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현세건] 디오라마


세월이 지나도 변함이 없고 어떤 때에는 오히려 젊어진 것 같기도 한 김성희의 얼굴을 보고 있노라면 서현은 마치 예전으로 돌아온 착각이 들곤 했다. 아르쥬나가 있고 거기에 마주 앉아서 시답잖은 말다툼을 하던 세건이 있던 시절 말이다. 그러나 지금은 흔하디흔한 프랜차이즈 카페에서 성희를 만났고 한세건은 없었다. 새삼스레 그 사실이 소름 끼치도록 현실적으로 다가와서 서현은 일부러 머그잔에 담긴 커피만 뚫어지게 내려다보았다. 까만색 액체에 비친 서현의 얼굴 또한 김성희와 마찬가지로 예전과 비슷했다. 시간이 멈춘 공간에서 오직 세건만이 제거되어 있었다.

라이칸스로프와 인간의 수명은 비할 바가 아니었다. 어차피 언젠가는 죽어서 곁을 떠날 사람, 조금 더 일찍 갔을 뿐이다. 더구나 한세건은 몸에 너무 많은 부담을 지우고 있던 처지이니 요절한 것도 당연하다. 죽음을 멈추기는커녕 늦출 방법도 없어서 다만 물병에 시커먼 잉크가 번져나가는 모양을 지켜보듯 바라볼 도리 외엔 없었다. 마지막에 한세건이 어땠더라. 그날의 세건이 어떤 얼굴이었는지 벌써 가물가물했다. 세건은 자신의 끝을 담담하게 맞이했고 서현도 마찬가지였지만 내심 현실을 부정하고 싶어 했고 지금까지도 잊으려고 애쓰는 터라 기억이 선명하지 않다.

“무슨 생각하니?”

성희는 다 알면서도 모른 척 물었고 서현은 그 모른 척을 기꺼이 받아들였다.

“왜 아메리카노인가 해서요. 저 쓴 건 잘 안 마시는 거 아시면서.”

까다롭게 메뉴를 가리는 타입이 아니라 성희가 자신이 커피를 주문해 오겠다고 말했을 때도 뭐든 괜찮을 줄 알았다. 그런데 하필이면 아메리카노, 그것도 프랜차이즈의 탄 맛 나는 커피라니. 서현은 머그잔을 들어 한 모금 마셨다가 눈살을 찌푸리며 도로 내려놓았다. 그 꼴을 본 성희가 퍽 재미있다는 듯이 웃으며 자신의 잔을 들었다. 성희가 시킨 커피는 우유 거품을 가득 얹은 카푸치노였다. 빨간 립스틱을 바른 입술에 거품이 약간 묻자 혀끝으로 요령 좋게 훔쳐낸다.

“근데 저한테 줄 물건이라는 건 뭡니까?”

“아, 그거. 택배로 보냈는데?”

“…전해주려고 만나자던 거 아니었어요?”

“너무 커서 들고 다니긴 번거롭거든. 오늘은 겸사겸사 얼굴이나 보려고. 잘생긴 얼굴을 자주 못 보니까 하루하루 늙는 기분이 들더라구.”

말은 그렇게 해도 세건의 죽음으로 인해 생긴 서현의 상실감을 달래 주려는 의도이리라. 서현은 표정을 감추려고 일부러 쓴 커피를 크게 들이켰다. 절로 인상이 찌푸려지고 그제야 서현은 성희가 굳이 아메리카노를 시킨 까닭을 알 것 같았다. 성희의 마음 씀씀이는 고맙지만 한편으론 부담스러웠다. 한세건이 떠나고 상심한 것은 분명하지만 몇 년이 흐른 지금까지 위로가 필요할 정도로 힘들지도 않았다. 그런데도 성희는 물론이거니와 서린까지 연락할 때마다 은근하게 신경을 쓰곤 했다. 특히 서린이 자주 그러는데 서현은 솔직히 어처구니없었다. 세건이 죽은 후, 훨씬 깊은 사이였던 자신보다 서린이 더 힘든 시간을 보낸 까닭이다. 예지 능력으로 이미 알았음에도 불구하고 마치 예기치 못하게 사고로 가족을 잃은 아이처럼…….

“뭘 보낸 건데요?”

“디오라마. 박물관에 가면 조그맣게 축소해서 만든 마을 모형 같은 거 있지? 그런 거야.”

“뭔지는 알겠군요. 어디서 그런 게 생겼는지도 궁금하지만 그걸 왜 저한테?”

“아는 마법사가 심심풀이로 만들었다고 선물로 준 거야. 그러니까 마법 도구라는 거지. 물론 관상용 외에 쓸모는 없지만 우리 집은 너무 복잡해서 그런 큰 물건 둘 곳이 없어.”

결론은 선물이니 받긴 받아야겠고 딱히 전시해 놓을 장소는 없으니 떠넘겼다는 소리다. 확실히 서현의 집이 넓기는 했다. 세건은 죽기 전에 자기가 소유한 땅과 건물을 모두 처분했지만 마지막까지 지낼 아지트 하나는 필요했기에 남겨 두었고 그곳은 그대로 서현의 집이 되었다. 일단 중고차 회사 사무실 정도로 등록해 두었지만 사실상 일과는 전혀 관련이 없고 루스킨과 빼또쥬는 예전 아파트에 그대로 지내서 온전히 서현 개인의 공간이 되었다.

“받기는 하겠지만, 무슨 모형인데요?”

“그건 나도 모르겠네. 나야말로 궁금하니까 뜯어보고 나서 알려줄래?”

서현은 한숨을 쉬었다. 아는 사람에게 받은 선물이라면 위험한 물건은 아니겠지만 명색이 마법 도구인데 한 번 살펴보지도 않고 휙 넘기다니, 조심성이 없다. 아마도 선천적인 마법 저항력을 믿기 때문일 테지만 그마저도 요즘은 약해졌다. 인간을 안 먹고 카타볼릭 상대로 지낸 지가 몇 년이던가. 인간으로 따지면 수도원 생활을 하면서 풀만 뜯어 먹는 수준이었다. 그렇다고 해도 릴리쓰의 자손, 남들 보기에는 여전히 강력한 라이칸스로프일 뿐이니 어디에 토로할 데도 없다.

그 후로는 어떻게 지내는지 적당히 말을 주고받으며 시간을 보내다 헤어졌다. 성희는 이따금 무언가 말하고 싶은 기색을 내비쳤는데 아마도 세건에 관한 이야기일 거라고 서현은 지레짐작했다. 그 외에 그녀가 말 꺼내기를 망설일 화제는 달리 없었다. 서현은 몇 번이고 편하게 얘기해 보라고 말하려다가 마음을 바꾸기를 거듭했다. 그런 지나친 배려를 굉장히 불편하게 여기면서도 한편으로는 세건의 이름을 꺼내려고 할 때마다 속에 박혀서 채 빠지지 않은 가시가 따끔하게 가슴을 찔렀다. 몇 해가 지났는데도 가시 끝은 무디어질 기미가 안 보였다. 그토록 한결같은 날카로움을 유지하다니, 그 고집스러움이 한세건을 닮았다.

집으로 돌아가는데 타이밍 좋게 택배 기사에게서 전화가 왔다. 곧 도착할 시간이기도 하고 어차피 근교의 외딴 장소에 지어진 곳이라 누가 들고 갈 염려는 없어서 집 앞에 놓아 달라고 부탁했다. 얼마 후에 도로에서 커다란 택배차 한 대가 반대쪽 차선에서 달려와 옆을 스쳐 지나갔다.

집에 도착해서 바닥에 곱게 놓인 상자를 보니 확실히 크긴 컸다. 직사각형 상자의 긴 쪽은 서현이 양팔을 좌우로 벌린 만큼이나 길어서 겉만 보기에는 커다란 서랍장 같기도 했다. ‘깨짐 주의’ 문구가 붙어 있어서 조심스럽게 안으로 옮겼다. 서현에게는 별거 아니었지만 인간 기준으로는 성인 남자가 옮기기에도 상당히 버거운 무게였다. 상자를 뜯고 스티로폼과 에어캡까지 모두 걷어낸 후에야 디오라마의 외형이 드러났다. 검은색 벨벳으로 둘러싸여 내용물은 아직 보지 못했는데 웬 글씨가 써진 종이가 붙어 있어서 글귀를 쭉 훑어보았다.

사용 설명서.

첫 번째, 윗면 마법진에 손을 댄다.

두 번째, 10초 동안 아무거나 떠올린다.

세 번째, 감상한다.

참 간단해서 좋은 설명서였다. 벨벳을 거두자 견고한 유리 상자가 드러났는데 그 안은 검푸른 안개 따위가 가득했고 천장을 덮은 유리에 물감 따위로 마법진이 새겨져 있다. 서현이 손을 얹자 감응해서 붉게 빛나기 시작했다. 그리고 아무거나 떠올리라고 했던가. 공교롭게도 서현의 머릿속에 그려진 것은 세건의 얼굴이었다. 순하다면 순한데 맹렬한 귀화가 어린 눈초리는 잘 벼려진 창만큼 매섭고, 약간 까칠한 입술을 꾹 다물고 있으면 완고해 보이기도 한다. 그래도 어쩌다 한 번씩 웃을 때는 제법 곱상하게 생긴 평범한 청년 같았다. 더해서 새카만 눈동자, 단정한 이목구비, 시선을 내릴 때 그 위를 장식하는 속눈썹. 서현은 입술을 깨물었다.

어느새 십여 초가 지나가고 마법진이 사라지면서 상자 속 안개가 깨끗하게 걷혔다. 서현은 마침내 모습을 드러낸 디오라마를 들여다보았다. 의아할 정도로 평범한 풍경이 그 안에 있었다. 구석에 학교가 있고 그 주변으로 다양한 가게가 포진했다. 아파트와 주택이 알맞게 자리를 잡은 가운데 공원도 하나 있으며 야트막한 뒷산과 용도를 모를 창고도 하나 덩그러니니 놓인 채였다. 구석구석 살펴보아도 특별한 점은 전혀 없었다. 다만 그것들 하나하나가 굉장히 정교해서 실제로 존재하는 곳을 통째로 들어내서 옮겨 담아놓은 듯하다. 그 때문인가. 지극히 평범한 디오라마에서 좀체 눈을 떼기 어려웠다. 무엇보다 마법진에 손을 대고 세건을 떠올린 것과 어떤 연관이 있는지 짐작조차 가지 않는다. 무슨 의미가 있었던 거지? 그러나 한참을 주의 깊게 관찰해도 특별한 구석을 찾지 못한 탓에 서현의 관심은 금세 사그라졌다. 디오라마를 소파 앞에 옮겨두고 난 후에는 완전히 신경을 거두었다.

출출해서 냉장고를 뒤졌지만 혼자 사는 처지에 이것저것 사두지 않아서 배를 채울 거라곤 냉동식품이 다였다.

“햄버거라도 사올 걸 그랬군.”

그렇게 중얼거렸다가 서현은 문득 허전함을 느끼고 고개를 돌렸다. 가끔 예고도 없이 세건의 빈자리가 적나라하게 느껴지는 때가 있었다. 그가 이곳에 있었다면 서구 빠돌이, 미각도 없는 짐승 새끼 등등 험한 말을 마구 쏟아냈을 텐데 이제는 아무리 햄버거를 사다 먹어도 그런 말을 듣지 못했다. 한세건의 욕설도, 갖은 시비를 걸며 툭하면 총을 겨누는 것까지도 그리움의 대상이 될 줄 누가 알았으랴. 심지어 그를 사랑하던 때조차 미처 알지 못한 마음이었다. 답답한 마음에 서현은 애꿎은 냉장고 문을 거칠게 닫았다.

“역시 혼자 살면 안 되는 건가.”

세건이 죽고 그의 아지트에서 살기로 했을 때 서린이 했던 말이다. 마음은 알겠지만, 그래도 동료들과 같이 지내는 게 좋겠다고. 툭하면 추억이 숨 막히도록 쏟아져 진절머리가 나는 날이면 그 충고가 옳았다는 생각이 들지만 아직은 이곳을 떠날 마음이 들지 않았다.

소파에 비뚜름하게 앉아 아지트에 남은 세건의 잔재를 더듬어 보던 중, 문득 이상한 기운을 느낀 서현이 바닥에 놓인 디오라마를 보았다. 언제부터였는지 유리 상자 안에 희부옇게 안개가 꼈고 사라졌던 마법진이 다시 나타나 희미하게 발광했다.

“뭐지?”

미심쩍은 눈빛으로 디오라마를 응시하던 서현은 빛이 꺼지지 않는 마법진을 향해 손을 뻗었다. 그리고 유리와 손끝이 접촉하는 순간, 엄청난 광채가 터지며 시야를 하얗게 물들였다. 서현은 반사적으로 눈을 가느다랗게 좁히며 얼른 손을 뗐고 흰빛은 눈 깜짝할 사이에 사라졌다. 그 짧은 순간, 알 수 없는 일이 일어났다. 서현은 느닷없이 홍채를 찌른 빛 때문에 조금 아릿한 눈을 깜박이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익숙한 아지트는 온데간데없고 낯선 창고만이 있었다.

조그마한 창을 통해 비스듬히 들어오는 빛살이 바닥에 내리꽂혀 작은 햇살 웅덩이를 만들었다. 뽀얀 먼지가 부유하는 창고 안에는 조각난 널빤지나 쇠막대 따위가 무질서하게 굴러다녔다. 버려져서 누구도 사용하지 않는 장소로 보이는데 그에 비하면 바닥은 누가 드나드는 것처럼 먼지가 적었다. 그러고 보니 출입문 옆에 천으로 덮인 직사각형의 무언가가 있다. 호기심이 동해서 다가가려는 찰나, 멀리서부터 차근히 가까워지는 발소리가 들렸다. 창고로 오는 건가? 그렇다면 이곳으로 자신을 불러들인 자일지도 몰랐다. 서현은 그 기척에 집중해 보았다.

들리는 걸음걸이는 제법 느긋해서 도착하려면 조금 시간이 걸릴 법했다. 서현은 팔짱을 낀 채로 방문객을 기다렸다. 바로 제압을 할지 잠깐 두고 볼지는 얼굴이나 무장 상태를 보고 판단할 셈이다. 땅을 딛는 소리가 가벼우니 설사 무장했더라도 대단한 정도는 아닐 터였다. 아니면 마법사일 텐데 서현에게 그들은 큰 위협이 되지 못했다.

얼마나 기다렸을까. 발소리가 지척까지 다가왔다. 이윽고 문고리가 덜거덕거리면서 문이 열리고 내부로 확 들이치는 햇빛과 함께 기다리던 자의 모습이 드러났다.

그의 얼굴을 본 순간, 서현은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그럴 리가 없는데. 꿈이 아니고서야 그가 나타날 리 없는데. 어째서, 지금까지 멀쩡하게 살아있었다는 것처럼 아무렇지 않은 얼굴을 하고 자신을 보고 있을까.

“한세건…?”

무심코 이름을 부르자 그가 미간을 좁히더니 서현을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누구신지?”

그 물음에 정신이 든 서현이 세건을 자세히 뜯어보았다. 외모는 분명 한세건인데 서현이 아는 얼굴보다 더 앳되고 머리도 평범한 검은색, 거기다가 옷은 학생들이나 입는 교복이다. 척 봐도 단련된 몸은 아니고 마냥 물렁물렁하지만도 않을 뿐, 그 나이대에는 평균적인 체격이었다. 당연히 풍기는 분위기도 다르다. 이쯤 되면 아예 다른 사람이라고 하는 편이 좋을 법한데 겉모습이 어떻든 그는 한세건이 분명했다. 죽은 사람이 눈앞에 있는 것부터가 비정상적인 사건인데 세세한 외형이야 아무렴 어떤가.

뚫어지게 쳐다만 보니까 불쾌했는지 세건이 눈을 치뜬다. 그래 봐야 뱀파이어 헌터였던 세건처럼 싸늘한 독기가 없어서 서현이 보기에는 귀엽기까지 했다.

“누구냐고 물었는데요?”

한세건에게 존댓말을 들으니 신선하기보다 어색해서 서현이 픽 웃었다.

“네가 아는 사람.”

그러자 세건이 어리둥절해서 인상을 쓰고 눈동자를 굴렸다. 서현은 서현대로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났는지 추측해 보았다. 원리까지 자세히 알 수 없으나 원인은 따로 찾을 필요도 없이 그 디오라마였다. 세건이 등장한 까닭은 검푸른 안개를 걷을 때 마법진에 손을 대고 그를 생각한 것과 관련이 있을 터였다. 서현은 다시 창고를 빙 둘러본 후, 문 앞에 선 세건의 코앞까지 다가가서 밖을 내다보았다. 완만하게 기울어진 땅과 빽빽하게 나무들이 주위를 둘러싼 풍경을 본 순간, 디오라마 안에 있던 작은 뒷산과 창고가 뇌리를 스쳤다. 설마, 여기는 그 안인가?

“당신…….”

그립던 목소리가 귀에 익은 호칭으로 부르는 바람에 이끌리듯 시선을 보내자 서현보다 키가 한 뼘쯤 작은 세건이 당황한 기색으로 올려다보고 있었다.

“외국인이야?”

“그런데?”

“그런데, 라고? 난 아는 외국인 없거든? 진짜 당신 누구야?”

어설프게나마 예의를 갖추더니 이제는 아예 반말이다. 서현을 모르는 한세건에겐 생전 처음 보는 사람이 자기를 아는 척하니 경계하는 것이 당연했다. 서현은 재차 생각에 잠겼다. 세건을 떠올린 까닭에 이 기묘한 마법에 그가 등장한다고 쳐도 왜 자신이 아는 모습이 아니라 고등학생이며 전혀 모르는 사이가 되었는지, 그 이유만은 도통 짐작이 안 간다.

“뭘 그렇게 자꾸 쳐다봐? 누구냐고 묻는 말 안 들려?”

아마 가족이 뱀파이어에게 몰살당하기 전의 한세건은 이런 느낌이었겠지. 월야 세계도 모르고, 헌터도 진마 사냥꾼도 아닌 한세건. 그저 좋아하는 일을 하면서 살다가 평범하게 늙어 눈을 감는, 그런 일생을 살았어야 하는 게 아닌가. 돌이킬 수 없는 과거이고 한세건의 삶이 불행으로 점철되었다고 말하기도 싫지만 서현은 죽어가는 그를 보면서 매일 그런 생각을 했다.

“난 서현이다.”

“서현?”

“성이 서, 이름이 현.”

“외국인이라면서?”

“혼혈이지. 외국인이 이렇게 한국말 잘하는 거 봤어?”

어딜 봐도 서현은 혼혈로 보이지 않지만 본인이 그렇다는데 거기에 대고 반박할 사람은 거의 없었다. 세건 역시 의혹이 가시지 않은 눈빛으로 빤히 쳐다보면서도 그에 대해선 별말 없이 넘어갔다.

“당신이 이름이 서현인 건 알겠어. 그래서 날 어떻게 아냐고.”

그 부분은 어떻게 설명해도 이해하지 못할 게 빤하니 조악한 변명이라도 해야 할 텐데 마땅히 얘깃거리가 안 떠올랐다.

“그걸 말하기 전에…배고프니까 뭐 좀 먹으면서 얘기하지.”

뒷산을 내려가면서 서현은 세건을 만난 흥분을 서서히 가라앉혔다. 죽은 자는 살아 돌아오지 못한다. 이건 불변의 진리이므로 저 한세건 또한 진짜가 아니다. 이곳이 디오라마 안이라면 그는 마법이 만들어낸 가상 인물이다. 외모나 성격은 아마도 마법진에 손을 대고 세건을 떠올렸을 때 기억을 읽고 그걸 토대로 만들었을 터. 말하자면 서현의 머릿속 일부에서 나온 환상이고, 환상은 절대로 실제가 될 수 없다. 불쾌해진 서현이 몰래 혀를 찼다. 기억 속 인물을 멋대로 만들어다가 강제로 초대하는 질 나쁜 마법에 걸려든 자신이 한심했다.

산에서 내려와 거리를 걸으며 둘러보니 확실히 밖에서 들여다본 풍경 그대로였다. 특히 큰 공원을 중심으로 양옆에 늘어선 아파트 단지와 주택가가 그랬는데 세건이 교복을 입고 있으니 어딘가에 그 학교도 있을 듯하다. 디오라마에는 없었던 사람들까지 보여서 마법인 걸 아는데도 현실감이 든다. 앞서 걷는 세건의 뒤통수를 뚫어지게 응시하는데 손가락이 근질거린다. 그를 만지면 생생하게 촉감이 느껴질지 궁금했다.

이윽고 상점가에 도착했는데 문제가 하나 있었다. 서현이 뒤늦게 자신이 빈털터리임을 밝히자 세건이 못마땅한 눈빛으로 머리부터 발끝까지, 다시 역으로 쭉 훑더니만 헛웃음을 흘린다.

“하, 당신 거지야? 노숙자야?”

“대체 내 어디가 거지처럼 보여? 하필이면 안 갖고 나왔을 뿐이야.”

이런 일이 벌어질 줄 누가 알았겠는가. 설령 돈이 있더라도 여기서 제대로 통용될지도 미지수다.

“발끈하는 거 보니 거지 맞네.”

“그러는 그쪽은 대단히 여유로운가 본데 거지한테 적선이나 하든가.”

“당신 성인 아냐? 학생한테 얻어먹겠다고?”

“거지는 그런 거 안 가려.”

콧방귀를 뀐 세건이 어쩔 수 없군, 하고 덧붙이더니 서현을 근처 분식집으로 데리고 들어갔다. 자리에 앉은 그는 묻지도 않고 우동 두 그릇을 시켰다. 그 모습을 보는데 무심코 한국에 무일푼으로 와서 매번 세건에게 얻어먹던 때가 떠올랐다. 세건은 매사 얄밉게 굴면서도 돈이 필요할 때는 턱턱 내놓아서 그의 처사에 불만을 터트리다가도 꿀 먹은 벙어리가 된 적이 많았는데…….

아예 성격까지 다르면 좋았을 걸, 하필이면 실제 한세건의 언동과 똑같아서 환상으로 대하려고 해도 마음의 동요를 억누를 수 없었다. 서현은 이를 악물고 고개를 돌렸다. 오랜 시간을 들여 내면의 밑바닥까지 가라앉혔던 뜨거운 응어리가 점점 떠오르는 것이 느껴졌다.

디오라마를 만든 마법사의 속셈이 대강 파악이 됐다. 그러나 서현은 이딴 것을 바란 적 없다. 이제 한세건을 보기 위해선 추억을 더듬는 수밖에 없어도 그 행위가 고통스러울지언정 무의미하지는 않았다. 환상 따위로 비슷하게 꾸며서 보여준다고 기뻐할 것 같은가?

“이제 얘기해 봐.”

흘끗 곁눈질한 서현의 눈과 팔짱을 끼고 노려보는 세건의 눈이 맞부딪쳤다.

“정체가 뭐야?”

“배 채우고 얘기한다니까. 너 기억력 나쁘지?”

진짜도 아닌 주제에 짜증을 내는 표정까지 딱 한세건이다.

“넌 거기 왜 왔지? 그 창고 버려진 곳 같던데.”

“…몰라.”

“모른다는 게 말이 돼?”

“모르겠는데 어쩌라고? 정신 차리니까 거기로 가는 중이었고 그냥 가야 할 거 같은 기분이 들었어. 설령 이유가 있대도 당신한테 말해줘야 할 의무라도 있어?”

저 신경을 긁는 말투라니. 저도 모르게 실소가 터져 나왔다. 그 웃음이 거슬렸는지 또 눈썹을 움찔하는 꼴이 영락없이 한세건 자체였다. 그런 까닭에 분명히 그가 환상임을 인지하면서도 서현은 자꾸 그 사실을 부정하고 외면하고 싶은 유혹에 사로잡힌다.

“그러는 그쪽은 거기서 뭘 하고 있었는데? 설마 진짜 거진가?”

“아니. 굳이 설명하자면 당신과 비슷한 이유야.”

대뜸 세건이 멍한 얼굴을 하고 쳐다보았다. 서현이 왜, 하고 물으니 이번에는 엷게 당혹감이 어린 시선이 허공을 방황한다.

“당신이라고 부르는 거 이상하지 않아?”

“어디가 이상하다고 그래?”

“콕 집어서 말할 수 없는데, 그쪽이 당신이라고 부르니까 왠지 익숙한…젠장, 모르겠군. 아무튼 이상해.”

당황한 쪽은 되레 서현이었다. 언제나 세건을 당신 혹은 이름으로 불렀으니 그가 익숙하다고 느낀대도 이해가 된다. 문제는 마법이 그런 소소한 부분까지 구현 가능한가에 대한 거였다. 무방비하게 마법진에 손을 댔고 시키는 대로 세건을 떠올려서 외견은 읽을 수 있었는지 몰라도 서현은 기본적으로 정신에 침투하는 종류의 마법에 저항력이 강했다. 솔직히 한세건을 이만큼 비슷하게 만든 것조차 놀라울 지경인데 얘기할수록 지나치게 정교하다. 마치 가짜가 아니라 기억을 잃은 것처럼 보이지 않나. 거기까지 생각이 미친 후, 서현의 표정은 딱딱하게 굳었다.

진짜일 리가 없다. 그건 불가능해.

단호하게 가능성을 부정하는 이성과 끈질긴 의혹 사이에서 갈팡질팡하는 사이에 우동 그릇이 나왔다. 둘은 암묵적인 침묵 속에서 젓가락질을 시작했다. 일견 무덤덤한 얼굴을 하고 그릇 언저리에 무의미한 시선을 고정한 세건은 상념에 잠긴 모습이었다. 아무래도 당신이라는 호칭을 익숙하게 여기는 자기 자신이 퍽 신경 쓰이는 기색이다. 그런 행동까지도 서현의 의심에 부채질했다. 손님이라곤 둘뿐인 탓에 후루룩, 면발 빨아들이는 소리가 유난히 이상하게 들렸다. 어렴풋한 긴장감과 어색함이 가느다란 실이 되어 서서히 가슴을 조이고 있었다.

순식간에 한 그릇 뚝딱 비우자마자 세건이 한숨 돌릴 틈도 없이 벌떡 일어났다. 계산하고 가게를 나서는 그의 뒤를 따라가는데 세건이 서현을 휙 돌아보았다. 기분 탓인지 그는 아까 얘기를 나누기 전과 다른 사람처럼 보였다.

“이제 그쪽 정체를 밝힐 때가 된 거 같지 않아?”

“흠, 대로변에 서서 말하긴 좀 그렇군. 아까 공원 있던데 거기로 옮기는 게 어때?”

의외로 세건은 군말 없이 따랐다. 공원은 훌륭하게 조성된 장소치고 한산해서 둘 외에는 사람 그림자조차 잘 안 보였다. 서현이 빈 벤치에 털썩 앉고 세건은 조금 떨어진 곳에 섰다.

“아까 우동 먹으면서 그쪽이 누군지 생각해 봤어.”

서현은 순간적으로 긴장했다가 이어진 말을 듣고 금세 허탈해졌다.

“혹시 스토커인가?”

놀랍게도 세건은 매우 진지했다.

“그거 진심으로 하는 소린 아니겠지?”

“씨발, 그럼 왜 알지도 못하는 새끼가 아는 척 이름을 불러!”

“당신 말이 점점 험해진다?”

그러자 세건이 움찔했다. 말투 지적이 먹힌 게 아니라 그놈의 ‘당신’ 때문인 것 같았다.

“일단 그쪽이 아니라 서현이야. 이름 알려줬잖아. 당신 기억력 나빠?”

기억력을 의심하는 소리를 또 고스란히 들은 세건이 눈에 쌍심지를 킨다. 곧장 되받아칠 거라고 예상했는데 웬걸, 세건은 뜻밖에도 입을 꾹 다물었다. 또 침묵이다. 그의 머릿속에서 무엇이 일어나는지 궁금해서 능력을 써보면 어떨까 싶었으나 단지 생각만으로 그쳤다. 서현은 한 번도 세건의 속을 들여다본 적이 없었다. 가만히 있으면 읽은 줄도 모르겠지만 사귀는 사이에 그런 짓을 하는 건 불공평하고 이기적이었으니까.

“그쪽…”

“서현.”

세건의 검은 눈동자가 오묘하게 이채를 띤다. 속내를 감추는 와중에도 만감이 소용돌이치는 눈빛. 세건이 입술을 약간 벌렸다. 입 모양이 느리게 움직이면서 안쪽의 붉은 혀끝이 움찔거리는 광경이 눈에 들어온다. 어떤 이유에선지 주저하는 그를 가만히 주시했다. 초조하게 시간이 흐르고 세건은 기어코 소리 한 번 안 내고 입을 닫고 말았다. 서현이 까닭 모를 실망감에 빠지는 찰나.

“서현.”

세건이 불시에 이름을 불렀다. 그리고 겨우 그 한마디로 인해 둑이 와르르 무너져 내렸다. 서현은 그때야 억누르고 피해왔던 자신의 욕구를 알아차렸다. 세건이 죽은 후로 흘려보낸 긴 세월 동안에 이름을 불러주는 그 목소리를 얼마나 절실하게 찾아 헤맸던가. 얼마나 힘겹게, 짐짓 평정을 가장해서, 그 얼마나…….

“서현, 뒷산으로 가자.”

“뭐? 거긴 왜…잠깐!”

다짜고짜 공원을 벗어나는 세건을 이유도 모른 채 따라가면서 서현은 귀에 맴도는 울림을 수차례 되뇌었다. 사실 생전의 한세건이 이름을 자주 부르는 편이 아니었다. 도대체 살갑게 구는 경우가 없어서 서현이 그 야박함에 불만을 터트리기 일쑤였고 그러면 세건은 새삼스러워하며 어렵사리 입술에 두 글자 이름을 머금곤 했다. 단순히 필요에 의해 붙여둔 명칭을 읽는 것과 달랐기 때문에 그럴 때의 ‘서현’은 특별했다. 뭐라고 표현해야 좋을까. 세건은 이따금 서현이라는 존재를 구성하는 모든 요소를 함축하여 자신에게로 끌어들이는 것만 같았다. 서현을 그렇게 부를 수 있는 사람은 한세건이 유일했다. 표면적인 기억만으로 빚은 가짜는 절대로 그렇게 부르지 못한다.

서현이 몇 차례나 뒷산에는 왜 가느냐고 물었으나 세건은 대꾸조차 없었다. 산길에 접어들고도 그는 서현을 향해 고개 한 번 돌리지 않았다. 말은 뒷산에 간다고 했는데 더 정확히는 처음 만났던 그 창고가 목적지 같았다.

“좀 멈춰 봐.”

답답한 마음에 성큼성큼 비탈을 올라가는 세건의 손목을 잡아당겼는데 너무 가볍게 휙 끌려왔다. 균형을 잃고 뒤로 기울어진 몸이 서현의 품으로 떨어졌다. 세건이 놀란 눈을 하고 서현을 올려다보았다가 금세 찡그리며 가슴팍을 손으로 밀어냈다.

“뭐하는 짓이야? 사람 맨땅에 구르게 할 일 있어?”

“살짝 당겼는데.”

“개새끼, 네놈 기준에나 살짝이겠지!”

세건이 화를 내면서 잡힌 손목을 거칠게 빼냈다. 서현은 할 말을 잃고 그의 얼굴만 쳐다보았다. 방금 한세건이 개새끼라고 했나?

“당신 설마.”

“그놈의 당신 소리도 지겹군. 이름 부를 줄 모르나?”

“…그럴 리가 있겠어. 한세건.”

그제야 누그러진 얼굴에 미소가 스치고 세건이 고개를 기울여 키스했다. 두 손이 서현의 뺨을 덮었다가 귓바퀴를 스치듯이 어루만지고 팔로 목을 끌어안아 옷자락과 머리칼을 움켜쥐었다. 서현은 도무지 믿기지 않아 세건을 선뜻 껴안지도 못했다. 그러다가 세건이 벌어진 입술 새로 서현의 혀끝을 문지르고 들릴 듯 말 듯 작게 이름을 속삭였을 때는 모든 생각이 하얗게 날아가 버렸다. 서현은 아직 소년의 몸인 세건을 품에 안고 정신없이 뜨거운 키스를 퍼부었다. 뜨거운 혀를 얽고, 민감한 입천장 점막을 쓸고, 도톰한 아랫입술을 깨물고 빨기를 거듭했다. 숨 쉬는 게 버거울 만치 오랫동안 서로를 탐하는 키스가 지칠 줄도 모르고 이어졌다. 세건이 헐떡이며 입술을 떨어뜨릴 적마다 서현이 그의 머리를 끌어당겼다. 예전에도 힘으로는 못 당했는데 지금이야 더 말할 필요가 있을까. 세건은 잡은 건지 매달리는 건지 모르게 서현을 붙잡고 이따금 나직하게 욕설이나 신음을 내뱉었는데 반쯤은 맞물린 입술 틈으로 뭉개졌다. 도저히 끝나지 않을 것 같던 키스가 겨우 끝나고 세건은 타액으로 흠뻑 젖고 부은 입술을 문지르며 숨을 몰아쉬었다.

“허억, 헉, 이 미친…”

“보고 싶었어.”

욕을 하려던 세건이 입을 딱 다물었다.

“정말로 당신이 그리웠어.”

“알아.”

“당신이 어떻게 알아. 죽었는데.”

“내가 네놈을 모를 것 같아?”

고개를 설레설레 저은 세건이 돌아서서 다시 산을 오르기 시작했다.

“고등학생이라니 웃기는군. 이따위 가짜 세계에서 빌어먹을 학생 놀이나 한다고 하나 즐거울 것 없는데. 여길 만든 새끼가 누군지 몰라도 살아 있었으면 찾아가서 대가리에 총알을 박아 줬을 거다.”

“그 덕분에 나를 만났는데도?”

그 물음에는 대답하지 않았다. 세건의 뒷모습은 긍정하는 것도 같고 부정하는 것도 같았다. 묵묵히 목적지를 향해 가는 발걸음이 어찌나 단호한지 서현은 다시 그를 멈춰 세우지 못했다. 어떻게 이곳에 존재하는지, 처음부터 자신을 알면서도 모른 체한 건지, 창고로 가는 까닭은 무언지 등등 궁금한 점이 한둘이 아니었는데 세건은 어떤 질문도 거부하는 분위기를 풍겼다. 서현은 문득 고개를 꺾어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이곳에 오고 꽤 시간이 지났는데도 천장에 고정된 전구처럼 똑같은 자리에 있었다. 제법 그럴듯하게 보이는 세계여도 결국 실체는 정지된 텔레비전 화면이나 다름없었다.

이윽고 둘은 낡은 창고에 도착했다. 세건이 닫히다가 만 문을 천천히 열자 녹슨 경첩이 귀에 거슬리는 소리를 냈다. 공기 중에 떠다니는 먼지가 기척에 놀라 이리저리 휘돌았다.

“결과적으론 네놈이 날 여기로 불러들인 거지. 살아 있었으면 네놈 대가리에도 똑같이 총알을 박았을 거다. 내가 학생 모습인 것도 네 마음이 반영된 거란 걸 모르겠냐?”

그 지적을 듣자마자 한 대 얻어맞은 충격이 골을 흔들었다. 그랬던 건가. 세건의 죽음 이후부터 종종 그를 월야로 이끈 비극의 시작, 그 사건이 일어나지 않았을 세상에서 사는 그를 상상했던 게 원인이었나. 그렇다면 이곳 디오라마의 풍경 또한 그러한 바람이 영향을 끼쳤으리라.

“그랬군. 내가 너를…….”

“그래. 내 인생을 통째로 부정이라도 하고 싶었던 거냐? 아니면 일찍 뒈진 게 불쌍해서 동정하는 건가?”

“아니, 그런 게 아냐. 단지 당신과 같이 더 많은 시간을 보내고 싶었어. 조금이라도 더 오래, 하다못해 일 년 아니면 이 년이라도……. 그런 표정 짓지 말라고, 한세건. 그래. 내가 쓸데없는 생각을 했어. 당신은 당신의 삶을 제대로 살았는데 내가 멋대로 주물러서 미안하군.”

“알고는 있다니 다행이라고 해줘야 하나, 개새끼. 이제 이딴 세계는 부숴버리고 돌아가. 가서 이 먼지 쌓인 머릿속이나 청소해라.”

세건이 출입문 옆에 놓인 것을 가리켰다. 처음 여기에 왔을 때 확인하려다가 세건의 발소리를 듣고 잊어버렸던 길고 네모난 상자였다. 서현은 이제 그것의 정체를 짐작할 수 있었다. 다가가서 천을 걷어내자 유리가 씌워진 디오라마가 모습을 드러냈다. 바깥에서 만든 풍경 그대로였다.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마음속으로 하나하나 형태를 잡아 한세건을 살게 했던 세상이다. 서현은 굴러다니는 쇠파이프를 집어 들었다.

“한세건. 이런 말 하면 화내리란 거 알지만, 그래도 말하고 싶어. 잠깐이나마 당신을 만나서 좋았어.”

그는 화내는 대신에 인상을 찌푸린 채로 눈을 응시했다. 잘 가라는 인사 한마디쯤 해줘도 될 텐데 냉랭하기는 여전했다. 서현은 쇠파이프로 디오라마를 힘껏 내리쳤다. 와장창 하고 유리와 디오라마가 산산조각이 나고 거짓 세계에도 거미줄 같은 균열이 생겼다. 세건의 모습은 갈기갈기 찢어진 초상화처럼 보였다. 깨진 세상이 빠른 속도로 부서져 내렸고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이 엉망이 되어도 서현은 마지막까지 세건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서현.”

세건이 불시에 이름을 불렀다. 서현은 그 한마디에서 수십 개의 말을 읽었고 언어로는 채 표현하지 못할 그의 감정까지도 충분히 느꼈다. 그러므로 더 이상의 말은 불필요했다. 고막을 찢을 듯이 째지는 소음과 함께 눈앞이 번쩍했다.

서현이 잠시 눈을 감았다가 다시 떴을 때는 어느새 낯익은 아지트 안이었다. 발치에는 부서진 디오라마와 유리 파편이 사방에 흩어져 있었다. 서현은 떨어져 나온 창고 모형을 지그시 내려다보다가 발로 툭 쳐서 저만치로 굴려 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