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고 아인소프 오올이 발동했다.
서린과 세건은 단조로운 백색 공간에서 서로를 마주하고 섰다. 위아래는 물론이고 사방이 까마득한 데까지 확장되어 도저히 끝이 안 보였고 주위가 온통 새하얗다. 그러나 눈처럼 하얗지도, 백지처럼 하얗지도 않다. ‘흰색’보다 차라리 불투명한 ‘무색’에 가까웠다. 정적과 공허라는 단어가 태어난 곳이라도 해도 과언이 아닌 이 기묘한 공간에 오직 둘뿐이었다. 세건은 놀란 눈으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여긴…뭐지?”
세건의 눈이 설명을 요구하듯 서린을 바라보았다. 그는 조금 전까지 눈물을 흘리며 사라져 가던 테트라 아낙스가 아니었다. 정장 대신에 편한 티셔츠와 청바지 차림이고, 길게 기른 흑발 대신에 짧은 다갈색 머리인 서린은 세건에게 훨씬 익숙한 모습이었다. 차림새를 떠나 전체적으로 앳된 분위기를 풍겼다. 방금까지도 함께였건만 서린은 아주 오랜만에 만나는 형을 반기듯 환하게 웃었다. 예나 지금이나 그는 천진한 소년의 미소를 띤다.
“아인소프 오올이 발동하기까지 찰나보다도 짧은 간극이 존재해요. 여긴 그 시공의 틈새고 내가 형을 데려온 거죠.”
“나를 왜?”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게 있어서? 뭐, 인류의 소망을 들어주면서 아주 잠깐 내 욕심을 채운다고 누가 뭐라고 하겠어요?”
서린이 어깨를 으쓱했다. 마지막이라는 단어가 총알이 되어 폐부를 관통해 세건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의 말대로 어차피 이곳엔 둘밖에 없어서 서린이 무엇을 하든 다른 이들은 알지도 못한다. 설령 안다고 한들, 감히 어느 누가 손가락질하겠는가. 서린은 구원자이며 인간과 흡혈귀를 불문하고 모두 그에게 거대한 부채를 진 입장이었다. 비현실적인 무거움은 오히려 가볍게 느껴져서 세건은 코끼리 다리를 만지는 장님처럼 서린이 짊어진 무게를 단편적으로 더듬을 수밖에 없었고, 그런 자기 자신에게 화가 났다.
“아쉽게도 시간이 많지 않으니까 일단 가요.”
손가락을 튕기자 마법처럼 땅과 하늘이 차례로 생기고 복잡한 풍경이 레고 블록 쌓이듯 아래에서부터 위로 구성되기 시작했다. 어느새 세건은 낯익은 아지트 앞마당에 서게 되었다. 규모가 작은 송림, 그 사이에 세워진 붉은 벽돌 교회와 슬레이트 지붕을 얹은 창고. 한때 불타서 없어졌던 장소가 서린의 힘으로 다시 생겨났다.
“와, 여기 진짜 오랜만이다. 그쵸?”
뭐가 그렇게 좋은지 서린은 눈에 띄게 들떠서 아지트 안으로 들어갔다. 세건은 그 뒤를 따라가며 감회에 젖었다. 이 아지트에서 둘이 생활하던 시절, 막 월야 세계에 들어온 서린은 그저 그런 마법사와 뱀파이어에게도 쩔쩔매고는 했다. 그런 서린이 대뜸 흡혈귀의 왕인 테트라 아낙스가 되고, 흡혈귀화 되었던 자신을 구하고, 이제는 세상을 위해 생명을 내놓았다. 세건은 이것을 비극이라 칭하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결코 해피엔딩도 아니다. 아담카드몬 아낙스 때문에 목숨을 잃은 사람들에겐 어떨지 모르나 적어도 자신에겐 아니었다.
“형이랑 스파링하면서 여러 번 죽었다 살아났는데. 언제쯤 형한테 안 얻어맞을 수 있을까 걱정하던 내가 이렇게 되다니, 인생은 진짜 한 치 앞을 모른다니까. 아, 맞아! 여기! 여기서 형의 명언이 탄생했잖아요. 나에게 반하지 마라! 데인져러스 보이의 전설이 시작된 역사적인 곳이라구요.”
놀려대는 소리에 세건은 반사적으로 미간을 찌푸렸다. 그러나 이번만은 서린이 무슨 소리를 해도 도저히 막지 못했다. 그저 꼬리 흔드는 강아지처럼 돌아다니는 녀석의 뒷모습을 바라볼 뿐이었다. 서린은 아지트 구석구석을 돌아다니면서 혼자 조잘조잘 잘도 떠들었다. 여기선 무슨 일이 있었고 저기선 뭘 했고……. 혁진에 대해서 말할 때는 어두워진 낯빛으로 잠시 상념에 잠기기도 했다. 그렇게 아지트를 중심으로 송림도 가볍게 빙 둘러본 서린이 마침내 세건을 돌아보았다.
“참 이상하죠, 형.”
“뭐가.”
“지금의 내가 훨씬 강하고 할 줄 아는 것도 많은데, 툭하면 습격받아서 다치기나 하던 그때가 더 좋았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요. 테트라 아낙스가 된 후로 내가 그전보다 사는 게 즐거웠는지 난 잘 모르겠어요. 물론 불행하지도 않았지만.”
서린은 먼지 낀 교회 창문으로 시선을 옮겼다. 셀로판지를 붙여서 만든 스테인드글라스는 조잡하게나마 에덴동산을 묘사하고 있었다. 나무를 휘감은 뱀과 사과를 건네고 받는 최초의 인간. 세월의 흐름을 못 이긴 뱀의 몸통은 너덜너덜해서 금방이라도 유리창에서 떨어질 것 같았다. 서린은 고개를 돌리고 뺨을 긁적였다.
“물론 과거로 돌아간다고 해도 내 선택은 똑같을 거예요. 그 덕분에 형들을 구하고, 아버지도 다시 한국으로 모셔왔는걸요.”
한세건은 어쩔 수 없었던 과거를 잊지 못하고 후회하며 제자리걸음 하는 자였다. 반면 서린은 언제나 미래를 받아들이고 꿋꿋하게 앞으로 나아간다. 그래서 세건은 서린이 부러웠고 그의 본성이 변하지 않기를 바랐다. 잔혹한 운명의 수레바퀴에 얽매인 채로도 웃을 수 있는 서린은 그 존재 자체로 위안이었다. 자신이 흔들릴까 봐 그 사실을 인정하지 못했을 뿐이다.
“나와 하고 싶었다는 게 여기 오는 거냐?”
“여기는 겸사겸사 온 거고 진짜는 따로 있어요.”
서린이 예고도 없이 풍경을 와르르 무너뜨렸다가 새로이 구축했다. 이번에는 평범한 도시의 번화가였다. 뜨거운 햇볕이 온몸으로 쏟아지고 달궈진 아스팔트 바닥에서 열기가 치밀어 오른다. 불볕더위에도 거리로 나온 사람들은 최대한 가볍게 옷을 입고 연신 부채질을 해댔다. 어느덧 세건과 서린의 옷차림도 계절에 걸맞게 바뀌어 있었다. 뙤약볕에 노출된 콧잔등과 팔이 뜨끈뜨끈해지고 금세 땀이 흐르기 시작했다. 살인적인 더위를 자랑하는 한여름이었다.
“세건 형. 잠깐 같이 걸어요.”
돌아다니기엔 최악인 날씨 아닌가? 세건은 그런 의문을 삼키고 서린과 나란히 길을 걸었다. 소모적인 말씨름으로 주어진 시간을 허비할 만큼 생각이 없지 않았다. 무엇보다 서린이 이런 날을 택한 데에는 필시 까닭이 있으리라 여겼다. 단지 그에게만 유의미할지라도 세건은 상관없었다.
“어딜 가는 거야?”
“아무 데도 안 가는데요?”
도리어 서린이 가긴 어딜 가냐는 눈빛을 보냈다. 그럼 정말로 산책이나 즐기자는 말인가?
“평범하게 형이랑 번화가를 걷는 게 내 꿈이었거든.”
남들이 들으면 그런 게 무슨 꿈이냐고 할 테지만 서린에겐 소박하기는커녕 매우 이루기 힘든 소망이었다. 서린은 태생부터 월야의 주민으로 살아가야하는 숙명을 안았다. 세건과 잠시나마 손잡았을지 몰라도 테트라 아낙스가 됨으로서 둘은 절대로 공존할 수 없는 관계를 획득했다. 평범해지기 위한 선택지는 극단적이었다. 세건이 월야를 파멸시키겠다는 목적을 포기하거나 아니면 서린이 인간이 되는 것. 어느 쪽이든 불가능했다.
“그보다 형, 큰일이에요.”
서린이 대뜸 정색하는 바람에 세건도 덩달아 표정이 굳었다. 설마 벌써 시간이 다 되었나, 하고 생각하는 순간.
“땀 때문에 내 러블리 챠밍 큐트함이 녹아내리겠어.”
“…낯짝에 깔린 뻔뻔함은 안 녹아내리나 보지?”
심각성이라곤 눈 씻고 찾아봐도 없는 서린의 행태에 세건은 그만 예전에 그랬던 것처럼 퉁명스럽게 쏘아붙였다. 그러고 나서 아차, 했는데 서린은 뭐가 그렇게 좋은지 만면에 미소를 띠고 한층 유들유들하게 굴었다.
“어우, 딱딱해. 형은 그래가지고 연애나 제대로 할 수 있으려나 몰라. 아무튼, 더우니까 저기서 아이스크림이나 사요.”
서린은 다짜고짜 세건을 끌고 근처 편의점으로 향했다. 에어컨을 빵빵하게 튼 편의점 안에 들어서자 숨통이 트였다. 이제야 살겠다며 호들갑을 떨어댄 서린이 괜히 매대 앞을 기웃거리다가 아이스크림 냉동고 앞에 섰다. 둘은 냉동고 가장 밑바닥에서 딱딱한 하드를 꺼냈다. 계산하자마자 크게 한 입 베어 먹으니 머리가 띵하게 아팠다. 워낙 날이 더워선지 편의점 식사대엔 컵라면 먹는 사람 한 명 없었다. 세건과 서린은 할 일 없이 침묵하는 전자레인지 옆에 나란히 서서 보기만 해도 눈이 부신 바깥을 응시했다.
“예전에 형이랑 혁진이를 찾으러 나갔던 날, 그날도 엄청 더웠는데 기억해요? 오죽하면 형이 방탄복도 벗고 대학생처럼 입어서 내가 젊어 보인다 했는데. 그리고 얘기하면서 걷다가 너무 더워서 아이스크림도 하나씩 사 먹었고.”
그제야 세건은 서린이 함께 걷자면서 한여름을 택한 이유를 알아차렸다. 그때도 놀러 나온 건 아니지만 겉보기에는 평범하게 잘 알고 지내는 형과 동생으로 보였으리라. 아이스크림은 달짝지근한데 부드러운데 입안은 쓰고 껄끄러웠다.
흡혈귀에서 인간으로 돌아오고 이따금 그와 지냈던 나날을 회고하노라면 기억의 파편이 테트라 아낙스를 향한 증오를 좀먹었다. 매사 긍정적이고 답답하리만치 선량한 녀석이라 진심으로 미워하지 못했다. 그런 까닭에 세건은 의식적으로 과거의 서린을 떠올리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썼다. 서린은 월야를 다스리는 제왕 테트라 아낙스였다. 더군다나 자신의 목숨을 치욕스럽게 이어붙인 자!
그러나 이 뱀파이어의 왕은 목숨을 대가로 한세건을 구원하지 않고 구함으로써, 타락한 뱀에서 순수했던 최초의 아낙스로 돌아갔다.
“형은 기억 안 나요?”
세건은 나무 막대를 쓰레기통에 넣고 편의점을 나왔다. 쫄래쫄래 따라 나온 서린이 얼굴을 흘끔거리면서 속내를 읽으려고 한다.
“기억해. 그래서 서린 넌 나하고 뭘 하고 싶은 거지? 옛날 얘기를 하고, 걷고, 그걸로 네 소망이 충족되나? 그게 정말 너한테 의미가 있는 거냐?”
“응. 당연하죠. 이것도 다 소중한 기억이 되니까.”
“…기억이라고?”
어차피 넌 이제 사라질 텐데 그게 다 무슨 소용이야. 그 말만은 차마 내뱉을 수 없었다. 그럼에도 서린은 뒷말을 짐작했으리라. 그는 오히려 위로하듯이 따뜻하게 웃어서 세건의 가슴에 실낱같이 얇으면서도 깊게 파인 상처를 입혔다.
“형, 나 아직 사라지지 않았어요. 여기 있다고요. 어차피 기억이란 살아있는 동안 곱씹는 데 의미가 있는걸. 형하고 함께 보내는 이 시간을 순간마다 계속 추억하고 있어요. 그리고 내가 사라져서 더는 기억하지 못하게 되더라도 형이 기억할 테니까 괜찮아.”
죽음을 목전에 둔 때조차 서린은 조금이나마 남은 삶을 가치 있게 한다. 세건은 아무리 해도 그처럼 할 수 없었다. 증오하고 파괴하는 방법밖에 몰라서 매 순간을 충실하게 사랑하기란 지독히도 고통스러웠다. 그러나 이 통증이 서린을 잃는 대가라고 한다면 어찌 외면하랴. 세건은 입을 앙다물었다. 서린의 빛이 너무 강해서 세건은 짙어지는 자신의 그림자를 보았으나 차마 눈 돌릴 수 없었다.
서린이 계속 걷기를 청해서 둘은 편의점 차양의 그늘에서 나와 다시 내리쬐는 볕 아래로 들어갔다. 줄지어 늘어선 상가와 시끌시끌한 말들이 옆을 느리게 지나갔다.
“세건 형. 손잡아도 돼요?”
불현듯 화해의 악수를 하지 못했던 것이 떠올라 세건은 고개를 끄덕였다. 뜨거운 손이 살그머니 다가와 세건의 손을 꼭 잡았다. 더위로 인해 맞닿는 손바닥에 금세 땀이 송골송골 맺혔지만 서린이 놓지 않은 까닭에 세건도 그대로 두었다. 두 남자가 대낮에 손을 잡고 다니는 광경이 퍽 이상할 법도 하건만 서린이 미묘하게 비틀어 놓았는지 지나가는 누구도 신경 쓰지 않았다.
“젠장, 더워서 현기증이 다 나는군. 이건 너무 심한 거 아니야? 여름 날씨에 아이스크림을 먹으면서 예전 기분을 되살리고 싶었던 거면 아까 했으니까 이제 어떻게 좀 해 봐.”
그러자 서린이 웃음을 터트렸다.
“실은 나도 그 생각 중이었는데 형이 뭐라고 할까 봐 말 못하고 있었거든요. 그럼 시원하게 해볼까요?”
망막이 아프도록 새파랗던 하늘에 갑자기 먹장구름이 꼈다. 태양이 구름에 가려지면서 급격히 날이 흐려지더니만 비가 쏟아졌다. 서린은 처음부터 가지고 있었던 양 자연스럽게 빨간색 도트 무늬 우산을 펼쳐 머리 위에 씌웠다. 세건이 우산 지붕을 올려다보고 시선을 내리는 잠깐 사이에 번화가는 한적한 돌담길이 되어 있었다. 붉고 노란 단풍잎이 온통 바닥을 덮었고 새카만 처마를 따라 빗물이 미끄러졌다.
“여기가 어디게요?”
“몰라.”
“그럴 거라고 생각은 했어요. 형은 몸 만드느라 이런 데 오지도 않았을 거 아냐. 여기가 바로 그 유명한 덕수궁 돌담길이란 말이에요!”
서린이 뭘 기대했는지 몰라도 세건은 돌담길이고 뭐고 감흥이 없었다. 바이크를 타고 근처를 지나다니기만 하지 이런 곳에 뱀파이어가 나타나지 않는 바에야 올 일이 뭐가 있다고. 물론 세건도 여기가 유명한 장소라는 것쯤은 알았다. 긴 담벼락을 접하고 길게 뻗은 길은 깨끗하고 운치 있었다.
“여기 연인끼리 걸으면 헤어진다며?”
“그런 소리가 있긴 하죠.”
고개를 주억거린 서린이 의미심장한 눈으로 세건을 곁눈질했다.
“근데, 형. 그런 말을 하는 이유는 혹시 나랑…”
“가자.”
서린의 입에서 얼토당토않은 말이 나오려고 하려고 하기에 얼른 말꼬리를 자르고 먼저 앞으로 나섰다. 세건은 오래전부터 서린의 순진무구한 애정을 알아도 모른 체했다. 그런데 인제 와서 무슨 죽은 사람 소원 들어주는 양 받아줄 수는 없었다. 나란히 걷고, 손잡고, 대화를 나누는 것쯤이야 얼마든지 하겠지만 어설프게 관계를 맺기는 싫었다. 그러나 서린이 원하면 거절하지 못할 걸 짐작한 탓에 세건은 끝까지 외면하기로 했다. 빗방울이 머리와 어깨를 적셔도 성큼성큼 걸어가는 세건의 뒤로 타다닥, 잰 발걸음 소리가 들린다. 잽싸게 우산을 씌우며 팔을 맞댄 서린이 다시금 손을 움켜쥐었다.
“혼자 가지 마요, 형.”
장난기가 쏙 빠져 오직 처량하기만 한 서린의 목소리를 듣자마자 세건은 움찔하고 그를 돌아보았다. 앞서 걷지 말라는 의미가 세건의 귀에는 조금 다르게 들렸다. 꼬리 처진 강아지처럼 보는 표정을 맞닥뜨린 세건은 걷는 속도는 약간 늦추었다. 새삼스레 짜증인지 분노인지 모를 감정이 울컥 치솟았다. 서린, 이 착해 빠진 녀석을 홀로 보내는 건 정말 못할 짓이다.
“…혼자 안 가.”
그 대답이 기쁜지 서린은 금세 싱글벙글해졌다. 둘은 보폭을 맞추어 돌담길을 끼고 빗속을 산책했다. 어느새 땀은 다 식었고 축축하게 습기를 머금은 공기가 피부를 미미하게 적셨다. 비 오는 날 특유의 물 냄새에 물씬 스며든 단풍잎 풋내가 들숨에 섞여 몸속으로 들어왔다. 빗물에 젖은 은행잎은 유난히 색이 짙어 한 발 내디딜 때마다 신발 밑창이 노랗게 물들 것 같았다.
서린이 한 음씩 천천히 콧노래를 불렀다. 사이사이 우산에 떨어진 비가 방울방울 부서지는 소리가 끼어들어 장단을 맞추었다. 드문드문 귀에 익은 멜로디 같다가도 역시나 생소한 음악이었다. 유행가일 수도 있다. 어차피 세건은 헌터가 된 이후에 제대로 음악을 들어본 적이 없다. 매해 히트를 치는 음악은 워낙 길거리에서 트는 바람에 간단한 후렴구 정도나 아는 정도였다.
“앗, 꽃집이다. 세건 형, 꽃 사줄까요?”
“됐어. 꽃은 무슨 꽃.”
서린은 어째 실망한 기색이었다.
“그럼 나 사줘요.”
“…돈 없어.”
“빌려줄 테니까 나중에 갚아요. 형이니까 특별히 이자는 안 받을게.”
아주 대단한 선심이라도 쓰는 태도다. 서린은 다짜고짜 세건을 끌고 꽃집으로 직진했다. 일부러 그러는 건지, 서린이 마치 저한테 미래가 있는 양 구는 바람에 세건도 잠깐이지만 혹시나 했다. 헛된 희망이겠지. 세건은 실소를 흘렸다. 서린은 뒷일을 생각하는 대신에 지금에 몰두하고 집중하고 싶은지 몰라도 세건은 그렇게 편할 대로 생각하기 어려웠다. 그러나 적당히 하라고 말하려 해도 입술은 아교 붙은 듯이 떨어지지 않는다.
그새 세건의 발은 꽃집 앞에 서 있었다. 서린이 우산을 접어 빗물을 털고 가게 안으로 쏙 들어갔다. 각종 식물을 비롯한 꽃과 높은 습도가 흡사 열대우림을 방불케 했다. 사주겠다고 말도 안 했는데 서린은 마치 꽃과 꽃 사이를 날아다니는 나비처럼 한시도 가만히 있지를 않았다. 몇 발짝 떨어져서 서린을 따라가던 세건은 망설인 끝에 서린, 하고 그를 불러 세웠다.
“왜요?”
“내가 너한테 꽃을 주는 게 어울린다고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
서린이 미간을 좁히며 고개를 갸우뚱했다.
“으음, 확실히 내가 형한테 주면 몰라도 그 반대는 그림이 웃기긴 한데.”
“그럼 포기해.”
딱 자른 말에 서린이 아쉬운 티를 잔뜩 냈다.
“그렇게 싫어요?”
“그래. 이별 선물 같아서 싫어.”
“맞아요, 이별 선물. 형한테 받고 싶어.”
세건은 입술을 깨물었다. 숫제 서글픈 표정이라도 지어 보일 것이지, 서린은 자기가 낸 문제의 정답을 맞힌 걸 칭찬하듯 활짝 웃었다. 못 이기는 체하고 응하라면 할 수도 있다. 딱 한마디, 알겠다고 하면 그만인데 뭐가 어려울까. 대답은 너무 쉽고 그까짓 꽃 한 송이 따위 대수롭지도 않아서 세건은 더 싫어졌다. 원하는 대로 맞춰준 다음에 ‘잘 가라. 이제 소원 성취했지?’라는 식으로 헤어지라고? 이게 무슨 흔한 상업영화의 결말도 아니고 너무 우스꽝스럽다. 새건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미안하지만, 너한테 그런 선물 줄 생각은 없어. 차라리 산책을 계속하든지, 어쨌든 간에 다른 걸 해.”
재차 거절당하자 서린이 한숨을 푹 쉬었다.
“알았어요. 형이 별로라면 나도 강요는 안 해요. 그럼…옛날부터 꼭 해보고 싶은 거 있었는데 같이 해줄래요? 그건 상대가 없으면 못 하는 거라서.”
“뭔데?”
서린이 장난기 어린 미소를 띠고서 세건을 데리고 꽃집을 나왔다.
“춤춰요.”
“뭐?”
빗속으로 들어간 서린이 귀여운 땡땡이 우산을 빙글빙글 돌리면서 기대감 어린 눈빛으로 세건을 빤히 바라보았다.
“형, 왈츠 출 줄 알아요? 어릴 때, 그러니까 아버지랑 살 때요. 아직은 그럭저럭 살 만하던 시기라 텔레비전도 있었거든요. 언제였더라, 밤에 아버지가 돌아오길 기다리는데 옛날 영화를 하더라구요. 딱히 할 것도 없어서 보는데 남녀 주인공 둘이 빗속에서 왈츠를 추는 거예요. 와, 되게 낭만적이지 않아요, 형? 그걸 보고 나도 언젠가 꼭 해보고 싶었는데 출 사람이 있어야 말이지.”
헛웃음이 터져 나왔다. 이건 진짜로 흔한 로맨스 영화의 한 장면 아닌가. 세건은 서린과 손을 붙잡고 춤추는 모습을 상상했다가 저도 모르게 눈살을 찌푸렸다. 평소의 한세건이라면 혀를 깨물고 죽으면 죽었지 그럼 남세스러운 짓거리는 안 할 것이다. 문제는 꽃을 선물해달라는 청을 거절한 후라 마음이 약해져 있었다. 다른 걸 하라고 말한 주제에 이것저것 가리기도 우습고 마지막이라는 점을 상기하면 까다롭게 자기 입맛대로 고르기도 염치없다.
“그래, 춰. 근데 난 왈츠 같은 거 출 줄 모른다.”
“걱정 말아요, 형. 나라고 알겠어? 대충 추는 거지. 오히려 잘 추는 편이 훨씬 웃기지 않을까요?”
세건은 내밀어진 서린의 손을 쳐다보며 고심하다가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여기서?”
“좋잖아요. 고즈넉한 궁궐 옆 아름다운 돌담길을 따라가며 왈츠를 추는 챠밍한 소년 서린과 반할 만큼 멋진 한세건!”
“웬만하면 사람 없는 데서 하지?”
비 내리는 날이라 비교적 한가해도 빗소리를 들으며 걷는 운치를 즐기기 위해 나온 사람들이 있었다. 여기서 남자 둘이 음악도 없이 춤추면 무슨 눈으로 볼지 자명했다. 아무리 서린이 임시로 만든 세계라지만 지금 둘에게는 엄연한 현실이지 어설픈 모조품이 아니었다. 그 점을 깨끗이 무시할 만큼 세건은 낯짝이 두껍지는 못했다.
“그럼 이번에는 형이 장소를 골라 봐요.”
“…꽃밭.”
순간적으로 떠오른 곳을 툭 내뱉었다. 하필 꽃밭인 건 아마도 서린이 이별 선물로 꽃을 사달라고 했기 때문이리라.
“빨간색 달리아가 가득 핀 곳으로.”
주문을 받은 서린이 고개를 끄덕였다. 비가 계속 내리는 채로 둘을 중심으로 하여 붉은 꽃밭이 파문처럼 퍼져나갔다. 사방의 지평선 끝까지 온통 달리아가 만발한 들판으로 채워지기까지는 금방이었다. 웬만한 사람 키만큼 높이 자란 달리아는 수많은 꽃잎이 풍성하게 원형을 이루어 화려했다. 서린과 세건은 꽃밭을 가로지르는 길에 섰다. 차진 흙과 굵은 모래로 잘 다져진 땅은 비에 젖어도 그다지 질퍽거리지 않았다. 서린은 자신이 만들어낸 풍경을 잠시 감상하더니 만족스럽게 미소했다.
“모르는 꽃이라 정보를 검색해서 만들었는데 예쁘네요. 자, 그럼.”
서린이 우산을 펼쳐진 그대로 옆에 내려놓았다.
“한 곡 부탁할게요, 형.”
몸을 붙이고 어색하게 자세를 잡자마자 서린이 움직였다.
“형은 왼발부터 뒤로 가요. 다음은 옆으로 한 발, 이번엔 오른발로 앞으로요. 다시 옆으로 갔다가 뒤로 가고.”
그들은 천천히 춤을 추기 시작했다. 둘 다 몸을 쓰는 데는 능란한 덕분에 채 열 번을 반복하기도 전에 스텝에 익숙해졌다. 처음에 거북이 기어가는 속도였던 발동작이 점차 빨라지고 서린은 흥이 났는지 대담하게 한 바퀴 돌기도 했다. 어느덧 빨간 우산은 저만치에 떨어졌다.
암만 머릿속에 이론이 있어도 실전은 다른 법이라 서린의 솜씨는 초보에서 벗어나질 못했고 세건은 그 서린이 리드하는 대로 따라가는 실정이었다. 서로 발이 꼬이는 바람에 넘어질 뻔도 하고 괜히 빙글빙글 돌기도 했다. 왈츠랍시고 추고 있는데 기본 스텝을 제외하면 왈츠라고 하기 민망한 수준이었다. 서툴고 엉망진창이었음에도 서린은 즐거워하며 입으로 유명한 왈츠 곡을 흥얼거렸다. 거기에 경쾌한 빗소리로 부족한 반주를 갈음했다.
이 왈츠를 끝낼 음악이 없는 까닭에 둘의 춤은 한참 동안 계속되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흠뻑 젖었는데도 쉴 새 없이 움직여서 밀착한 몸을 통해 뜨거운 체온이 전해졌다. 이리로 돌았다가 저리로 돌고, 휘청휘청하면서도 춤은 끝날 듯 끝나지 않았다.
기어코 체력만은 인간을 넘어선 그들이 서서히 숨이 찰 지경이 되었을 때, 발이 엇갈리면서 균형을 잃은 세건을 서린을 잡아챔과 동시에 비로소 몸을 멈추었다. 잠시 묘한 열감을 품은 시선이 교차하던 어느 순간, 느닷없이 서린이 폭소를 터트렸다. 그는 아예 허리를 접고 끅끅 소리를 내며 흐느꼈다. 세건은 젖은 머리칼을 뒤로 넘기면서 잘게 떨리는 서린의 등을 내려다보았다.
“뭐가 그렇게 웃겨?”
가까스로 허리를 편 서린이 눈가를 훔쳤다.
“형 진짜 심각하게 못 추는 거 알아요?”
“그래서 모른다고 했을 텐데? 잘 추는 편이 더 이상하다며?”
“이 정도일 줄은 몰랐죠. 발은 곧잘 움직이는데 몸은 완전 뻣뻣해서, 그게 무슨 왈츠 추는 자세예요.”
“하. 그러는 넌 대단히 잘 한 줄 알아?”
세건이 쏘아붙였지만 고작 그걸로 서린을 부끄럽게 하긴 역부족이었다. 서린은 어깨를 으쓱이며 뻔뻔한 말을 했다.
“난 처음치곤 잘 했는데? 형이랑 다르게 물 만난 물고기처럼 유연하게 움직였거든요?”
두 손을 깍지 끼고 팔을 위로 쭉 뻗어 기지개를 켠 서린이 배부른 강아지처럼 싱긋 미소했다. 그리고 걸음을 옮겨 기다란 달리아 줄기를 잡고 꽃송이를 응시했다.
“춤추면서 생각했는데, 왜 하필 빨간 달리아예요?”
“아까 꽃집에서 봤어.”
“형도 참, 말 돌리긴. 하고 많은 꽃 중에 왜 달리아인지 말해달라니까.”
서린의 눈은 꽃에 고정되어 있는데도 세건은 그를 계속 바라보지 못하고 고개를 돌렸다.
“그냥 눈에 띄어서 기억에 남은 거지 왜는 무슨 왜야? 무슨 거창한 의미라도 있는 줄 알아?”
한사코 부정하노라니 서린이 피식 웃는다.
“알았어, 알았어요. 별 뜻 없다 그거죠? 음, 아무튼 고마워요. 솔직히 왈츠 추자고 했어도 기대 안 했는데 덕분에 정말 좋은 기억으로 남을 거야. 그러니까 이젠…미련 없이 갈 수 있을 것 같아요, 세건 형.”
세건은 눈을 둥그렇게 떴다. 먼 데서부터 달리아가 붉은 꽃잎을 휘날리고 쏟아지던 빗줄기가 거꾸로 솟아오르기 시작했다. 비구름이 떠다니던 흐린 회청색 하늘도 흩어지더니 이윽고 새하얀 빛으로 가득 찼다. 더불어 서린의 몸 또한 서서히 옅어지고 있었다. 세상에서 지워지고 있었다.
이 얼마나 고요하고 비현실적인 죽음인지.
“…가는 거냐?”
차마 서린이 사라지는 꼴을 볼 자신이 없어 외면했던 세건은 이번에야말로 서린에게서 눈을 돌리지 않고 마지막을 지켜보았다. 하지만 인사는 하지 않았다. 바람에 휩쓸린 듯이 허공에 떠오른 꽃잎을 관망하던 서린이 난처한 기색으로 입술을 달싹였다.
“형, 미안해요. 실은 내가 거짓말을 했어. 형이 지금 일을 기억할 거니까 괜찮다고 했지만.”
“뭐?”
“아마 형은 기억 못 할 거야.”
세건은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서린과 함께 옛 아지트에 간 것도, 아이스크림을 먹고 손잡고 걸을 것도, 이곳에서 춘 왈츠도 한낱 연기처럼 흩어진다는 말인가.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한 채, 오로지 그와 악수조차 하지 못했다는 후회만 남는다니.
“너…!”
“형이 행복해지면 좋겠어. 그러니까 나 같은 건 잊고 잘 살아요…라고 할 줄 알았다면 큰 오산이고, 솔직히 말하면 난 죽는 것도 싫지만 형이 날 잊는 게 더 싫어. 나 잊지 마요, 세건 형.”
짐짓 밝게 웃으며 얘기하지만 세건은 서린의 얼굴을 적셨던 눈물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난 원래 뭔가를 잘 잊는 성격이 아냐.”
“하긴, 형 성격에 날 잊을 수 있을 리 없죠. 아, 다행이다. 아참, 그리고 하나 더.”
거의 투명해지다시피 한 서린이 갑자기 달려와 세건을 와락 끌어안고 귓가에 소곤거렸다.
“형은 내가 붉은 달리아의 꽃말을 모를 거라고 생각했어요?”
그의 말이 마침표를 찍는 동시에 서린도, 달리아 꽃밭도 없어지고 처음 들어왔던 새하얀 공간이 남았다. 그리고 이제는 세건 혼자였다. 비는 그쳤으나 무거운 고요가 머리와 어깨로 쏟아져 내린다. 세건은 희미하게 남은 서린의 감각을 곱씹으며 중얼거렸다.
“…아니. 알 거라고 생각했어.”
그리고 아인소프 오올이 발동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