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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달 전에 그러했고, 열흘 전과 다름없이, 어제와 별다르지 않은 오후 네 시.
첼레스테스는 바 테이블에 앉아 정기 구독하는 잡지를 넘기는 중이었다. 발간일로부터 엿새가 지나고 오늘 정오 즈음에 배달부가 가져온 터라 관점에 따라 식었다고도 따끈따끈하다고도 할 수 있는 매거진이다. 손님은 점심 무렵에 일단이 스쳐 지나간 이후로 감감했다. 턴테이블에서 LP판이 돌아가며 리듬 느린 재즈를 연주하고, 엷게 초콜릿 향이 나는 비슷한 커피 냄새가 은은하고, 빳빳한 새 종이가 불규칙한 간격으로 팔락팔락 넘어간다. 현상 유지를 약속하는 듯한 고요가 굳은살로 박인, 그다지도 평범한 오후. 문이 열린 것은 그때였다.
돌연하기로는 검푸른 밤하늘의 어느 방위를 비낀 유성이고, 신선하기로는 흰 숨이 싹트는 겨울 새벽이다. 방문객은 몹시도 붉었다. 저무는 태양은 절정이어서 석양이 범람해 열린 문으로 쏟아져 들어왔다. 빛을 등진 인물은 검었으나 태양 위치를 갈음한 적색 머리가 부시게 찬란했다. 오늘따라 바람이 부산스러워 올올이 반투명하게 반짝이는 머리칼이 날리는 형상은 불티를 방불케했다. 태초의 노을은 필경 저 붉음이었으리라.
첼레스테스는 커피잔을 내려 놓았다. 동시에 방문객이 한 발짝 발을 내디디고 문을 닫았다. 여자는 옷매무새가 단정했고 큰 여행용 가방을 한 손에 들었다. 바람 때문에 머리와 트렌치 코트가 흐트러졌는데도 어수선한 분위기는 전혀 나지 않는다. 반듯한 자세 때문이었다. 수 초간 침묵 실린 시선을 받아냈다. 예리한 시선이지만, 상대를 무턱대고 파헤치는 성질과는 한참 멀었다. 불현듯 강철 뿔과 발굽을 지닌 사슴이 떠올랐다. 얼마든지 꿰뚫고 짓밟을 무기를 가졌으나 그것을 부러 과시하지 않았다. 그저 흙이 빚고 화염이 완성한 한 편의 문장으로 존재할 뿐.
“실례지만 길을 여쭙겠습니다. 근방에 영업하는 숙박 시설이 있습니까?”
“물론이죠. 서 계시지 말고 이쪽으로 오세요.”
첼레스테스는 바 스툴에서 내려와 여자를 탁자로 안내했다. 여자는 곤혹스러운 기색으로 고개를 흔들었다.
“죄송하지만 저는 아무것도 마실 생각이 없습니다.”
“숙박 시설이라면 잘 찾아 오셨으니 염려 마세요. 여기 파일럿의 연인은 낮이면 카페, 밤이면 바, 또한 스물네 시간 운영하는 게스트 하우스거든요. 앉으시지요, 손님.”
여자는 첼레스테스를 잠시간 응시하다가 천천히 발을 옮겼다. 신중하고 절도가 있는 걸음걸이, 똑바른 자세와 바늘 하나 들어갈 틈새도 없이 견고한 분위기가 군인과 흡사했으나 아마 군인은 아니었다. 여자의 몸가짐은 직업적 특성보다 어릴 적부터 자연히 습득해 신체 일부처럼 결합된 것으로 보였다. 그는 출입문과 가까운 바깥자리에 앉아 캐러멜 색깔인 직사각형 가죽 가방을 발치에 놓았다. 코트는 먼지가 날리지 않게 벗어서 옆에 단정히 개 놓았다.
“시원한 물을 드릴까요? 아니면 블랙 커피? 홍차도 있으니 말씀만 하세요. 숙박 손님께는 서비스로 드리고 있으니까요. 허브차는 어떠세요?”
“그럼 허브차로 부탁하겠습니다.”
여자의 선택에 첼레스테스는 내심 기뻤다. 마침 어제 새로 들인 로즈힙을 꼭 내주고 싶었던 까닭이다. 바 뒤에서 물을 끓이는 동안, 이름 모를 손님을 눈여겨보였다. 관찰은 첼레스테스의 습관이었다. 지금의 시선에 사심이 일절 없다고 할 수는 없으리라. 머리칼은 들장미, 눈은 새순.
초록색 눈이 카페 유리창 바깥을 응시했다. 그곳에는 웅장하게 팔을 벌리고 선 핀토스가 있다. 워낙 고도가 높은 데다가 거리가 꽤 가까웠기에 산등성이도 한눈에 안 들어왔지만, 크레이프 케이크처럼 층층이 쌓인 우듬지가 바람에 흔들리는 광경은 또렷이 보였다. 하지만 손님은 정경을 감상하는 눈빛과 달랐다. 수 년만에 만난 친우를 보듯하면서도 동시에 원망하는 듯했고, 넘지 못할 방벽을 내다보는 막막함도 느껴졌다. 첼레스테스는 티 스트레이너에 말린 로즈힙을 담아 찻잔에 올린 후 물을 부었다. 희부연 김이 모락모락 오르며 새콤한 향기를 퍼트렸다. 투명한 물이 붉은 색으로 느리게, 하지만 선연히 물들었다. 첼레스테스는 손님의 상념을 침범하지 않도록 조심히 다가가 테이블에 잔을 놓았다.
“스트레이너는 바로 건지셔도 됩니다.”
“감사합니다.”
고저가 없는 억양에 짤막한 인사. 자못 무뚝뚝한 손님이었다. 그러나 무성의한 말씨는 아니었거니와 설혹 예의를 차릴 뿐인 대꾸였던들 기분이 상하진 않았을 터였다. 이런 장밋빛 여성에게 날카롭고 단단한 면모가 있음은 실로 당연했으니까. 그가 편히 차를 마시도록 테이블에서 멀어진 첼레스테스는 바 스툴에 비뚜름하게 걸터앉아 아까 펼친 채 엎어 두었던 잡지를 도로 들었다. 그러고 식은 커피를 간간이 마시며 잡지를 팔락거렸지만, 시선과 의식은 온통 진홍의 여성에게로 기운 채였다. 여자가 스트레이너를 건져 받침에 두었다. 엷은 크림색 찻잔 손잡이에 손가락을 걸고, 말할 때를 제외하면 굳게 감쳐문 입술이 살그머니 열리고, 불그레한 찻물에 녹음이 응집된 눈을 드리운다. 호록거리는 소리도 내지 않고 로즈힙을 머금은 순간, 여자의 뺨이 미미하게 부드러워진다. 마치, 봉오리가 얄브스름하게 트이듯이.
이런, 뭔가 잘못하는 기분이 드는데.
한가롭게 재즈가 흐르는 대낮의 카페에서 초면인 손님을 상대로 무도한 상상을 할 것 같아서 첼레스테스는 얼른 잡지에 실린 옷으로 눈을 돌렸다. 테이블에서 이따금 찻잔을 들었다가 내려놓으면서 달각 울리는 소리도 재즈의 한 부분으로 들렸다. 이윽고 말마디가 고요를 가로질렀다.
“잘 마셨습니다.”
여자의 침착한 육성은 고요와 반대되는 속성이 아니었다. 첼레스테스는 말소리가 고즈넉하게 들리기도 한다는 사실을 처음 알았다.
“별말씀을요. 숙박하실 곳을 찾으신다고 하셨지요?”
“그렇습니다.”
첼레스테스는 숙박 장부를 들고 냉큼 맞은편에 앉았다. 정면에서 마주한 낯은 그야말로 태양의 과실이며 야생의 뿔이었다.
“일행이 있으신가요? 며칠 묵으실 예정이신지요?”
문득 여자가 몇 초간 침묵을 머금었다가 입을 뗐다.
“혼자입니다. 약 일주일, 혹은 열흘 정도 묵을 듯합니다. 일정이 부정확하여 죄송합니다.”
그렇게나 오래? 장기 투숙이라고 할 기간은 아니나 여자의 짐이 단촐했으므로 기껏해야 사흘쯤이리라 예상했던 까닭에 첼레스테스는 당연한 의문을 떠올렸다. 이런 벽지에 무려 일주일 이상 머물려는 까닭은 무엇일까. 핀토스 산맥의 유명한 휴양지는 이곳과 거리가 멀었다. 듀브리스는 근처였지만, 거긴 광산 도시여서 왕의 숲을 빼곤 볼거리가 적었다. 그러니 관광객은 보통 여기까지 오지 않았다. 첼레스테스의 카페를 찾는 손님은 인근에 주둔하는 니네베 연대의 군인들, 광산 노동자들, 물류 트럭을 운전하는 기사들이 대부분이었다. 그밖에는 가뭄의 콩 나듯 길을 잘못 든 사람, 군부대나 광산에 볼일이 있어 방문했다가 누군가의 소개를 받고 들르는 사람이 한둘씩 방문했다. 하지만 이 손님은 어느 쪽에도 속하지 않았다. 첼레스테스는 섣부른 지레짐작을 하는 대신 빙긋이 미소했다.
“개의치 마세요, 손님. 종전 후 버려진 플랏을 개조해 카페로 만들었는데, 위층의 빈 방들을 방치하기 아까워서 겸사겸사 숙박 시설로 쓰고 있거든요. 원래 투숙객이 많지 않은 곳이니까 얼마든지 편히 머무세요. 그러면 우선은 일주일 숙박으로 계산할까요? 여기 성함을 적어 주세요, 레이디.”
여자가 자기 앞으로 밀려온 장부의 빈칸에 서명했다. 이시엘. 첼레스테스는 거꾸로 보이는 이름을 기민하게 읽고 나서 입속으로 한 음절씩 읊었다. 이, 시, 엘……. 우아한 이름이었다. 이시엘은 숙박하려는 사람이 으레 물을 법한 질문은 하나도 하지 않고 일주일치 숙박비를 지불했다. 그저 한동안 묵을 곳만 있다면 다른 것은 아무래도 좋다는 태도였다. 첼레스테스는 그를 2층으로 안내했다. ‘파일럿의 연인’은 3층짜리 플랏이었다. 맨 위층은 널따란 거실에 두 개의 침실이 있는 집으로, 첼레스테스의 보금자리이기도 했다. 2층은 집이 두 개였다. 각각 작은 거실과 침실 하나이고 침대는 더블베드였다. 그러니까 이곳에서 받을 수 있는 투숙객은 최소 둘에서 최대가 넷이었다. 숙박하는 손님은 정말로 드문데, 두 개뿐인 방 중에 하나가 며칠 전에 찼기 때문에 남은 방을 열었다. 아무리 손님이 적다고 한들 방은 늘 청결하게 관리했고 내부 인테리어에도 아주 공을 들였다. 개인적인 취미 생활의 일환이었지만, 첼레스테스는 오늘만큼 자신의 취향과 깔끔한 성미에 감사한 날이 없었다. 이시엘이 한참 핀토스를 바라보았던 모습이 떠올라서 거실에 들어서자마자 창밖이 보이게 연초록색 쉬폰 커튼을 걷었다. 뉘엿뉘엿하는 뜨거운 햇살이 눈부시게 들이쳤다.
“방은 마음에 드세요?”
거실을 빙 둘러본 눈동자가 압도적인 높이로 솟은 핀토스로 가서 멎었다.
“네. 좋은 방입니다.”
미사여구가 배제된 감상인데도 첼레스테스에겐 그의 담백한 표현이 기나긴 찬사 이상으로 만족스러웠다. 조식을 제공하는 시간, 청소하는 시간, 세탁물을 맡길 장소 등을 차례로 설명하고 나서 옆방에 숙박하는 젊은 남자에 대해서도 언급해 두었다. 기자라고 했던가. 며칠간 지켜본 바로는 종일 방에 틀어박히거나 종일 외출하거나 둘 중 하나였다. 오늘도 아침을 먹고 올라간 이후로 여태까지 두문불출이었다. 조용하게 들락날락하는 그 사람이나 ‘유념하겠습니다.’하고 말하는 이시엘이나 피차 요란을 떠는 성격과 거리가 먼 듯했으므로 걱정은 안 되었다.
“편하게 쉬세요. 지내시면서 불편한 점은 뭐든지 말씀하시고요.”
그러고 열쇠를 건넨 후 1층으로 내려가려는 때였다. 뜻밖에도 이 무뚝뚝한 손님이 물었다.
“사장님 성함을 여쭈어도 되겠습니까?”
되다마다.
“첼레스테스입니다. 괜찮으시면 첼이라고 불러 주세요.”
만나자마자 애칭을 대는 사장은 부담스러울까. 흔쾌히 통성명을 하고 나서야 그런 걱정이 들었는데 이시엘은 무덤덤하게 응했다.
“고맙습니다, 첼.”
정말이지 별다른 뜻도 없이 불렀다는 것쯤은 바로 알았다. 첼레스테스는 부드러운 미소로 화답하고 조용히 카페로 내려와 빈 찻잔이 남은 테이블로 걸어갔다. 찻물은 바닥에 얄팍하게 고였고, 로즈힙 향기는 아직까지 주변을 맴돌았다. 잔을 들어서 안으로 시선을 떨어뜨렸다. 새콤한 가운데 쌉싸름하여 감칠맛이 나는 들장미 열매. 타오르는 붉은색. 첼, 이라고 단단하게 부르는 육성. 이토록 별다른 오후. 불현듯 카페 바깥을 내다보았다. 산봉우리에 걸린 창공은 여전히 사랑해 마지 않도록 아름답다. 그럼에도 저곳을 더 오래 자유로이 누비는 대신 지상에 발붙이기로 선택한 연유가 무엇이었던지 첼레스테스는 새삼스럽게 떠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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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녁부터는 주류를 팔았다. ‘파일럿의 연인’은 하나부터 열까지 첼레스테스의 취향대로 운영했기 때문에 구비된 술도 대다수가 와인, 샴페인이었다. 막 가게를 열었던 무렵에는 위스키는 왜 없냐는 둥 칵테일을 달라는 둥 요구하는 이들도 많았지만, 출현하는 족족 호되게 내쫓기를 반복했더니 깨끗이 사라졌다. 무슨 장사를 이런 식으로 하느냐며 투덜대는 소리는 모조리 무시했다. 애당초 첼레스테스는 돈벌이 수단으로 ‘파일럿의 연인’을 차린 게 아니었다. 돈을 벌고 싶었으면 룬데인으로 갔거나 하다 못해 듀브리스로 갔지, 산과 군부대와 광산이 주변의 전부인 위치에 덩그러니 카페를 차렸겠는가. 그러나 벽지에 틀어박힌 가게라고 해도 알음알음 분위기가 좋은 카페로 입소문이 난 까닭에 특히 여성 단골들이 많아져 손님은 어느 정도 유지되고 있었다. 그날의 노동을 마치고 피로한 얼굴로 찾아온 여자들이 와인 한 잔을 즐기며 웃고 떠드는 얼굴을 보노라면 첼레스테스도 뜻밖의 보람을 느끼곤 했다. 종종 들르는 니네베 연대의 동기들도 각별한 기쁨을 주는 존재였다.
“맛있다! 캔튼 과자점의 아몬드 플로랑탱은 정말 최고야!”
“맞아! 갈레트 브루통도!”
안젤리움 쌍둥이가 행복한 얼굴로 재재거렸다. 아세르 상사에서 운영하는 캔튼 과자점은 룬데인에 본점이, 여러 대도시에 분점이 있으나 아직 듀브리스에는 없었다. 유일한 직원인 베스가 식사 메뉴를 만들어 주었으나 제과를 맡길 직원은 없거니와 주방 공간도 부족했으므로 다과는 전부 캔튼 과자점의 본점에서 매주 2회 소포를 받고 있었다. 본래는 개인 카페에 과자를 배달하지 않지만, 인맥이란 인맥은 총동원하고 직접 방문하여 부탁한 끝에 계약서를 쓸 수 있었다.
“첼이 제대한 이유는 아직도 잘 모르겠지만, 여기에 카페를 열어 줘서 다행임.”
“제대한 이유는 예전에 들었잖아. 찾는 게 있다고.”
“근데 뭘 찾고 싶은지 첼도 모르잖음? 알지도 못하는 걸 어떻게 찾는지 이해가 안 됨.”
자매의 순수한 의문에 레티샤가 어깨를 으쓱였다.
“난 이해할 수 있어.”
외견은 구분이 안 될 만큼 똑같은 쌍둥이였으나 속은 비슷하면서도 많은 부분이 달랐다. 하나의 뿌리에서 파생된 가지라고 한들 어떻게 똑같은 잎사귀를 매달고 동일한 리듬으로 바람에 흔들리겠는가. 첼레스테스는 따뜻한 코코아에 마시멜로우를 띄워서 자매의 테이블에 한 잔씩 놓아 주었다.
“중요한 건 내가 이 카페를 운영하면서 즐겁게 지내고 있다는 사실이지, 안젤리움 아가씨들.”
“하긴, 첼이 즐거우면 됐어!”
“맞아. 오늘따라 더 기분이 좋아 보이는데!”
“그야 너희가 오랜만에 왔으니 그렇지 않겠어?”
그때 출입문에 걸린 종이 맑게 울렸다. 서늘한 저녁 공기를 동반하고 들어온 인물은 산바람 때문에 붉은색 단발 머리가 조금 헝클어진 채였다. 오늘로 나흘째 ‘파일럿의 연인’에 숙박하고 있는 이시엘이었다. 그는 새벽같이 일어나 한 시간쯤 나갔다 들어와서 씻은 후에 식사한 다음, 다시 어딘가로 외출하여 늦은 저녁에나 돌아왔다. 그제도, 어제도, 오늘도. 다른 손님은 카메라와 수첩을 들고 다니니 취재하러 다니는구나 짐작할 만했지만, 이시엘은 맨몸이었다. 이런 산간벽지에서 뭘 하는지 몰라도 단순한 여행이 아님은 분명했다.
“손님, 이제 오세요? 저녁은 드셨어요?”
“아직입니다.”
“이런, 여덟 시가 넘었는지 식사도 안 하셨다고요? 이쪽으로 앉으세요. 오늘 베스가 만든 스튜가 정말 맛있답니다.”
남은 좌석으로 안내하자니 공교롭게도 안젤리움 쌍둥이의 옆이었다. 이 자매는 호기심이 많은 데다가 종종 악의 없이 실례되는 말을 그대로 내뱉을 때가 있었다. 바로 지금처럼.
“와, 빨강머리가 엄청 예뻐!”
이시엘은 눈에 띄는 미인인 데다가 자세가 당당하여 어디서나 관심을 받는 상황에 익숙할 법했으나 대놓고 그런 찬탄을 듣는 것은 처음인지 멈칫했다. 다행히 그는 동글동글한 얼굴에 앳된 티가 나는 자매를 보더니 불쾌한 내색 없이 자리에 앉았다.
“아가씨들, 그렇게 빤히 보면 실례야. 미안해요, 손님. 워낙 격의가 없는 친구들이라서.”
“괜찮습니다.”
며칠 지켜본 바로 이시엘은 과묵한 만큼이나 겉치레로 하는 말은 없었다. 거짓말을 못하는 어리숙함과 달랐다. 그는 사소한 빈말로 자신을 치장할 필요를 못 느끼는 사람에 가까웠다. 첼레스테스가 보기에 이시엘에겐 정말로 잘 꾸며낸 언동이 불필요했다. 그런 껍질은 겉과 속이 다르고 본연의 모습이 사회와 충돌할 여지가 있는 사람한테나 필요했으니까. 따라서 이시엘이 괜찮다고 말하면 그런 것이다. 그의 투명한 명료함은 으레 사람들이 소통하며 상대가 진심인지 아닌지 해석하느라 진을 빼는 행위를 원천 차단했다. 첼레스테스는 솥에 남은 뵈프 부르기뇽을 한 번 더 끓여서 커스터드 크림색 그릇에 담아서 곁들일 식전빵, 토마토 샐러드와 내놓았다. 이시엘은 단정하게 잘 먹는 여자였다. 꼿꼿하고 선이 날렵한 몸을 보아 운동과 친하리라 어림짐작했다.
그가 식사를 마친 자리는 아주 깨끗했다. 빵 부스러기도 거의 흘리지 않았으며 그릇에는 당근 한 조각도 안 남아 있었다. 자신이 만든 요리도 아닌데, 남이 잘 먹은 모습을 보면서 이렇게나 뿌듯하다니. 첼레스테스는 이시엘이 식사하는 속도를 눈여겨보다가 딱 맞게 우린 애플민트 차까지 대접했다. 어지간한 군인보다 똑바르게 등허리를 펴고서 천천히 차를 마신 이시엘은 짧지만 성의 있게 인사했다. 맛있게 먹었습니다. 이시엘이 2층으로 올라간 후 그가 떠난 자리를 정리하노라니 안젤리움 자매가 서로 눈을 맞추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첼이 기분 좋은 이유를 알겠음.”
“예쁜 여자 손님이 있어서 그런 거지!”
사실이었지만, 행여나 위층까지 말소리가 퍼질까 싶어 첼레스테스는 얼른 둘의 입을 막았다. 쌍둥이는 입단속 비용으로 주어진 쿠키를 행복한 낯으로 오독오독 깨물었다.
“근데 얼굴이 좀 낯익음. 어디서 본 것 같은데.”
“나도 그 생각을 하고 있었어!”
리피에 이어 레티샤까지 그렇게 말하니 흘려듣기 어려웠다. 마냥 해맑은 아가씨들 같아도 안젤리움 자매는 사관학교를 졸업한 어엿한 장교인 데다가 눈썰미가 좋았다. 다만 이시엘은 쌍둥이를 아는 눈치가 아니었으므로 셋이 어디서 마주쳤을지 짐작되지 않았다. 자매 역시 이시엘을 언제 봤는지 떠올리지 못했기에 그들의 의문은 의문으로만 남았다.
영업 종료 팻말을 걸고 가게를 정리하고 나면 밤 10시가 다 되었다. 첼레스테스는 보헤미안 풍으로 아늑하게 꾸민 자신의 집으로 올라가 저녁에 팔고 딱 한 잔이 남은 와인을 마시면서 느긋하게 목욕했다. 그리고 지난 며칠 그랬듯이 침대에 누워 아래층 손님을 생각했다. 데운 몸과 약한 술기운에도 잠이 오지 않았다. 아무래도 술이 한 모금 더 필요할 성싶어 뒤척이던 몸을 일으키고 1층으로 내려갔다. 그런데 코르크 마개를 막 뽑으려는 찰나, 위에서 문을 여닫는 소리가 났다. 자정을 목전에 둔 플랏은 아주 적요했기에 누군가가 2층 발코니에서 외부로 연결되는 계단을 딛고 내려오는 기척을 똑똑히 감지할 수 있었다. 안경잡이 기자는 아니었다. 첼레스테스는 이시엘의 발자취가 어떤 무게와 어떤 속도로 구성되는지를 마치 십 년은 들었던 것처럼 알았다. 이런 밤중에 다시 외출일까. 남의 사생활에 지나친 관심을 쏟는 자신의 무례를 자각하면서도 무의식중에 그에게 기울어지는 감각을 가누기 어려웠다. 와인병을 놓고 카페 밖으로 나섰다.
부푼 상현달과 총총한 별이 내리는 밤하늘은 모든 인간의 정념을 촘촘하게 직조한 듯했다. 아름답고도 막막한 별빛 아래, 새카만 그림자로 대지를 내리누르는 핀토스 앞에 이시엘은 특유의 올곧은 자세로 서 있었다. 이 여자는 아마도 산에서 내려온 사슴이리라. 아니면 사슴으로 둔갑한 여신이거나. 첼레스테스는 그를 놀래지 않도록 일부러 작게 기척을 내며 다가갔다.
“잠이 안 오세요?”
이시엘이 고개를 들렸다. 달빛의 한숨이 미끄러지는 미간과 콧등과 입술이 은은하게 빛났다.
“예. 저 때문에 깨셨습니까?”
“저도 잠이 안 와서 와인을 조금 마실까 하고 내려온 참이었어요.”
이시엘이 입은 얇은 셔츠의 칼라가 바람에 흔들렸다. 그의 어깨는 조금도 움츠러들지 않았지만, 첼레스테스는 숄이나 담요를 챙겨 나올걸 그랬다고 내심 후회했다. 이곳은 산과 인접한 까닭에 밤이면 꽤 쌀쌀했다. 더구나 시월이 아닌가. 하다 못해 재킷이라도 걸치고 나왔어야 그에게 벗어 주었을 텐데. 첼레스테스는 서풍을 등지고 이시엘과 나란히 섰다.
“지내기는 어떠세요? 숙박하시는 손님이 적다 보니 제 경험이 부족해서 혹여 잠자리며 식사며 소홀히 대접하고 있지 않은지 걱정되거든요. 불편하신 점은 뭐든 기탄없이 말씀해 주시겠어요? 손님께서 의견을 주시면 큰 도움이 될 거예요.”
“그렇습니까. 보탬이 될 만한 의견을 드리려고 해도 저는 무척 편안하게 머물고 있습니다. 옆 객실에 묵는 다른 분에게 여쭈는 것이 사장님께는 더 도움이 되실 것 같습니다.”
그 젊은 기자 말인가. 사내가 자신의 플랏을 어떻게 생각하건 귀를 기울일 마음은 추호도 없으나 첼레스테스는 그저 빙긋이 웃었다.
“편히 지내신다니 기쁘네요. 처음엔 이런 곳에서 숙박업을 해 봐야 본전도 안 나온다고 친구들이 놀렸지만, 만약 그 말을 들었으면 큰일날 뻔했죠. 하마터면 손님께서 묵을 곳이 마땅치 않아 난처하시지 않았겠어요?”
이시엘이 희미하게 웃었다.
“확실히 그렇습니다. 저 역시 근방에 숙박할 곳이 있으리라 기대하지 못했습니다.”
“이런 데까지 오는 여행객은 거의 없죠. 다들 왜 이런 산간에 카페를 차렸는지 이해하지 못하던걸요.”
“이유를 여쭤도 되겠습니까?”
별로 궁금해하지 않을 줄 알았기에 첼레스테스는 잠시 고민했다. 그럴싸한 여러 가지 이유가 떠올랐다. 농담처럼 둘러댈 말도 있고, 전적으로 진실은 아니나 아예 거짓이지도 않은 말도 있었다. 많은 손님과 지인이 똑같은 물음을 던졌다. 그때마다 적당한 답변으로 넘어가는 쪽을 택해 왔다. 다분히 사적인 이유였던 데다가 그들이 이해하도록 설명하는 일이 녹록지 않았기 때문이다. 첼레스테스는 이시엘의 눈을 직시했다. 홍채의 녹빛은 어둠에 가려졌지만, 그 색깔이 일으키는 감수성은 낮밤을 불문하고 선연했다. 불현듯 나무 껍질과 잎사귀와 부엽토와 풀 내음이 만연한 대지에 서서 이시엘을 바라보는 이 순간이 비행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렇다고 해도 공중에 뜬 감각하곤 달랐다.
“찾는 게 있어요.”
공중을 누비는 내내, 아니, 태어나서 기고 말하고 걷고 달리며 생애 내내 무언가를 찾아 헤맸다. 잃어버린 고글의 행방을 수색하는 것, 언젠가 곁을 스쳤던 여인의 눈빛을 떠올리는 것처럼 간단하지 않았다. 첼레스테스가 찾는 그것은 일찍이 본 적 없고 한 번도 알지 못했으나 제 삶이 될 무언가였다. 한때는 그게 하늘이라고 여겼다. 그러나 많이, 드높게, 멀리 날아도 광활한 창공과 흐드러진 별빛은 벗이 될지언정 연인이 될 순 없었다. 하늘에서 끝내 찾지 못했다면 땅으로 내려옴이 마땅했다. 가장 오랫동안 먼 거리를 이동하는 철새도 종국에는 날개를 접고 땅에 안착하는 것이 순리이니까. 그런데 어째서 여행지로서 인기도 없는 자리를 골랐는가 하면, 외롭고 낯설어서 좋았다. 이제껏 발견하지 못했던 것을 찾으려면 익숙하지 않은 땅이 나았다.
무얼 찾느냐고, 다들 으레 건네는 상투적인 질문이 이시엘의 입술에선 나오지 않았다. 그는 고개를 꺾어 검고 암석과 식물과 협곡이 얽혀 울퉁불퉁한 산등성이를 올려다보았다. 이마에서 콧대로, 입술로, 턱으로 이어지는 불가사의한 곡선. 갑자기 속에서 말이 돋아났다. 마치 활개쳐 오르는 새처럼.
“손님도 뭔가를 찾고 계세요?”
바람이 불었다. 이시엘의 단발이 살짝 떠올랐다가 귓바퀴를 덮으며 흐트러졌다.
“잘 모르겠습니다.”
이시엘이 말문을 닫은 까닭에 더는 묻지 않았다. 바람에 헝클어지는 앞머리를 쓸어 넘기면서 함께 핀토스 산맥을 바라볼 뿐이었다. 비행하기 좋은 밤이라는 생각이 문득 떠올랐다가 밤하늘 어딘가로 천천히 날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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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붉은 머리 여자요, 여기 묵는 거 맞죠? 이상한 사람이 아닌지 잘 지켜보는 게 좋겠어요.”
점심이 지나서 방문한 손님 하나가 커피를 주문하더니 그런 소리를 했다. 전쟁 중에 남편을 잃었고 종전 후에는 니네베 연대 주둔지 근처에 작은 세탁소를 열어 운영하는 사람이었다. 심성이 나쁘다곤 못 했다. 다만 가십을 즐겨 여기저기 말을 실어나르기를 좋아했다.
“이상한 사람으론 안 보이던걸요.”
“사람은 겉만 봐선 모르는 거예요. 듣자하니 종일 산자락을 배회한대요. 무슨 유령처럼……. 약국을 하는 폴링 씨도 그 여자가 산 밑에 우두커니 선 모습을 봤다던데요? 벌써 소문이 쫙 났다구요.”
정착한 사람이 적어 조용하다는 장점만큼 한 마디 말도 하루만에 사방팔방으로 퍼지는 단점도 분명했다.
“식물학자일지 누가 알겠어요?”
“식물학자요?”
정말 그렇게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요, 하는 속내가 담긴 되물음이었다. 물론 이시엘은 어느 모로 보아도 책상물림과 거리가 멀었다.
“어쨌거나 무슨 문제를 일으키는 건 아니니까요. 저는 숙박하러 오는 손님 모두가 그토록 점잖고 깔끔하면 좋겠다는 생각뿐이랍니다, 린느 부인.”
첼레스테스는 부드러운 태도로 커피를 바 테이블에 올렸다. 에두른 요청을 눈치 빠르게 알아차린 린느가 커피 잔을 들면서 입술을 비죽였다.
“미인이어서 좋은 건 아니고요?”
“여기 오시는 여성들 중 미인이 아닌 분도 계시던가요?”
“아휴, 내가 자기를 어떻게 이겨. 됐어요, 됐어.”
“요새 세탁소는 어때요? 별일 없으시죠? 행여나 진상을 부리는 손님이 나타나면 말씀하세요. 제가 니네베 연대 친구들을 끌고 출동하겠습니다.”
이시엘을 감싸는 언동에 조금 심통이 난 표정이던 린느가 결국 얼굴에 웃음꽃을 피웠다. 그러고는 커피를 다 마시고 가게를 나설 때까지 이시엘에 관한 화제는 일절 꺼내지 않았다. 적막할 겨를도 없이 방문객이 잇따랐다. 안젤리움 자매였다. 퍽 반가운 이들도 함께였다.
“선배님, 잘 지내셨어요?”
릴리안과 기젤라는 니네베의 공중 타격대에 소속된 후배 파일럿이었다. 첼레스테스가 제대를 결정했을 때 누구보다 두 사람이 가장 아쉬워했다.
“첼! 이거였음!”
인사도 생략하고 달려온 리피가 불쑥 잡지를 한 권 내밀었다. 이거라니? 의문은 잡지 표지를 보자마자 해소되었다. 표지 모델이 이시엘이었다. 흰색 펜싱 보호복을 입고 가느다란 에페를 든 옆모습이 아름다웠다. 무슨 잡지인가 물었더니 안젤리움 자매가 구독하는 스포츠 매거진이란다. 표지에 배치된 활자들 가운데 ‘이시엘’, ‘키시온’, ‘모금 운동’, ‘기부’ 같은 단어가 눈에 띄었다.
“리피, 이거 빌려도 될까?”
“응, 괜찮음.”
“고마워. 오늘도 우리 아가씨들에게 서비스를 안 줄 수가 없겠네.”
“와아!”
커피와 차, 캔튼 과자점의 쿠키를 준비해서 때마침 세탁을 마친 베스까지 합류해 여섯이 테이블에 둘러앉아 한참 이야기를 나누면서 먹고 마셨다. 석양이 내려올 무렵에야 네 사람이 돌아가고 베스도 저녁 요리를 마친 다음에 퇴근하고 나서야 짬이 났다. 그제야 잡지를 펼칠 수 있었다. 잡지 표지를 장식한 만큼 여러 페이지에 걸쳐 이시엘의 인터뷰가 실렸다. 그는 펜싱 대회에서 거둔 성적, 돌아가신 아버지, 종전 후 피해 복구에 대해 이야기했다. 다 읽기도 전에 잡지를 덮었다. 이시엘이 동의한 인터뷰라고 해도 남의 개인사를 훔쳐 보는 기분이 들어 불편했던 까닭이다.
잡지를 계산대 밑에 두고 한결같은 핀토스를 내다보았다. 장엄하며 무심한 봉우리 너머에 파리사 시가 있다. 브룬넨과 전쟁이 끝나고 일 년이 지났지만, 최전방이자 격전지였던 키시온 일대는 여전히 폭격에 쑥대밭이 된 상태로 방치되어 있다. 키시온으로 가는 기차도 끊긴 채였고, 겨우 세 달 전에야 전사자들의 시신을 모두 수습해 안장한 실정이었다. 지지부진한 전후 복구 사업 때문에 신음하는 지역이 비단 키시온만은 아니나 변방이라는 사유로 계속 후순위로 밀린 것도 사실이다. 일례로 듀브리스 역시 전쟁 피해가 컸으나 광산의 존재 덕붙에 빠르게 복구됐다. 결국 돈이 문제였다. 국고가 부족하다느니 더 시급한 문제가 많다느니 하지만 당파 싸움과 온갖 이권이 얽혔다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사정이 이러하여 뜻이 있는 시민들이 여러 차례 모금 운동을 벌였다. 거기에 키시온을 고향으로 둔 이들과 여전히 유해를 찾지 못한 군인들의 유족 단체도 시위를 이어나가며 정부의 적극적인 지원을 촉구하는 중이었다.
첼레스테스도 생생하게 기억했다. 새카만 잿더미에 뒤덮여 문명의 흔적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파리사를 내려다봤을 때, 자신이 타고 있는 물건이 인간에게 신과 같은 오만을 부여했음을 깨달았다. 제대한 까닭에는 그런 이유도 있었다.
저녁 손님들이 노을처럼 밀려왔다가 어둠으로 사라지고, 하루의 애수를 묻히고 들어온 밤 손님들도 별빛으로 흩어졌다. 웬일인지 그때까지도 이시엘이 돌아오지 않았다. 가게 정리를 마친 첼레스테스는 방으로 올라가지 못하고 문밖에 섰다. 불쑥 왔던 것처럼 불쑥 떠났을까. 그렇다면 방 열쇠를 두고 갔으리라. 그가 산기슭을 돌아다닌다던 이야기가 떠오르자 꼬리를 물고 불안한 상상이 스쳤다. 첼레스테스는 고개를 저었다. 민들레 씨앗처럼 아스라이 날아갈 사람이 아니었다. 우울하고 공허에 젖은 여자였으면 제가 한눈에 알아봤으리라.
재킷을 입고 플랏 뒤 창고로 들어갔다. 벽에 기대어 세운 선반에 자주 쓸 일이 없는 공구, 수리용 부자재, 오래된 라디오 등 낡은 기계가 차곡차곡 쌓였고 창고 중앙은 큼직한 천을 뒤집어쓴 것이 차지하고 있었다. 먼지가 약간 쌓인 천을 걷고 얼마간 잠자고 있던 애마를 밖으로 끌고 나왔다. 중천에 뜬 달이 삼륜 모터사이클의 매끄러운 표면을 더듬었다. 붉은색 차체가 농밀한 광택을 띠는 가운데 은빛 프레임이 눈부실 만큼 반짝였다. 헬멧과 장갑을 챙겨 착용하고 무작정 출발했다. 이시엘을 만나게 되면 행운이고, 찾지 못하고 플랏으로 돌아왔을 때 이시엘이 있다면 그 또한 행운이다.
배기음이 적요를 쪼개고 그 사이를 헤드라이트가 비추었다. 첼레스테스는 산비탈 주변을 따라 달리며 불가역적인 것들을 사유했다. 폭격으로 주저앉은 건물, 끊어진 철로, 폭탄이 터져 무너진 갱도, 시위와 진압과 농성과 외면, 잡음이 끊이지 않는 공장, 세계를 찢어발기는 펜촉, 부상자들, 사망자들. 그리고 그을음이 묻은 사진, 잔해 틈새를 킁킁대는 개, 직접 철로를 넘어가는 몸들, 피켓과 행진의 파도, 고발의 외침, 결여를 메우는 잉크, 생존자들. 또한 헤어짐과 만남, 넘어짐과 일으켜세움, 나아감과 기다림, 떠남과 머무름과 돌아감……. 불현듯 사위를 둘러보았다. 지금 자신은 어디로 가고 있을까.
불빛을 타고 쭉 뻗어나간 의문의 끄트머리에 그림자 같은 형상이 걸렸다.
“이시엘!”
헤드라이트를 끄고 서치등만 밝힌 채 나아갔다. 도로 바깥쪽에서 걸어오던 이가 천천히 걸음을 늦추었다. 첼레스테스 역시 먼발치에 바이크를 세우고 헬멧을 벗었다. 이시엘이 불빛의 테두리에서 한 발짝 안으로 들어섰고 그와 눈이 마주쳤다. 오감이, 예감과 직감이 바짝 발돋움했다. 불타는 태양을 이끌고 제 세계에 들어온 저이를 본 순간부터 알지 않았던가. 저도 모르게 그 앞으로 달려갔다. 무심코 손을 뻗었다가 되돌려서 헬멧을 양손으로 꽉 잡았다.
“세상에, 별일 없으셔서 다행이에요. 늦도록 오시지 않아 얼마나 걱정했는지.”
“평소보다 멀리까지 다녀오는 바람에 시간이 지체됐습니다. 혹시 절 찾으러 나오셨습니까?”
“물론이죠. 이 근방은 워낙 인적이 드문 곳이니까요.”
유달리 흉흉한 동네라고 할 순 없으나 여자 혼자 밤거리를 산책하기 좋은 데도 못 되었다.
“아, 그렇군요. 폐를 끼쳤습니다.”
“별말씀을. 서로 염려하고 돕는 일이 어떻게 폐가 되겠어요?”
첼레스테스는 들고 있던 헬멧을 내밀었다.
“오래 걸으셨죠? 타세요.”
어깨 너머로 모터사이클을 본 이시엘이 물었다.
“보호 장비가 하나뿐이면 저는 걸어가도 됩니다.”
“걱정 마세요. 규정에 완벽히 부합하는 헬멧이 하나 더 있답니다.”
그제야 헬멧을 받아들인 그를 뒤에 태우고 한적한 도로 위를 주행했다. 은하수가 밤을 둘러안은 듯 이시엘의 양팔이 허리에 감겼고, 살며시 맞닿은 몸이 불가역적인 감정을 유도했다. 짐승처럼 웅크린 핀토스는 계속해서 그들을 무언으로 응시했다. 지나는 계절을 함축한 밤바람이 이따금 눈꺼풀 같은 낙엽을 날려 보냈다. 첼레스테스는 그 모든 것에 차분히 경도되었다. 영속해도 좋을 시간이었다. 하지만 순간은 늘 그러하듯 떠나 멀어지고, 그럼에도 첼레스테스는 플랏에 도착해 이시엘이 벗어 건네는 헬멧을 기쁘게 받아들였다.
“참, 저녁 식사는 하셨어요?”
그가 짧게 머뭇거렸다.
“괜찮습니다. 영업이 끝난 시간에 더 신세를 질 수는 없습니다.”
“아… 그러시다면 어쩔 수 없지만, 아쉽네요. 저녁으로 만든 뇨끼가 딱 한 접시 남았거든요. 정말 맛있게 됐는데 버리자니 너무 아깝고, 아침까지 두면 분명 맛이 없어질 텐데 어떡하나 고민 중이었어요. 베스의 훌륭한 요리를 남겨야 하다니, 안타까워요. 인기가 많아 항상 모자랐는데 오늘따라 손님이 왜 그리 적었는지.”
속상한 마음을 거듭 강조한 끝에 이시엘의 도움을 얻는 데 성공했다. 얼른 주방에 불을 밝히고 따뜻한 한 끼를 차려서 앞에 놓아 주었다. 정중하게 인사를 건넨 여자가 조용히 식사를 시작했다. 찻물을 올리려던 찰나, 계산대 밑에 시선이 걸렸다. 잠시 깜박했던 잡지가 모서리를 비죽 내밀고 있었다. 잠시 망설이다가 서두를 뗐다.
“실은 고백할 게 있어요.”
고개를 든 이시엘에게 잡지를 보여 주었다.
“일부러 찾아본 건 아닌데, 일방적으로 개인사를 들여다봐서 마음에 걸렸어요.”
그가 잡지를 받아들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닙니다. 알리고자 인터뷰한 내용이니 아셔도 무방합니다.”
이시엘은 매사 담백한 까닭에 오히려 거리감이 불확실했다. 첼레스테스는 한층 조심스러워졌다. 한편으로는 위태로운 어느 선까지 침범하고 싶었다. 아슬아슬하게 손을 넣어 파동을 일으키고 싶다. 오직 미래로 쏘아져 나가는 시간과 마찬가지로 그 흐름을 막지 못할 마음이었다.
“키시온으로 가시려는 건가요?”
거절 혹은 그 이상의 반응을 각오한 물음은 침묵을 마주했다. 산 그림자를 닮은 고요였다. 달그락, 이시엘이 부드럽게 스푼을 움직였다.
“아버님과 마지막으로 전화한 날, 그곳을 떠나시라 말씀드리고 싶었습니다.”
시간은 결코 역행하지 않는다. 대신 언어는 사람을 잠시나마 과거로 보냈다. 증언, 일기, 목격담, 회고록, 그밖의 다양하고 기나긴 이야기들.
“끝내 말이 떨어지지 않았습니다. 고향인 그곳이 당신께 어떤 의미인지, 어떤 마음으로 지키고 계신지 저 또한 모르지 않아 그저 무탈하시라 인사하고 통화를 마쳤습니다. 바로 그날 밤, 키시온의 소식을 들었습니다.”
목소리가 느리면서 또렷하게 이어졌다. 말하고 있는 와중에도 말의 배후에 붙은 침묵의 부피가 월등히 컸다. 그러므로 부호로는 표시되지 않고 호흡으로만 존재하는 쉼표조차 완전한 공백은 아니었다.
“설령 떠나시라 말씀드렸어도 머무셨을 것을 알아서 말 꺼내지 못했음을 후회하진 않습니다. 아버님께선 명예롭게 전사하셨고, 전 그분을 애도하며 살아남은 이로써 최선을 다해 제가 할 수 있는 일을 했습니다. 그래도, 잘은 모르지만, 뭔가 충분치 않은 것 같았습니다. 무얼 놓치고 있는지 거듭 생각해도 답은 나오지 않았고 다만 참을 수 없는 기분이 들어 하릴없이 기차를 탔습니다. 여기까지 오면 알게 되리란 생각 때문에.”
단촐한 여행 가방을 들고 이토록 외진 데까지 와서 며칠이나 묵을지 확답하지 못했던 연유가 그래서였구나. 어느 골짜기 사이, 먼 산중턱을 일별한 이시엘이 허공에 붙박여 있던 손을 내렸다. 그는 똑바른 자세와 걸음을 가진 사람답게 헤매는 법도 없이 현재로 돌아와선 느지막이 첼레스테스의 질문에 답했다.
“아직 모르겠습니다. 아버님이 지키시려던 땅을 보고 싶은지, 아버님을 앗아 간 땅을 보고 싶지 않은지, 그런 것과는 무관하게 고향의 모습이 궁금할 뿐인지요.”
복엽기에서 내려다본 광경이 불가피하게 떠올랐다. 누구에게도 그날의 파리사가 어땠는지 이야기하지 않았다. 제 입에 올리는 자체가 부적절하다고 여긴 까닭이었다. 이제야 당시의 기억을 말로 옮기려 한다면 청자는 응당 이시엘이어야 할 터였다. 과연 당사자가 듣기를 바랄지 확신하기 어렵지만, 말을 아끼려다 자칫 숨기는 형국이 될까 저어됐다.
“그 일이 있고 나서 파리사를 본 적 있어요.”
무뚝뚝한 낯이 미미하게 변했다.
“제대하기 전에 파일럿이었거든요. 니네베 연대에 있었죠.”
“…어땠습니까?”
그리하여 첼레스테스는 보았던 그대로를 사견 없이 솔직하게 전했다. 고개를 끄덕이는 이시엘의 모습은 일견 담담했다. 슬픔의 수심이 너무 깊어서 보이지 않는 것일까. 아니면 밀접한 폐허를 상상하지 않는 방법을 억지로 터특하고야 만 것일까. 그걸 가늠하는 것도 옳지 않다고 느껴져서 추측을 그만두었다.
이윽고 이시엘이 식사를 끝마쳤다. 여느 때처럼 꼼꼼하게 깨끗한 접시에 버려지는 것은 한 톨도 없었다. 그리고 만난 이래 처음으로 이쪽이 권유하기도 전에 먼저 차를 한 잔 청했다. 캐모마일 향부터 맡은 후에 한 모금을 머금은 여자는 만감이 우거진 녹색 눈을 내리깔았다.
“따뜻하네요.”
귓바퀴에 걸려 있던 붉은색 머리칼이 몇 가닥인가 흘러내려 뺨 위로 흐트러졌다. 이시엘을 안고 싶었다. 그의 머리를 빗어 주고, 데운 오일을 온몸에 발라 어루만지고, 한밤 내리 이마에, 콧등에, 볼에, 입술에, 가슴에 입을 맞추고 싶었다. 저이의 따뜻한 것이 되고 싶었다.
✈
“전화를 쓸 수 있습니까?”
어제는 방에 틀어박혀 끼니도 챙기는 둥 마는 둥하던 기자가 아침 댓바람부터 1층으로 내려와 물었다. 아직 가게도 열지 않은 시간이었다. 손끝은 잉크 얼룩이 다 지워지지 않아 거뭇하고 옆구리에 낀 서류 봉투는 신문에 실으려는 원고치고는 몹시 두꺼웠다. 책이라도 출판할 요량인가. 첼레스테스는 관심을 거두고 수화기를 건넸다. 엿들을 생각도 없지만, 기자는 목소리를 최대한 낮추고 조심스럽게 말을 주고받았다. 통화는 짧았다.
“잘 썼습니다.”
수화기를 돌려놓은 사내가 그 길로 플랏을 나섰다. 영업 전이라도 커피 한 잔은 내줄 용의가 있었는데 퍽이나 바쁜 모양이었다. 레코드판을 골라 턴테이블에 올리고 냄비 안에서 끓기 시작하는 토마토 스튜를 저었다. 새콤달콤한 내음이 플랏에 퍼졌을 때 베스가 출근했다.
“곧 비가 떨어지려나 봐요.”
그 말마따나 하늘이 온통 회색이었다. 일출 시간이 훌쩍 지났건만 구름이 은닉한 태양은 눈에 띄지 않았고 공기에 특유의 물 냄새가 물씬했다. 버터에 토스트와 아스파라거스를 굽고 달걀 프라이를 얹은 후 스튜를 곁들여서 베스와 아침을 먹는 중에 물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유리창을 톡톡 두드리기도 잠시, 빗줄기가 대번에 굵어졌다. 산맥을 넘어온 먹구름이 그르릉거렸다. 물의 소란이 플랏을 에워싼 가운데 이시엘이 위층에서 내려왔다. 물기가 덜 마른 머리칼이 유난히 붉어 아침마다 그는 막 피어난 장미처럼 매력적이다. 오늘따라 세계가 무채색인 까닭에 평소보다 두드러졌다. 여상스러운 아침 인사를 나누고 식사를 준비해 주었다.
“비가 제법 내리네요. 오늘은 플랏에 계시는 편이 좋겠어요.”
“예. 쉬이 그칠 비로 보이지 않는군요.”
산뜻한 긍정 이면에 고민이 엿보였다. 이유를 헤아리다가 곧 깨달았다. 슈트케이스 하나만 들고 온 그였으니 실내에서 시간을 보낼 마땅한 물건도 못 챙겼을 가능성이 높았다. 가령 읽을거리, 휴대용 라디오, 뜨개질감 같은 것들 말이다. 첼레스테스는 이시엘의 식사가 끝나길 기다렸다가 넌지시 물었다.
“방에만 계시려면 무료하실 텐데, 책이라도 빌려 드릴까요?”
맑은 눈동자에 언뜻 반가움이 떠올랐다.
“그래도 되겠습니까?”
“당연하죠. 어떤 책을 좋아하세요? 소설, 시집, 수필… 아, 사진집도 있어요.”
그가 잠깐 생각에 잠기더니 사뭇 친밀하게 미소했다.
“추천해 주시겠습니까, 첼?”
가까운 이들에게서 숱하게 들었던 제 이름이 이시엘의 육성을 입고 더없이 향긋해졌다. 오랜 세월 숙성되어 그윽한 풍미를 획득한 포도주가 된 기분이었다. 저를 호명하는 입술의 달싹임과 혀의 모양과 숨결의 습기를 상상하지 않는 것이 더욱 어려웠다. 한 잔의 와인으로 그에게 흘러들어 적시면 좋으련만. 첼레스테스는 눈웃음을 지었다.
“기꺼이.”
방으로 올라가 책장 앞을 서너 번 서성거렸다. 이시엘이 연애 소설을 즐겁게 읽을 것 같지 않고, 추리 소설도 취향을 타기 십상이었다. 그때 맨 윗칸 끝에 꽂힌 책이 눈에 들어왔다. 옛날에 어느 작은 서점에서 발견한 서적이었다. 사진이 실린 여행 산문집으로, 저자의 섬세하며 아름다운 시각이 인상 깊어 각별히 아꼈는데 전쟁이 터진 후 지금까지 잊고 살았다.
1층에서 기다리던 이시엘에게 책을 주며 허브차를 우리겠다고 말했다. 그러고는 차와 다과를 대접하며 여기 테이블이 넓어서 책을 읽기 좋을 거라고 굳이 덧붙였다. 모처럼 이시엘이 외출하지 않는 날이다. 조금이나마 오래 같은 공간에 있길 바라는 마음이 잘못은 아니잖은가. 물론 비가 내리는 창가에서 미인이 독서에 몰입하는 모습을 바라보고 싶은 욕망이 없다고는 못했다. 이렇게 궂은 날이면 으레 손님이 뚝 끊겨서 청소를 마친 베스는 일찍 퇴근시켰다.
단 둘만 남은 플랏. 고요가 물방울 형태로 하강하고, 턴테이블 위에서 천천히 도는 레코드가 현의 떨림을 읊조린다. 이시엘이 드문드문 종잇장을 넘기는 소리, 진한 로즈힙 향기, 천장에 매달린 엷은 노란색 불빛들. 조용히 설거지를 마친 첼레스테스는 이시엘을 방해하지 않으려고 바 테이블에 떨어져 앉아 신문을 펼쳤다. ‘파일럿의 연인’에는 성향도 제각각인 일간지, 주간지, 월간지가 항상 종류별로 있다. 꽤 많은 손님이 가져온 신문을 읽고는 두고 갔다. 그것들은 또 다른 손님의 손에 들어가 읽혔다. 첼레스테스 역시 한적한 시간이면 어디선가 유입되어 덩그라니 남은 신문을 훑고는 했다. 몇몇 신문의 구석에 할애된 크로스워드 퍼즐을 푸는 재미도 있었다.
“첼. 사진이 끼워져 있습니다.”
지브릴 블랑쉬가 날카로운 필치로 써 내린 사설을 읽던 중이었다. 첼레스테스는 의자에서 내려와 이시엘 곁으로 다가섰다. 흑백 사진 속에는 군복을 입을 자신이 활짝 웃고 있다. 정강이 높이까지 풀이 자란 어느 여름, 자작나무 숲이었다.
“키시온이군요.”
이시엘은 그곳을 한눈에 알아보았다.
“맞아요. 브룬넨이 침공하기 얼마 전이었어요.”
맞은편에 앉아 그와 함께 사진을 보았다. 자신만큼이나 이시엘의 눈빛도 추억에 젖었다. 아니, 저이가 가진 추억의 깊이와 색채를 어떻게 저와 비교하겠는가. 흑백 사진을 물끄러미 응시하는 시선에 감정이 여러 겹으로 물결쳤다. 애수, 기쁨, 고통, 애정.
“전 여기서 자랐습니다.”
“숲에서요?”
“어릴 적엔 놀이터였고, 펜싱을 시작하고 나서는 연습실이었습니다. 가슴이 답답하거나 속상한 일이 생겼을 때는 도피처였고요. 매년 키를 재고 표시했던 나무도 있었습니다.”
“사랑스러운 추억이네요. 이날 제가 손님의 키 재기 나무를 지나쳤을지도 몰라요.”
“예, 어쩌면.”
희미한 웃음을 뒤로하고 이시엘이 눈을 감았다.
“지금은…….”
그리고 나직하게 말끝을 흐리는가 싶더니 다시금 초록이 드러났다.
“지금은 새 숲이 생기고 있을 겁니다.”
첼레스테스는 미소로 긍정했다. 금속과 암석은 스러진 그대로겠지만, 불탄 숲은 불탄 채로 남아 있지 않으리라. 전쟁이 끝나고 일 년이 흘렀다. 이미 새로운 식물이 싹을 틔우고 줄기를 뻗어서 어린 시절의 이시엘보다 작은 묘목들은 지금 내리는 비를 흠뻑 맞고 있겠지. 언젠가 또 숲을 이루면 이전과 같은 자작나무가 아니더라도 필경 아름다울 터였다.
레코드가 멈췄다. 음악이 퇴장한 자리로 스며드는 투명한 감정.
입을 떼려는 찰나였다. 문이 열리고 빗소리가 남은 여백을 가로챘다. 넉살을 떠는 말소리가 이어졌다.
“여신이시여, 감사합니다! 이런 곳에 카페라니!”
자리에서 일어나 손님을 맞이했다. 눈꼬리가 뾰족한 여자가 한 명, 서글서글하게 웃는 남자가 한 명. 두 사람의 검은색 코트에 물기가 조금 묻어 있지만, 우산은 들지 않았다.
“어서오세요.”
“가게 앞에 차를 세웠는데, 괜찮을까요?”
“남는 게 주차 공간이죠. 편하신 자리에 앉으세요.”
여자가 성큼성큼 발을 내딛고 남자는 가게를 휘휘 둘러보며 따라갔다. 제일 안쪽에 앉은 두 사람은 따뜻한 커피를 주문했다. 단 한 마디도 하지 않는 여자의 몫까지 남자가 조잘거렸다. 커피 한 잔이 절실했다느니, 가게 분위기가 좋다느니, 이쪽은 듀브리스랑 딴판이라느니 등등. 그들에게 커피를 내어주니 어스레한 창밖을 내다보던 남자가 휙 고개를 돌렸다.
“사장님이시죠? 여기서 오래 장사하셨습니까?”
“오래됐다고 해야 할지 모르겠네요. 전후에 자리잡았어요. 이 근방이 다 그렇죠.”
“실은 저희가 누굴 찾는 중이라서요. 혹시 지브릴 블랑쉬라는 사람 아십니까?”
“지브릴? 처음 듣네요. 남잔가요?”
“예? 어, 잘 모르겠습니다만. 그쵸? 모르죠?”
남자는 동행이 앉은 쪽으로 상체를 슬쩍 기울였다. 우아한 동작으로 잔을 들다가 그를 흘기는 여자는 마치 모자란 이등병을 쳐다보는 병장과 비슷했다. 이왕이면 저쪽과 말을 섞고 싶었으나 무언을 고수하려는 여인에게 치근덕대는 짓은 꼴사나운 남자들이나 하는 짓이었다. 첼레스테스는 사내의 이름을 외우는 취미가 없노라고 설명하는 대신, 바 테이블에 한 팔을 올리며 기대고 서서 영업용 미소를 띠었다. 팔꿈치에 눌린 신문이 작게 바스락 소리를 냈다.
“보시다시피 위치가 이래서요. 낯선 사람은 잘 오지도 않을 뿐더러 보통은 손님의 이름을 들을 일이 없죠.”
“하긴…….”
심드렁하게 수긍한 남자가 구부정하게 턱을 괴었다.
“역시 듀브리스를 더 뒤져 보죠?”
그의 제안에도 동행인 여자는 조용히 커피만 음미했다. 무시 혹은 침묵에 익숙해 보이는 남자도 말문을 닫았다. 한동안 시간을 때운 두 사람이 일어나 밖으로 나설 때까지도 빗발은 전혀 누그러지지 않았다. 작게 시동을 거는 소리가 들린 후 전조등 불빛이 유리창을 한 번 훑었다. 첼레스테스는 반으로 접힌 신문을 펼쳐 1면 상단에 크게 인쇄된 ‘클라리온’을 한 번 눈에 담았다가 한쪽 구석으로 치워 놓았다. 이시엘은 한결같이 바르게 앉아 책장을 넘기고 있었다. 첼레스테스는 그의 빈 찻잔을 채워 주고, 턴테이블에 다른 레코드를 올렸다. 촘촘히 모인 건반 소리가 빗자루로 낙엽을 쓸어 치우듯 두 손님이 떨어트리고 간 적막을 가장자리까지 밀어냈다.
하늘은 온종일 비를 쏟아부었다. 그날 밤, 첼레스테스는 총성을 듣고 잠에서 깼다.
✈
침대 밑에서 장탄된 소총을 꺼낸 다음, 자세를 낮추고 창가로 가서 벽에 등을 붙였다. 어둠에 포박되어 푸른색을 잃은 커튼으로 창을 가렸다. 부츠의 끈을 빠르게 동여맸다. 창틀과 커튼 틈새를 약간 벌려 바깥을 내다보았다. 비가 내리는 밤은 포연에 뒤덮인 전쟁터처럼 제대로 보이는 게 없었다. 숙박 손님들을 위해 플랏 앞에 설치한 야외 전등이 달빛도 저버린 땅에서 찾을 수 있는 유일한 광원이었다.
탕! 두 번째 총성이 울렸다. 빽빽한 암흑 속에서 일순 번뜩인 연황색 불빛으로 단번에 위치를 가늠했다. 물건 몇 개와 리볼버를 챙기고 살금살금 2층으로 내려가 바깥 계단과 통하는 문을 잠갔다. 그때 누군가가 조심히 방을 나왔다. 눈에 익은 실루엣이었다.
“이시엘.”
작은 부름에 그가 멈칫했다. 작은 랜턴으로 바닥을 비추고 단걸음에 다가갔다.
“위험하니 안에 계세요.”
“방안에 있어도 안전이 보장되지 않습니다. 그리고 하나보다 둘인 편이 덜 위험할 겁니다.”
말소리는 침착했으며 눈빛과 얼굴에 긴장이 선연해도 공포는 훌륭히 갈무리되어 있다. 꼭 산전수전 다 겪은 군인 같은걸. 정말이지 강단이 센 여자였다. 설득하려던 마음을 바꿔 리볼버를 건넸다.
“쏴 본 적 있으세요?”
“예.”
단호히 대답하며 총을 받아드는 손동작을 보고는 더 군말을 얹지 않았다. 기자가 묵는 옆방의 문은 굳게 닫힌 채였다. 그곳을 흘긋 곁눈질하고 같이 1층으로 향했다. 플로어에 발을 딛자마자 총성이 네 번 연달았다. 탕! 탕, 탕! 탕! 위층에서 들었을 때보다 큰 총성이었다. 다만 그들을 노린 발사는 아니었다. 유리창 하나도 깨지지 않은 것이 그 증거였다. 돈이 목적인 강도였으면 진작 들이닥쳤으리라. 이시엘 혹은 첼레스테스를 죽이려고 했어도 마찬가지다. 다시 말해서 총을 쏘는 자는 밖에 있는 누군가를 공격하고 있었다. 양측이 총격을 주고받는 중일지도 모른다. 사태가 복잡했다.
어느 한쪽이 죽을 때까지 기다리는 것이 과연 옳을까?
생존한 측이 플랏에 침입하지 않고 얌전히 사라지리라 장담할 수 있나?
그러나 돕는다면 누굴 돕는단 말인가?
만에 하나 이시엘이 잘못되기라도 한다면…….
어쨌든 신고가 먼저였다. 이시엘에게 보안관 사무소 번호를 알려주고 지하실로 갔다. 야외 전등을 끄려면 가게 출입문을 열고 나가야 했다. 그런 위험을 감수하느니 전력을 끊는 게 나았다. 차단기를 내리자마자 위에서 소란이 일었다.
총성, 와장창 소리, 쿵, 쿵.
서둘러 계단을 뛰어올라갔다. 이시엘은 바 테이블 측면에 붙어 총구를 겨누었고, 깨져서 비가 들이치는 창가의 테이블 아래에 한 사람이 머리를 감싼 자세로 쓰러져 있다. 그가 웅크린 몸을 펴고 일어나다가 뒤늦게 둘을 발견해 멈칫한 순간, 재차 이어진 총성이 이번에는 다른 창문을 깨트렸다. 유리 조각이 바닥에 와르르 흩어졌다. 첼레스테스는 눈살을 찡그리며 ‘파일럿의 연인’의 또 다른 손님을 끌어다 바 테이블 안으로 밀어넣었다. 세 사람은 바닥에 나란히 앉았다. 중간에 낀 사내가 입을 꽉 다문 채 씨근거렸다.
“인생을 꽤 험하게 사셨나 봐요, 프란 화이트 씨? 밖에 몇 명이에요?”
“둘입니다.”
한숨이 저절로 나왔다.
“…말려들게 해서 죄송합니다. 저들의 목적은 저니까 두 분은 뒷문으로 나가서 도망치십시오.”
“글쎄, 무관한 사람을 끌어들이지 않을 위인들이었으면 여기다 대고 총을 쏘진 않았겠죠.”
“저 말씀이 맞습니다. 그리고 상대가 둘이라면 한 명은 지금쯤 뒷문 쪽으로 이동했을 겁니다.”
기자는 말문을 닫았다. 할 말이 없겠지. 마음 같아서는 여길 왜 들어왔느냐 따지고 싶었지만, 그런다고 상황이 좋아지지도 않을뿐더러 화풀이에 불과했다. 총을 쏴대는 자들이 아니라 목숨이 위태로워 숨어든 사람을 비난할 만큼 못나지는 않았다. 대화를 나누는 동안에 총격은 없었다. 폭풍 전의 고요였다. 첼레스테스는 프란 화이트를 다시금 훑었다. 그래도 암살자가 꼬일 수 있는 몸이라는 걸 자각하고 다니는지 총을 한 자루 갖고 있었다.
“몇 발 남았어요?”
“세 발입니다.”
반은 썼군. 적은 훈련을 받은 전문가일 터였다. 이쪽이 머릿수가 하나 더 많은 것은 딱히 유리한 요인도 아니었다.
“그건 제가 쓰겠습니다. 당신은 이걸 쓰십시오. 여섯 발이 그대로 있습니다.”
이시엘이 들고 있던 총을 프란에게 내밀었다.
“이시엘.”
“제겐 이것도 있으니 괜찮습니다.”
그가 끝이 구부러진 막대를 들어 보였다. 쇠지렛대였다.
“양주장 옆에 세워져 있었습니다.”
얼굴도 식별하기 어두운 와중에 그걸 발견하다니 관찰력이 대단했다. 프란이 거절했으나 이시엘은 한사코 총기를 교환했다. 펜싱 선수인 이시엘에겐 레이피어처럼 휘두를 수 있는 무기가 손에 익어서 편할지라도 쇠막대기로 화기(火器)를 든 적과 맞서는 선택은 상식적으로 무모했다. 첼레스테스는 이시엘의 너그러운 배려에 존경심이 들면서도 제 리볼버가 기자의 손에 들어간 것은 영 못마땅했다. 그럼에도 내색하지 않았다. 한가하게 볼멘소리를 터트릴 형편이 아니었다. 갑자기 창으로 환한 불빛이 쏘아져 들어왔다. 짐승이 목을 긁어 우는 듯한 엔진음을 듣고 뭘 하려는지 깨달았다.
“차로 들이박을 셈이에요. 구석까지 물러나요!”
셋이 몸을 던지자마자 육중한 고철 덩어리가 벽을 부수고 찌그러진 아가리를 들이밀었다.
콰앙—!
천둥이 고막에 바로 꽂힌 것 같았다. 새하얀 빛이 실내를 환하게 밝혔다. 다행히 바 테이블은 건재했다. 첼레스테스는 기자의 어깻죽지를 거칠게 잡아당기며 외쳤다. 헤드라이트! 그리고 바 위로 소총을 올려서 동공을 찌르는 불빛을 쏘았다. 오른쪽 전조등이 퍽 터지는 동시에 운전석 문이 열렸다. 총구를 문으로 틀었다. 탕! 탕! 자동차 문과 바 테이블 엄폐물 삼아서 총격을 한 번씩 교환했다. 워낙 거리가 가까워 정밀하게 조준할 필요는 없었지만, 빛에 노출된 이쪽이 확연히 불리했다. 문 뒤의 적을 견제하며 생각했다. 차에서 한 명만 내렸다. 그럼 다른 한 명은?
“첼, 뒷문입니다!”
마치 머릿속의 의문을 읽은 듯한 외침이었다. 첼레스테스는 섬뜩한 직감에 끌려 대각선 방향에 있는 계단으로 총구를 돌리자마자 격발했다. 두 개의 총성이 하나처럼 겹쳤다. 쇄도한 탄환이 팔뚝을 비끼고, 계단과 뒷문이 있는 복도에서 욕설이 터지고, 불쑥 암전이 찾아왔다. 기자가 왼쪽 헤드라이트를 박살낸 것이다. 곧바로 이시엘이 날쌘 제비처럼 곁을 스쳐 지나갔다. 따라가고 싶은 마음을 억누르며 자동차 쪽으로 몸을 틀었다. 그리고 저 대신 견제 사격을 몇 발 가한 프란을 뒷문으로 보냈다.
총성, 박살나는 술병, 퍽퍽 터져 나가는 테이블, 공중에 날리는 나뭇조각, 발치에 구르는 탄피……. 목숨이 왔다 갔다 하는 와중에도 첼레스테스는 제 플랏이 엉망진창으로 변해 간다는 사실에 비감을 느꼈다. 그래도 바닥에 흥건하게 고인 와인은 긍정적인 생각을 불러일으켰다. 도수 높은 양주를 안 팔아서 다행이었다. 쏟아진 술이 보드카였으면 라이터를 던지기 딱 좋은 환경이 될 뻔했으니까.
탄환이 귓바퀴 끝을 스쳤다. 간담이 서늘해졌다. 대번에 긴장이 극에 달하자 조바심이 일었다. 한시라도 빨리 상대를 제압하여 압박감에서 벗어나고 싶은 욕구가 들썩였다. 아직 냉정한 머리가 몸을 빠듯하게 통제했다. 초조감에 휘둘려서 뛰쳐나갔다간 맞추기 좋은 과녁판이 될 뿐이다. 저쪽이 먼저 인내를 잃고 달려들면 좋겠지만, 기대하지는 않았다.
적도 피차 같은 생각을 한 듯했다. 운전석에 올라탄 이가 차를 빼기 시작했다. 재차 박으려는 계획이리라. 빠르게 탄창을 갈아 끼운 첼레스테스는 바 테이블 위를 훌쩍 뛰어넘어 플랏 밖까지 쫓아나가 운전석을 쐈지만, 워낙 캄캄한 데다가 일부러 이리저리 방향을 비틀며 후진하는 바람에 겨냥이 쉽지 않았다. 더 멀어지기 전에 목표를 타이어로 바꾸고 연사했다. 출렁대던 차가 덜컹 내려앉더니 빗물에 미끄러져 회전하다가 멈췄다. 꼼짝도 안 하는 새까만 덩어리는 툭 튀어나온 바위 같았다. 누가 내리는지도 잘 보이지 않는 까닭에 차에 시선을 고정한 채 플랏 안쪽으로 천천히 뒷걸음질했다. 그새 머리부터 발끝까지 비에 젖어 축축했다.
두 사람은 어떻게 됐지? 이시엘은 괜찮을까? 왜 아직 돌아오지 않지?
너무 조용했다. 찾으러 가고 싶었다. 찾아야 했다. 지금 눈을 떼려는 판단은 옳지 않다. 하지만 이시엘이 위험하다면, 혹여 움직일 수 없을 정도로 다쳤다면 이게 다 무슨 의미인가. 첼레스테스는 젖은 얼굴을 쓸어내렸다. 탄식이 흘러나왔다.
“첼.”
명료한 호명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뒤돌아본 곳에 어느새 나타난 이시엘이 서 있었다. 그의 손에 여전히 들린 쇠지렛대가 왠지 전설의 명검처럼 보여 첼레스테스는 그만 미소를 짓고 말았다.
“이시엘! 무사했군요.”
“예, 덕분에. 첼은 괜찮습니까?”
“저도 무사해요. 화이트 씨는요?”
“그도 무탈합니다. 뒷문으로 들어온 자를 생포하는 데 성공해서 화이트 씨에게 감시를 맡겼습니다. 다른 이는 달아난 겁니까?”
첼레스테스는 멀찌감치 떨어진 형체를 가리키며 상황을 짧게 설명했다. 그들은 같은 곳을 응시하며 어떻게 할지 의견을 나누었다.
동료가 잡힌 걸 알면 다시 올 수도 있겠습니다.
그리 의리가 강한 사이일지 잘 모르겠네요.
가 보는 편이 좋겠습니까?
아니에요. 밖에는 총격에서 몸을 숨길 데가 없어요.
다행히 둘은 고민을 오래 끌지 않아도 되었다. 마침내 신고를 받은 보안관들이 도착했다. 자동차 여러 대가 내뿜는 불빛과 희게 빛나는 빗줄기를 지켜보던 첼레스테스는 이시엘에게로 눈을 돌렸다. 그러고는 무너지고 부서지고 흩어지고 깨지고 찢겨 조각난 ‘파일럿의 연인’을 살펴본 다음에 마지막으로 다시 이시엘을 응시했다. 그새 이시엘도 난장판이 된 내부를 둘러보다가 시선을 맞추었다. 밤이 눈을 가린 탓에 뒤늦게 알아챘다. 이시엘의 몸에서 물이 떨어졌다. 함께 비를 맞지는 않았으나 똑같이 비에 젖어 있었다.
첼레스테스는 무언가를 말하고 싶었다. 욕망과 의무가 접붙은 연리지가 되어 가지를 드리웠다. 거기에 영글어 매달려서 흔들리고 무르고 터져 버릴 것 같은 말들.
“많이 부서졌군요.”
그래요. 속절없이 부서졌지요.
“첼? 몸이 안 좋습니까?”
고개를 흔들고서 물기로 가라앉은 머리를 뒤로 넘겼다. 자신이 밟고 서 있는 돌과 유리와 나무 잔해를 신발 밑창으로 긁었다.
“지켰다고도, 못 지켰다고도 말하기 애매한 꼴이긴 하네요. 위층에 피해가 없으니 불행 중 다행이라 해야겠죠. 이 상태로 지내기는 어렵겠지만요.”
이시엘이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하룻밤은 괜찮을 겁니다.”
랜턴을 손에 든 보안관들이 달려왔다. 첼레스테스는 사건 경위를 설명했다. 이시엘이 보안관 둘을 대동하고 뒷문으로 나가서 포박해 놓았던 자를 데려왔다. 찢어진 이마에서 피를 흘리며 한쪽 발을 절뚝이는 남자는 예상대로 검은색 코트 차림이었다. 보안관들은 밖에 멈춰 있는 자동차에서 누구도 찾지 못했다. 실패가 확실해지자 몸을 뺀 것 같았다. 첼레스테스와 이시엘은 구두 조사에 응한 것으로 끝났지만, 사건과 직접적으로 연관된 프란 화이트는 보안관들과 함께 가기로 결정됐다. 자세한 조사도 필요한 데다가 범인 중 하나가 달아났으니 당장은 보안관 사무소에 의탁하는 편이 안전했다. 보안관이 현장 조사를 진행하는 사이, 짐을 챙겨 내려온 프란이 걸어왔다. 어딘가 망가져서 비뚤어진 안경이 콧대에 위태롭게 얹혀 있다.
“도와주신 덕분에 살았습니다. 감사합니다.”
“됐어요. 따지자면 당신을 구하려던 건 아니었거든요. 인사는 이시엘에게 가서 하세요.”
그는 무어라 더 말할 것처럼 입을 뗐다가 도로 다물고 보안관과 이야기하는 이시엘을 향해 돌아섰지만, 몇 걸음을 가기도 전에 돌아왔다.
“피해를 입으신 부분은 제가 할 수 있는 한 보상하겠습니다.”
제법 결연한 선언이었다. 첼레스테스는 눈 뜨고 못 볼 꼴이 된 1층을 가리키며 웃었다.
“그러실 돈은 있고요? 지브릴 블랑쉬 씨?”
플랏에 묵는 동안 지켜본 이 손님은 무척 검소했다. 옷차림은 깨끗하고 단정했으니 오래 입어 낡은 티가 났고, 먹고 마시는 데 필요 이상으로 비용을 들이지도 않았다. 숙소비는 꼬박꼬박 지불했으니 그나마 돈에 쪼들리는 형편까진 아니리라 추측했다. 인제 와서 생각하건대 후원자가 한둘은 있을 법했다. 권력자와 자본가의 원한을 많이 산 몸으로 유랑 생활을 지속하려면 기자 급여만으로 충당이 어려울 테다. 그러니 플랏의 수리 비용을 요구하면 빌려서라도 마련해 올 만했다.
“애당초 보상 책임은 생존자가 아니라 여기에 차를 갖다 박고 총을 쏴댄 측에 있죠. 받을 게 있으면 그쪽에게 받을 테니 가 보세요, 화이트 씨.”
그는 껄끄러운 기색을 숨기지 못하면서도 납득하고 떠났다. 이쪽도 무턱대고 사양한 건 아니었다. 전쟁으로 무너진 삶을 들여다보라고 줄곧 말해 온 사람에게 돈을 받아 봐야 속만 불편하리라. 그리고 첼레스테스는 제가 금전적으로 여유로운 기반을 가진 덕에 보상금도 담백히 포기할 여유가 있음을 자각했으므로 호의를 베푼다는 식으로 거절하긴 싫었다.
보안관들은 조사를 일단락하고 사무소로 돌아갔다. 당분간 듀브리스에 머물라는 권유를 물리친 첼레스테스는 플랏에 남아서 몇 가지 일을 처리했다. 우선은 베스에게 전화해 전후사정을 간략히 설명하고 본의 아니게 더는 일자리를 제공하지 못하게 되었음을 전했다. 뒤이어 재산 관리인에게 연락해 베스의 봉급과 퇴직금 지급을 일임했으며 마지막으로 어머니와 변호사에게 차례차례 전보를 부쳤다.
이시엘도 플랏에 남았다. 전화를 돌리는 동안에 그가 대신 지하실에서 전력 차단기를 다시 올렸다. 수화기를 내려 놓았을 때는 뜨겁게 우린 차를 머그잔에 담아서 가져다 주었다. 바 뒤편에 조그맣게 딸린 주방만은 온전해서 수도와 취사 도구를 쓸 수 있었다. 그들은 멀쩡한 의자를 찾아서 앉았다. 조명과 음악도 없고 보기에 좋은 것이라곤 일절 안 남은 공간에서 유일하게 사람만이 찬란했다.
그럼 날이 밝고 어디로 갈까. 어디로든 갈 수 있다. 동시에 어디로 갈지 막막했다. 정답이 부재했으므로 옳고 그름도 없었다. 선택만이 있을 뿐.
“올라가서 쉬시는 편이 좋겠습니다, 첼. 고단해 보이십니다.”
“그건 이시엘도 마찬가진걸요. 같이 올라가요.”
이시엘을 등을 보면서 계단을 오르는 그 잠깐이 소나기 같았다. 여물어 떨어진 살구 같았다. 2층에 다다른 순간에 기어이 두 손을 뻗었다. 이시엘의 어깨는 반듯한 만큼 단단했고 아찔하게 가늘었다. 고개를 수그려 속삭였다.
“엘. 제 방에 욕조가 있어요. 비를 맞았잖아요. 따뜻한 물에 들어가서 몸을 녹여요. 긴장도 풀고요.”
그가 더디게 고개를 돌렸다. 단발머리에 엷게 밴 빗물 내음과 목덜미의 풋풋한 체취. 눈과 눈이 상호 마주하여 시선으로 연결된다. 그리도 단순명료한 직선으로부터 첼레스테스는 멈춰 있던 인생이 운행하는 감각을 느꼈다. 이제부터 죽거나 살고, 슬프거나 기쁘고, 파멸하거나 수복하는 삶의 온갖 갈래가 바로 이 초록색 눈에서 시작하고 끝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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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시엘의 머리를 빗어 장미향 오일을 발라 주었다. 탄력적인 팔다리를 손끝으로 부드럽게 눌러 마사지하고, 우아한 어깨와 등을 문질렀다. 목덜미에 입을 맞추었다. 허리를 끌어안고 합쳐진 체온으로 침대를 데웠다. 눈을 붙였다가 세상이 남빛으로 변화할 무렵에 깨어나 말했다.
엘, 비행해 본 적 있어요?
여전히 비가 뿌리는 하늘은 느릿느릿 밝아졌다. 아침은 밀크티를 우리고 버터에 팬케이크를 구워서 해결했다. 꼭 가지고 다녀야 할 짐만 꾸리고 덜 중요하거나 부피가 큰 귀중품은 창고로 옮겼다. 첼레스테스는 이시엘을 모터사이클에 태우고 천천히 달렸다. 새벽부터 조금씩 가늘어진 빗줄기가 이슬처럼 그들을 적셨다. 핀토스 산맥은 차차 멀어지면서도 등허리를 높였다가 낮추면서 꾸준히 뒤로 따라붙었다.
이십분 가량 달려서 사방이 탁 트인 대지에 도착했다. 듀브리스에서 서쪽으로 얼마쯤 떨어진 곳에 세워진 민간 비행장이었다. 관리인과 경비원들은 아침나절부터 방문한 둘을 반기지 않았지만, 첼레스테스가 건넨 열쇠와 서류를 확인하더니 잠자코 안으로 들여서 격납고 한 켠을 열었다. 인간이 긴 세월 창공을 동경하는 마음에서 탄생한 쇠의 새가 어슴푸레한 날빛에 드러났다.
어딜 가는지 묻지 않고 조용히 동행해 준 이시엘은 느닷없이 복엽기를 만나고 자못 놀란 눈치였다.
“이렇게 가깝게 본 건 처음입니다.”
첼레스테스는 복엽기를 만져 볼 수 있도록 이시엘을 옆으로 이끌었다. 그가 차고 딱딱한 몸체에 손바닥을 지그시 붙였다. 저이의 손에 닿으면 심장이 없는 새라도 두근두근 고동치리라. 저이의 초록색 눈에 담기면 녹슬어 굳은 육체라도 푸르게 생기가 돌리라.
“키시온으로 가요, 엘.”
이쪽을 향한 눈동자에 어느 때보다 채도가 높은 감정이 확 트였다.
“거길 가 보는 편이 낫다거나 안 가는 게 좋겠다는 말을 감히 할 수는 없겠죠. 다른 누구도 그러지는 못할 거예요. 하지만, 엘, 대신 저는 답을 알아보러 가자고 말할 수 있어요. 당신을 데려다줄게요. 이 날개로 산맥을 넘어서.”
그 폐허에는 비탄도 외로움도 절망도 있을 것이다. 담배도 스웨터도 장난감도 있을 것이다. 비가 흙먼지를 씻기고 돌들이 무너진 틈바구니로 샛노란 민들레도 흰색 코스모스도 피었다가 졌을 것이다. 잡초들도 무성해져서 금색으로 말라가는 중일 것이다. 이시엘이 무엇을 보고 느끼든지 그저 곁에서 걸을 것이다. 원한다면 오래도록 머물 것이며 당장 떠나기를 바라면 또 날개가 되어 줄 것이다. 손을 내밀고 기다리자 이시엘이 한참 바라보던 끝에 조심히 맞잡았다. 첼레스테스는 깨달았다. 저는 분명 이때를 위해서 하늘을 나는 방법을 배웠으리라고.
잦아들던 비가 완전히 그쳤다. 두 사람을 태운 복엽기가 촉촉한 활주로를 곧게 미끄러져 마침내 떠올랐다. 핀토스를 향해 완만하게 상승하는 시간은 담장을 감고 만개한 장미 같았다. 기화하는 물방울 같았다. 첼레스테스는 잿빛 구름이 걷히면서 쏟아진 서광으로 날아들었다. 새파란 춘풍이 날아와 손을 보탰다. 우주의 무수한 점 가운데 하나뿐인 복엽기는 마음껏 바람을 타고서 고도를 높였다. 점은 땅으로부터 산 너머로 긴 선을 이어졌다.
이 창공의 궤적 안에 찾아 헤매던 모든 것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