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현세건] 자리끼


테트라 아낙스의 비호를 받지 못하는 아웃로 뱀파이어는 대부분 혼자 행동하면서 무분별하게 사람을 습격하는 까닭에 찾기도, 사냥하기도 쉽지만 가끔 예외인 경우도 있다. 제법 머리를 굴릴 줄 아는 놈들은 서로 뭉치거나 사회 시스템 속에 숨거나 교묘하게 민간인을 방패로 내세우는 식으로 헌터를 피했다. 한세건이 며칠간 추적해온 놈들도 이런 부류였다. 그동안 요리조리 피해 다녀서 짜증이 한계까지 차 있었지만 세건은 인내했다. 도망치는 족족 뒤꽁무니를 따라다녔으면 월야에서 이렇게 오래 살아남아 진마 사냥꾼이라는 호칭까지 얻지 못했을 것이다. 늘 그랬던 대로 판을 짜고 기다려 사냥감을 함정에 몰아넣었다.

그간 제법 포식을 했는지 곧잘 재생력을 쓰던 뱀파이어는 너덜거리는 팔다리를 하고 창밖으로 떨어졌다. 그러나 월야의 마물은 고작 삼 층에서 떨어진 정도로는 죽지 않는다. 한세건은 깨진 창문 앞에 서서 총을 들었다. 공포에 질린 뱀파이어는 죽음이 목전에 왔음을 알면서도 바닥을 기며 도망치려 애썼다. 추악한 광경이다. 총구를 그 머리통에 겨누고 쏘려는 순간, 한세건은 놈에게 다가가는 이를 발견하고 멈칫했다.

이제는 서현이라는 이름이 제법 익숙해진 릴리쓰의 자식. 다른 쪽을 처리하러 갔던 그가 어느새 돌아와 여유로운 걸음걸이로 뱀파이어와 거리를 좁혔다. 방아쇠에 걸친 한세건의 손가락이 움찔했다. 처음에는 그저 전쟁 범죄자, 식인 괴물이라는 생각뿐이라 혐오감이 치솟았으나 보면 볼수록 그의 능력과 수완은 대단했다. 하지만 그래 봐야 라이칸스로프, 호감의 대상이 될 수는 없다. 이 미친 달의 세계에서 살아간다는 것은 까마득한 밤안개 속을 달려가는 행위나 마찬가지였다. 그 끝에 낭떠러지가 있음도 모른 채 무턱대고 뜀박질하다가 느닷없이 밑이 훅 꺼지면 그제야 아차, 하지만 눈 깜짝할 사이에 머리가 박살이 나 비극적 최후를 맞이하는 게 월야 주민의 운명이다. 그리고 이 안에선 이빨을 들이대는 놈이건 웃으며 손을 내미는 놈이건 자기 자신까지 포함해 모두 지옥에 떨어질 괴물이다.

서현이 몸으로 뱀파이어를 가렸다. 아마도 자신이 마무리하려는 것이리라. 세건은 우뚝 선 서현의 단단한 등을 응시하며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었다. 그를 볼 때면 종종 형언하기 어려운 충동에 사로잡히곤 했다. 그건 살해하고 싶은 욕구에 한없이 가까웠으나 그 기저에는 증오와 경멸이 없었다. 세건은 사이코패스 살인마가 아니었다. 월야의 파멸이라는 목적을 잃고 단지 죽이고 싶어서 죽인다면 피를 찾아 헤매는 짐승과 무엇이 다른가. 머리로는 그런 사실을 아는데 막상 서현을 보노라면 순간이지만 파괴적인 감정이 치밀어 오른다.

눈에서 푸른 귀화가 번뜩이고 세건은 단호하게 방아쇠를 당겼다.

탕―!

라이칸스로프의 우월한 신체능력은 날아오는 총알도 단숨에 피할 수 있었다. 서현은 고개를 옆으로 기울인 것만으로도 탄환을 스쳐 보냈고 뒤통수에 구멍이 뚫린 뱀파이어는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절명했다. 세건이 총을 거둠과 동시에 서현이 휙 고개를 돌렸다.

“당신 툭하면 아군을 쏘는군? 혹시 피아를 구분할 인식능력이 모자라?”

서현의 도발에도 세건은 코웃음을 쳤다. 막말로 조금 전의 총격에 맞아봐야 그가 받을 피해라곤 따끔한 충격이 다였다. 굳이 하나를 덧붙이자면 불쾌감 정도일까.

“네놈이 언제부터 아군이었지, 전범 쓰레기?”

“이봐,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잖아.”

“매번 잘도 피하면서 말이 많군. 억울하면 한 발 맞는 게 어때. 그럼 투덜거리는 소리도 들어주지.”

물론 그가 넙죽 맞아준다고 하면 일반 총기와 은탄환 따위가 아니라 비스트를 사용하겠지만 말이다. 그쯤은 되어야 고위 라이칸스로프에게 타격을 주는 것이 가능하다. 그 속셈을 알아차렸는지 서현이 입을 다물었다. 아래로 내려가려고 돌아섰던 세건은 멈칫하고 재차 서현을 내려다보았다. 재가 되어 사라질 시체를 발끝으로 툭툭 건드려 보던 그가 알아차린 듯이 고개를 들었다. 평온하리만치 잔잔한 눈동자가 가증스럽다. 그의 눈빛은 어지러이 나달거리는 자신의 증오에 깊숙이 핀을 꽂아 찰나지만 내부의 불길을 멈춰버린다. 세건은 그게 싫었다.

아지트에 돌아와도 세건의 일과는 계속되었다. 각종 감시, 보안 시스템을 모조리 확인하며 이변이 없는지 살펴보고 나면 항상 새벽녘이었다. 서너 시간 수면을 취하는 것만으로도 최적의 상태를 유지하는 덕분에 세건은 흡혈귀 사냥과 훈련에 마음껏 몰두했다. 일분일초가 아깝기도 했지만 불필요한 감상이 끼어들 여지를 차단하려는 까닭도 있었다. 서현을 만난 뒤부터는 더욱 그랬다. 다신 볼 일 없으리라 여긴 얼굴을 아르쥬나에서 맞닥뜨린 후, 본의 아니게 손발을 맞추다가 이젠 대놓고 파트너로 오인당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서현은 정신오염 방지와 감시를 이유로 지긋지긋하게 따라붙어서 세건을 제 아파트로 끌고 가지 못하는 날이면 넉살 좋게 아지트의 빈방을 멋대로 이용하기 일쑤였다. 다행인 점은 서현이 일찍 잠든다는 사실이다. 그는 현재 카타볼릭 상태라 조금이라도 만회하려면 충분히 먹고 자야만 했다.

세건은 갑작스러운 변덕에 이끌려 서현이 잠든 방으로 가 보았다. 그는 무방비한 모습으로 잠들어 있었다. 세건은 종종 궁금했다. 과연 그는 자신이 어디까지 다가갔을 때 비로소 깨어날까. 이 거리에서 총을 쏘면 피할 수 있을까. 심장이 두방망이질하고 몸이 뜨거워지기 시작했다. 요 며칠 불거졌다가 내려앉기를 반복하는 격렬한 살의의 형상. 얼굴을 양 손바닥으로 덮고 심호흡한 세건은 서둘러 자신의 방으로 돌아와 침대에 몸을 뉘었다. 미친 달이 내면에 밀물과 썰물을 번갈아 일으킨다.

얼마간 뒤척이다가 잠들고, 다시 눈을 떴지만 여전히 사위는 어두컴컴했다. 시계를 확인하니 채 한 시간도 안 지났다. 아무리 일반 사람보다 수면이 덜 중요하다지만 아예 밤을 새면서 버텨도 괜찮은 건 아니었다. 세건은 마른 입술을 핥았다. 입안이 텁텁하고 목이 탔다. 타액으로 목구멍을 축이고 다시 눈을 붙이려 했으나 갈증은 시시각각 심해져서 잠들기조차 어려웠다. 모래바람이 입술부터 폐까지 연거푸 휩쓸고 지나가는 것만 같았다.

방을 나선 세건은 냉장고 앞에 선 검은 실루엣을 보고 긴장했다가 이내 그의 정체를 깨닫고 안도했다. 서현은 세건의 기척을 바로 알아차리고 고개를 돌렸다.

“벌써 일어났어? 아직 해도 안 떴는데.”

“…물 마시러 나왔다.”

서현이 냉장고를 열어 작은 생수병을 휙 던져주었다. 입에 물을 들이붓자 몸이 게걸스럽게 흡수했다. 세건은 단번에 생수병을 비웠다.

“여기서 뭘 하는 거야?”

그는 초등학생처럼 일찍 잠들고 별일이 없으면 해가 중천에 뜨도록 잤다. 게다가 어찌나 깊이 잠드는지 도중에 깨는 꼴을 못 봤다. 그러니 이 시간에 눈을 뜨고 있는 모양새가 이상할 수밖에.

“아까 저녁을 대충 먹었더니 배고파서.”

서현은 냉동실에서 인스턴트 햄버거를 꺼내더니 전자레인지에 넣고 돌렸다. 주홍색 불빛이 어둠을 한 조각 살라 먹고 기계가 위잉 소리를 내며 돌아갔다. 세건은 어처구니가 없었다. 사람을 먹지 않는 탓에 늘 허기에 시달려 음식으로 채운다는 사실을 알지만 이 밤중에 햄버거라니? 이건 배고프고 아니고를 떠나 단순히 햄버거 마니아 아닌가?

“아주 영혼을 팔지 그래.”

“지나가는 사람 붙잡고 물어봐. 당신이 믹서기에 갈아 먹는 그 끔찍한 사료보다 이게 더 낫다는 의견에 동의할 사람이 수만 명은 될 걸.”

“적어도 내겐 미각이란 게 있어서 그딴 걸 맛있다고 먹진 않아.”

그는 뭐라고 되받아치는 대신, 작동을 멈춘 전자레인지에서 햄버거를 꺼내 입에 물었다. 세건은 한마디를 더 하려다가 돌연 허무해져서 말문을 닫았다. 그가 햄버거에 환장하는 게 하루 이틀 일도 아니거니와 어쨌거나 자신은 상관없는 일 아닌가. 무엇보다 허물없는 사이인 양 시답잖은 이야기를 주고받기가 꺼려졌다. 매사 이런 식으로 휘말리니 바깥에서 둘이 친하냐는 질문을 듣고 마는 거란 자각은 있었다. 세건은 고개를 좌우로 흔들곤 몸을 돌렸다.

“한세건.”

서현의 음성이 방으로 돌아가려는 걸음을 붙잡았다.

“충분한 수면은 정신 건강에 좋아.”

“무슨 개소리야?”

“당신은 너무 적게 자니까.”

세건은 눈살을 찌푸렸다. 자기가 보호자라도 되는 양 구는 행태에 짜증이 났다. 서현이 무엇을 걱정하는지 스스로 잘 알고 있다. 그러나 이 세계에 들어와 지금까지 누구의 보살핌도 받지 않고 혼자 걸어왔는데 지금에 와서 누군가가 간섭하고 참견하는 것이 귀찮았다. 하물며 사람도 아닌 라이칸스로프가! 툭하면 친근하게 구는 서현의 태도가 늘 세건의 민감한 부분을 건드린다. 서현을 멀리하려다가도 어느덧 가까운 거리를 허락하는 자신과 그러한 사실을 외면하지 못하도록 자꾸만 일깨우는 서현. 어느 쪽이 더하고 덜할 것 없이 분노를 부추긴다.

“그럼 내 정신 건강을 위해 네가 내 앞에서 꺼지는 게 제일 좋다는 사실에 대해선 어떻게 생각하지? 순순히 사라져 줄 건가, 전범? 그게 아니라면 역겨운 오지랖은 집어치워. 내 일은 내가 알아서 해.”

어둠 속에 선 서현은 묵묵부답이었다. 간신히 화를 억누르며 방으로 돌아온 세건은 침대에 털썩 주저앉았다. 빌어먹을 개자식. 욕설과 함께 한숨이 터져 나왔다. 이미 잠은 다 깼으나 정신적 피로감이 몸을 침대로 끌어당겼다. 단조로운 천장을 보고 있노라니 복잡한 마음이 한층 두드러졌다. 세건은 자신이 어떻게 해야 좋을지 갈피를 잡지 못했다. 한 발 떨어져서 서현을 볼 때마다 통제 불가능한 살기에 매몰되다가도 정작 그가 자신의 경계선 안으로 불쑥 발을 내밀면 어찌할 바를 몰랐다.

세건은 침대 시트에 고인 달빛을 손으로 더듬었다. 시린 광기가 혈관을 타고 전신에 산산이 흩어진다. 그대로 서현의 얼굴을 떠올리자 예리한 고드름이 정신을 난도질해 관자놀이가 지끈지끈했다. 세건은 시트를 꽉 움켜쥐고 입술을 깨물었다. 여전히 목이 말랐다. 밑 빠진 독처럼 갈증이 가시질 않는다.



안 그래도 적막한 공원은 을씨년스럽게 부는 잔바람과 자욱하게 낀 안개로 인하여 한층 스산했다. 먹물을 쏟아버린 것처럼 한 치 앞도 분간하기 어려운 밤은 까마득히 깊었다. 부옇게 번지는 가로등 불이 유령인 양 일렁거리고 묽고 창백한 달빛은 지상으로 뚝뚝 떨어졌다. 습기 찬 공기를 들이마실 때마다 끈끈한 어둠이 폐부에 들어차 속이 더부룩해진다. 세건은 채혈기와 혈액팩을 챙겨 일어나서 흡혈귀 시체를 잠시 쳐다보았다. 어떤 감흥이 일어나기 보다는 꺾어진 목을 보고 새삼 서현의 악력을 상기했을 뿐이었다. 보기에는 가볍게 달랑 들어 올리자마자 패대기친 줄 알았건만 어느새 뼈를 분질러 놓았다.

“나도 놀러 다니는 건 아니라니까. 그리고 빼또쥬는…아니, 알았어. 지금 들어갈 테니까 가서 얘기해.”

전화를 끊은 서현이 한숨을 쉬었다.

“내 참, 결혼도 안 했는데 바가지 긁는 부인이 생긴 기분이군.”

한동안 세건의 아지트를 꿀단지 찾는 벌처럼 드나들고 본인 아파트에는 거의 안 가더니만, 기어코 부하 녀석이 집에 좀 들어오라고 성화를 부린 모양이었다. 휴대폰 너머로 잔소리를 들으며 이마를 짚던 모습은 확실히 먹여 살릴 가족이 딸린 가장과 비슷했다. 때마침 순찰을 끝마친 참이라 서현은 곧장 자전거 안장에 올라탔다.

“그런 이유로 먼저 간다.”

“잘됐군. 앓던 이가 빠진 기분이야.”

이죽거리는 소리에도 서현은 피식 웃기만 했다. 그는 태평하게 경적까지 울리며 안개 저편으로 넘어갔고 세건은 꽤 오랫동안 서현이 사라진 방향을 응시했다. 서현을 향해 점차 명료해지던 살의가 이상하게도 지금만은 퍽 얌전하다. 간다는 소리에 시원하다는 투로 대꾸했지만 실제로는 그가 떨어져 나갔다고 마냥 후련하거나 기쁘지 않았다. 주변을 에워싼 안개가 감정마저 불분명하게 흐려놓은 것 같다.

오랜만에 혼자 귀환해 샤워하고 나온 세건은 믹서기에 각종 재료를 넣고 갈아 마셨다. 늘 그랬듯 맨정신으로 먹기 힘든 맛이었는데 이날따라 유난히 끔찍해서 절로 미간이 구겨졌다. 냉장고를 열어 서현이 사다 놓은 콜라를 따서 목으로 넘겼다. 탄산이 식도를 따끔하게 자극하고 입안에 감도는 불쾌한 맛을 깔끔하게 씻어 주었다. 문득 냉동실을 열어보니 역시나 햄버거가 잔뜩 들어 있다. 방 하나를 차지하는 것으로도 모자라 아예 냉장고까지 점령하다니. 세건은 헛웃음을 흘렸다. 형제는 형제인지 서현도 동생만큼이나 뻔뻔스러운 구석이 있다. 어처구니없는 햄버거 더미를 묵묵히 주시하던 세건은 하나를 꺼내 전자레인지에 돌려보았다. 사실 이딴 걸 맛있다고 매번 먹어치우는 서현을 보며 대체 무슨 맛인가 싶을 때가 더러 있었다. 이윽고 따뜻하게 데워진 인스턴트 햄버거를 입에 물었다. 그럼 그렇지, 세건은 중얼거렸다. 더럽게도 맛이 없었다. 하지만 자신이 매일 갈아먹는 음식과 비교하면 천국 수준인 것만은 분명했다.

늘 그랬듯이 감시 카메라를 일일이 점검한 후에야 잠들려던 세건은 습관처럼 서현의 차지가 된 방에 들렀다. 그리고 문간에 기대어 빈 침대를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서현이 눈에 안 띄기를 바라는 동시에 무심코 그의 흔적을 쫓아가는 모순 속에서 상념이 싹을 틔운다. 온갖 색깔의 물감을 불규칙적으로 칠해 놓은 듯, 뇌리가 산란해졌다.

서현, 이사카 베르게네프. 그 이름은 뜨겁게 달궈진 쇳덩어리 같아서 입에 담으면 점막이 불타는 느낌이었다. 전신이 겁화에 휩싸여 살과 뼈가 타고 숨 막히는 열기가 목을 조른다. 세건은 가상의 고통에 헐떡거리며 방안으로 들어와 침대 앞에 섰다.

지금 여기에 서현이 있었더라면.

무심코 스친 생각에 세건은 얼이 빠졌다. 그가 있었더라면, 그다음은? 입술을 깨물자 살이 찢어지고 핏물이 배어 나온다. 가슴속에 새하얗게 빛나는 달이 고치의 형상으로 잉태되어 당장에라도 부화할 듯이 두근거린다. 숨통을 옥죄는 공포가 원인 모를 갈망과 섞여 이내 살심으로 변모했다. 세건은 정강이에서 나이프를 빼 들어 침대 매트리스에 내리꽂고 시트며 커버, 베개를 힘으로 갈기갈기 찢어버렸다. 귀화가 일렁거리는 눈동자로 엉망이 된 침대를 노려보다가 자신의 감정에 반응해 날뛰는 망령들을 거둬들여 방에서 나왔다.

세건은 제 방에 눕자마자 까무룩 잠들었다. 오랜만에 집과 가족이 등장하지 않는 꿈을 꾸었다. 깜깜한 밤에 내던져진 세건은 무형의 유혹에 이끌려 어디론가 걸어가고 있었다. 눈에 보이는 길도, 이정표가 될 빛도 없건만 어디로 가야 하는지 확신할 수 있었다. 기나긴 걸음 끝에는 하나의 문이 있었다. 칭칭 감긴 녹슨 쇠사슬을 손쉽게 뜯고 열어젖히자 갑자기 빛이 쏟아졌다. 한눈에 다 담기도 어려운 거대한 달이 휘황찬란하게 빛나고 있었다. 달은 천천히 떠올라 세건의 머리 위로 올라가더니 얼음처럼 녹아내리기 시작했다. 세건은 달빛을 머금은 물에 흠뻑 젖었다. 무심코 입술을 벌리자 녹은 달이 흘러들어와 전신으로 스며들었다. 시원하고, 달콤하고, 짜릿하다. 최초로 경험하는 전율에 휘감겨 불안과 희열로 몸을 떨다가…….

눈을 떴다. 땀으로 인해 옷이며 몸이 죄다 축축했다. 세건은 한참이나 꿈의 잔상에 붙들려 있다가 뒤늦게 몸을 일으켜 앉았고 그제야 낯선 손님의 존재를 알아차렸다. 평소의 민감함을 고려하면 매우 이례적인 일이었다. 세건은 반사적으로 가까이 둔 총을 들어 겨누었으나 거의 동시에 그의 정체를 알아보았다.

“서현?”

그가 창으로 들이치는 달빛을 등진 채로 어깨를 으쓱였다. 적이었다면 꼼짝 못 하고 당했으리라는 섬뜩함도 잠시, 아파트로 돌아갔던 서현이 왜 여기에 있는지 의문이 들었다. 혹시 아직 꿈을 꾸고 있나? 당혹감에 빠져 멀거니 보고만 있노라니 서현이 뭔가를 휙 던졌다.

“슬슬 이게 필요할 것 같아서.”

얼떨결에 받아 보니 생수병이었다. 최근 새벽마다 깨서 물을 마시러 나가는 것을 눈치 채고 있었던 모양이다.

“설마 이것 때문에 다시 왔다고?”

“아니. 햄버거 때문에.”

“뭐?”

“집에 햄버거가 없더라.”

어떤 멍청이도 그 말을 진짜 이유라고 믿지 않을 것이다. 얼마간 침묵을 공유하던 서현이 잘 자, 하고 유유히 밖으로 나갔다. 세건은 생수병을 들어 달빛에 비추었다. 꿈속에서 본, 달이 녹아내렸던 그 물 같았다. 뚜껑을 열어 목구멍으로 물을 흘려보내니 제법 시원했지만 그뿐이다. 입가에 흐르는 물을 손등으로 훔치고 축축해진 입술을 더듬어 보는 동안, 내부의 두근거림은 커졌다 작아지기를 거듭하며 알아듣기 어려운 말을 소곤거린다. 세건은 시선을 옮겨 서현이 서 있던 창가를 응시하다가 빈 생수병을 우그러뜨렸다.

이미 예전부터 알고 있었다. 자신에게 증오란 목숨을 유지하는 심장이자 호흡이었지만 아무래도 서현을 증오할 수가 없었다. 이런 희극이 또 있으랴. 몸 일부가 마비되어버린 아찔함에 세건은 동아줄처럼 차고 단단한 총을 그러쥐었다. 손톱이 손바닥을 파고드는 통증이 차라리 기껍다.



세건의 가족은 살갑게 부대끼며 대화를 나누던 사이가 아니었지만 아주 어린 시절엔 함께 여행을 가기도 했다. 세건은 처음 자신의 눈으로 보았던 바다를 떠올렸다. 해풍이 멀리서부터 싣고 오는 짠 냄새, 머리칼 사이사이로 스미는 끈적끈적한 공기. 너른 수면에 아침 날빛이 반사되어 망막을 찌르던 광경은 경이 그 자체였다. 파도가 백사장으로 천천히 밀려오고, 물보라가 재잘거리는 소리를 내며 물러가는 모양은 아무리 오래 보아도 질리지 않았다. 그러는 동안 바다는 천천히 후퇴해 어느새 밑바닥에 숨겨 두었던 자신의 속살을 드러냈다. 갯벌에 발자국을 찍으며 게와 조개를 잡으며 돌아다니는 사이에 훌쩍 몇 시간이 흐르고, 지평선 끝까지 사라졌던 바닷물이 졸졸 흘러들어오기 시작했다. 세건은 거대한 바다가 움직이는 것이 신기했다. 그것이 하늘에 있는 달의 힘이라는 이야기를 들었지만 그 원리를 이해하기엔 너무 어렸다. 서서히 차오르는 물이 발목에 찰랑거렸다. 세건은 피부에 직접 느껴지는 신비로움을 느긋하게 맛보고 싶었으나 가족의 재촉에 못 이겨 멀리 떨어진 백사장을 향해 열심히 걸어가야 했다. 가족 중 누가 그런 말을 했다. 지체하다간 순식간에 밀물에 삼켜져 바다에 붙잡혀 버린다고.

백사장에 도착하고 얼마 후, 고단함에 잠깐 눈 붙인 세건은 솜털을 훑고 지나가는 파도의 고동을 듣고 깨어났다. 그날 친구끼리 놀러 왔던 고등학생 중 한 명이 갯벌에 나갔다가 실종되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마냥 아름답게만 보이는 바다의 이면에 존재하는 난폭함을 느낀 순간이었다.

세건은 지금 자신이 밀물 들어오는 바다에 갇힌 형국이라고 생각했다. 고작 발가락을 적시던 물은 순식간에 허리까지 올라왔으나 돌아가기엔 너무 먼 길을 왔다. 빠져나갈 방도가 없어 세건은 뼈저린 무력감을 절감했다.

“아이스크림! 아이스크림 사세요!”

시뻘건 낙조에 뒤덮인 바다는 흡사 불꽃을 품은 거대한 어항 같았다. 모래사장을 돌아다니는 장사꾼에게 아이스크림 하나를 사서 입에 물었다. 사르르 녹는 달콤한 끝에 미미하게 짭조름한 맛이 났다. 입술을 핥으니 바다 냄새가 혀를 물들인다. 아이스크림을 먹어도 갈증이 계속되었으나 세건은 구태여 물을 마시지 않았다. 단순한 목마름이 아닌 까닭에 생수는 불필요했다.

줄곧 혼자 있으니 헌팅 나온 여자들이 치근덕거리는 통에 세건은 바닷가를 떠났다. 내륙으로 들어오자 짜고 습한 바람을 대신해 건조한 대륙의 바람이 몸을 휘감았다. 이따금 뒤에 두고 온 바다가 자신을 향해 밀려오는 착각이 들어 길가에 바이크를 멈추고 뒤를 돌아보기도 했다.

그렇게 한참을 걸려 익숙한 거리로 찾아온 세건은 아르쥬나로 향했다. 늦은 밤이었지만 헌터들은 한창 활동할 시간이었다. 문을 열고 들어서자마자 쏠리는 눈길을 무시하고 곧장 김성희를 찾았다. 그녀가 반색하며 손을 흔들었다.

“어머, 세건아! 오랜만이네? 웬일이야?”

“무슨 정보라도 들어온 게 있나 해서요.”

김성희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아직 쓸 만한 정보는 없어. 있었다면 찾아오는 걸 기다리지 않고 바로 불렀을 거야.”

세건은 진심으로 아쉬웠다. 번잡한 정념을 지우기 위해 앙리 유이든 뭐든 몰두할 대상이 절실하게 필요했다.

“음, 아까 서현이 왔다 갔는데.”

“…그놈이 왜요?”

이제는 어디를 가도 당연하게 서현 이야기가 따라온다. 사실상 협력관계를 맺은 건 사실이라 어쩔 수 없음을 알지만 요즘 같은 시기에는 그의 이름을 듣기만 해도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다.

“널 찾던데? 요즘 같이 산다며? 언제부터 그렇게 각별한 사이가…”

“그런 거 아닙니다.”

그러자 김성희가 빙긋이 미소했다. 이 날카로운 사람에게 마음을 들킬 것만 같아서 갑자기 자리가 불편해졌다.

“이만 가보겠습니다.”

돌아가는 길에 서현의 아파트에 들를지 고민했지만 그냥 지나치기로 했다. 어차피 자신을 찾는 까닭이라고 해 봐야 별것 아닐 터였다. 아니, 이러니저러니 해도 사실은 서현을 피하고 싶었다. 서슴없이 밀려 들어오는 그에게 저항할 시간이 필요했다.

라이칸스로프, 사람을 먹이로 삼는 괴물, 제 욕심을 위해 전쟁을 일으킨 범죄자. 세건은 그 사실을 끝없이 되뇌었다. 지금이야 식욕을 억누르고 있어도 결국 인간을 삼키는 본질은 그대로였다. 영혼에 새겨진 증오를 억지로 불러일으키며 그를 죽이는 상상을 해 본다. 총알을 수십 발 쑤셔 넣고, 팔다리를 잘라 온몸을 난도질한다. 그러나 아무리 잔혹하게 그를 찢어 놓아도 서현은 감쪽같이 본래 모습을 되찾고 세건은 그를 살해하면 할수록 식도를 쥐어짜는 목마름을 느꼈다. 뱃속을 태우는 열기에 피가 끓어올랐다. 차라리 그가 뱀파이어였다면 이토록 속수무책으로 사사로운 감정에 매몰되는 형편에 이르지는 않았으리라. 그를 보는 순간 증오가 폭발했을 테니까!

시내를 빠져나가려던 세건은 인파 속에서 뱀파이어를 발견하고 바이크를 멈추었다. 설령 아는 얼굴이라도 도로를 달리며 찰나에 스치는 이를 알아보기 어려울 텐데, 이미 인간의 시력을 벗어났음을 참작하더라도 귀신같은 예리함이었다. 그러나 세건의 눈에는 양 떼 사이에 늑대가 들어가 있는 것처럼 극명하게 보였다. 다년간 쌓은 경험 덕분이기도 하고 반쯤은 망령 덕분이기도 했다. 세건은 골목으로 바이크를 몰아 흡혈귀를 그대로 받아버렸다. 바퀴에 갈리며 살점과 피가 튀고 비명이 치솟았다. 이런 곳에서 헤매는 놈은 대개 혼자 다니는 아웃로라서 반응이 형편없었다. 급소란 급소에 총격을 가하고, 거기에 더해 도폭선까지 휘감아 터트려버렸다. 말 그대로 산산조각이 난 뱀파이어는 재생할 틈조차 없이 죽어버렸다. 널브러진 사체 조각을 보던 세건은 무심코 욕설을 내뱉었다. 놈들을 도륙하는 거야 이제껏 밥 먹듯이 해온 일이지만 지금은 흡혈귀라는 이유만으로 죽인 게 아니었다. 세건은 순간이나마 서현을 투영했고 그 순간에는 단지 화풀이 대상에 불과했다. 더러운 기분이었다.

그 상태로 아지트에 도착해 자신을 맞이하는 서현과 얼굴을 마주하자마자 세건은 머리끝까지 치닫는 격정에 사로잡혔다. 입술을 짓씹은 세건이 신경질적으로 쏘아붙였다.

“내 뒤꽁무니 따라다니는 게 즐거운 모양이지? 개새끼는 개새끼로군.”

“개와 친척인 건 맞으니까 거기에 대해선 할 말이 없는데, 흥분 가라앉혀. 스물네 시간 붙어서 감시하겠다는 것도 아닌데 좀 참아.”

그놈의 정신오염 타령도 지긋지긋했다. 그것만 아니면 서현이 뭐라고 하던 무력을 사용해서라도 쫓아낼 텐데 그에게는 명분이 있었다. 더군다나 아무리 욕을 하고 화를 내도 매끄럽게 흘려보내니 절벽에 대고 외치는 꼴이었다. 급격히 피로해진 세건은 서현을 내버려두고 그의 옆을 지나쳤다. 그러나 채 몇 발짝 멀어지기도 전, 세건은 팔을 붙들렸다. 특유의 괴력으로 세건을 간단히 끌어당긴 서현이 얼굴이 가까이 가져다 댔다. 색이 다른 눈동자가 삽시간에 경계를 비집고 발자국을 찍었다.

“피 냄새가 나는군. 뱀파이어를 죽이고 오는 길이야?”

“그럼 언제는 안 죽였나? 새삼스럽게 묻는군.”

“그야 그렇지. 그런데 이건…바다 냄새 같은데.”

확실히 서현의 후각이라면 피부에 묻은 소금기에서 짠 냄새를 맡은 것쯤 일도 아니리라. 세건은 괜히 당황해서 그의 손을 뿌리쳤다. 자신의 내밀한 사생활이 발가벗겨져 드러나는 느낌이었다.

“내가 어딜 다녀오든 무슨 상관이야?”

“그냥 냄새가 난다고 했을 뿐이야.”

여유를 띠는 서현의 미소를 보니 속이 뒤틀렸다. 상대가 혼란스러워하건 말건 아랑곳하지 않는다는 태도에 자신만 초조해진다. 세건은 욕실로 직행에 뜨거운 물로 살갗에 밴 소금을 씻어냈다. 끈적거리는 머리를 감고 한참을 샤워기 아래에 서 있다가 문득 팔을 들어 냄새를 맡아 보았다. 욕실에 번진 샴푸 향만이 코를 자극하고 바다의 흔적은 조금도 느껴지지 않았다.

물기를 털고 나오다가 불현듯 자신이 망쳐놓은 침대에 생각이 미쳤다. 지난번 대뜸 돌아와 물을 주고 간 날, 아침에 일어나 방을 확인했지만 서현은 온데간데없었다. 그 후로 서현이 이곳에 오기는 처음이다. 침대 꼴을 보았을 텐데 대체 무슨 상상을 했을지 덜컥 걱정되었다. 아무런 언급조차 안 하는 점이 더욱 신경 쓰였다. 그런 생각을 하며 방으로 돌아간 세건은 제 침대에 버젓이 누운 서현을 보고 움칫했다. 하지만 정작 당사자는 태연자약했다.

“이게 뭐하는 짓이지?”

“그걸 몰라서 물어? 당신이 침대를 그 모양으로 만들어 놨는데 책임을 져야지.”

변명의 여지가 없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하더라도 같은 침대라니? 세건은 밖에 놓인 소파를 떠올리고 밖에서 자겠다는 뜻을 내비친 후, 걸음을 되짚어 나왔다. 서현은 빈말이라도 손님인 자기가 소파를 쓰겠다고 말하지 않았다. 도대체가 그의 의중을 알기 어려웠다. 인정하기 싫지만, 그는 격을 달리하는 능력과 왕자라는 별칭에 걸맞게 기본적으로 점잖아서 이렇게 염치없이 구는 경우는 드물었다.

소파에 누운 세건은 눈을 감았다. 정적이 닫힌 눈꺼풀에 한 겹 내려앉고 희미하게 파도치는 환청을 들으며 무의식으로 세계로 잠겼다. 그리고 다시 달이 녹아내리는 꿈을 꾸었다. 세건은 두 손에 은빛을 띠는 물을 한가득 모아 목을 축이다가 숫제 입을 벌리고 받아 마셨다. 물을 삼키는 목울대가 쉴 새 없이 움직였다. 청량한 달콤함이 말라비틀어진 영혼을 적시고 전신의 감각이 넘치는 기쁨을 주체하지 못하고 바르르 떨렸다. 넘실대는 오르가슴으로 쾌락을 갈음하기까지 결코 긴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완벽한 엑스터시에 빠져 세건은 더욱 크고 압도적인 열락을 갈구했으나 달이 모조리 녹아내린 뒤에는 메마른 암흑이 찾아왔다. 끔찍한 상실감에 휩싸인 세건은 가슴을 움켜쥐고 몸부림치다가 비로소 꿈에서 깨어났다.

숨을 몰아쉬던 세건은 자신을 주시하는 눈길을 느끼고 고개를 모로 눕혔다. 서현이 거기에 있었다. 그는 세건이 눈 뜨기만을 기다린 것 같았다. 어두운 가운데 시선이 어렴풋하게 교차하며 무언의 대화가 오갔다. 그러는 도중에도 세건은 극심한 갈증에 시달렸다. 선연한 욕정이 자신의 것인지 서현의 것인지, 혹은 둘 모두의 것인지 분간하기 어려웠다.

서현이 천천히 다가와 한쪽 무릎을 꿇고 몸을 낮추었다. 세건은 열에 들떠 입만 달싹이다가 가까스로 목소리를 냈다.

“서현.”

그는 고개를 숙여 목 언저리에 코를 묻었다.

“여전히 바다 냄새가 나는군, 한세건.”

“…그만둬.”

뜨거운 손바닥이 복부와 가슴 위를 미끄러지며 올라왔고 스치는 자리마다 열기로 화끈거렸다. 세건은 고통스럽게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서현이 턱을 움켜쥐며 나지막이 속삭였다.

“내가 필요하잖아.”

서현의 말 대로였다. 세건은 꿈이나 생수 따위의 일시적인 대체품이 아니라 진짜 만족을 갈구했다. 영육이 마르지 않도록 흠뻑 적셔줄 감로수를 원했다. 흥분과 두려움이 뒤섞인 가운데, 서현이 미소를 그렸다. 시신경이 타들어 가는 듯했다. 마침내 서로의 입술이 겹쳐지고 세건은 떨리는 팔로 그의 목을 끌어안았다. 어느덧 밀물이 머리끝까지 차올라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