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계시도 예언도 없노라 말하는 너는 홀가분해 보이지 않았다. 신의로 약속한 바를 이루었고 신으로부터 내림 받은 정언도 마침내 이행한 네 얼굴에서 내가 새길 수 있는 감정은 완연한 피로뿐이었다. 끝내 말을 아끼는 널 대신해 너 스스로 가누지 못하고 금이 간 둑처럼 흘리는 에테르가 차라리 더 많은 이야기를 했다.
네게서 조그마한 기쁨이나마 발견하길 바랐다. 그것이 해방감이어도 좋고, 되돌려진 시간으로 많은 이들이 살았다는 안도감도 좋다. 어렵다면 친구들과 더불어 무사히 마지막에 도달했다는 단순한 만족이라도 내비치기를. 질문 아닌 말들을 주고받는 내내 너는 여전히 내 이해가 가닿지 못하도록 먼 데서부터 기인한 애수 너머에 있었다. 이윽고 자리를 뜨던 새벽녘에 나를 감싼 감정은 단어 몇 개로 명명될 수 없었으나 하나만은 명징했다. 너로부터 전도되고 또 나를 투영하는 그 고통.
장관과 면담이 길어져 잠시 양해를 구하고 메모를 작성하는데 아쉬운 한편 오히려 다행인가 생각한 까닭은 그래서였다. 네 고통을 덜기는커녕 한층 유발할 뿐인 내가 빠졌으니 너는 편안한 저녁을 보낼 터였다. 네가 실소하는 상상을 하며 아세르 저택으로 보내는 전언 말미에 쳐진 눈썹을 그렸다.
클레이오, 너와 함께 저녁을 먹지 못해 슬퍼.
시종에게 메모를 건네는 내 입가를 고소가 베고 지나간다. 네가 쏟아낸 피와 에테르에 견주면 내 슬픔의 부피나 중량은 실로 무상하지 않은가.
침상에서 앓는 너를 보러 들어갔던 밤, 아무렇게나 새어 나오는 백금빛 에테르로 네 주변은 일몰 무렵이었다. 너는 당장에라도 벗겨지고 찢어질 얄팍한 금박 같은데 에테르는 아득한 신화처럼 무심하게 유려하다. 온도를 배격한 빛에서 나는 최초로 섬뜩함을 느꼈다. 널 위해 데워진 방에 조금의 냉기도 엄습하지 못하는데도 서늘한 감각이 차올랐다.
이불 밖으로 나온 손을 넣어 주려고 침대 곁으로 가고 나서야 네 왼손에서 못 보던 상흔을 발견했다. 고열에 가죽이 오그라지다 만 것처럼 이지러진 살갗. 어떠한 경위로 생겼는지 알 기회가 내게 주어지긴 할까, 클레이오.
도저히 되돌릴 수 없게 누설되는 에테르가 너무 밝고 메말라서 나는 흐르는 피를 속수무책으로 받는 사람처럼 무릎을 굽히고 말았다. 손등에 이마를 대며 신의 대리인인 너를 생각했고, 다음으로 입술을 대며 친애하고 신뢰하는 너를 생각했고, 이어 손을 놓고 일어나 내려다보며 네 본질을 생각했다. 메이지 마스터, 은총의 마법사, 아세르 가의 차남 등등 너를 일컫지만 아무도 클레이오 아세르라는 사람을 제대로 모른다는 진실.
그것이 결국에는 너였다. 가장 가깝다 믿는 내게도 더욱 내밀한 앎의 때는 아스라했다.
나는 두 손으로 얼굴을 덮었다.
‘클레이오.’
나는 두 손으로 낯을 쓸어내렸다.
‘클레이오.’
얼굴과 손바닥은 건조했다. 넘치는 백금빛으로 표상되는 신의 창대 안에서 모순적이게도 너는 그늘졌고 내 무지는 비루했다. 역광에 압도되어 검은 것으로 포괄된 하나 사물처럼 너는 단순함에 가려졌다. 그때 나는 네 존재로부터 통렬히 실감했다. 입때껏 쇄신한 네 투신의 대가로 여신과 인간이 무얼 약속했든 이것은 네가 도달해 마땅한 결말은 아니었다. 불러도 대답 못하는 이를 뒤로하고 나온 밤부터 고통은 내 심장을 겨냥하고, 클레이오, 너를 상기하는 순간마다 나날이 첨예해진다.
한숨 돌릴 새 없이 연달았던 일정이 마침내 끝나고 시계를 보니 식사 때가 한참 지난 뒤였다. 나 때문에 덩달아 아세르 저택에 못 간 이시엘과 늦은 식사를 했다. 이시엘은 집에 돌아가서 먹어도 된다고 사양했지만, 식사 자리에도 못 온 사람을 굶겨서 돌려보냈다고 첼이 작은 앙심을 품을 터였다. 이시엘이 파마 궁을 나서고 제레미 툴민까지 퇴근한 후에야 혼자 된 나는 국왕 대리도, 친우의 주군도 아닌 너의 아서가 된다. 시종이 전달한 메모를 받고 너는 약간 안심했을까 아니면 언어로 정의하기 어려운 마음이었을까.
오늘 회의실에서 본 너는 내 질문에 도리 없이 동요했던 밤은 없던 것처럼 냉정하리만치 무덤덤했다. 짧게 서로를 응시한 찰나 미미하게 흔들린 표정으로 네 감정을 이해하려 노력했으나 내가 취사한 명칭들은 체념과 절박, 쉼표와 마침표처럼 극과 극이고 풀이하기엔 맥락이 불명확한 것들이었다. 동시에 내 감정도 그러했다. 타인은 몰라도 내 기분만은 정확히 안다고 여겨 왔으나 사실은 인간의 복합적인 마음결이 한 자루 칼처럼 극명할 리가 있겠나.
의견을 굽히지 않는 너를 보며 나는 불가피하게 미소했다. 길었던 전쟁과 몰아치는 시간에 쫓겨 외면하고 말았던 네 많은 얼굴을, 말하고 싶어도 말 못 할 것들을 힘겹게 삼키면서도 괜찮은 척하게끔 방치했던 나날을, 내 눈을 천진하게 가렸던 맹목적 믿음을 후회하는 까닭이었다. 어떤 순간은 당시에 알아차리지만 지나서야 알게 되기도 한다. 네가 영광과 애정과 찬사를 오직 나와 친구들의 것으로만 온전히 돌리고 스스로는 담담히 그늘을 택했던 순간을 나는 그제서야, 비로소, 느지막이 짐작하게 되었다.
밤이 이슥해 첼과 안젤리움 자매가 돌아가고도 남았을 즈음 왕궁을 나서 아세르 저택으로 향했다. 나는 익숙하게 담을 넘어가 정원에서 네 방의 발코니를 올려다보았다. 이제 계시도 예언도 없노라 말하는 너는 홀가분해 보이지 않았지만 나는 차라리 후련했던 것 같다. 신의 강박한 매듭에서 풀려난 네가 그 가벼운 무게감으로 홀연히 사라진대도 납득한다. 널 위한 경감이 되어 주기에 내가 턱없이 밝고 멀고 낮은 탓에 버려지더라도 수용하리라. 네 묵언 너머로 섣불리 다가가게 해달라 매달릴 만큼 내 통증은 네 아픔에 준하지 않으므로.
그러니 친애하는 나의 클레이오, 신조차 귀 기울이지 않을지라도 신의를 담아 말한다.
나는 아직도 괜찮고 덜 아프고 덜 짓이겨졌으니 후회하고 자책하고 곱씹으며 기다리고 견딜 수 있다. 언젠가 내 심장을 높이 쏘아 올릴 고통의 화살로 말미암아 네게 다다르는 때까지, 종국에 내게 바라 마지 않던 이해가 허락되는 날까지 널 위해 기꺼이 괴로우리라는 것.
그것이 네 신의에 답하는 내 ‘약속’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