사실 확인이나 마음 전달을 위해서가 아니라 일종의 얼버무림이었다. 란지에는 구김이 펴진 조슈아의 셔츠를 유난히 강하게 잡아당겼다. 최선의 답변은 두 번째 키스로 족하다.


*


함께 식사하기, 마을을 산책하기, 책 읽고 감상을 나누기, 손잡고 키스하기. 그들은 사귀는 사이에서 으레 할 법한 일정과 접촉으로 하루하루를 채워 갔다. 란지에는 조슈아와 보내는 매순간이 살갗에 까슬까슬한 스웨터처럼 껄끄러우리라 넘겨짚었지만, 현실은 도톰하게 어깨를 덮는 담요였다. 제 애정공세가 통했음에 기뻐하며 멋대로 끌고 다니고 몰아붙일 법도 한데, 소공작은 능란하게 거리를 쟀다. 은근슬쩍 유혹하면 흔쾌히 넘어오면서도 매사 한 줌 객관성을 마련해두는 느낌이다. 그런 교묘함은 여유에서 비롯된다. 그의 관심사를 갈취해야 하는 입장에선 썩 달가운 모습이 아니었다. 하물며 조슈아는 시시각각 미술관에 가는 날이 얼마나 기대되는지 언동으로 표현했다.

그를 공식적으로 떨어뜨려도 되는 시간, 다시 말해 오스틀리 교수의 연구실에 틀어박힌 때에는 늘 똑같은 고민뿐이었다. 어떻게 소공작이 못 가도록 막을 것인가. 차라리 다리라도 부러져서 못 간다고 할지 심각하게 고려한 적도 있다.

그럴 경우 조슈아가 어떻게 반응할지 알게 된 계기는 어디까지나 우연이었다. 연구실에서 망치질을 하며 머리로는 조슈아에 관해 골몰하다가 실수로 손끝을 내리쳤다. 손톱이 반절 가량 깨졌다는 소식에 그토록 창백해질 줄 누가 알았겠는가. 그가 어찌나 야단법적을 떨었는지, 소공작의 성화에 자다가 불려온 교수는 사흘쯤 밤잠 설친 사람처럼 해쓱했다. 결국 실험 삼아서 가볍게 계단이라도 구르려던 각오는 고이 접어야만 했다. 그게 아니라도 부러진 뼈는 마법으로 얼추 붙일 수 있다는 점에서 시간 끌기에 적합한 방법이 아니다. 그렇게 날짜는 하릴없이 넘어갔고, 그동안 온갖 획책이 수포로 돌아가거나 실행하기도 전에 폐기되기를 거듭했다.

란지에는 한참 수그리고 있느라 뻐근해진 목을 크게 젖혔다. 육체의 밑바닥부터 거슬러 오르는 한숨이 어슴푸레한 천장에 닿을 듯 길게 이어진다. 양어깨를 번갈아가며 주무르자 뒤통수까지 욱신거린다. 그때서야 피로감이 그을음처럼 명료해진다.

란지에는 주홍색 램프 빛으로 얼굴을 씻어냈다. 손가락이 차갑다. 연구실에서 기계용 윤활유를 자주 쓰는 까닭에 화로 사용은 금했다. 그래서 연구실은 언제나 쌀쌀했고, 오스틀리 교수는 화재로부터 안전한 난로를 발명하겠다며 뚝딱거렸다. 란지에는 그냥 마법을 쓰는 게 낫겠다고 생각하면서도 굳이 입 밖에 내어 교수의 불타는 의욕을 꺾진 않았다.

슬슬 일어날까. 실험대 선반에서 서류철을 꺼내 펼친 후, 확대경 대신 맨눈으로 마지막 페이지를 확인했다. 그리고 연구실 출퇴근 기록이 빼곡하게 적힌 아래에 평소대로 날짜와 시간을 적었다. 학점을 대체하려면 르노아의 날 외에 연구실에서 다섯 시간 근무가 필수였다. 시간을 적어 놓으면 오스틀리 교수가 다달이 행정실로 보내는데, 이제껏 자율적으로 기록하면서도 진실 여부를 의심받은 적은 없다. 이유는 단순하다. 밤마다 소모되는 양초와 램프 기름의 양이 만만찮았으니까.

똑똑. 서류철을 제자리에 돌려놓는 때, 누군가 연구실 밖에서 인기척을 냈다. 빗방울 부딪치는 소리로 착각하기에는 너무 또렷했다. 이 시간에 방문자라니? 문을 열자 촉촉한 빗소리가 밀려오는 뒤편으로 우산 하나가 앞을 가로막고 있었다. 기울인 우산으로 얼굴을 가린 인물이 말했다.

“누구게?”

유치해서 다정스러운 장난. 순간 말문이 막혔다가 더듬더듬 입을 뗐다.

“조슈아.”

비에 젖은 장막이 오르고 공공연하게 숨겨진 얼굴을 드러냈다. 물기를 함빡 머금어 윤기 흐르는 밤. 그 서정적인 무대를 독차지하고 완벽하게 장악한 주역은 순결하도록 맑게 미소했다.

“우산 없을 것 같아서 데리러 왔어.”

“…고마워.”

“고마운 어조가 아닌데?”

“놀라서 그래.”

그의 웃음소리가 빗줄기 틈의 공백과 어우러지며 경쾌한 리듬을 자아냈다.

“내가 마중 나오는 일이 그렇게 놀랄 일이야?”

란지에는 고개를 저었다. 놀란 지점은 따로 있다. 행여 비라도 맞을까 기숙사로 돌아갈 시간에 우산을 들고 오는 배려가 지극히 예사로운 것. 또한 당연히 그가 오리라고 무의식중에 예측한 듯이 담담한 것. 그래서 연구실 구석에 박힌 우산이 버젓하게 존재하는데도 기꺼이 함구하는 것. 그만큼 깊숙이 침투한 애정을 자연스레 누리는 자기 자신.

불을 끄고, 문단속을 하고, 시한부 연인이 드리워준 날개 아래로 몸을 맡겼다. 나란히 보폭을 맞춰 걷노라니 명치 부근이 묘하게 간지러웠다. 난데없이 조슈아와 나눈 침묵이 어색했다. 처음이었다. 무슨 말이라도 꺼내고 싶은데 얼떨떨해서 아무 생각도 떠오르지 않는다. 이토록 가누기 어려운 불안과 거북함이라니. 하릴없이 먼발치나 보며 걷기를 얼마간.

문득, 우산이 한쪽으로 쏠렸음을 깨달았다. 짧은 망설임 끝에 조슈아의 손 위로 우산대를 잡아 균형을 맞췄다. 잠잠하게 어둠을 꿰뚫던 시선이 비스듬하게 돌아왔다가 정면으로 향한다. 다시금 우산이 기울어지기에 묵묵히 힘을 실어 똑바로 세웠더니만, 잠깐만 수평을 지키고 기어이 비뚜름해진다. 그 고집이 우스워서 실소가 툭 굴러 나왔다.

“왜 웃어?”

완만한 억양, 듣기 편한 중성. 심장이 쿵 곤두박질치는 바람에 표정이 굳었다. 심장부가 덴 듯이 화끈거렸다. 왜 이럴까. 연기에 과히 몰두한 나머지 진짜 감정으로 착각했나.

“아무것도 아니야.”

“그렇게 말하면 더 궁금해지는 거 알지?”

재차 둘러대려다 퍼뜩 생각을 바꿨다. 진심으로 그에게 끌리는 기분이 들어 당황했지만, 소공작의 기묘한 마력에 일시적으로 동요하는 순간은 지금껏 몇 번이나 겪었다. 새삼스레 방어적으로 굴 필요 없다. 란지에는 내면의 파문을 의식적으로 잠재우고 우산대를 장난스럽게 흔들었다.

“네 균형 감각이 형편없어서 웃었어. 제대로 잡아봐.”

“너랑 있으면 항상 어딘가는 고장 나는걸.”

고개 숙인 조슈아의 입술이 손등에 살며시 닿았다. 말랑말랑한 촉감이 신경을 민감하게 돋우자 살결에 촘촘히 스며드는 입김은 뜨거울 뿐만 아니라 무척 자극적이었다.

“넌 내 불완전성을 양각하고, 내 결함이 극히 평범하단 사실을 깨닫게 하고, 그로써 나를 인간으로 완성시켜.”

조슈아의 마음은 직선적이고 명확하다. 시적인 수사와 비밀스런 메타포를 선호하면서도 고백만은 정제된 순은처럼 분명하다. 하지만 자신의 척박한 정신세계에서 순수한 감동이 샘솟기란 사막에서 활엽수 자라는 것만큼 비현실적인 것이다. 그저 자신에게 푹 빠진 소공작을 바라보며 싱거운 성취감만 느낄 뿐이다. 그의 거대하고 짙은 애정이 데모닉의 선천적인 분별력을 앞지를수록 계획을 성공시키는 데 이득이니까. 란지에는 미약한 기쁨을 얄팍하게 베어내 입가에 걸었다.

“언제는 수호천사라더니.”

“아니라서 실망했니?”

그럴 리가. 인간이라서 다행이라면 모를까. 그가 진정으로 천사나 악마처럼 초월적이라 까마득히 위에 뜬 별과 같이 드러난 것, 숨겨진 것을 전부 투시하면 곤란하다. 마지막에는 거짓임을 들켜도 괜찮지만, 집회 날까지는 반드시 사랑에 매료된 사람으로 비춰져야 했다.

느릿느릿 얽히는 시선에 열중하며 흡사 끌려가듯 조슈아에게 어깨를 기울였다. 턱을 젖히고, 날숨을 흘리고, 코끝이 아슬아슬하게 가까워지면 눈을 내리깐다. 익숙해진 체취가 아찔한 현기증을 일으키자마자 입술이 맞물렸다. 혀끝도 닿지 않았건만, 호흡이 벅차다. 그와 키스하는 순간엔 견고하게 쌓은 평정도 허상이 된다. 어깨와 등허리 근육이 긴장으로 뻣뻣해지면서 흡사 거미줄에 걸린 나비처럼 옴짝달싹할 수 없다.

란지에, 더 가까이. 조슈아가 반들반들하게 젖은 아랫입술을 부드럽게 오물거리며 속삭였다. 연인이면 거부하는 것이 이상할 유혹에 응해 그의 팔 안으로 몸을 묻으려는 찰나.

야옹. 빗줄기 너머에서 고양이 소리가 들렸다. 일시에 멈칫하고 서로를 바라보노라니 퍽 가냘픈 울음이 잇따른다. 둘은 비안개로 흐물흐물해진 어둠을 주시하다가 소리의 진원지로 향했다. 이윽고 화단에 늘어선 관목 틈바구니로 웅크린 고양이 한 마리가 눈에 띄었다.

“피피?”

야옹. 조슈아가 알은체하니 꼭 대답하듯 울음소리가 뒤이었다. 피피는 언제부턴가 네냐플을 제집처럼 돌아다니기 시작한 길고양이로, 처음에 이름 붙인 학생이 누군지는 불확실한데 어쨌거나 다들 피피라고 부른다. 학생 몇몇이 상자와 담요로 보금자리를 만들어줬는데 워낙 돌아다니길 좋아하는 탓에 집에서 발견되는 날은 드물었다. 그리하며 피피는 네냐플 구석구석에 여러 채의 집을 가지게 됐으며, 개중 하나는 소공작이 손수 만들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지금은 산책하러 나왔다가 비를 피하느라 돌아가지 못하는 듯했다.

“피피, 집에 데려다줄게.”

조슈아는 신중하게 손길에도 피피는 날카롭게 울며 더욱 깊이 숨었다. 도도한 피피는 사람들이 챙겨주는 밥은 먹어도 손만은 허락하지 않았다. 소공작이 고양이를 어지간히 마음 쓰는 기색이라 란지에는 기숙사까지 남은 거리를 가늠한 다음, 제안했다.

“우산은 피피 주고 뛰어갈까?”

“음…괜찮겠어? 비 맞으면 추울 텐데.”

“코앞이잖아. 뛰면 일 분도 안 걸려.”

결단을 내리기까지 오래 걸리지 않았다. 우산을 피피에게 씌워준 다음, 란지에는 조슈아와 함께 빗속을 뛰기 시작했다. 빗줄기가 귓바퀴로 야단스럽게 스치고, 구둣발이 젖은 땅을 세게 박찰 때마다 마구 철벅거렸다. 무수한 빗방울이 가리가리 부서지면서 벅찬 호흡을 수반하고 비산한다. 산만한 소음, 산만한 정신. 몇 차례인가 감정적이 되어 그의 손을 놓으려 했으나 이성적으로 손마디에 힘을 실었다.

기숙사 입구로 뛰어들 무렵에는 벌써 머리칼이 물기를 넉넉히 머금어 무거웠다. 달리기는 멈추었으나 그들은 계속 손잡은 채였다. 외려 축축한 손가락끼리 서로 교차해 단단히 깍지를 끼고 올라갔다. 자박거리는 발자취가 통로 벽에 되울리며 신비롭고 야릇한 분위기를 조성했다. 숨소리는 점차 일정한 리듬으로 돌아가는 중이지만, 맥박은 굴절된 음영처럼 일렁거렸다. 띄엄띄엄 걸린 램프마다 눈길을 보냈으나 일련의 시선은 기필코 조슈아를 거치거나 그에게 도달했다.

머잖아 빌라 앞에 도착했을 때, 란지에는 뺨에 키스하려는 조슈아를 가로막으며 말했다.

“따뜻한 차가 마시고 싶어.”

지금쯤 룸메이트 셋은 잠들었을 것이며 거실에서 달그락거리는 기척으로 깨우기 저어된다는 말까지는 불필요했다.

한 층을 더 올라가 조슈아의 독방으로 들어갔다. 캄캄한 방에는 아직 훈기가 감돌았다. 녹녹해진 코트는 의자에 걸치고 부지깽이로 벽난로 속 잿더미를 허적였다. 조슈아가 나오기 전에 지폈던 잉걸불이 다소간 살아남아 시뻘건 심장을 번뜩였다. 차가 끓여지길 기다리는 동안, 불을 되살렸다. 재와 불티가 날아오르며 명멸하는 광경은 실내인데도 하늘에 뜬 성좌를 연상케 한다.

무감하게 불꽃을 응시하던 시선이 곧 벽난로 선반에 가지런히 세워진 엽서로 갔다. 그림의 까만 밤하늘은 어둑한 방에 포개져서 무질서한 수채 무늬만이 은은하게 빛났다. 엽서를 벽난로에 던지고 싶은 충동이 들었다.

“별이 굴뚝을 타고 내려왔네.”

진한 자스민 향기에 실린 음성이 목덜미를 적셨다. 란지에는 무심결에 뻗어나가던 손으로 건네주는 찻잔을 받아들어 꼭 감쌌다. 성에가 껴서 삐걱거리던 관절이 눈 깜짝할 새에 유연해진다.

“내게 기회만 주어진다면, 모든 별을 수집해 내 공간에 장식할 거야.”

“본래 인간은 한결같이 닿을 수 없는 것을 추구하지.”

“너도 그래?”

찻잔에 입을 대려다가 멈칫했다. 혹시 그가 무언가를 알고서 묻는 것 아닌지 의혹이 불거진 까닭이다. 조심히 조슈아를 곁눈질했으나 그는 매순간 변화하는 불꽃의 이적만 좇고 특정한 대답을 기다리는 눈치는 아니었다. 알고 있다. 소공작은 아직 모른다. 혼자 지레 뜨끔했을 뿐.

어쩌면 평생 가도록 도달하지 못할 세상. 그러나 멈출 순 없다. 수십 세대가 필요할지라도 언젠가 저 찬란한 별에 닿으리라는 믿음이 있기 때문에. 란지에는 깊어지는 눈빛을 찻잔에 담아 숨겼다.

“천문학자들 의견으론 별의 크기는 대륙의 수백 배가 넘는다더군. 네 방에 장식하려면 장난감 별로 만족해야 할 것 같은데.”

“장난감은 귀엽지만, 내 미적 기준을 충족시키진 못해서. 나는 그림을 걸고 싶어.”

“…그림?”

불안한 확신을 담아 묻노라니 아니나 다를까, 조슈아가 벽난로 위에서 엽서를 집어 들었다.

“이거 말이야. 하루빨리 보러 가면 좋겠어. 이제 일주일 남았네.”

구체적인 기한을 듣자 사형 선고라도 들은 기분이다. 교수대가 저만치에서 아른거리는 기분이라니. 조슈아를 막는 데 실패하면 어떤 일이 발생할지 상상하고 오한이 치밀어 뜨끈한 찻물을 단숨에 들이켰다. 식도에서 가슴까지 화끈해진다. 쓰린 혓바닥을 입천장에 문지르는 동안에도 소공작의 말은 계속됐으며, 음절마다 무시하기 어려운 설렘이 조밀하게 치장됐다.

“실제로 보면 훨씬 찬란하겠지? 이 몽환적인 물병자리 앞에 서노라면 얼음처럼 차갑고 감로처럼 달콤한 별빛이 내 머리로 파랗게 쏟아져 내릴 거야. 그걸 매일 밤낮으로 볼 수 있으면 얼마나 기쁠까? 화가를 만나서 꼭 작품을 팔아달라고…”

“조슈아.”

과감히 말허리를 자르고 찻잔은 벽난로 위에 놓았다. 더불어 조슈아의 손에서 빼낸 엽서도 본래 위치로 돌려놓으며 장작불을 등지고 마주섰다. 그의 눈동자에서 불과 별이 멀어진 자리로 한 사람의 모습이 가득 찬다. 란지에는 벨벳처럼 순한 뺨을 손바닥으로 살그머니 덮은 다음, 아래로 더디게 쓸어내렸다.

“내가 있는데 다른 생각하지 마.”

가능하다면 심장이라도 움켜잡아서 미술관 따위는 떠올리지도 못하게 하고 싶었다. 목적이 클럽의 비밀 유지가 아니라면 최초로 가져보는 로맨틱한 욕구였으리라.

조슈아가 두 손을 꼭 잡고 고개 숙였다. 아슬아슬하게 입가를 비끼고 볼의 솜털에 스친 입술이 끝내 귓바퀴에서 멈췄다. 간질간질한 숨결이 혈관을 타고 흘러, 차츰 소공작의 존재감에 중독된다.

“걸핏하면 나 몰래 딴생각에 잠기는 사람이 누구더라.”

산들거리는 목소리가 여과 없이 흘러들자 머리털이 쭈뼛 섰다. 경직된 몸을 그러안은 조슈아가 캔버스에 점묘하듯 목 언저리에 연달아 입맞춤하기 시작했다. 아울러 미소가 잘랑잘랑 흔들리며 살에서 살로 미미한 진동을 전달했다. 란지에는 도리 없이 한숨만 터트리며 고개를 비틀었다. 애초에 그의 예리한 감을 완벽히 피하리란 기대는 하지도 않았다. 적절한 선까지는 능히 속여 넘길 수 있고, 의심도 알맞게 써먹으면 주의를 휘어잡을 수단이 된다.

“내가 뚫어지게 쳐다보는 것도 모르잖아.”

“그건…”

“괜찮아, 란지에.”

척추의 윤곽을 차근히 덧그리던 손이 대담하게 셔츠 걷고 들어왔다. 은근하게 휘어진 등허리가 탄력적인 곡선을 그렸다.

“지금은 그러고 싶어도 못하게 해줄 테니까.”

그렇게 말하는 본인이야말로 오직 한 가지 생각과 욕망에만 매몰된 사람으로 보였다. 그걸 증명하듯, 격정적인 키스를 기점으로 윗옷은 점점 엉망으로 흐트러졌다. 거실을 가로질러서 침실로 들어가 익숙한 체취가 밴 시트 위로 쓰러지기까지 일사천리였다. 이제는 푹신한 매트리스에서 뒹굴고, 엉키고, 백열의 한복판에서 헐떡이는 일만 남았다. 하루, 이틀, 더 많은 밤이라도 상관없다. 첫날밤도 아닌데 더 준다고 뭐 대수겠는가. 란지에는 빙긋 웃으며 조슈아를 끌어당기고, 입으론 짐짓 얄팍한 걱정을 속삭였다.

“내일 아침 수업 있어.”

“뭐 어때.”

이윽고 셔츠의 마지막 단추가 풀렸다.

“일어날 걱정은, 잠들 수 있을 때나 하는 거야.”


*


“나한테 이런 걸 내미는 녀석들은 대개 꿍꿍이가 있는데.”

안경알 너머에서 밤색이 눈이 속내를 가늠하려 뚫어지게 이쪽을 쳐다보았지만, 란지에는 개의치 않았다. 이 친구는 본디가 남 일에 참견하기 좋아하는 성격이 아니다. 하물며 손아귀에 동전이나 술병을 쥐여 주면 범죄가 아닌 바에야 사소한 의문은 뒤도 안 돌아보고 내던질 녀석이다.

“흠흠, 그래서, 무슨 일이냐?”

결국 찰랑거리는 술병은 네냐플 최고 주당의 침대 아래로 사라졌다. 란지에는 지체 없이 본론을 꺼냈고, 머잖아 술 한 병에 버금가는 부탁은 뭐든 들어줄 요량이던 표정이 구겨졌다.

“미간에 모범생이라고 써 붙인 네가 근신 처분을 받는 방법은 알아서 뭐 하려고 그러냐? 더욱 개운치 않은 점은, 하필이면 그 방법을 나한테 묻는다는 거지.”

“그럼 위대한 네냐플을 특례 입학한 장학생 탐정 말고 누구에게…”

“너까지 그 소리냐? 알았다고, 알았다. 뭘 하려는지 모르겠다만 근신이라면 무단 외박, 술병 반입으로 부족하지 않겠냐. 사고를 쳐도 단단히 쳐야 할 거다. 평소 짜증나던 녀석을 주먹다짐으로 보건실에 보내던가.”

주먹질이라니. 란지에는 슬쩍 미소하며 마른 손가락을 쥐락펴락했다. 폭력 행사가 혐오스러운 것은 차치하고, 자신의 손은 만년필 다루기에나 적합했다. 어설프게 남을 때려봤자 되레 손만 상처 날 것이다.

“그건 어렵겠군.”

직접 사고를 치겠다는 자백이나 똑같으니 막시민이 미심쩍은 눈빛을 띠었다. 란지에는 어깨만 으쓱여 시치미를 뗐다.

“아니면 가볍게는 빌라 침입, 무겁게는 절도 정도겠구만. 그러고 보니 최근에 근신을 받은 놈이 다른 녀석 과제를 베꼈다가 걸렸다더라고.”

“알겠어. 고맙다.”

“미친 짓이나 하지 마라. 주변에 맛간 놈은 조군 하나로 족하니까.”

바로 그 맛간 친구 때문에 미친 짓거리를 계획하는 줄은 짐작도 못하겠지. 우연히 떠올린 근신 처분은 아주 괜찮은 방법이었다. 강의를 듣지 못하고, 마을로 외출하지도 못하고, 근신이 풀릴 때까지 기숙사 청소를 해야 했다.

물론 대마법사도 아닌데 조슈아가 근신을 받게끔 조작할 수는 없다. 처분 받을 사람은 자신이고, 그걸로 발목을 잡을 심산이다. 미술관까지 다녀오려면 족히 하룻낮이 걸려 빌라를 비우기는 불가하니, 조슈아라도 그림 한 점을 위해 퇴학 위험을 감수하라고 권하지 못할 것이다. 둘이 절박한 사랑의 도피를 할 것도 아니고…….

“조슈아에겐 내가 이런 걸 물었다고 말하지 마.”

제 친우의 이름이 언급되자 막시민은 대번에 눈살을 찌푸렸다. 그대로 시선만 교환하기를 잠시. 그가 안경을 추켜올리며 한층 날카롭게 물었다.

“대체 뭘 꾸미는 거냐?”

“그걸 얘기해주지 않으려고 줬잖아.”

눈짓으로 침대 밑을 가리키자 말문이 막힌 표정으로 팔짱을 척 꼈다. 술병을 돌려줄지 말지 고민하는 눈치였다. 막시민이 무엇보다 중요하게 여기는 가치는 목숨인데, 그의 순위에서 조슈아와 제 생명이 엇비슷한 무게를 지녔대도 놀랍지 않을 것이다.

“걱정할 필요 없어. 조슈아한테 해가 될 일은 아니야.”

그러자 막시민도 군소리를 덧붙이지 않았다. 이제 방법을 골라서 자연스레 들키는 일뿐이었다. 과제를 베낀 학생이 있다고? 강의 들으랴 과제 하랴 보조 연구원 노릇하랴 눈알이 빨개지도록 바쁜 모범생이 실수로 저지를 법한 일이다. 그리 생각하며 밖으로 나선 순간.

“란지에? 네가 막시민 방에서 나오는 광경을 다 보네.”

때마침 조슈아가 빌라로 들어오기에 눈이 마주쳤다. 란지에는 재빨리 연인답게 웃어 보였다.

“빌릴 게 있어서. 혹시 날 보러 왔어?”

“혹시, 가 아니라 당연히 널 보러 왔지.”

문 너머에 친구가 있거나 말거나 그는 태연하게 허리를 끌어안았다. 보는 눈도 없건만, 애정을 과시하듯 뺨을 번갈아가며 맞대며 비주도 나누었다. 소공작은 기분이 좋아 보였다. 비단 오늘만의 일이겠는가. 사귄 날부터 매순간 행복감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다. 때때로 란지에는 어린아이 앞에서 반듯이 잘린 케이크 조각을 든 기분이 들었다. 언제든지 달콤한 크림을 건네서 기쁨을 줄 수도, 떨어뜨려 뭉개서 절망을 줄 수도 있었다. 한 사람을 좌지우지할 강력한 힘. 세간에선 이를 권력이라 칭한다. 그게 사실이다. 자신은 분명 소공작보다 감정적으로 권력적 우위에 있다.

“안됐지만, 과제하러 도서관에 가려던 참이라 어울려주기 힘들어.”

지그시 어깨를 밀어 떨어뜨리니 조슈아가 금세 풀이 죽는다.

“무슨 과제?”

“내일 역사 강의에 제출할 레포트. 요 며칠 바빠서 손도 못 댔거든. 같이 가봐야 지루할 테니까 나중에 봐.”

“그럼…어쩔 수 없네. 내가 도와준대도 기뻐할 네가 아니지? 그나저나 로젠크란츠가 과제를 코앞에 닥쳐서 급하게 해치우는 날도 다 있구나. 그 교수님, 엄청 깐깐하잖아. 너랑 논쟁한 다음부터 더 그러신 것 같아.”

조금 전만 해도 기운 없던 조슈아가 생글생글 웃었다. 그래도 연인이 과제를 못 낼 위기인데 가벼운 위기에 닥친 모습이 처음이라 들뜬 모양이다.

불현듯, 역사 교수와 설전을 벌였던 날이 떠올랐다. 모든 학생이 창백해진 가운데 혼자만 유쾌하게 눈을 반짝거리던 소공작. 그 다음으로 눈만 마주쳐도 언짢은 기색을 풍기는 교수의 얼굴이 뇌리에 스쳤다. 그래서 역사 과제를 택했다. 때마침 시일이 적절했을 뿐만 아니라, 그 교수라면 건방진 제자를 혼내주고 싶어 벼르고 벼를 테니 필시 쾌재를 부르면서 근신 처분까지 이끌어낼 테니까.

“그러니 더 잘 써내야지. 보아하니 넌 끝냈나 보군. 난 과제도 못하게 이리저리 끌고 다녀놓고.”

조슈아가 눈을 데굴데굴 굴렸다. 어련할까. 그에겐 무슨 과제물이든 글자 쓰는 시간만 주어지면 손쉽게 끝나는 일이다. 당연히 끝내고도 남았으리라 짐작했다.

“으음, 넌 도서관에 간다 그거지? 난 오랜만에 루시안이랑 나가야겠다. 과제 끝내면 꼭 날 보러 와야 해. 응? 기다릴게.”

사랑해, 란지에. 속삭임을 덧붙인 소공작이 뺨에 키스하고 빌라 밖으로 되돌아 나갔다. 화려한 공작새처럼 꼬리가 길어 문도 닫지 않은 채였다. 란지에는 물끄러미 열린 문을 응시하다가 천천히 자신의 책상으로 걸어갔다. 서랍을 열자 진작 끝낸 역사 과제가 고이 들어 있다. 열심히 써서 아쉽지만, 이번엔 폐기할 수밖에.

이번 일로 뭇 교수의 신뢰가 무너지겠지만, 그리 아쉽지 않다. 어차피 성적이나 평판에 연연한 적 없다. 그저 퇴학만 아니면 됐다. 학원 생활을 포기하기엔 지금의 다디단 휴식이 마음에 들고, 무엇보다 지스카르를 실망시키기 싫었다.

란지에는 잠깐 뜸들이다가 도서관으로 향했다. 오랜만에 혼자서 책이라도 읽으며 적당히 시간이나 때울 셈이다. 진짜 중요한 일은 그 뒤였다.


*


거무튀튀한 돌로 건조된 북탑 벽은 석양빛을 듬뿍 받아 검붉은 광택이 흐르고, 꼭대기는 마치 벌겋게 불타는 듯하다. 저물녘의 기숙사 입구엔 아직 램프가 켜지지 않아 어슴푸레하다. 란지에는 그늘에 침수된 나선통로를 올라 도토리 빌라로 들어갔다. 거실은 아주 고요했다. 확인 차 돌아가면서 문을 두드렸으나 안에서는 어떤 인기척도 나지 않았다. 낮에 방에 있던 막시민도 자리를 비웠다면 소공작도 아직 밖에 있겠지. 아무래도 통금까지 아슬아슬하게 놀다가 들어올 모양이다.

도서관에서 빌려온 책은 내려두고 냉랭한 벽난로에 불을 던져 부지깽이로 뒤적이기 시작했다. 장작에 붙은 불이 제대로 타기 시작하니 금세 훈기가 돌았다. 찬바람에 경직된 뺨이 연하게 풀리는 감각을 즐기는 여유 따위도 없이 서랍에서 레포트를 꺼냈다. 만일을 대비해 내일까지는 남겨두려 했으나 마침 혼자이니 일찌감치 처분하기로 했다.

티테이블에 누구 것인지 모를 책, 종이가 쌓여 차곡차곡 쌓여 있지만, 별다른 관심을 두지 않았다. 거실에 룸메이트들의 물건이 흩어져 있는 일은 일상다반사였다. 그 위로 레포트를 놓으니 일순, 이 계획의 성공 가능성에 대한 의문과 회의감에 빠졌다가 금세 고개를 저어 털어냈다. 자신에겐 클럽을 보호할 의무가 있고, 지금 임무를 수행하는 것과 다를 바 없었다. 마침내 과제를 불속으로 집어넣으려는 때.

“란지에! 있어?”

별안간 문이 벌컥 열렸다. 익숙한 목소리에 다급히 종잇장을 간추렸다. 불과 얼마 전에 만났던 소공작은 몇 해만에 해후한 듯이 만면에 반가운 미소를 가득 띠었다.

“일찍 왔군.”

“네가 보고 싶어서 혼자 빠져나왔지. 과제는 끝냈어? 아, 들고 있는 그거야? 나도 보여줘.”

갑작스러운 요청에 놀라서 평상시에는 하지 않을 행동을 하고 말았다. 다시 말해 레포트와 조슈아를 번갈아 본 다음, 손을 뒤로 돌리고 예민한 어조로 물었다.

“갑자기 왜?”

역시나 조슈아도 눈을 동그랗게 뜨곤 나지막하게 웃었다. 분명 이상하다고 생각하지만, 단지 놀랐을 뿐이지 크게 개의치 않는 기색이다.

“왜긴, 한나절 만에 얼마나 잘 썼는지 궁금해서 그렇지. 대신 내 것도 보여줄게.”

그 덕에 란지에는 시침 뚝 떼고서 조금 전의 실수를 만회할 기회가 생긴 셈이었다. 물론 그에게 보였다간 계획이 어긋나니 그럴 순 없었다. 들고 있던 레포트를 테이블에 놓인 종이뭉치 위에 올렸다. 가끔 비밀은 명쾌하게 드러나 있어야 은밀하다.

“이건 아냐. 아직 완성을 못 했어. 그런데 네 레포트를 읽는 건 구미가 당기네.”

“그게 뭐가 어렵겠어. 내 방에 가서 차만 마시면 돼.”

그는 가볍게 어깨를 으쓱였다. 탁 트인 공원에서 산책하자는 제안처럼 담백했다. 매우 일상적이고 무신경한 유혹. 진작 그의 손을 잡고 넘어가 주기로 결정했으나 절대 손쉽게는 아니었다. 은근히 사탕을 흔드는 편이 좋았다. 머잖아 거머쥘 사탕인 것을 알면서도 안달하고 조르는 놀이를 즐기고 싶은 조슈아를 위해서.

“차 향기에 취해 샐녘에나 돌려보내려고?”

“욕심 같아서는 대낮까지 취하고 싶은데.”

“앞으로 그럴 날이야 얼마든지 있을 테니 오늘은 욕심으로만 남겨놔. 난 학점을 망치고 싶지 않으니까.”

자발적으로 학점을 망치기로 작심하고 안간힘을 쓰는 중이며 앞으로 그와 밤을 지새울 날도 며칠 남지 않았지만, 자신조차 진실이라 착각할 만큼 거짓말이 술술 나왔다.

“그럼 차라리 방으로 가져가서 하면 어때? 나는 차를 따라주고, 너는 과제를 하고.”

“네가 얌전히 있겠다고 약속하면 그것도 나쁘지 않지.”

휘움한 눈썹이 가늘게 찌푸려진다. 조슈아에겐 찡그린 표정조차 고상하게 비춰지게끔 만드는 매력이 있다.

“널 방해할 거라고 생각하는 거야? 나를 그렇게까지 못 믿다니, 조금 충격인걸.”

“믿어. 날 지척에 두고 가만히 있을 네가 아니라는 믿음일 뿐이지.”

“가만히 못 있도록 부추기는 쪽이 누군데. 얄미운 소리 하긴.”

뺨이라도 꼬집을 것처럼 손끝으로 볼을 살짝 잡는가 싶더니 그저 슬슬 어루만졌다. 최선을 다해 살결의 감촉을 똑똑히 느끼려고 애쓰는 손놀림이다. 그의 눈길은 깃털이 되어 위에서 아래로, 아래에서 위로, 이목구비 전체를 찬찬히 훑었다. 목구멍으로 갈증이 파고든다. 란지에는 어떠한 의도도 없이 순수하게 눈감고 싶어졌다.

욕구라니, 자신에게 어울리지 않는 감정이다. 목적을 위해 조슈아의 손바닥에 뺨이라도 비빌 준비가 되어 있지만, 지금은 그를 떨어뜨려야만 한다는 강박에 사로잡혔다. 그러나 자칫 거부하는 것으로 비춰지지 않게 조심히 그의 손목을 잡고 끌어내렸다.

“오늘은 절대 넘어가지 않으니까 기대하지 마.”

짓궂은 소년처럼 킥킥 웃음을 터트린 조슈아가 고갯짓으로 빌라 문을 가리켰다.

“아무것도 안 했는데 성급하기도 해라. 방으로 가자. 최고로 맛있는 차를 대접해줄게.”

그가 먼저 뒤돌자마자 눈으로는 뒷모습을 살피며 손으로는 대충 얹어 놨던 레포트를 책 밑에 깔았다. 일부러 뒤적이지 않는 한, 다시 돌아오기 전까지 남의 눈에 띄는 일은 없을 것이다. 그리고 도서관에서 빌린 책에 양피지 몇 장을 끼워 팔에 안고서야 조슈아를 따라 나갔다.

소공작은 본인이 장담한 대로 훌륭하게 우린 차를 내어주었다.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찻물이 몸을 따뜻하게 했다. 오랜만에 도토리 군단 친구들과 나가서 뭘 했는지 얘기하는 목소리에 귀기울이고, 적당한 때에 과제를 보여 달라 요청했다. 조슈아는 농담이었는지 모르지만, 란지에는 그의 레포트가 필요했다.

본래는 책의 일부를 그대로 베낄 심산이었는데 책을 통째로 인용한 것만으로 근신이 내려질지 불확실하니 조슈아의 과제도 써먹으면 좋을 성 싶었다. 나중에 어떻게든 둘러댈 방법도 있고, 자신이 딴사람의 성과물을 탐낸다면 데모닉 것쯤 되어야 그럴싸하다는 합리적 이유에 근거한 결정이다.

문제는 조슈아가 도통 보여 주지 않는 거였다. 이따 네 과제가 완성되면 그때 교환해서 읽자는데 당장 봐야겠다고 고집 부릴 명분이 없다. 결국 란지에는 가급적 피하고 싶었던 수단을 택하기로 했다.

“그런데 저녁은 밖에서 먹었어?”

기숙사로 오기 전에 식사를 해결하기에는 이른 시간임을 알기 때문에 일부러 물어본 것이다. 짐작대로 조슈아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애들이랑 군것질만 조금 했지. 아, 그러고 보니 저녁때구나. 같이 식당 가자.”

“난 별로 생각이 없으니까 다녀와. 린디즈에서 사놓은 올리브가 있으니까 이따 먹으면 돼. 네가 올 때까지 과제 마무리하고 있을게.”

“그걸로 저녁을 대신한다고? 난 그 시고 짜고 매운 걸 무슨 맛으로 먹는지 모르겠다니까.”

“무슨 맛인지 모르겠는 맛이지.”

대단찮은 농담에도 즐겁게 웃음을 터트린 그가 곧이어 방을 나섰다. 앉은 채로 그를 배웅하고 혼자 남은 란지에는 발소리가 멀어지길 기다린 뒤에야 자리에서 일어났다.

조슈아의 책상에는 늘 양피지가 쌓여 있다. 직접 작곡한 교향악 악보, 내로라하는 극장에서 탐낼 연극 대본, 인물이든 사물이든 자유롭게 그린 소묘 등등. 역사 과제를 찾으려 종이더미를 조심히 뒤적거리던 중, 누구보다 잘 알지만 무척 낯설게 보이는 인물화를 발견했다. 바로 자기 자신 말이다.

거울을 마주할 때와는 또 다른 느낌이었다. 아마도 그린 이의 감정과 주관적인 시선이 반영되었기 때문이리라. 한 번쯤은 네 그림이라며 보여줄 법도 한데 지금까지 그런 적이 없었다. 란지에는 그 점을 의외라고 생각했지만, 이내 관심을 거뒀다. 지금은 조슈아가 뭘 그리든 중요하지 않다.

곧 과제를 찾아내 빠르게 훑기 시작했다. 짧은 시간에 문장을 그대로 외우기는 어려웠다. 주된 논점을 파악해 서론부터 결론까지 똑같게 전개시키면 교수의 의심을 사기에 충분하다. 그러나 란지에는 너무 집중한 나머지 방으로 가까워지는 기척에 신경 쓰지 못했다. 문이 열린 때는 막 절반을 읽어나가던 중이었다.

“란지에, 애들이 간식을…응? 거기서 뭐 해?”

순간, 등줄기가 화끈하면서 식은땀이 흘렀다. 들킨다고 별일이야 있겠느냐마는, 괜한 의심을 사서 일을 복잡하게 만들기 싫었다. 문을 등지고 있었던 덕에 란지에는 기민하게 레포트와 자신의 얼굴이 그려진 소묘를 바꿔 들 수 있었다.

“네 그림을 보고 있었어. 내 얼굴도 있던데.”

천연덕스럽게 그림을 들어 조슈아 눈에 보여주었다.

“아, 그거? 마음에 드니? 나는 네 실물에 훨씬 못 미쳐서 별로더라.”

그 소리에 다시금 그림을 들여다보았다. 수준을 평가할 안목은 없지만, 섬세하게 균형 잡힌 형태만 보더라도 잘 그렸다는 사실은 자명하다. 헌데 실물에 못 미치다니. 하필이면 자신의 얼굴이라 긍정도 부정도 못 하고 가만히 그림을 내려놓았다.

“그보다 갑자기 왜 돌아왔어?”

“나 다녀오는 사이에 배고플지도 모르니까 올리브 절임 갖다 주려고. 마침 다들 돌아와서 파이도 얻었어. 참, 그리고 이건 뭐야?”

티테이블에 차례로 올리브 병, 달콤한 냄새가 새어나오는 봉투를 내려놓더니 마지막으로 옆구리에 끼고 있던 양피지 몇 장을 내밀었다. 영문도 모르고 다가가노라니 조슈아가 한마디 덧붙였다.

“역사 레포트 같던데.”

맙소사. 란지에는 완전히 당황해서 한달음에 달려가 그의 손에 들린 것을 낚아챘다. 분명히 책 아래에 깔았는데 어떻게 찾았단 말인가.

“마음에 안 들어서 버리려던 거야. 급하게 쓴 티도 많이 나고.”

“버린다고? 왜? 어디 줘 봐.”

“안 돼. 이상해서 보여주기 싫어.”

너무 치졸한 대답이라 스스로 말하고도 민망해 뺨이 조금 화끈거렸다.

“내 과제를 빨리 끝내버리고 놀고 싶은 마음은 알겠지만…”

“아니라니까. 네 기준은 너무 높아, 란지에. 내가 읽어볼게.”

세상에서 제일 기준치가 높은 사람이 무슨 소리인가. 과제가 아니라고 발뺌하기는 글렀으니 열심히 조슈아의 관심을 물리칠 도리 외엔 없었다. 끈질기게 보여 달라는 그를 피해서 주춤주춤 물러나다가 이윽고 벽난로 앞에 이르렀다. 이대로는 뺏길지도 모른다는 위기감이 솟구쳤고, 급기야 극단적인 선택을 했다. 바로 도토리 빌라에서 미처 하지 못했던 일, 불태우는 것이다. 과감히 벽난로 속으로 과제를 던지자 불붙은 종이가 화르르 타올랐다.

그 광경을 보노라니 속이 후련해졌다. 진작 태우면 좋았을 것을. 물론 조슈아는 도둑 하나 내쫓으려고 집을 불태운 사람이라도 목격한 표정이었다. 종이에서 잿더미로 순식간에 형태가 변해버린 레포트를 황당하게 쳐다보던 그가 실소를 터트렸다.

“그렇게 싫었어? 태울 것까진 없잖아.”

“네가 집요하게 구니까 그렇지.”

시원히 던져버린 것까진 좋지만, 이제 정말 과제를 새로 쓰지 못하면 입학 이후 최초로 아무것도 못 내는 사태까지 왔다. 란지에는 가져왔던 책과 만년필을 챙겼다. 벌써 저녁이 지나고 있으니 얼른 책을 베끼고 반이나마 읽었던 조슈아의 과제도 섞어 넣어야 제시간에 잠들 수 있다.

“넌 저녁 먹으러 가. 난 그냥 빌라로 갈게.”

조금 전 소공작이 가져온 올리브 절임, 레몬 파이를 보고 멈칫했다가 함께 안아들었다.

“과제 도와줄까?”

“아니. 됐으니까 식당 문 닫기 전에 식사해.”

딱 잘라 거절하니 조슈아는 어쩐지 풀이 죽은 기색이다. 곧 란지에는 이유를 깨달았다. 자신이 화났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저런 표정은 좀처럼 보기 어려워서 마음에 걸렸으나 단호하게 방을 나섰다. 그러나 도토리 빌라로 돌아가서 예기치 못한 사태를 맞닥뜨리라곤 상상도 못했다.

란지에가 빌라 문을 열었을 때, 루시안은 눈에 띄게 파리해진 얼굴로 거실을 배회하며 이렇게 중얼거리고 있었다.

“어떡해, 어떡해, 어떡하지, 어떡해…!”

가만 보니 보리스와 막시민도 여기저기 뒤지는 모양새로 미루어 무언가를 찾는 듯했다.

“무슨 문제라도 있어?”

그제야 루시안이 허둥지둥 달려와 표정은 물론이고 온몸을 동원해서 본인이 엄청난 난관에 봉착했음을 알렸다.

“없어! 없어졌어! 내! 내 거!”

“침착하게 얘기해 봐.”

“내 역사 레포트가 없어졌어! 저기 책 위에 올려놨는데! 혹시 못 봤어? 밑에는 네 레포트가 있던데.”

그가 가리킨 티테이블에는 아까 란지에가 보았던 책이 그대로 있었다. 그러나 책 위에는 아무것도 없고, 밑에만 종이 몇 장이 깔린 채였다. 불길함이 엄습했다. 조슈아의 방으로 향하기 전까지 책에 얹혀 있던 양피지 뭉텅이는 사라지고, 밑에 숨겨둔 것만 남아 있다. 그럼 아까 불태운 것은 뭐지?

설마, 그럴 리가. 하지만, 그렇지만.

조심히 책 밑에 깔린 것을 살펴보니 불행하게도 정말 자신이 쓴 과제였다. 다만 세 장이 사라졌을 뿐. 다시 울상이 된 루시안을 돌아보노라니 본의 아니게 그의 과제를 불사른 란지에는 현기증이 날 지경이었다.

결국 루시안의 레포트가 한 줌 잿더미로 화한 경위를 설명하기 위해 조슈아를 불러왔다. 과제물이 일부 섞인 채로 뒤바뀐 사실을 전해들은 그의 안색도 두드러지게 어두워졌다.

“내용은 안 봤어? 기억나는 거 없어?”

“아니. 읽었으면 바로 알았겠지. 필체가 확연히 다른데.”

평소에는 한 시도 조용할 새 없는 루시안이 넋이 나가 묵묵히 카펫만 내려다보는데 어찌나 처량하던지, 란지에는 작은 동물이라도 괴롭힌 것처럼 깊은 죄책감을 느꼈다.

“미안해, 루시안. 도와줄 테니까 다시 쓰자.”

자신의 계획 때문에 그가 피해자가 되었으니 과제를 미제출하는 한이 있더라도 사태 수습이 우선이었다. 작금의 돌발 사고에 일조한 조슈아도 고개를 끄덕였다.

“근본적으로는 내가 실수한 거니까 책임지고 도울게. 란지에, 너는 네 과제부터 마저 끝내.”

“란지에는 다 쓴 거 아니었어?”

“저건…쓰다가 말았던 거야.”

온종일 거듭했던 거짓말과 변명으로 둘러대니 루시안은 이 와중에도 고난을 나눌 동료가 생겼음에 기뻐했다.

한사코 혼자 도와줘도 된다는 조슈아.

과제가 불탔는데도 대범하게 같이 힘내자고 주먹을 불끈 쥐는 루시안.

란지에는 어떻게든 과제를 망치는 길로 가려 했으나 본인이 빚어낸 거짓과 오해의 구렁텅이에 빠져, 종국에는 멀쩡히 완성한 레포트를 두고 새벽까지 벼락치기 과제에 매달려야 했다. 단언컨대 두 번 다시는 겪기 싫은 경험이었다. 그렇게 조슈아의 미술관행을 막으려던 계획은 헛되이 불발되는 결말을 맞이하고 말았다. 이제 남은 시간은 나흘뿐이었다.


*


그간 부단히 애쓴 것이 무색하게 미술관에 가려는 조슈아의 의지는 굳건했다. 심지어 어제는 미술관 인근에 구경할 장소를 추려서 어딜 가면 좋을지 묻기까지 했다. 모처럼 함께 교외로 나가는데 주변이라도 둘러보면 즐거울 거라나. 이쪽은 가지 못하게 막을 계책을 짜내느라 관자놀이가 지끈거리는데 관광이라니?

두통에 시달리던 란지에는 문득, 교내에서 끊이지 않는 기침 소리에 생각이 미쳤다. 차가운 날씨, 더군다나 며칠 전 비가 내린 탓인지 최근 감기 환자가 속출하고 있었다. 치료 마법은 물리적인 상처, 가령 뼈에 금이 가거나 살이 찢어진 종류의 부상에나 효과적이고 감기는 단박에 낫기 어려웠다.

이러한 까닭으로 감기 환자가 되어 앓아누운 지도 이틀째. 신체적인 고통이야 이골이 나도록 경험했으므로 과거의 단편을 틈틈이 상기하면 그럭저럭 연기할 만했다. 솔직히 가짜 환자 노릇보다 조슈아의 사려 깊은 눈빛이며 지극정성이 더 견디기 고되었다. 매끼마다 식당에서 특별식을 챙겨오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물 한 잔도 제 손으로 갖다 줘야 직성이 풀리는 듯 굴었다. 꼼짝없이 누워 수발만 받자니 성공의 예감이 들어서 다행스러운 한편, 헌신적인 병간호를 종일 마주하고 이제 와서 가슴속이 따끔거렸다.

“계속 붙어 있을 것까진 없어.”

감기 환자랍시고 누웠을 때부터 조슈아는 침대 맡에 의자를 두고 앉아 떠나지 않았다. 미술관을 빙자한 집회에 같이 가겠다고 하지만 않았어도 그와 사귀지 않았겠지만, 모순적이게도 미술관 걱정만 아니면 조슈아와 사귀는 일 자체는 꽤 괜찮았을지 모른다.

“신경 쓰이면 멀리 앉을까?”

그가 빙긋 웃으며 방구석을 가리켰다. 당연히 나갈 생각은 요만큼도 없는 것이다. 객관적으로 조슈아는 훌륭한 간병인이었다. 필요한 것을 제공하고, 따분하지 않을 정도만 말동무를 해주고, 남는 시간에는 얌전한 독서가 또는 사색가로 침묵을 지켰다. 떠들기라도 하면 그 핑계로 잠깐 내보냈을 텐데, 그러기엔 조슈아가 매우 점잖고 고상한 사람이었다.

“고작 감기야.”

“988년에 아노마라드 북부에서 감기가 돌았는데 사망자가 수십 명에 달한 적이 있어. 어제부터 제대로 일어나지도 못하잖아. 다 나을 때까지 안심하지 마.”

“그럼 옮을지도 모르니까 더더욱 떨어지는 편이 좋겠네.”

자신이 왜 그를 떨어뜨리지 못해 안달인지, 본래는 조슈아를 붙들고 아무데도 못 가도록 만들려는 의도였는데 희한하게 상황이 역전됐다.

“염려해줘서 고맙지만, 난 괜찮아. 잔걱정은 하지 말고 쉬어. 회복에 안 좋아.”

그가 서늘한 이불 홑청에 올려둔 손을 그러쥐었다. 잇달아 애간장이 타도록 천천히 내려온 입술이 손등과 접촉하는데 어찌나 조심스럽던지, 흉곽이 갑갑하게 조여든다. 심장이 전신을 울림통 삼아 고동치고, 뜨거운 수프라도 마신 것처럼 속이 후끈거리기 시작했다. 목까지 덮인 이불이 답답해지는데도 그 속으로 고개를 묻었다. 등에서 땀이 배어나왔다. 열이 나는 건가.

“며칠 더 쉬면 나아.”

“며칠이라니. 내일은 털고 일어나야지.”

빨리 나으라는 격려로만 들리지 않는 까닭은 당장 내일이 엽서에 적힌 날이라 그렇겠지. 애인이 아파서 드러누웠어도 고대하던 그림은 꼭 보러 가겠다는 뜻인가. 이 떨떠름한 심경을 뭐라 정의할지 모호했다. 이를테면 서운함, 배신감, 실망감, 그 비슷한 어떤 것들. 란지에는 그림에 집착하는 그가 못마땅하고, 나아가서는 나보다 그림이 좋으냐며 어리숙하게 굴고 싶어졌다. 일시적으로 사랑을 연기하는 사람이 갖기에는 부자연스러운 감정. 당혹한 탓에 퉁명스러운 대꾸가 흘러나갔다.

“글쎄. 기대하진 마.”

“어떻게 기대를 안 하겠어?”

하마터면 코웃음이라도 칠 뻔했다. 어련하겠는가. 아름다운 것이라면, 특히 마음에 든 작품이라면 제가 보고 듣고 만져야 직성이 풀리는 성격이다. 레코르다블, 하이아칸처럼 아주 먼 데도 아니고 마차로 서너 시간 거리였다. 살뜰히 보살펴주는 행동에 안심하다가도 눈에 안 보이면 마음 한구석에서 불안이 샘솟는다. 자신을 두고 혼자라도 다녀오진 않을까. 겨우 하루, 사귀는 사람 때문에 가지 못할 이유는 없는데.

“넌 왠지 낫기 싫은 것처럼 보이네.”

조슈아의 웃음에서 의심이 엷게 배어나왔지만, 깃털처럼 가벼이 팔랑대는 수준에 불과했다. 잡아채서 살살 간질여도 될 무게여서 기꺼이 써먹기로 했다. 란지에는 줄곧 잡고 있던 그의 손가락을 만지작거렸다. 마디, 뼈대, 핏줄. 그리고 체온이 투명한 촉감에 붉은색으로 온화하게 번진다.

“모처럼 아르님 소공작이 곁에 붙어서 안 떨어지는 상황을 즐기려고. 이런 기회는 여간해서 찾아오지 않으니까.”

“농담하는 걸 보니까 금방 낫겠는걸.”

“농담 아니야.”

이중주를 연주하듯 우아하게 얽히던 손가락이 멈춘다. 미소가 걷히고 난 표정에 이번에야말로 첨예한 의구심이 깃든다.

“뜻밖이네. 내가 계속 여기 있어서 불편하잖아.”

“불편한 적 없어. 아플 때 누가 옆에 있는 게 생소해서, 어쩔 줄 모르는 거지.”

“생소해? 간호해주는 사람이 없었어?”

란지에는 눈을 감았다. 어린 시절에는 어머니가 계셨고, 란즈미도 작은 고사리손으로 이마를 짚어 주기도 했다. 한 번은 아픈 날에 부친이 찾아온 날도 있었다. 그러나 굳건한 땅이라 여겼던 가족이 산산조각 부서져 몸과 마음을 유린한 후, 오래도록 아파도 돌봐줄 사람이 없었다. 동생을 위해 아파서도 안 되었다. 누구에게도 약한 모습을 보일 수 없고, 지스카르의 안식처에 몸담았다가 다시 세상으로 나간 뒤에는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 어느 고통이든 철저히 숨겨야 했다.

“아무도, 없는 시기가 길었고…있을 때도 내가 원치 않았어. 남에게 아픈 티를 내는 성격이 못 되니까.”

“하지만 내게는 말했잖아.”

목적이 있으니까. 연민과 애착을 이용해야 하니까. 란지에는 조슈아의 손을 단단히 잡았다. 얼어붙은 마음에 사적인 감상이 비집고 들어갈 틈새 따위는 없을 텐데, 나날이 무형의 균열이 생긴다. 너울에 침식되는 벼랑처럼 조금씩, 서서히, 거스르지 못하게.

“옆에 있어주길 바라니까.”

입에 발린 고백을 들을 적마다 매번 달게 미소하던 조슈아가 웬일로 이번엔 웃지 않았다. 그 평온함의 질량, 침묵의 중력이 합쳐져 방안에 묵직하게 내려앉는다. 란지에는 숨을 죽였다. 의자에서 일어난 그가 침대 위로 그늘을 늘어뜨렸다. 어느 때보다 신중한 숨결이 입술에 포개어질 듯, 그러나 과감하게 멈춘다.

“나만이?”

부드럽고, 절실하고, 감미로운 한마디. 조슈아는 달뜬 독점욕을 거리낌 없이 들이밀었다. 삽시간에 모든 걸 집어삼킬 불꽃이 지척에서 이글거렸으나 두렵기는커녕 단숨에 거머쥐고 싶은 매혹이 치밀어 올랐다.

“너만이…유일하게.”

충동이 송곳처럼 번뜩이며 절제력을 꿰뚫었고, 란지에는 인력에 떠밀리는 동시에 이끌려 두 팔을 조슈아의 목에 감았다. 겹쳐진 입술은 마치 첫키스인 것처럼 맞닿은 채 움직이지 않는다. 그저 호흡과 감촉을 느낄 뿐인데 열이 끓는 듯하고, 목덜미에서 등줄기로 땀이 촉촉이 배어나오기 시작한다. 이 순간을 조용하게 오래도록 누리고 싶고, 분별없이 뒤엉키고 싶은 모순적 감정이 균등하게 공존했다. 손가락 사이사이로 들어와 간지럽히는 머리칼을 느리게 움켜잡았을 때, 조슈아가 먼저 입을 열었다.

그의 혀는 입술로 완만히 흘러들어오는 물방울 같다. 뜨겁지만 갈증을 해소시키는 감로수. 란지에는 눈을 감고서 벅찬 숨결, 혀의 농밀한 얽힘, 젖은 입술이 내는 마찰음을 하나도 놓치지 않고 느꼈다. 어느덧 침대로 올라온 조슈아의 무게감이 아찔하리만치 좋아서, 그의 손이 잠옷과 이불 위로 몸을 더듬었다. 밤새 계속될 법한 키스로 숨이 막혀 가슴이 크게 부풀어 오르면 조슈아는 기다렸다는 듯이 손바닥으로 슬며시 문지르곤 했다. 이성을 짓밟는 욕망의 기세가 거칠어질수록 자신의 목적과 향방이 흐릿해진다. 소공작을 사랑하지 않는다는 사실도 지금은 한갓 티끌보다 사소해서 당기면 당기는 대로, 다 떨쳐내고 어디론가 가고 싶다.

그러나 조슈아는 예상 외로 냉정해서 달아오르다 못해 괴로운 표정을 지으면서도 다만 옆에 누워서 베개에 얼굴만 파묻었다.

“하아…같이 자고 싶다.”

둔하게 웅얼거리는 음성이 탄식하듯 중얼거렸다. 키스가 끝난 뒤에야 제정신이 돌아온 란지에는 손바닥으로 마른세수를 했다. 욕구불만에 시달려 안달난 사람처럼 굴다니. 홀려도 단단히 홀린 게 분명하다.

“둘이 눕기는 좁아. 네 방에서 자.”

그러자 조슈아가 웃음을 터트리며 휙 돌아누웠다.

“침대 크기가 문제야?”

“…알면서 굳이 묻지 마.”

“그래, 가서 자야지. 자칫하면 네가 환자인 걸 깜빡할 것 같아.”

퍽 의미심장한 발언과 함께 일어앉더니 그는 볼에 다정히 키스했다.

“푹 쉬어, 란지에.”

지난밤과 똑같은 인사에 뒤이어 촛불을 끈 다음, 문이 여닫히는 소음조차 나지 않게 조용히 나갔다. 란지에는 이불을 머리까지 뒤집어쓰고 얕은 한숨을 내쉬었다. 이제 하루만 버티면 끝이다. 내일이 지나면 더는 집회 때문에 전전긍긍하고, 조슈아를 속이느라 안간힘을 쓸 필요가 없다. 사랑하지 않는다고 되뇌고, 눈만 마주쳐도 행복해하는 그를 보며 가책을 느끼지 않아도 된다. 우산을 함께 쓰고, 빗속을 달리고, 함께 차를 마시며 얘기하는 일도 없으리라. 내일이면 전부 사라질 것들.

하루 속히 연애놀음을 마치고 본래의 생활로 돌아가길 바랐는데 막상 그날이 코앞에 닥치니 심경이 복잡하다. 한창 역할에 몰입했다 빠져나올 순간을 앞둔 배우처럼 말이다. 란지에는 모로 누워 두 눈을 꼭 감았다. 방안이 공허로 가득한 이유는 분명 불이 꺼져 어둠뿐인 탓이리라.


*


뒤척뒤척. 란지에는 십 초마다 좌우로 돌아누우며 온몸으로 초조감을 표출했다. 날이 밝은 지도 한참 됐는데 조슈아가 오지 않았다. 어제는 그가 들고 왔던 특별식도 보리스가 대신했다. 소공작이 어디 갔는지 물었지만 보리스도 부탁받았다는 말뿐, 자세히 아는 바가 없었다. 기어이 그림을 보러 갔단 말인가? 앓아누운 자신을 내버려두고?

도통 가만 누워서 기다릴 수 없었던 란지에는 자리를 박차고 나갔다. 식사 때라 유독 고요한 기숙사 계단을 디뎌 위층으로 올라갔다. 조슈아의 방에 도착해 노크했지만, 한참 기다려도 무반응이고 문도 단단히 잠겨 있었다. 그가 말 한마디 않고 혼자 미술관에 갔다고 믿기 싫지만, 현재까지의 정황은 의심하기에 충분했다.

혹시나 식당에 있지 않을까 가보았으나 티치엘을 비롯한 도토리 빌라 룸메이트만 모여 있었다. 그들은 내내 몸살 앓던 친구가 불쑥 나타나서 적이 놀랐는지 휘둥그레 뜬 눈으로 쳐다보았다. 란지에는 거두절미하고 본론부터 꺼냈다.

“조슈아 어디 갔는지 몰라?”

“응, 모르겠는데. 있잖아, 란지에 너 오늘…”

“미안, 루시안. 나중에 얘기하자.”

말허리가 잘린 루시안은 얼빠진 표정이 되었다. 웬만해선 남의 말을 끊는 법이 없었으므로 당황할 만하다. 그러나 지금은 한가로이 이야기를 나눌 여유가 없다. 미안해. 거듭 간결한 사과를 남기고 식당에서 나갔다. 만에 하나 조슈아가 벌써 출발했으면 그간의 노력이 죄다 허사로 돌아갈 것이다. 임무 실패를 목전에 두었다는 허탈감도 잠시, 란지에는 빗속에서 오갈 데 없어진 고양이처럼 북탑 입구에 멀거니 섰다.

어젯밤에는 그토록 상냥하게 키스한 주제에 가버리다니. 그의 정성을 믿은 자신의 미련함을 탓해야 할 텐데, 소공작을 향한 원망만으로 속이 엉망진창이고 뒤따라갈 마음조차 들지 않는다. 짧게 탄식하며 눈두덩을 문지르는 때였다.

“란지에! 이제 일어나도 돼?”

활짝 미소하는 얼굴이 눈부신 햇빛 아래에서 희게 반짝였다. 경쾌한 걸음으로 달려온 그가 입구 그늘로 뛰어들었다. 란지에는 조슈아가 다가오는 양을 멀뚱히 쳐다볼 수밖에 없었다. 햇빛은 쨍한데 흠뻑 젖은 머리 위로 우산이 씌워지는 기분이 든다.

“난…네가, 어딜 갔나 하고.”

혼자 미술관에 간 줄 알았다는 말을 삼키며 그의 품에 안긴 상자로 눈길을 보냈다. 쪽빛 상자, 곱게 묶인 붉은색 리본. 조슈아가 화사하게 웃으며 상자를 내밀었다.

“주문했던 선물 찾으러 다녀왔어. 생일 축하해, 란지에.”

뜻밖의 축하에 말문이 막혔다. 란지에는 새삼스럽게 엽서 하단에 적힌 날짜를 떠올렸다. 2월 19일. 클럽의 비밀을 지키는 데 여념이 없어서 깜빡 잊고 있었다.

“언제 알았어?”

“한참 전에 알았지. 기다렸는데, 넌 기어이 나한테 말하지 않더라. 계속 아파서 그럴 겨를도 없었는지 모르겠지만. 아무튼, 받아.”

“…고마워.”

조슈아에게 2월 19일은 그토록 원하던 그림을 직접 감상하러 가는 날, 그 이상의 의미는 없다고 여겼는데……. 머뭇머뭇 건네받은 상자를 응시하다가 그 자리에서 풀어 보았다. 길게 늘어진 리본을 갈무리하고 뚜껑을 여는 순간, 자신의 내부에서도 녹슨 자물쇠처럼 오므라져 있던 무언가가 넓게 펴지기 시작했다.

“내 목도리를 둘러주는 즐거움을 포기하기 싫지만, 네가 휑한 목으로 돌아다니는 건 싫거든.”

그가 상자에서 꺼낸 목도리를 둘러주고 찬결이 들지 않도록 꼼꼼히 모양을 잡아주었다. 구운 토스트에 듬뿍 얹힌 꿀처럼 달콤함이 뚝뚝 흘러내리는 손길이다.

“별로 춥지 않은데.”

“감기 환자가 그런 소리해도 소용없어. 그리고 따뜻하게 해줘야 봉오리가 활짝 열리지. 추우면 말라버리잖아.”

꽃봉오리가 무엇을 일컫는지 알고 있다. 애당초 가짜와 진짜는 비교 대상도 안 되지만, 그들의 마음을 저울에 올리면 마땅히 한쪽으로 기울 테지. 설령 조슈아가 연인의 가면을 간파하지 못했더라도 서로 확연히 다른 무게는 직감적으로 느낄 것이다. 그러나 소공작은 애정의 차이를 좁히라고 닦달하기보다 따사로운 애정을 선사하겠노라 말한다. 넉넉한 빛과 물과 양분으로 꾸준히 화초를 가꾸듯, 꽃피우길 기대하고 인내하며.

란지에는 목도리에 입술을 묻었다. 일전에는 그를 유혹하기 위해서였지만, 이번에는 다르다. 내리쬐는 여름 햇빛에 자연히 고개가 숙여지는 것처럼 소공작의 열띤 사랑 앞에서는 도리가 없었다.

“원예에도 일가견이 있는 줄 몰랐군.”

“내가 못하는 게 뭐겠어? 그리고 어떤 꽃은 원래가 피우는 데 십 년, 백 년이 걸린대.”

그쯤은 거뜬하다는 자신감이야 대단하나 못하는 게 없다는 말을 곱씹노라니 설핏 웃음이 번졌다. 못하는 게 없다고? 조슈아는 원예에 조예가 없음이 분명하다. 이미 꽃이 피었는데, 그것도 모르고 십 년씩이나 기다리겠다니. 기숙사 입구만 아니었더라면 그에게 키스라도 했을 텐데.

벨벳 리본을 잘 갈무리해서 상자에 넣었다. 생일 선물은 목도리 하나였지만, 실제로 받은 선물은 단순한 물건 이상으로 많았다. 예컨대 믿음 같은 것. 현실적으로 공화주의자가 소공작과 원만한 연인 관계를 유지할 수 있노라 낙관하기 어렵지만, 지금은 조슈아가 자부하는 원예 솜씨에 자신을 맡기고 싶어졌다.

“조슈아. 당장 방으로 가야겠어.”

“아직 몸이 안 좋아?”

란지에는 선물 상자를 가볍게 안고서 조슈아에게 얼굴을 가까이 갖다 댔다. 입술을 갸름한 뺨에 닿을락 말락 스쳐 보내고서 귓전에 나긋나긋한 어조로 속삭여주었다. 어젯밤에 못한 것을 하러 가자, 조슈아. 목도리가 아닌 맨살의 온기로 뜨겁게 젖어서 한없이 싱그럽게 피어나고, 찬바람에 시들지 않도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