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달의 방
황금 잔에서 타오르는 푸른 불꽃이 크게 일렁였다. 연회장에 모인 모두의 시선이 불의 잔에 집중되었다. 발표가 남은 학교는 호그와트뿐이다. 이윽고 불꽃이 선명한 붉은색으로 변하고 쪽지 한 장이 솟구쳐 교장의 손으로 빨려 들어갔다. 좌중이 숨죽인 가운데 이름을 확인한 교장 오스왈드의 목소리가 홀에 울려 퍼졌다.
<호그와트 챔피언은, 이사카 베르게네프!>
모인 이들이 일제히 한 학생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그는 오른쪽에 적안, 왼쪽에 청안을 지닌 소년이며 바로 자기 자신이었다. 호명을 받은 서현은 당혹감을 표출할 겨를도 없이 자리에서 일어나 앞으로 나갔다. 교장이 트리위저드 대회 참가자 세 명이 확정되었음을 알리는 순간, 서현은 한 사람을 바라보았다.
첫인상만으로는 일견 순진하게도 보이는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눈빛은 겉보기와는 아주 딴판으로 매섭고 날카롭다. 그는 자신을 노려보고 있었다.
*
서현은 기숙사 침대에서 눈을 떴다. 창밖으로 보이는 호수는 깜깜했다. 곯아떨어진 룸메이트들의 숨소리, 바깥에서 물이 출렁이는 소리가 들린다. 천장에 달린 은색 램프가 희미한 빛을 퍼뜨려 신비로운 분위기를 자아냈다. 이곳에 누워 있노라면 이따금 물속으로 서서히 가라앉는 기분이 든다. 실제로도 슬리데린 기숙사는 호그와트 호수 아래에 있다. 유리창 너머로 밤의 호수보다 더 검은 무언가가 스쳐 지나갔다. 아마 대왕오징어 혹은 여태껏 누구도 보지 못한 신기한 생물이리라.
서랍에서 회중시계를 꺼내 램프 빛에 비춰 시간을 확인했다. 아침 해가 밝으려면 한참 남았다. 서현은 도로 잠을 청할 요량으로 부드러운 이불을 목까지 끌어당겨 덮고 눈을 감았다.
그렇게 오 분이 지나고 십 분이 지나도록 한 번 달아난 수마는 찾아올 줄을 몰랐다. 매끄러운 비단의 감촉마저도 오늘은 편안히 잠들게 도와주지 않았다. 한동안 뒤척이던 서현은 마지못해 자리에서 일어나 망토를 걸치고 기숙사 휴게실로 나갔다.
석벽에 새긴 고딕 무늬 조각, 큼직한 벽난로, 흑단으로 만든 고풍스러운 장식장과 테이블이 갖춰진 휴게실은 엄숙하면서 예스러웠다. 과거지향적인 순혈주의자들이 좋아할 법한 취향이다.
서현은 가죽 소파에 털썩 앉았다. 잠이 안 오는 이유는 꿈 때문이었다. 그 꿈은 얼마 전의 일이었고 또한 현재 가장 큰 고민거리를 제공한 사건이기도 하다. 고개를 젖혀 녹색 램프를 멀거니 쳐다보았다.
한없이 마음을 어지럽히는 초록색.
한숨 소리가 적막한 휴게실에 퍼진다. 애초에 불의 잔에다 이름 쪽지를 넣은 게 화근이다.
“이런 시간에 안 자고 뭐 해?”
어느새 기척도 없이 접근한 이가 맞은편 소파에 풀썩 드러누웠다. 서현과 반대로 그의 눈동자는 왼쪽이 붉은색, 오른쪽은 까만색이다. 이란성 쌍둥이라서 오드아이라는 점을 제외하면 외견상 닮은 구석은 적었다. 서현처럼 본명인 ‘롯시니’ 보다 아명이자 애칭인 ‘서린’ 으로 더 자주 불리는 그가 길게 하품을 했다.
“설마 두 번째 과제가 걱정되어서 밤잠 못 이루는 건 아닐 거고, 세건 형 때문이지?”
“왜 내가 그 걱정을 안 할 거라고 생각해?”
“형은 처음부터 의욕이 없었잖아. 당장 낮에도 세건 형이 얼굴도 안 비춘다는 소리만 투덜거렸고.”
서린 말마따나 서현은 트리위저드 대회에 무관심했다. 호그와트 대표이고 무엇보다 불의 잔이 한 선택이라 설렁설렁하고 있을 뿐이다.
다만 일부러 져주기는 싫어서 첫 번째 시합에서 본의 아니게 1위도 했다. 그래도 한세건은 코빼기도 내비치지 않았다. 축하는 고사하고 어디 한 군데 부러졌으면 좋았으리란 악담을 할지언정 얼굴은 보러 올 줄 알았건만 웬걸, 모르는 사람처럼 싹 무시하다니. 그와는 학년도 기숙사도 다르므로 평소엔 마주칠 기회가 많지 않았다.
“내가 목숨을 건 사투를 벌였는데 한 번 오지 않는 걸 보면 걱정도 안 되는 거겠지.”
“형이 상한 데라곤 용이 뿜은 불에 머리카락이 약간 그슬린 게 다인데.”
“실제로 다쳤는지가 중요해?”
서현은 그슬린 부분을 잘라내 이전보다 다소 짧아진 머리카락을 문질러 보았다.
“아니면 내가 잘해낸 게 못마땅한지도 모르지.”
테이블에 놓인 모래시계를 가지고 손장난 치던 서린이 빙긋 웃었다. 그가 던져 올린 모래시계가 허공에서 빙글빙글 돌며 올라갔다. 정점을 찍고 떨어지는 걸 도로 잡아챈 서린이 투명한 유리 뒤에 붉은 눈동자를 대고 깜빡거렸다.
“서현도 참, 그 형 성격 알면서. 긍정적으로 생각해. 애당초 화난 게 아닐 수도 있어.”
동생은 매사 한세건에게 호의적이다. 물론 심성이 악한 녀석은 아니다. 세건은 어둠의 마법에 심취한 미친 마법사에게 가족을 잃은 탓에 그런 자를 극도로 혐오했다. 아닌 체해도 정에 약한 부분이 있고 기본적으로 원리원칙을 지키는, 서린의 표현에 의하면 ‘알고 보면 좋은 형’이다. 문제는 성격이 비딱하다는 점이다. 그것도 아주 심하게 꼬였다. 다혈질에 까다롭고 심지어 예민하기까지 했다.
“그때 날 쏘아보는 눈빛을 네가 못 봐서 그러지. 속 좁은 자식 같으니. 날 뽑은 건 불의 잔이지 내 탓이 아닌데 왜?”
“이름을 넣은 건 사실인걸. 안 넣었으면 뽑히지도 않았을 텐데.”
애석하게도 서린의 말이 맞다. 이러쿵저러쿵해도 결론은 불의 잔에 자신의 이름을 넣은 게 실수였다. 자신답지 않게 그런 행동을 하게 된 원인이 바로 눈앞에 있었다. 서린은 조금도 책임감을 느끼지 못하는 표정이다.
“네가 넣자고 했잖아.”
“당연히 우리 한세건 씨가 뽑힐 줄 알았지. 학년도 우리보다 높고, 마법 실력이야 말할 것도 없고 말이야. 그리고 난 제안만 했지 강제한 적 없다? 형 손으로 이름을 적고, 직접 불의 잔에 넣었잖아.”
말문이 막힌 서현은 그저 혀를 찼다. 재미 삼아 이름이라도 넣어 보자는 꾐에 넘어가는 게 아니었다. 설마 위에 두 학년을 제치고 5학년에 불과한 자신이 뽑힐 줄 어찌 알았으랴. 만일을 대비해 점이라도 쳐볼 걸 그랬다고 뒤늦게 후회해봐야 떠나간 열차일 뿐이다.
“아마 한세건도 자기가 될 거라고 믿었겠지. 그런데 정작 불의 잔은 날 선택해서 화가 날 수도 있겠지만, 그렇게 죽일 듯이 노려보나? 그놈은 래번클로에 갈 게 아니라 슬리데린으로 왔어야 했어.”
“세건 형이 슬리데린에? 만약 모자가 슬리데린을 외쳤으면 입학도 안 했을걸. 항상 시대착오적…”
“시대착오적 순혈주의 환자 집단이라고 비아냥대는 녀석이니까.”
시선을 교차한 서현과 서린이 동시에 실소를 터트렸다. 세건이 그들보다 두 학년이나 높은 까닭에 비록 그가 분류 모자를 쓴 모습을 못 봤어도 눈에 선했다.
사실 한세건은 그 성격 때문에 래번클로 내에서도 아웃사이더였다. 마법 실력이 좋아 무시당하지 않을 뿐, 그는 누구와의 교류도 거부하는 사람이다. 그 때문에 세건이 두 살이나 어린 후배, 그것도 슬리데린과 가까이 지내기 시작하자 놀랍게 여기는 이들이 수두룩했다. 덕택에 서현과 서린은 선배들에게 한세건에 관한 여러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입학 당시 분류 모자를 썼을 때의 일화도 그중 하나였다.
머리 위에서 한참 궁리하던 모자가 어딜 원하느냐 질문했을 때, 열한 살 한세건이 한 대답은 이랬다.
<고작 그딴 질문을 떠올리는데 무슨 오 분이나 걸려? 그냥 슬리데린 말고 아무 데나 보내, 멍청한 모자!>
잠시 연회장이 침묵에 잠겼다고 하니 그 분위기가 어떨지 상상이 되었다. 어쨌거나 그런 한세건이니 만일 슬리데린으로 배정되었으면 생난리를 치며 모자를 패대기치고 짓밟았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아무튼, 잠도 못 들고 고민할 정도면 형이 먼저 찾아가 봐. 사흘 후에 두 번째 시합인 것도 잊지 말고. 이왕 시작한 거 우승컵을 가지면 좋잖아.”
“무슨 머그잔이라도 되는 것처럼 쉽게 말하는군.”
“머그잔보다 대단히 나을 건 뭐야? 머그잔은 쓸모라도 있지, 트리위저드 컵은 팔지도 못하는 예쁜 장식품이잖아.”
자신의 동생은 종종 뱀의 혀처럼 차가운 독설을 무덤덤하게 했다. 남들은 설령 서린이 순혈이라고 할지언정 슬리데린에 배정된 것은 모자의 중대한 실수라고 떠들었다. 다 녀석을 모르고 하는 소리였다. 차라리 대회 챔피언에 서린이 뽑혔으면 좋았을 텐데. 서현은 퉁명스럽게 대꾸했다.
“그 팔지도 못하는 장식품을 뭐하러 가져와?”
“에이, 아예 안 나갔으면 몰라도 서현이 꼴사납게 지는 모습을 보고 싶지 않은 내 마음을 모르는 거야?”
꼴사납게, 라는 부분이 신경에 거슬려 눈살을 찌푸렸다. 수가 얕은 도발이었다. 그러나 서린은 친형제인 만큼 자신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서현은 마법사 세계의 명성 따위엔 흥미가 없으나 일단 시작된 싸움에서 지는 것을 싫어했다.
“됐어. 가서 잠이나 자라.”
서현이 손을 휙 내저었다. 당장은 이기고 지는 문제보다 한세건과 자신 사이에 꼬인 매듭을 어찌 풀어야 할지가 더 중요했다. 서린은 알 만하다는 눈빛을 하고 의미심장하게 웃었다.
“그럼 먼저 들어갈게. 형도 고민은 그만하고 자.”
*
신비한 동물 돌보기 수업이 끝나기도 전, 서현은 세건을 만나러 가기 위해 서둘러 성으로 향하는 중이었다. 언덕을 휩쓸며 내려오는 북풍 때문에 머리와 머플러와 망토가 사방으로 휘날린다. 그러거나 말거나 내버려두었다. 괜히 지체했다가 한세건을 놓치면 몰래 빠져나온 것도 허사가 되어버린다. 그런 급박한 와중에 회랑으로 둘러싸인 성 안마당을 재게 가로지르는 서현을 부르는 목소리가 있었다.
“이사카, 이사카 베르게네프!”
마법약 과목을 가르치는 교수이자 슬리데린 기숙사 사감인 호레이스였다. 이 교수는 베르게네프 형제에게 지대한 관심을 두고 있었다. 아마도 모친인 위대한 마녀 릴리스로부터 고스란히 물려받은 재능 때문이리라.
실제로 형제는 유년 시절부터 또래보다 뛰어났다. 그래서 순혈주의자들은 시시때때로 둘을 예시로 들먹이며 혈통의 중요성을 강조하고는 했다. 정작 써 먹히는 서현과 서린은 피 따위 아무래도 좋았지만 말이다.
어쨌거나 호레이스 교수는 속물에 학생을 차별한다고 말이 많으나 실력은 확실했기에 딱히 그에게 유감은 없다. 지금까지는 그랬는데, 어쩌면 바로 오늘부터 유감스러운 감정이 생길지도 모르겠다.
“안녕하세요, 교수님. 무슨 일이신지…….”
“사흘 뒤 시합이잖나. 준비는 잘 되고 있는지, 근래에 별일은 없는지 오랜만에 얘기나 하려는데…어딜 가는 중인가?”
여기서 붙들려 교수실에 끌려갔다가는 한 시간 내로 빠져나오기란 불가능하다. 서린은 단호하게 대답했다.
“네, 급한 일이 있어서요. 시합은 걱정 안 하셔도 됩니다.”
“물론이지, 물론이야. 자네야 워낙에 똑 부러지니 별로 걱정은 안 해. 우승할 거라고 믿고 있네. 그 릴리스의 아들 아닌가. 나는 단지, 아, 그렇지. 내 정신 좀 보게. 그래, 바쁘면 이만 가보게. 나중에 시간 되거든 동생이랑 교수실에 한 번 들르면 좋겠군. 시합이 끝난 후라도 말일세.”
“그러겠습니다, 교수님. 그럼 이만.”
뒤도 안 돌아보고 달아나다시피 하는 등 뒤로 호레이스가 재차 당부했다. 꼭 들르게, 꼭! 그 소리를 귓전으로 흘리며 복도를 걷다가 훌쩍 앞서가는 마음을 따라잡기 위해 종내에는 뛰기 시작했다. 이럴 때는 터무니없이 넓은 호그와트가 짜증이 난다.
쉼 없이 달린 덕에 서현은 곧 연금술 수업 교실 근처에 이르렀다.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모퉁이를 돌자마자 서현은 한세건과 또 다른 이를 발견하고 멈칫했다. 뜻밖에도 그는 서린과 마주 선 채였다. 그들이 자신을 눈치 채지 못한 걸 보고 재빨리 몸을 숨겨 대화에 귀를 기울였다.
“무슨 개소리야? 트리위저드 따위엔 흥미 없어.”
“불의 잔에 이름도 넣었잖아.”
세건은 푸른색과 흰색이 번갈아 줄무늬를 만든 래번클로 넥타이를 신경질적인 손짓으로 잡아당겨 느슨하게 했다. 창으로 들어온 빛살이 그의 부들부들한 녹색 머리칼 위로 미끄러져 내린다.
“교수들이 하도 권유해서 그랬어. 안 그래도 NEWTs 준비하느라 바쁜데 안 뽑혀서 잘 됐지.”
괴팍하고 콧대 높아 오해하기 쉬우나 한세건이 막돼먹은 양아치는 절대 아니다. 웃기게도 성실한 노력파인 그는 교수들에게 지대한 관심과 호감을 얻고 있었다. 호레이스 교수는 대놓고 세건을 총애하는 대표적인 인물이다. 그 성격에 호그와트 최고의 수재로 이름 높은 학생을 좋아하지 않고서는 못 배길 터였다. 슬리데린 학생인 베르게네프 형제가 전혀 접점 없을 래번클로 소속인 한세건을 알게 된 계기도 호레이스 교수의 저녁 만찬에 초대되어서였다. 지금 생각하니 그거 하나만은 교수에게 감사할 일이다.
“그럼 서현은 왜 째려봤던 거야?”
인상 찌푸린 세건이 책등으로 제 어깨를 툭툭 쳤다.
“그놈이 물어보라고 시켰어?”
“그건 아니야. 나도 궁금해서 그러지. 형이 진짜 째려봤는지 아닌지는 못 봐서 모르지만, 요즘 서현을 무시하고 있는 건 맞잖아?”
지난밤엔 오해일 거라더니 역시 저 녀석도 그렇게 느꼈군. 서현은 혹시 서린에겐 이유를 알려주지 않을까 했다. 하지만 이어지는 세건의 대답에 그 기대는 와르르 무너졌다. 그는 도리어 코웃음을 치며 반문했다.
“내가 언제 무시했는데?”
“요즘 한 번도 안 찾아오고…”
“하, 둘이서 날 쌍으로 웃겨 주는군. 내가 왜 찾아가야 하지? 네놈들은 발이 없냐? 나야말로 엉덩이 무거운 너희 개새끼들에게 날 무시하는 거냐고 묻고 싶군. 트리위저드 때문에 바쁜지 어떤지 모르겠는데 나도 바쁜 몸이니 용건 있으면 알아서 찾아와.”
야멸차게 쏴붙이는 소리에 서린은 그만 말문이 막혔는지 대꾸도 못 했다. 숨어서 듣고 있던 서현이 그 자리에 있었대도 마찬가지였으리라. 기실, 그가 얼굴도 안 비친다고 불평하면서도 오기를 부려 세건을 찾아가지 않기로는 이쪽도 똑같았다. 서로 줄다리기하며 한 치도 물러서지 않으니 교착 상태가 지속되는 게 당연하다.
팔짱 낀 서현은 고개를 젖혀 벽에 머리를 기댔다. 따지자면 기싸움인데, 그날 한세건이 노려본 까닭이 궁금해서 안달 난 쪽은 자신이라 결국 이쪽이 갈 도리 외엔 없었다. 이미 여기까지 오기도 했으니 최종적으로 한세건의 고집이 이긴 셈이다.
“할 말 끝났으면 간다.”
서린이 어어, 하며 돌아서는 세건을 바라보기만 했다. 잠시 뒤에야 몸을 숨겼던 기둥에서 나온 서현은 머리를 긁적이는 동생의 어깨를 툭 쳤다.
“어, 형? 언제 왔어?”
“아까.”
눈치 빠른 서린이 씩 웃으며 의미심장한 눈빛을 했다.
“엿듣기는 나쁜 버릇이야.”
“혹시 내 애인이 동생이랑 바람이라도 났나 해서.”
“형도 참. 이런 데서 버젓이 바람을 피우겠어? 밀회는 훨씬 비밀스러운 곳에서 하지.”
짐짓 교활하게 웃어 보이는 서린의 까맣고 붉은 눈동자가 반짝인다. 그의 선량하고 온순한 미소만 보아 온 이들은 서린이 이렇게 악당 같은 표정도 지을 줄 안다고는 상상 못 하리라. 오로지 혈육인 서현만 알고 그나마 가장 가깝게 지내는 한세건도 몰랐다. 서린의 이중성은 흡사 두꺼운 커튼 틈새로 이따금 눈동자만 보이듯 섬뜩한 느낌을 준다. 그래도 서현은 동생의 마냥 순진하지만은 않은 면모가 싫지 않았다. 그저 가끔씩 녀석의 실체를 누가 알아야 할 텐데, 하는 심술궂은 생각뿐.
“그래, 그 비밀스러운 밀회에서 둘이 내 욕도 하고?”
잘 아네, 하면서 웃음을 터트린 서린이 등을 떠밀었다.
“세건 형한테 갈 거잖아. 얼른 가, 기숙사로 들어가 버리기 전에.”
세건의 모습은 벌써 시야에서 사라져 있었다. 이야기는 나중에 하기로 하고 서현은 뒤를 쫓았다. 그는 걸핏하면 급한 일이 있는 사람처럼 성큼성큼 빠르게 걸었다. 누가 쫓아오느냐고 한마디 하면 의식적으로 속도를 줄여도 몸에 밴 버릇은 어쩔 수 없어 매번 앞서나갔다. 항상 보폭을 맞추는 쪽은 자신이다. 달음박질하던 서현은 손에 잡힐 듯 가까워진 등을 향해 외쳤다.
“한세건!”
세건이 우뚝 걸음을 멈추었다. 돌아보는 얼굴에 불쾌감이 여실하게 배어 있었다. 서현이 망토를 크게 펄럭이며 앞에 서자마자 세건이 심드렁하게 위아래로 훑어본다.
“뭐야?”
“오랜만이네.”
“인사나 하려고 불렀냐?”
평상시 한세건의 반응 그대로인지라 서현은 조금 안심했다.
“그럴 리가. 얘기나 좀 하자고.”
“지금 바빠.”
“뭐 하는데? 기숙사 가는 길 아냐?”
그 질문이 뭐가 그리도 불편한지 세건의 성난 눈초리가 박힌다. 예민하기 짝이 없는 들짐승 같았다. 이럴 때마다 그가 있어야 할 장소는 금지된 숲이어야 맞는 것이 아닌가 싶었다.
“바쁘다면 바쁜 거지, 내 할 일을 시시콜콜 보고해야 해?”
한마디를 해도 곱게 하지 못하는 어투는 한세건의 가장 큰 재능이었다. 시비를 거는 의도로만 들리는 까닭에 막 아는 사이가 되었을 무렵에 얼마나 싸웠던가. 물론 세건이 늘 이런 식으로 말하지는 않는다. 이건 현재 지대한 불만을 품고 있거나 기분이 저기압이라는 증거다. 보나 마나 원인은 나겠지. 서현은 어깨를 으쓱했다.
“알았어. 그럼 언제 안 바쁜데.”
세건이 입을 꾹 다물었다. 눈을 비스듬하게 내리깐 게 고민하는 모양새다. 묵묵히 기다린지 얼마 지나지 않아 세건이 다시 말문을 열었다. 조금 전만 해도 앙칼진 말을 내뱉던 입술이 제법 차분해졌다.
“밤에, 자주 보던 방에서.”
시간도 장소도 뭉뚱그린 답이었으나 그 이상 설명은 불필요했다. 서현은 돌아서려는 세건의 팔목을 잡아챘다.
“기다릴 거니까 꼭 와.”
“흥, 내가 말도 없이 약속을 어길 사람으로 보여?”
쌀쌀맞게 손을 뿌리친 그는 뒤도 안 돌아보고 가버렸다. 망토가 펄럭이며 안쪽의 파란색이 언뜻 보였다가 사라지기를 거듭했다. 환한 마당을 가로지르는 세건의 뒤꽁무니에서 살랑거리는 푸른빛이 흡사 베타의 꼬리지느러미 같았다. 서현은 실소를 흘렸다. 물고기라니, 그런 조그마하고 여린 생물은 한세건과 전혀 안 어울렸다.
*
소문에 의하면 호그와트 내에는 숨겨진 비밀 통로와 방이 여럿 있다고 한다. 어쩌다가 발견할 수도 있지만 그러한 행운은 드물게 찾아오는 법이다. 그런 관점에서 보면 작년 이맘때쯤, 베르게네프 형제가 감춰진 방 하나를 알게 된 것은 엄청난 운이 따랐기 때문이라고 설명할 수밖에 없었다.
대신 방 입구가 드러나는 조건을 알기 위해 몇 날 며칠 머리를 맞대고 궁리해야 했다. 처음 방의 존재를 알게 된 사람은 서현과 서린이지만 세건이 입구를 여는 수수께끼를 푸는 데 지대한 공헌을 한 까닭에 지금은 셋이 공유하는 아지트가 되었다. 셋은 그곳을 ‘달의 방’ 이라고 불렀다.
입구는 호그와트 지하에서도 아주 외진 장소에 있었다. 지하는 유독 미로처럼 복잡하게 꼬여 자칫 길을 잃기 십상이므로 학생 대부분은 매번 지나는 통로만 다녔다. 달의 방을 찾아오는 셋을 제외하면 유령들조차 오지 않았다.
서현은 시간을 확인했다. 방이 열리는 조건 첫 번째, 자정이 넘은 시간일 것. 다음으로 벽면에 손을 뻗어 눈에 안 보일 만큼 교묘히 열쇠 모양이 양각된 부분을 익숙하게 찾아냈다. 조건 두 번째, 반드시 침묵한 상태로 열쇠에 충분한 체온을 전달할 것. 마지막 조건은 달이 잘 보이는 맑은 날이어야 했다. 이미 날씨는 확인해두었다.
막다른 벽에 서서히 아치형 입구가 모습을 드러냈다. 문을 열고 완만한 오르막 통로를 나선형으로 따라 올라가면 그 끝에 달의 방이 있었다.
돔형 천장을 지닌 둥그런 방은 통로와 이어진 반원형 바닥을 제외하면 모두 맑은 물로 찰랑찰랑하게 채워졌다. 수면과 바닥 높이는 불과 한 뼘 차이다. 서현은 품에 안고 온 황금알을 내려두고서 바닥에 아로새겨진 글귀 앞에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았다. 그리고 지팡이를 꺼내 바닥에 글자를 따라 썼다.
<Per amica silentia lunae>
세건이 알아본 바에 의하면 어느 유명한 머글 시인의 산문집 제목이라는데, 그 점으로 미루어 보면 슬리데린 출신 마법사가 만든 장소는 아니리라. 시인의 이름도 들었으나 잘 기억나지 않는다. 애초에 마법사 집안에서 나고 자라 마법사하고만 교류해온 형제는 머글 시인에 관해선 아무것도 몰랐다.
글씨에서 푸른빛이 반짝였다. 이윽고 천장에 마법으로 만든 만월이 떠오르며 하얀 카펫, 검푸른 벨벳 소파, 테두리가 정교하게 장식된 마호가니 테이블, 불이 타오르는 은제 화로가 차례로 나타났다.
서현은 황금알을 소파에 놓고 물가로 다가가 손끝을 담가 보았다. 어찌나 차가운지 팔뚝에 소름이 돋는다. 1미터나 될까 말까 한 깊이라 여름에는 물장난도 칠 수 있지만 겨울인 지금, 달의 방은 냉기로 가득했다. 서현이 손을 털고 일어나려던 찰나.
“이건 뭐야?”
그새 세건이 와서 소파에 놓인 알을 툭툭 건드렸다. 깔끔한 사복에 회색 코트를 걸친 차림새가 그럴싸했다. 반면 서현은 잘 때 입은 옷에 슬리데린 망토나 두르고 왔다. 툭하면 심미안이라는 것이 없냐며 핀잔을 듣는 터라 얼른 망토를 여며 옷을 가렸다.
“뭐긴. 첫 번째 시합에서 가져온 그 알이지.”
“누군 눈이 없어? 이걸 왜 가져왔냐고.”
“두 번째 과제 단서잖아. 근데 아직 못 풀었거든.”
서현은 소파에 풀썩 앉으며 설명했다. 세건이 영 못마땅하게 내려다본다.
“하, 내일모레가 시합인데 태평하군?”
“그래서 래번클로의 우등생에게 도움을 청하고자 들고 왔잖아.”
그러자 세건은 화가 난 티를 풀풀 내며 알을 집어 들었다. 여차하면 집어던질 기세다.
“보자던 용건이 이거냐? 날 불러낸 게 이거나 풀어달라고? 이 개새끼야.”
“누가 그렇대. 그건 덤이고, 내가 무슨 얘기를 할진 짐작하고 있잖아?”
세건은 미간을 좁힐 뿐, 부정하지 않았다.
“자, 들을 준비 됐으니까 말해봐. 내가 불의 잔에 이름을 넣어서 화났어?”
“아니.”
“그때 날 노려본 건 맞지?”
“그래.”
스무고개 문답도 아니건만, 세건은 제가 설명해줄 의사는 요만큼도 없이 단답식으로 대꾸했다. 의사소통하기가 어렵기로는 거의 폴리 주스 만드는 급이다. 아니, 적어도 폴리 주스는 만드는 방법이라도 있는데 대화는 설명서라는 놈이 없으니 더 심하지.
“내가 트리위저드 대회에 나가는 게 마음에 안 들어?”
세건은 긍정인지 부정인지 불확실한 침묵을 일관하며 황금알을 문질렀다. 지금 그의 손이 더듬는 것은 알이 아니라 어떤 생각에 가까워 보였다. 이게 고민할 여지가 있는 질문인가? 서현은 의문을 삼키고 조용히 기다렸다. 곧 세건이 못마땅한 티를 내며 툭 내뱉었다.
“별로.”
영 미덥지 못한 대답이었다. 서현은 비딱하게 턱을 괴었다.
“당신 얼굴은 별로인 게 아닌데.”
정색한 세건이 내 표정이 뭐, 하고 말하는 눈으로 깔아본다. 속아주려고 해도 속아주기 어려울 만큼 거짓말이라는 표가 났다.
“우리 웬만하면 솔직해지자. 마음에 안 드는 거 맞잖아.”
“…그래. 마음에 안 들어. 분명 대회에 관심 없다고 하지 않았나?”
각 학교의 챔피언을 뽑기 이틀 전이었다. 서린과 불의 잔을 구경하던 중, 서현은 우연히 세건을 만났다. 그는 막 이름을 넣으러 온 참이었다. 명예욕이라고는 눈 씻고 찾아보려도 해도 없는 호그와트 제일의 아웃사이더가 트리위저드에 참가하다니! 웬 심경의 변화인가 묻자 졸업 기념으로 우승이나 하려고 한단다. 세건은 이미 제 것이라고 정해졌다는 태도였다. 흉흉한 눈초리로 서현과 서린을 번갈아 쳐다보며 물었다.
설마 네놈들도 나가려고?
서현은 영예와 명성 같은 추상적인 개념에 흥미가 없었다. 직접 손으로 다루는 힘이 좋았고, 그래서 마법을 좋아했다. 경쟁을 즐기는 타입과 거리가 먼 서린도 고개를 저었다. 그러자 세건은 묘하게 안심한 기색을 보이고 돌아갔다. 둘은 세건이 그답지 않게 욕심을 낸다고 의아해했다. 형제가 나란히 이름을 넣은 때는 바로 그 다음날이었다.
“지금도 관심은 없어. 확실하게 말해두는데, 당신을 방해하려는 속셈은 절대 아니었거든?”
“뭘 방해해?”
“우승컵을 갖고 싶었는데 내가 뽑히는 바람에 화난 거 아니야?”
“상상력이 풍부하군.”
헛웃음을 터트린 세건이 비아냥거리며 추론을 부정했다. 서현은 양손바닥으로 얼굴을 덮고 한숨을 쉬었다. 답답해서 돌아버릴 지경이다.
“그럼 대체 문제가 뭐야?”
“네가 날 속였잖아. 내가 물어봤을 땐 아니래 놓고 나중에 이름을 넣어? 나랑 장난하는 거냐?”
“뭐라고?”
겨우 그것 때문이라니. 서현은 얼이 빠졌다. 그야 한세건 입장에서 보면 자신이 한 입으로 두말한 꼴이라는 점은 인정한다. 트리위저드 챔피언으로 결정된 후, 그와 대면하고 그럴 의도가 아니었음을 해명할 기회도 없었으니 그럴 만도 했다. 그래, 거짓말 때문이라 이거지. 까닭을 알게 되자 맥이 탁 풀렸다. 허탈한 한편 안심이 됐다.
“오해하지 마. 그땐 정말 이름 넣을 생각 없었어. 재미 삼아 해본 거야. 이렇게 된 바람에 나도 골치 아프다고.”
“재미 삼아?”
세건의 얼굴이 미미하게 일그러졌다.
“그래서 네놈은 이름을 넣으면서도 뽑힐 가능성이 일 퍼센트도 없다고 믿었냐? 뭐 이런 멍청하고 모자란 새끼가 다 있어?”
살면서 이런 폭언을 듣게 될 줄이야. 이제까지 서현의 삶에서 ‘멍청함’, ‘모자람’, ‘부족함’ 따위의 단어는 존재할 수 없었다. 그러나 한 마디도 반박하지 못했다. 호그와트 챔피언은 한세건이 될 거라 철석같이 믿고 이름을 넣다니 정말 바보 같은 짓이긴 했다. 세상에 ‘반드시’ 라고 정해진 결과가 어디 있다고…….
“나도 후회하고 있어. 어쨌든 일부러 당신을 속인 거 아니야.”
세건은 불만이 채 가시지 않은 기색이면서도 일단 받아들였다.
“하기 싫으면 사퇴하지?”
“그게 말이 돼?”
“왜 안 돼? 욕이야 넘치도록 들어먹겠지. 근데 네가 언제 그딴 걸 신경 썼어?”
무심하리만치 고요한 눈동자. 그는 진심으로 하는 소리였다. 서현은 눈살을 찌푸리고 잠깐 저울질해 보았으나 아무래도 사퇴는 너무 극단적인 선택이었다. 세건 말마따나 평판은 문제가 아니다. 그러나 거기에 따라올 부차적인 문제를 고려하면 단순히 따져도 세 번째 과제까지 수행하는 편이 이득이다. 만약 우승이라도 하게 되면 그거야말로 좋은 일이고.
“사퇴할 정도로 싫진 않아. 그러니까 그 단서 좀 같이 풀어 보지?”
세건은 짜증스럽게 알을 던졌다.
“귀찮아. 가서 서린이랑 풀어.”
서현이 알을 받자마자 도로 세건에게 던졌다.
“서린이랑 안 해봤겠어? 풀리지 않으니까 가져왔지.”
재차 던지려던 세건이 돌연 멈칫했다. 마음을 바꿨는지, 그는 황금알을 눈높이까지 들어 올리고 이리저리 살피기 시작했다.
그것은 알의 형태를 하고 있을 뿐, 진짜 알은 아니다. 표면에 세로금이 세 가닥으로 균등하게 그어졌고, 독수리의 발톱 같은 꼭지가 위에 달렸다. 세건이 꼭지를 쥐고 쳐다보았다. 서현은 옆으로 돌리는 시늉을 해 보였다.
세건의 손 위에서 황금색 껍데기가 꽃 피듯이 열렸다. 투명한 알이 찬란한 금빛을 뿜었다. 그러나 아름다움에 심취할 여유 따위는 없었다. 외견의 화려함과 달리 고막을 찢을 듯 어마어마한 굉음이 터져 나왔기 때문이다. 그건 숫제 비명에 가까웠다. 미리 대비하고 있던 서현은 잽싸게 귀를 막았고 오만상을 찌푸린 세건이 서둘러 알을 봉인했다.
“이런 씨발. 이거 뭐야?”
“나도 그걸 알고 싶어.”
유심히 황금알을 뜯어본 세건은 이윽고 껍데기를 열었다가 닫기를 반복하며 탐구하기에 여념이 없었다. 그는 지팡이로 불을 뿜거나 물을 뿌리거나 허공으로 띄우는 등등 갖은 마법을 다 부렸다. 심지어 성질을 내며 파괴 마법까지 쓰려고 하는 바람에 서현이 깜짝 놀라 제지했다. 한세건은 단서고 뭐고 수수께끼를 풀지 못해 오기를 부리는 중이었다. 그 모습을 보면 영락없이 래번클로다.
“젠장, 그냥 포기해.”
“안 한다니까. 왜 그렇게 날 사퇴시키고 싶어 해?”
우승컵 때문에 화낸 게 아니라고 했지만 실은 앙금이 남았나 의심스러워 흘겨보노라니 세건이 벌컥 성을 냈다.
“이따위 것도 못 푸는 주제에 트리위저드는 무슨 트리위저드야?”
“이딴 거 못 풀기는 당신도 마찬가지야.”
“난 오늘 처음 봤지만 네놈은 그동안 뭘 했는데? 놀았냐?”
단서 찾기를 등한시할 수밖에 없도록 한 원흉에게서 무능한 놈 취급을 받으니 속이 부글부글 끓었다. 서현은 벌떡 일어나 세건의 코앞에 얼굴을 들이밀었다. 세건보다 두 살이나 어렸음에도 키는 이미 그를 따라잡아서 육안으로는 거의 차이가 없었다. 서현은 황금알을 확 빼앗으며 이죽거렸다.
“애꿎은 나한테 화풀이하지 마. 뭐, 결국 당신 머리도 그 정도인 거지.”
일부러 자존심을 긁었더니 과연 세건의 낯빛이 금세 붉으락푸르락해졌다.
“이 새끼가…내가 너랑 똑같은 줄 알아? 내놔!”
번개처럼 알을 낚아챈 세건이 곧바로 꼭지를 틀어 열었다. 단단히 화가 났는지 끔찍한 소리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빛을 뿜는 알을 뚫어지게 들여다보았다. 서현은 귀를 막고 있다가 그만 닫으라고 외쳤으나 알에서 나오는 괴성에 묻혀 그에게 닿지도 못했다. 하는 수 없이 알을 빼앗아 강제로 닫으려 했지만 세건은 집요했다.
서로 알을 붙들고서 실랑이하기를 잠시, 세건이 거칠게 밀쳐내더니 별안간 황금알을 물에다가 던져버렸다. 서현은 물속에서 빛나는 알을 바라보다가 세건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뭐하는 거야?”
“짜증 나서 던졌다.”
이 당당하기 그지없는 태도라니. 고개를 내젓고 지팡이를 들어 주문을 외자 알이 물 밖으로 튀어나와 손으로 빨려 들어왔다. 변함없는 비명에 진저리친 서현은 얼른 알을 봉했다.
“잠깐, 그거 다시 열어서 던져 봐.”
어리둥절해서 쳐다보니 세건이 물속을 가리키며 채근했다. 서현은 영문을 몰랐지만 그의 표정이 진지해서 이번에는 군말 없이 따랐다.
세건은 바닥 가장자리로 가서 무릎을 꿇고 수면에 얼굴을 가까이 가져다 댔다. 급기야 까닭을 물을 겨를도 없이 직접 물속으로 들어갔다. 세상에, 저 차가운 물에 잠수하다니. 서현은 소스라쳐서 뛰어갔다. 그사이에 수면 위로 상체를 드러낸 세건이 창백한 얼굴을 하곤 떨리는 입술을 달싹였다.
“너도 들어와.”
“뭐? 갑자기 무슨, 그보다 당신 괜찮아?”
“추워서 뒈질 거 같으니까 빨리 들어와서 이거나 들어!”
성화에 못 이겨 망토를 벗어두고 얼음장처럼 시린 물에 들어간 서현은 숨을 들이켰다. 뼛속까지 아리다는 게 어떤 감각인지 확실하게 실감했다. 세건은 꾸물거리지 말라며 쏘아붙이고 어깨를 눌러 억지로 잠수시켰다. 머리끝까지 입수한 서현은 물속에서 알을 보았고, 그 알 속에서 금빛 덩어리가 물고기처럼 유영하는 것을 보았고, 감미로운 노랫소리를 들었다. 밖에서 수차례 들었던 그 소름 끼치는 소리는 바로 인어의 목소리였다.
노래가 끝나자마자 알껍데기를 닫고 일어섰다. 차가운 공기에 노출된 몸이 오들오들 떨렸다. 피와 근육이 얼어버리는 듯했다. 피부가 난도질당한 것처럼 아픈데 다른 감각은 도리어 둔해졌다. 재빨리 물에서 나온 서현은 알을 소파에 내던지고 이미 한세건이 서 있는 화로 곁으로 달려갔다. 숯 없이도 타오르는 불을 쬐니 그나마 살만 했다.
쫄딱 젖어서 움츠린 모습이 신경 쓰여 벗어둔 망토를 머리 위로 덮어주었더니 확 치워버린다. 도무지 챙겨주는 보람이라곤 없게 만든다.
“필요 없어.”
“그런 말은 떨지 말고 해야 설득력이 있을 텐데?”
“허세 부리냐? 시퍼렇게 죽은 네놈 입술이나 챙겨.”
얄밉게 말하는 그의 입술도 보기 딱하기는 피차일반이었다. 쌀쌀한 성질머리에 가려져서 그렇지, 한세건 나름대로 위해주는 방식이었다. 자기가 선배고 연상이라서 하는 배려는 아니다. 그는 선배랍시고 으스대지도 않고 후배라고 돌봐주지도 않았다. 좋게 말하면 상하관계가 무던했다. 그러니 지금 세건의 배려는 애정 관계에 비롯한 것이 분명한…….
서현은 거기까지 흘러간 생각을 붙들고 웃음을 흘렸다. 무슨 암호라도 되는 양 해석하는 자신이 우스웠기 때문이다. 애정 관계, 그래, 그런 게 있지.
대뜸 웃는 모양새를 떨떠름하게 곁눈질하는 세건을 잡아당겨 입을 맞추었다. 추워서인지 숨이 유독 뜨겁다. 놀라서 뻣뻣해진 몸을 끌어안고 움찔거리는 입술 사이로 혀를 넣었다. 차고 부드러운 입술을 부비며 장난처럼 혀끝을 건드리는 키스였다. 체온과 흥분으로 인한 열기가 몸을 따뜻하게 했다. 핏기 없던 입술에도 발갛게 혈색이 돌아왔다.
“가, 갑자기 무슨 짓거리야?”
떨어지자마자 세건이 말을 더듬으며 물었다.
“시퍼렇게 죽은 입술을 챙기는 방법. 그리고 단서를 풀어준 답례?”
“답례를 왜 네놈한테 좋은 걸로 하는 거지?”
“나랑 키스하는 게 싫어?”
직설적인 질문에 대답할 말이 궁한지, 세건은 괜히 난폭하게 밀어낸다. 그는 화로의 불을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불길이 흔들릴 때마다 검은 눈동자도 짙은 주홍색 빛을 반사했다.
“검은 호수야. 익사해서 개죽음이나 당하지 마.”
서현은 픽 웃었다.
“내가?”
“재수 없는 놈.”
“당신만 하겠어.”
대꾸하는 대신 팔을 문지르며 어깨를 부르르 떤 세건이 턱짓으로 소파를 가리켰다.
“용건 끝났으면 저거나 갖고 꺼져. 그리고 서린이나 이리로 보내.”
“린이는 무슨 일로? 지금쯤 자고 있을 텐데?”
“무슨 일인지는 알 거 없고, 자면 깨워.”
서현은 의혹 어린 눈초리로 세건의 무덤덤한 얼굴을 뜯어보았다. 추워서 덜덜 떠는 주제에 당장 서린을 만나려는 까닭이 뭔지 의구심이 들었다. 둘만의 비밀이라 그건가? 말도 안 된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퍼뜩 서린이 낮에 밀회 운운했던 소리가 떠올라 속이 심란해졌다.
“양다리 걸치지 마.”
“씨발, 개소리할래?”
급한 용건 아니면 나중에 만나라고 했다가 토 달지 말라며 짜증스러운 반응만 돌아왔다. 세건의 뜻이 워낙 강경해 서현은 마지못해 그를 뒤로하고 통로를 따라 내려와 달의 방에서 나왔다.
시간이 시간인지라 호그와트 지하 감옥은 무거운 고요함에 짓눌려 있다. 젖은 옷에서 뚝뚝 물 떨어지는 소리가 적나라하게 울려 퍼졌다. 서현은 발소리를 죽이고 슬리데린 기숙사로 향했다. 이리저리 꼬인 복도를 지나 입구 앞에 도착해 암호를 대려는 때였다. 어디선가 쉿 하는 바람 소리가 났다. 서현은 흠칫하고 반사적으로 지팡이를 내밀며 돌아섰다.
뒤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숨죽인 채 귀를 기울여 보아도 사위는 쥐 죽은 듯 조용했다. 석연치 않은 느낌이 들어 서현은 눈살을 찌푸렸지만 이내 기분 탓이라 여기고 지팡이를 내렸다.
기숙사 암호를 말하고 문이 열릴 때까지도 주변을 계속 살폈지만 역시나 별일 없었다. 서현은 어깨를 으쓱이고 호수의 물결이 부드러운 무늬를 그리며 출렁이는 휴게실로 들어갔다. 슬리데린 기숙사 문이 아주 조용하게, 오래 뿌리내린 침묵처럼 닫혔다.
2. 백사(白蛇)
두 번째 시합이 치러지는 날, 서현의 아침 일과는 여느 때와 다를 바가 없었다. 오히려 수업이 있는 날보다 한가한 편이었다. 편안한 사복을 입고 망토를 걸친 후 지팡이를 챙기면 준비는 끝이었다. 느긋하게 연회장에 가서 아침도 먹었다. 긴장해서 빵이 목구멍에 걸리거나 체할 것 같은 기분이 들지도 않았다. 그저 몸을 움직이는 데 방해가 되지 않도록 평소보다 가벼운 식사를 했다.
낯익은 얼굴 몇몇이 지나가면서 응원했다. 솔직히 서현은 친구를 사귀는 재능이 전무하다시피 했다. 그나마 인사하고 지내는 학생도 대부분 서린과 친한 녀석들이라 자연히 얼굴을 익히게 되었다.
그렇다고 그들 모두 서린의 친구인가 하면 그도 아니었다. 서린은 기본적으로 사교성이 뛰어난데 아무하고나 친밀한 관계를 맺진 않았다. 그 은밀한 벽은 여간해서 알아차리기 어려웠다. 대신 그는 친구가 되지 않아도 호감을 사는 독특한 재주가 있다. 서현은 늘 그 점을 불가사의하게 여겼다.
같은 배에서 나왔는데도 닮은 듯 다른 쌍둥이 형제, 바로 그가 아침부터 머리털 한 가닥 보이질 않았다. 어젯밤 농담 반 진담 반으로 보러 올 필요 없다고 했지만 설마 진짜로 안 올 셈인가?
서현은 시간을 확인하고 천천히 시합 장소로 향했다. 검은 호수로 향하는 길은 개성 넘치는 세 마법 학교의 교복이 마치 소시지처럼 줄줄이 늘어져 있었다.
“서현!”
익숙한 목소리가 뒷덜미를 잡아챘다. 걸음을 멈추고 돌아보노라니 내리막길을 따라오던 한세건이 대뜸 눈살 찌푸리는 얼굴이 보였다. 엊그제 달의 방에서 본 이후로 첫 만남이었다. 문득, 그는 서린이 어디에 있는지 알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대놓고 자신만 쏙 빼놓은 채 둘이 나누었을 비밀 얘기가 내내 마음에 걸린 탓인지도 모른다.
“당신 혹시 서린…”
“서린은 어디 있지?”
둘은 동시에 질문한 다음, 동시에 입을 닫았다. 서현은 미간을 찡그렸다. 대단히 언짢은 상황이었다. 왜 한세건이 자신을 보자마자 그 녀석부터 찾는 거지? 응원이라도 한마디 하러 온 줄 알았더니만 이건 왠지 서린이 목적인 것 같은 모양새다. 슬금슬금 짜증이 밀고 올라오는 바람에 말투가 저절로 퉁명스러워졌다.
“나도 몰라. 아침부터 안 보였어.”
“아침부터?”
인상을 쓴 세건의 얼굴이 제법 심각해 보였다. 저 혼자 곰곰이 생각에 잠기는 꼴이 비위에 거슬린다. 스스로 유치하다는 자각은 있다. 그래도 정작 애인인 자신에게 무관심해 보이는 태도가 화를 돋웠다.
“걔는 왜 찾는데?”
“이런 날 네놈 혼자 있는 게 이상해서 물었는데, 뭐 잘못됐어?”
그럴싸한 변명이지만, 서현은 그 소리를 홀랑 믿을 멍청이가 아니었다. 세건의 말이 거짓임을 금세 알아차렸다. 가만히 쏘아보노라니 되레 세건이 성을 냈다.
“뭘 기분 나쁘게 쳐다봐?”
“계속 그런 식으로 나와 봐. 안 묻고 넘어가는 것도 한계가 있지.”
“어디서 개가 짖는군.”
세건이 코웃음을 쳤다. 원래 이런 놈인 걸 아는데도 속을 긁을 때마다 괴롭힐 만한 주문을 걸어버리고 싶었다. 이를테면 간지럼 태우기라든지.
“당신 진짜 이럴…”
“시합 준비는 제대로 했나 봐?”
말 돌리려는 속셈이 빤히 보였기에 무시하려다가 생각을 고쳐먹었다. 화해한 지 얼마나 안 지나서 싸우기도 싫고, 오늘 시합을 찝찝한 기분으로 치르기도 싫었다.
“준비할 게 뭐 있다고.”
세건은 그 대답이 못마땅한 기색이었다. 그가 뭘 마음에 안 들어 하는 경우는 비일비재해서 서현은 신경 쓰지 않았다. 하지만 한세건이 그답지 않게 잔소리를 한다면 상황이 조금 다르다.
“네놈 실력은 알지만 덤스트랭과 보바통도…”
“잠깐, 속단하지 말지? 다른 학교 대표들을 우습게보거나 대충 해도 이길 시합이라고 여기는 거 아니니까. 내가 그러지 않는다는 건 당신도 알고 있을 줄 알았는데.”
자신감과 자만심은 별개이고 서현은 그걸 잘 구분할 줄 아는 사람이었다. 세건은 어째 마뜩잖은 내색을 하면서도 묘하게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알아. 내가 하고 싶은 말은 그냥…….”
놀랍게도 그는 우물쭈물하다가 기어이 끝맺지 못하고 말문을 닫았다. 그 모습이 서현의 눈에 더할 나위 없이 이상하게 보였음은 당연하다. 호그와트 제일의 아웃사이더이자 자기중심적인 한세건이 남한테 못할 말이 있다고? 아주 대놓고 수상쩍은 냄새를 풍기고 있다. 서현은 눈을 가늘게 떴다. 그새 세건은 천연덕스럽게 무표정한 가면을 썼다.
“한세건. 뭘 숨기는지 모르겠는데 할 말 있으면 제대로 해.”
“몸조심해라.”
“뭐?”
돌연 경고인지 충고인지 모를 말을 던진 세건이 옆으로 지나갔다. 서현은 그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응시했다. 무슨 꿍꿍이가 있기에 되지도 않게 걱정씩이나 하는지 의아했다. 서린이 사라진 거나 세건의 태도가 이상해진 거나 모든 게 평소와 달랐다. 다들 짜고 자신을 놀리는 것만 같아 불쾌했다.
걸음이 빠른 한세건은 어느덧 손바닥만 하게 작아져 있었다. 어차피 같은 방향으로 가는데 제 할 얘기만 하고 혼자 가버리는 성질머리 하고는. 서현은 어깨를 으쓱이고 천천히 발을 움직였다. 세건을 추궁하는 것은 당면한 트리위저드 과제를 끝내고 해도 늦지 않으리라.
시합 장소까지 호수 기슭의 나루터에서 배를 타고 건너갔다. 4층 전망대 셋이 호수에 우뚝 섰고 참가자들은 가운데에 있는 전망대 1층에 모였다. 세 챔피언 중에 서현이 가장 늦게 도착했다. 혹시나 주위를 둘러보아도 서린은 없었다. 시합에 오고 안 오고는 문제가 아닌데 말도 없이 사라진 점은 영 석연치가 않다.
시합 시작을 앞두고 호수에 들어가기 전에 몸을 풀었다. 오늘따라 수면을 할퀴는 칼바람이 매서웠다. 서현은 어깨를 돌리면서 덤스트랭과 보바통 대표를 향해 한 번씩 눈길을 주었다.
불의 잔이 뽑은 보바통 챔피언은 ‘마리아’라는 고풍스러운 이름을 지닌 사랑스러운 소녀다. 길고 곱슬곱슬하게 굽이치는 금발이 아름다웠고 체구는 몹시 가녀렸다. 외견상으로는 고작해야 열 살로 보였으나 실제로 서현보다 한 살이 많다. 저 소녀는 요즘 호그와트와 덤스트랭 남학생의 무한한 관심을 한 몸에 받고 있었다. 마리아는 짧은 원피스 같은 흰 수영복을 입고 친구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어딘가 초조해 보이는 표정이다.
덤스트랭 챔피언은 모습을 드러냈다 하면 남녀 불문하고 시선을 모았다. 서현조차 그를 처음 보았을 때는 좀처럼 눈을 떼지 못했다. 청년과 소년의 경계에 선 이 열일곱 남학생은 손대면 촉감을 느낄 새도 없이 녹아내릴 듯 부드러운 금발을 목덜미를 덮을 정도로 길렀다. 외모는 섬세한 조각처럼 아름답고, 체구는 호리호리한 편이나 성별을 혼동할 만큼 연약한 느낌은 전혀 없다. 서현은 처음부터 그가 불편했다. 이 세상에 어울리지 않게 뒤틀린 무언가를 보는 이질감이 들었다.
고요하게 호수를 내려다보던 그, 루드비히 고든이 고개를 돌렸다. 태양을 빼다 박은 황금색 눈이 정확하게 자신을 향한 까닭에 서현은 움찔했다. 차분한 눈빛이다. 마치 관찰하고 있음을 알고 있던 것처럼 차분하다. 고든에게는 상대를 넓게 감싸 안는 동시에 강하게 누르는 묘한 기세가 있었다.
담담하게 눈을 마주치자 고든이 빛살처럼 눈부신 웃음을 입가에 띠더니 먼저 고개를 돌렸다.
“뒤늦게 경쟁심이라도 생겼니?”
어느새 접근했는지, 곱고 가느다란 손이 어깨를 살며시 짚었다. 의외의 인물이 등장한 까닭에 서현은 놀라서 몸을 돌렸다. 변신술 교수이자 래번클로의 사감인 김성희였다.
위대한 마녀로 평가받는 마법 실력을 모두 외모 유지에 쓴다는 우스갯소리가 돌 만큼 김성희 교수는 굉장히 젊어 보였다. 그녀가 호그와트 교수인 이상 학생을 자신을 찾아오는 게 이상할 일은 아니다. 다만 시합이 코앞인 지금, 여기 와야 할 교수는 슬리데린 사감인 호레이스였다. 서현의 의문을 알아차린 그녀가 빙긋이 웃었다.
“호레이스 교수님은 바쁜 일이 생기셔서 내가 대신 왔어. 어련히 알아서 준비했으리라 믿지만, 물속에서 어떻게 버틸 생각이니?”
“버블헤드 마법이요.”
“훌륭하구나. 그래서 세건이가 내버려두나?”
대뜸 한세건 이름이 튀어나와 서현은 의미를 묻는 눈빛을 보냈다. 성희는 의미심장하게 웃기만 했다. 때마침 시합이 시작할 시간이 되어 서현은 미처 물을 새도 없이 위치에 서야 했다.
교장 오스왈드의 음성이 소노루스(Sonorus) 마법으로 호수 전역에 울려 퍼졌다. 두 번째 과제는 지난밤 각 챔피언이 도난당한 보물을 검은 호수 아래에서 되찾아오는 것이다. 제한 시간은 한 시간, 그때까지만 마법 사용이 가능했다. 서현은 망토를 벗었다. 겨울 공기가 시리다 못해 따가워서 차라리 한시라도 빨리 물에 들어가는 편이 낫겠다 싶었다.
“그럼 신호가 울리면 시작입니다.”
이윽고 요란한 대포 소리가 터졌다. 서현은 호수에 들어가자마자 종아리 홀스터에서 지팡이를 꺼내 공기 방울을 만들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이끼 붙은 거대한 암석에서 자란 물풀이 하늘하늘 흔들리고 크고 작은 물고기가 재빠르게 헤엄쳐 지나간다. 말은 되찾아 오라지만 순순히 내어줄 리가 없었다. 서현은 주변을 경계하며 천천히 아래로 내려갔다. 긴장감보다 흥미로움이 더 컸다. 자신은 아끼는 물건이 많은 사람이 아니다. 그러니 간밤에 훔쳐간 보물의 정체가 어찌 궁금하지 않으랴.
잠깐, 간밤에 없어진 거라고?
한 가지 가능성이 뇌리를 스쳤다. 서현은 꾸준하게 어두운 밑바닥으로 향했고 오래 지나지 않아 빽빽하게 자란 수초의 숲이 눈앞에 펼쳐졌다. 이런 곳에서는 시야가 제한되어 뭐가 접근해도 모르리라. 서현은 망설임 없이 그 사이로 들어갔다. 위험해 보이는 만큼 맞는 길이기도 할 테지.
갑갑하게 눈앞을 가리는 장애물을 헤치며 나아가던 도중, 수초 너머에서 무언가가 쏜살같이 지나갔다. 언뜻 커다란 물고기 꼬리 따위가 보인 것도 같다. 인어였다.
서현은 팽팽하게 신경을 곤두세운 채 팔다리를 열심히 저어 속도를 올렸다. 그러다 섬뜩한 기운에 놀라 잽싸게 몸을 튼 순간, 눈 깜짝할 사이에 밑에서 인어가 솟구쳤다. 어찌나 빠른지 비늘이 스친 팔이 까져서 수중에 피가 번졌다. 상처를 돌볼 여유는 없었다. 다른 인어들이 여전히 틈새를 노리듯 주위를 맴도는 중이었다.
이미 물속에 들어온 지도 시간이 꽤 지났다. 인어도 인어고, 사방이 물풀이라 대관절 방향을 가늠하기 어려웠다. 신경질적으로 수초를 쳐내며 전진하던 서현의 눈에 멀찌감치 떨어진 앞으로 언뜻 울퉁불퉁한 바위가 보였다. 제대로 찾았든 말든 이 지겨운 수초 틈에서 벗어나기 위해 움직였다. 한층 위협적으로 접근하는 인어를 피하며 가까스로 나아가자 잠시 후, 시야가 확 트였다.
좁다란 바위 사이를 지나 거대한 기둥이 여럿 솟은 공터에 진입했다. 많은 인어가 이끼로 뒤덮인 초록색 기둥 주변을 헤엄쳤고 아치형 구조물 밑에 둥둥 뜬 세 사람이 눈에 들어왔다. 인어들은 서현이 그들에게 다가가도 가만히 지켜보기만 했다.
예상대로 그들 가운데에 눈 감은 서린이 있었다. 그의 긴 흑발이 물의 흐름을 따라 너울거렸다. 어떤 마법을 걸었는지 뻣뻣하게 굳어 있다. 자신의 보물이 서린이라……. 서현은 픽 웃었다. 하나뿐인 형제이자 가장 가까운 친구이니 맞기는 하다. 자신의 좁은 인간관계 안에서 누군가를 택하려면 서린 외에 달리 없었겠지.
지팡이로 서린의 발목에 묶인 끈을 끊어냈다. 아직 세 사람이 묶여 있는 것으로 보아 제일 일찍 도착했다는 뜻이고, 이대로 가면 두 번째 시합 역시 1위였다. 한세건에게 자랑할 생각을 하니 벌써 마음이 들떴다. 1위라는 기쁨보다 자랑했을 때 돌아올 반응이 더 기대되었다. 막 서린을 데리고 올라가려는 찰나, 갑자기 뒷덜미가 서늘해져서 휙 뒤를 돌아보았다.
멀리서도 눈에 띄는 금발과 하얀 수영복, 마리아가 오고 있었다. 그러나 뒤통수를 찌르는 기운의 근원은 마리아가 아니다. 서현은 수면으로 올라가다 말고 아래를 예의주시했다. 마리아는 자기를 쳐다보는 줄 알고 이쪽에 눈길을 주었다가 곧 제가 아님을 깨닫고 고개를 돌린다. 그리고 우거진 물풀을 응시했다. 그녀도 무언가를 느꼈을까?
인어들이 기묘한 소리를 내며 어지럽게 헤엄치기 시작했다.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예지력을 타고난 서현에게 예감은 단순한 느낌에 그치지 않는다. 망설이던 서현은 다시 위로 향했다. 시합의 승패를 떠나 무슨 일이 생기면 무방비인 서린이 위험하니 그를 올려보내는 것이 시급했다.
수면이 코앞에 다가왔을 무렵, 밑에서 괴이한 비명 따위가 연달아 들려 고개를 숙였다.
서현은 무심코 숨을 멈췄다. 뱀이었다. 엄청나게 커다란 백사 한 마리가 마리아를 칭칭 감고 몸통을 죄고 있었다. 대체 물속에 왜 저런 것이 있는지 의아해할 겨를도 없었다. 수면으로 서린을 밀어 올린 서현은 곧장 아래로 돌아가며 지팡이를 쥐었다. 버블헤드 마법 때문에 간단한 공격 마법밖에 못 쓸지라도 위협을 하기엔 충분했다.
지팡이에서 쏘아져나간 빛이 마리아의 머리를 삼키려고 벌린 주둥이를 스쳤다. 백사의 갸름한 타원형 눈이 서현을 보았다. 낡고 오래된 금색 홍채였다. 재차 지팡이로 뱀을 겨냥하자 놈은 영악하게도 마리아를 살짝 풀어주어 제 방패막이로 삼았다. 자칫 그녀에게 맞을까 봐 섣불리 공격하지 못했고 뱀도 그 사실을 알았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던 중, 연신 묘한 목소리를 주고받으며 빙글빙글 돌던 인어들이 일제히 뱀에게 달려들었다. 그것으로 뱀이 이번 과제를 위해 준비한 놈이 아니란 사실이 확실해졌다.
뱀의 날카로운 독니와 커다란 몸집도 물속에서 빠르게 자유자재로 움직이는 인어를 상대로 큰 위력을 발휘하기 어려웠다. 기어코 뱀은 마리아를 놓아주어야만 했다.
서현이 돌아가는 상황을 지켜보는데 누군가 어깨를 톡톡 두드렸다. 어느새 마법에서 풀린 서린이 와 있었다. 그가 제 입을 가리켰다. 서현은 버블헤드 마법을 걸어주었다.
이윽고 열세를 깨달은 뱀이 호수 밑으로 기어가 달아났다. 형제는 짧게 손짓을 주고받았다. 서린이 혼절해서 가라앉는 마리아를 데리러 내려가고 서현은 아직 끈에 묶인 두 사람을 향해 갔다.
여학생의 발목 끈을 자른 후, 막 옆에 있는 소년을 구하려 때였다. 빛이 번쩍하더니 아래에서 헤엄쳐 온 고든이 ‘도난당한 보물’의 팔을 잡아챘다. 서현은 그의 갑작스러운 등장보다 가슴팍이 붉게 물들어 있어서 놀랐다. 고든이 서현을 흘끗 보고 지팡이로 위를 가리켰다. 때마침 마리아를 품에 안은 서린이 올라왔고 셋은 거의 동시에 물 밖으로 얼굴을 내밀었다.
와아―!
챔피언들의 이름을 연호하는 소리와 환호성이 어지러이 뒤섞인다. 교수들은 이미 문제를 알아차린 듯 초조한 기색이었다. 서현이 데리고 나온 여자가 숨을 몰아쉬며 주위를 둘러보다가 서린의 품에서 기절해 있는 마리아를 발견하고 눈을 부릅떴다.
“마리아! 마리아!”
그녀는 마치 서린이 마리아를 그렇게 한 주범인 것처럼 거칠게 떼어냈다. 구해주었는데도 감사 인사는 고사하고 깨끗하게 무시당한 형제는 멀뚱멀뚱 서로를 쳐다보았다. 서린이 마리아를 흔드는 여자에게 말을 건넸다.
“그럴 게 아니라 빨리 교수님들께 데려가는 게 낫지 않을까요? 물도 차가운데.”
그제야 여자는 정신을 차렸지만 역시나 고맙다는 말은 한마디도 없었다.
전망대로 올라온 이들의 어깨에 커다란 수건이 몇 겹씩이나 덮이고 거기에 두꺼운 담요까지 얹혔다. 몰려든 교수들은 우선 마리아와 고든의 상태를 살폈다. 외견상으로는 큰 부상이 없어 보였다.
서현은 동생에게로 주의를 돌렸다. 서린은 긴 머리칼을 모아 물기를 짰다. 난데없는 사고에 휘말린 사람치고는 굉장히 평온해 보였다. 하긴, 이 녀석은 본래가 옆에서 집이 날아가도 시답잖은 농담이나 던지고 있을 위인이다. 그 두꺼운 신경이 때론 감탄스럽기까지 했다.
“으, 춥다. 형 덕분에 한겨울에 수영하는 경험도 해보네.”
“그래. 덤으로 물뱀에게 습격당하는 경험도 하고.”
“단순히 경험이라고 치부하기엔 너무 위험했지만.”
서린이 하마터면 목숨을 잃을 뻔 했던 마리아를 돌아보았다. 가느다란 팔다리와 젖은 금발이 맥없이 늘어진 광경은 퍽 애처로웠다. 치유 마법을 받은 고든의 안색이 한결 편안해진 반면, 마리아는 아직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었다. 서린에게서 마리아를 빼앗듯 데려갔던 여자가 곁에서 손을 꼭 붙잡고 있었다. 짙은 눈 화장이 형편없게 번진 탓에 핏기 없는 얼굴이 조금 무섭기까지 하다.
“메시아야. 마리아의 언니지.”
머릿속을 읽은 것처럼 서린이 냉큼 정보를 알려주었다. 서현은 그들에게서 눈길을 뗐다.
“그건 어떻게 알았어?”
“마리아와 메시아 얘기는 가만히 앉아만 있어도 들려오니까. 하긴, 형은 누구누구 씨가 그림자도 안 비치는 거에 정신이 팔렸었지?”
서린이 장난기 어린 웃음을 띠고 말을 끝내기가 무섭게 누구누구 씨가 모습을 드러냈다.
“서현!”
인파를 뚫고 나타난 그의 얼굴은 더없이 창백했다. 그는 단숨에 달려와 한쪽 어깨를 붙잡고 이리저리 돌려가며 살폈다. 꽉 깨문 입술마저 하얗게 질렸다. 세건이 이토록 조마조마해 하는 모습을 보기는 처음이다. 그 원인이 다름 아닌 자신인 까닭에 서현은 당혹스럽고 한편으로는 기뻤다. 틈만 나면 얄미운 소리를 내뱉으면서 이런 때에는 진심으로 걱정하는 걸 보니 미소가 절로 지어진다. 그게 거슬렸는지 세건이 왈칵 짜증을 냈다.
“웃음이 나와?”
“당신 얼굴 보니까 좋아서 그러지.”
공개적인 장소에서 말해선지 세건이 화들짝 놀란다. 그의 귓바퀴가 붉게 물들었다.
“무슨 개소리야! 뇌에 물 들어갔냐?”
“그 말 들으니까 코에 들어간 물이 갑자기 신경 쓰이네.”
얼굴을 일그러뜨린 세건이가 고개를 반대편으로 틀었다.
“서린 넌?”
“보다시피 멀쩡해. 당한 건 저쪽이지.”
한세건이 고든과 마리아를 잠시 눈여겨본 뒤에 한숨을 내쉬었다. 단순한 안도감의 표출로는 안 보여서 말을 건네려는 찰나, 공교롭게도 교장인 오스왈드와 눈이 마주쳤다. 오스왈드가 이쪽을 보며 성희에게 뭐라고 속닥거린 다음에 자리를 떴다. 이내 가까이 온 성희는 허리에 손을 얹고 셋의 면면을 차례로 보았다.
“고생들 했어. 곧 결과가 발표될 거야.”
“그런 일을 당했는데 결과가 중요한 건 아니잖아요.”
그렇게 반박한 사람은 서현뿐, 서린과 세건은 묵묵히 입을 다물고 있었다. 성희의 낯빛에 난처함, 곤란함, 골치 아픔 따위의 감정이 드러났다.
“어떻게 된 일인지 알아보는 게 먼저 같은데요.”
비록 이쪽이 입은 상처라고는 인어를 피하다가 긁힌 게 전부였고, 정작 목숨이 위태로웠던 쪽은 마리아였다. 그러나 마리아가 뱀과 더 가까웠을 뿐이지 자신이 당했을 수도 있고, 트리위저드 시합 중에 일어난 사고이므로 서현의 일이기도 했다.
“물론 알아봐야지. 하지만 시합을 중단할 순 없어.”
불만을 내비치자 그녀가 흘러내린 담요를 끌어올려 덮어주며 조그맣게 속삭였다.
“얘기는 나중에 차차 하게 될 거야. 지금은 여길 정리하는 게 우선이란다. 무슨 의미인지 알지?”
서현은 눈을 굴렸다. 전망대의 학생들이 아직 사태를 파악하지 못해 어리둥절해져 흘끗거렸다. 짧은 사이에 웅성거림은 눈덩이 불어나듯 커지는 중이었다. 서현은 이 자리를 먼저 수습해야 한다는 사실을 이해했다. 이윽고 교장의 목소리가 소란을 잠재우며 검은 호수에 파문을 일으켰다.
“보바통의 마리아는 도중에 정신을 잃어 탈락했으며 루드비히 고든과 이사카 베르게네프는 동시에 물 위로 올라왔으므로 두 사람을 공동 일등으로 인정합니다.”
가만히 듣고 있던 서린이 씩 웃었다.
“축하해.”
“축하는 무슨 축하.”
시합이 엉망진창이 된 마당에 순위가 무슨 상관이랴 싶고 그다지 흥도 나지 않았다. 서린도 침체된 분위기를 전환할 겸 일부러 꺼낸 말이리라.
서현은 연신 속닥거리는 교수들을 관찰했다. 뭔가 심상치 않았다. 갑작스럽게 사건이 터졌는데 교수들은 생각보다 침착했고 아울러 심각해 보였다.
“이상한데.”
“뭐가?”
“교수들, 꼭 예상했던 것처럼 보여. 우리에겐 무슨 일이 있었는지도 안 물어보고.”
잠자코 듣던 세건이 고개를 저었다.
“이 복잡한 데서 막 물에서 빠져나온 네놈들이랑 무슨 얘기를 나눠. 부상자도 있고.”
서현은 미간을 찡그렸다. 한세건의 말도 일리가 있다. 그럼에도 자꾸만 석연치 않은 낌새가 느껴졌다. 교수들과 잠깐 이야기를 나누던 성희가 도로 셋에게 와서 손짓했다.
“자, 이제 너희도 기숙사로 돌아가 쉬어야지. 때가 되면 어련히 알아서 부를 테니까. 알았지?”
그때가 언제일지 묻기도 전에 김성희 교수는 셋의 등 떠밀어 나룻배에 오르게 했다. 그런 후에 바로 교장에게로 향한 터라 서현은 하는 수 없이 다른 학생들과 함께 뭍으로 향해야 했다.
배에 오른 서린과 세건은 한마디 말도 없이 잠잠했다. 세건은 혼자 상념에 잠겼고 서린은 턱을 괴고 뱃전을 멀거니 쳐다보았다. 서현은 찰랑거리는 호수의 물결에 시선을 드리운 채, 물속에서 보았던 백사의 눈을 떠올렸다. 오래된 칼에 박힌 금장식처럼 반들반들한 파충류의 눈동자가 뇌리에 깊숙이 박혀 지워지지 않는다. 그 눈에는 이렇다 할 적의조차 없이 순수한 살의로 가득했다.
나루터에 도착해 호그와트로 가는 셋의 앞을 누군가 가로막았다. 메시아였다. 그녀는 서현과 서린을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듣자하니 마리아를 구해줬다지?”
“더불어 당신도.”
서현이 구태여 첨언하자 메시아의 가느다란 눈썹 한쪽이 움찔한다.
“동생을 구해준 건 고마워. 마리아가 깨어나면 말해두겠어. 이름이?”
도움을 받은 주제에 되레 고압적으로 나오는 태도가 영 못마땅해 서현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보다 못해 서린이 나섰다.
“난 롯시니, 이쪽은 이사카야.”
“베르게네프 형제.”
눈을 가늘게 뜬 메시아가 그들이 알려주지도 않은 성을 말했다.
“이름은 익히 들었지. 잘 알겠어.”
뭘 알겠다는 건지 몰라도 메시아는 쌩하니 몸을 돌려 도도한 걸음걸이로 멀어졌다. 대단한 보상을 바라고서 한 일도 아니지만 저딴 태도로 나오니 기가 막혀 서현은 헛웃음을 쳤다.
“한세건 같은 여자군.”
“뭐라고?”
서현은 장난스럽게 빈정거렸다.
“당신도 항상 자기 하고 싶은 말만 하고 가잖아.”
다음 순간, 한세건이 욕을 하거나 화내면서 맞받아치리라고 짐작했던 서현은 당혹감에 휩싸였다. 그는 되레 사납게 올라간 눈꼬리를 내리고 침잠한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냉랭한 표정에 스민 감정은 흔하디흔한 짜증도 신경질도 아닌 순수한 분노였다. 서현은 얼떨떨했다.
“왜 그래?”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이 정도 농담은 평소에도 얼마든지 주고받는데 갑자기 유난스러운 반응이라니? 아예 없는 말을 했으면 또 모르지만 세건이 제멋대로 구는 게 하루 이틀 일은 아니잖은가.
“한세건?”
세건은 그 이상 화내지 않음으로써 분노를 표출했고, 서현은 혼자 다른 방향으로 걸어가는 그를 차마 잡지 못하고 쳐다보았다. 온갖 성질을 부리며 돌아섰으면 늘 있는 일이려니 했을 텐데, 아무래도 이건 여느 때와 달라도 너무 다르다. 목구멍에 가시 하나가 박힌 듯 까끌까끌하고 속이 거북해졌다. 조금 전, 한세건의 비위를 긁은 행동은 다분히 습관적이었다. 서현으로서도 의도치 않은 결과였다.
“내가 실수했나?”
“글쎄.”
“대체 뭐 때문에 저래?”
“모르지. 세건 형 속내를 누가 알겠어.”
서린은 어깨를 으쓱하고 멈추었던 걸음을 재개했다. 태평하게 콧노래까지 흥얼거리는 모양새가 두 사람의 지겨운 사랑싸움 따위 알 바 아니라는 태도였다. 보기 아니꼽지만 실제로 서린이 어떻게 해줄 수 있는 부분이 아니다.
서현은 세건을 쫓아갈까 말까 갈팡질팡하다가 내버려두기로 했다. 여태껏 파악한 한세건의 행동 패턴으로 미루어보건대 괜히 더 찔렀다가는 날벼락을 맞을 터였다.
3. 특별한 선물
연신 연회장 입구를 살피던 서현은 마침내 기다리던 인물을 발견하고 그를 주시했다. 세건은 안감이 푸른 래번클로 망토를 펄럭이며 무심한 얼굴로 저벅저벅 걸어 들어왔다. 과연 그가 언제쯤 이쪽을 발견할까? 그리고 눈이 마주치면 여기로 올지 말지도 매우 궁금해졌다.
지난날에 한세건이 화난 까닭은 아직도 추측 불가능했다. 그렇게 헤어진 후로 대면할 기회가 오지 않아 여전히 성이 난 상태인지는 알 길 이 없다. 설령 한세건이 자신을 보고 무시하더라도 이번에는 쓸데없이 시간 낭비하지 않고 물어볼 작정이다.
서현이 막 그를 부르려고 손을 드는데 하필이면 연회장 앞을 지나가던 김성희 교수가 한세건을 채갔다. 세건이 도로 등을 돌려 입구로 돌아갔다. 흔들리는 망토가 어째 ‘굿바이’ 하고 약 올리는 손짓 같았다. 서현은 아쉬움 대신 샌드위치를 곱씹으며 그들이 이야기 나누는 모습을 빤히 보았다. 성희가 편지를 건네자 누구의 것인지 몰라도 세건은 적잖게 놀란 눈치였다.
“질투해?”
맞은편에서 날아온 질문이 식탁으로 주의를 돌려놓았다. 서현은 어처구니없는 심정을 담아 자신의 쌍둥이 동생을 쳐다보았다. 아무리 한세건을 좋아한대도 교수 상태로 질투할 만큼 분별력이 모자라진 않았다.
“내가 그 정도로 정신이 나간 놈으로 보여?”
아니면 말고. 바삭바삭한 토스트에 버터를 바르던 서린이 어깨를 으쓱여 보인다. 쯧, 혀를 찬 서현은 포크로 먹음직스러운 갈색 소시지를 푹 찍으며 화제를 돌렸다.
“며칠이 지났는데 왜 아무도 안 부르는 거지?”
“누가?”
“누구긴 누구야, 교수들이지. 분명 호수를 조사했을 텐데 어떻게 된 건지 알려줘야 할 거 아니야.”
학생들에게 불안감이 퍼질 것을 우려해 시합을 급히 마무리 지은 것까진 알겠다. 다음날에는 교장의 호출을 받아 호수에서 있었던 일을 자세히 설명하기도 했다. 문제는 그 후로는 어떻게 되어가고 있는지 말해줄 낌새가 안 보인다는 점이다. 아직 뚜렷하게 밝혀진 바가 없더라도 아직 알아보는 중이라는 소리는 해줄 수 있을 텐데.
그날 교수들 태도를 보며 수상한 기미를 느꼈는데 이쯤 되니 의혹이 더 짙어진다. 서린이 입가에 살짝 주먹을 대고 시선을 내리깔았다.
“내 생각엔, 교수들이 우리한테 설명할 마음이 없어 보여.”
“그래. 아마 그런 거겠지.”
“알려주지 않아도 추측해볼 순 있잖아. 그 뱀.”
“뱀이 왜?”
몸을 앞으로 숙인 서린이 목소리를 한층 낮추었다. 약간 가늘어진 그의 눈매 사이로 보이는 눈동자가 드물게 심각한 빛을 띠었다.
“뱀이 상징하는 게 뭐겠어. 살라자르 슬리데린 혹은 볼드모트.”
“볼드모트 그자가 죽은 건 삼십 년도 더 지난 얘기야.”
역사 시간에 배운 바에 따르면, 예전에는 그 이름이 금기였으나 지금은 아니다. 그럼에도 볼드모트는 여전히 사악한 마법사를 대표하는 이름이자 암흑시대를 가리키는 나침반이었다. 마법사 세계에서 아직도 그 이름을 말하기 거리끼는 이들이 적지 않다. 하지만 해리 포터가 이곳 호그와트에서 그를 죽인 후로 평화가 계속되고 있었다. 호그와트 전시실에는 해리 포터와 그때 함께 싸웠던 모든 이들을 기리기 위한 기념비도 있다.
“그의 부활을 얘기하려는 건 아냐. 어느 시대에나 그런 힘을 탐내는 자가 있기 마련이라는 거지.”
서린의 말도 옳다. 한층 강력한 힘에 탐닉한 자들이라면 어둠의 마법이 주는 유혹을 뿌리치기 지난할 것이다. 볼드모트 추종자들에 관한 소문은 늘 떠돌았고 비밀리에 금지마법 연구에 몰두하는 이들도 당연히 있다. 세건도 그런 자에게 부모를 잃지 않았던가. 그러나 서현은 선뜻 그쪽과 연결 짓지 못했다.
“글쎄. 호수의 뱀은 그런 느낌하고는 달랐어.”
“무슨 소리야?”
“사악함과는 거리가 멀었다고. 악의가 없는 눈이었어. 물론 선하지도 않았지.”
서현은 뇌리에 생생히 아로새겨진 금색 홍채와 크레바스 틈처럼 길쭉한 흑색 동공을 상기했다. 누군가를 살해하는 행위는 필연적으로 사악함을 동반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뱀의 눈빛에는 ‘나쁜 의도’ 가 제거되어 있었고 한편으로는 그 점이 더욱 꺼림칙하게 느껴지는 괴물이었다. 무감정하면서도 기계적인 차가움과는 판이한 눈빛이라니…….
각자 상념에 잠긴 바람에 대화가 중단되었다. 얼마 후에 서린이 말문을 열었을 때는 화제가 또 다른 곳으로 옮겨졌다.
“그보다 형은 더 심각하게 고민해야 할 문제가 있을 텐데?”
서린이 짓궂은 미소를 그렸다.
“크리스마스 무도회에 같이 갈 파트너가 없잖아.”
잊고 있던 골칫거리를 떠올린 서현은 불평을 터트렸다.
“도대체 그 고루한 전통은 왜 유지되는 거지?”
친선 도모니 뭐니 해도 최종 목적은 마법사 세계의 결속을 촘촘히 하는 거였다. 예전과 비교하면 머글을 향한 편견과 오해가 제법 옅어졌다고 하나 여전히 마법사 세계는 폐쇄적이다. 아무리 시대가 달라져도 마법의 존재를 밝힐 수 없으니 그런 특성은 이해했다. 하지만 이해하는 것과 마음에 드는 것은 엄연히 별개였다. 아니, 솔직히 말하면 그냥 귀찮아서 싫었다.
서현은 턱을 괴고 연회장 안을 눈으로 쭉 훑었다. 하루하루 크리스마스가 가까워질수록 여기저기서 묘한 기류가 흘렀다. 흘끔거리며 기회를 살피는 눈동자들, 조그맣게 속닥거리는 목소리, 이따금 터지는 탄성과 탄식. 호그와트 전체의 들뜬 분위기가 피부로 와 닿았다.
한숨 쉰 서현은 설탕 넣은 밀크티를 휘저었다. 스푼이 찻잔에 부딪히며 달그락거린다.
“세건 형이랑 가.”
“말이 되는 소릴 해.”
서린 말마따나 차라리 한세건과 파트너가 될 수 있으면 조금 즐겨 보기라도 할 텐데 당연하게도 불가능했다. 그렇다고 버젓이 존재하는 애인을 놔두고 다른 파트너를 구하느니 차라리 혼자 가는 편을 택하는 게 나았다.
다만 한세건 생각이 어떨지는 미지수였다. 그놈이랑 같이 가려고 할 여자가 있기나 한가? 잘생긴 외모, 비상한 머리, 마법 실력까지 고루 갖춘 터라 뒤에서 지켜보는 여학생도 있기는 하다. 그들의 취향이 독특하다고 말하진 않겠다. 정작 한세건과 사귀는 주제에 그런 소리를 하면 자기 얼굴에 침 뱉는 꼴이니까.
어쨌거나 세건은 멀리서 바라보기에는 어떨지 몰라도 친해지고 싶은 타입은 아니잖은가. 공평하게도 세건의 까칠함은 남녀 구분이 없다.
“넌 어떡할 건데?”
“난 파트너 있어.”
서현이 눈을 크게 뜨고 그를 쳐다보았다. 처음 듣는 소리였다. 그야 파트너도 구하지 못할 녀석이 아니고, 같이 가자 청하기 수줍어 우물쭈물하다가 상대를 놓칠 내성적인 녀석은 더더욱 아니다. 서현은 서린과 비교적 친밀하게 지내는 여학생 몇몇을 떠올렸다. 대관절 누구랑 이브를 같이 보내기로 했을까. 그런데 서린의 대답은 뜻밖이었다.
“마리아.”
“마리아? 그 보바통 여자애?”
“여자애라니, 우리보다 한 살 위인데.”
시합이 끝난 이튿날, 마리아가 언니 메시아와 함께 인사를 하러 왔었다. 반나절 가량 의식을 잃었다가 깨어나서 창백해 보였으나 우려했던 것보다는 건강했다. 병동 신세를 지지 않은 것만으로도 다행이었다. 그때 서린이 그 특유의 서글서글함으로 마리아를 대하긴 했는데 어느새 크리스마스 파티를 같이 즐길 정도로 친해졌지?
“걘 여자애 하고 우린 남자애 하면 되지. 돼지, 돼지.”
“아, 형, 그런 말장난 좀…”
“다시는 돼지 소리를 못하게 진짜 돼지 새끼로 만들기 전에 그만하지?”
뒤통수에 익숙한 목소리가 내리꽂혔다. 서린의 말을 가로챈 한세건이 평소와 같은 태도로 옆자리에 털썩 앉았다. 서현은 그가 먼저 다가와 말을 걸었다는 점에 놀라 돼지 새끼로 변신 운운하는 소리는 귓등으로 흘려들었다. 못 보는 새에 화가 풀렸나? 정말이지 종잡을 수 없는 성격이다. 한세건이 렌틸콩을 곁들여 찐 양고기 캐서롤을 끌어당겼다.
“마침 잘 왔어, 형. 우리 크리스마스 무도회 얘기하는 중이었거든. 형은 파트너 어떻게 할 거야?”
“몰라. 근데 넌 마리아랑 간다고?”
세건이 인상을 찌푸리고 서린을 지그시 응시했다.
“그런 취향이었냐? 몰랐군.”
“응? 그런 취향이 뭔데? 세건 형 설마 이상한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 와, 그렇게 안 봤는데 음흉하네. 그 귀엽고 앙증맞은 소녀를 상대로 대체 무슨 파렴치한 상상의 나래를 펼치고 있는…”
“닥쳐!”
얼굴을 붉힌 세건이 버럭 소리를 질러 말을 끊었다. 큰소리 때문에 주변에서 흘끔흘끔 쳐다보았다. 세건은 씩씩거리며 개자식, 하고 한마디 더 욕을 날렸다. 서린을 변태로 몰아가려다가 본전도 못 찾은 셈이다. 그러게 말로 이긴 적 없으면서 굳이 건드리긴 왜 건드리나? 물론 불똥이 튈까 봐 소리 내어 말하지는 못하고 속으로만 생각했다.
“아무튼, 어떻게 된 건지 얘기나 해 봐. 네가 같이 가자고 했어?”
“어제 호숫가에서 숙제를 하는데 마리아랑 메시아가 산책하고 있더라고. 인사를 나눈 다음에, 어쩌다가 무도회 얘길 하게 됐는데 아직도 파트너가 없다는 거야. 같이 가자고 권하는 남자들은 다 마음에 안 든다나? 그래서 나하고 가면 어떻겠냐고 했지. 마리아도 좋다고 했고.”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던 남학생들 우는 소리가 여기까지 들리는 듯하다.
“메시아가 가만히 있었냐? 그 여자 동생 아끼는 정도가 유별났잖아. 분명 시스터 콤플렉스야.”
“마음에 드는 눈치는 아니었지, 아마? 하지만 파트너도 없이 혼자 가게 둘 순 없을 테니까. 참, 주말에 호그스미드 안 갈래? 마리아랑 가기로 약속했는데 오랜만에 다 같이 가자.”
“단둘이 호그스미드를 간다고?”
조용히 식사를 하던 세건이 눈을 치뜨며 반문했다. 서현은 어리둥절해서 그의 옆얼굴을 흘끔 훔쳐보았다. 얼마 전부터 서린 일에 예민하게 반응하는 모습이 자꾸만 거슬린다. 괜히 따졌다가 친형제를 시기하는 놈으로 찍힐까 저어되어 가만히 있을 뿐이지 속에서는 불만이 차곡차곡 쌓이는 중이었다. 서현은 화살을 서린에게 돌렸다.
“제정신이냐? 둘이 데이트하는데 우리가 왜 끼어들어?”
그러자 서린이 재미난 농담이라도 들은 양 웃음을 터트렸다.
“데이트라니, 그냥 글래드래그스에 파티 드레스 사러 가는 거야. 파트너니까 같이 골라 달라고 하던데.”
터무니없다는 식으로 반문한 까닭에 서현은 말문을 잃었다. 그게 데이트 아니면 뭐지? 파티 드레스를 함께 고르자는 건 대단한 호감의 표시 아닌가? 더군다나 드레스는 이미 챙겨왔을 텐데 왜 갑자기 새 옷을 사느냔 말이다. 보나마나 구실이다. 하지만 그것도 모를 만큼 서린이 형편없는 눈치의 소유자는 아닌데.
서현은 코코아를 홀짝거리는 혈육의 무덤덤한 얼굴을 빤히 들여다보았다. 제가 먼저 파트너 신청까지 한 주제에 마리아를 연애 대상으로는 조금도 안 보는 모양이다. 사생활에 참견할 마음은 없으나 같이 가면 따가운 눈총만 받을 것이 빤하여 재차 거절하려는 찰나.
“…그래. 가지, 뭐.”
한세건이 대뜸 승낙했다.
“잠깐, 뭐라고?”
“귀가 먹었냐? 간다고 했다. 살 것도 있고.”
도대체 이 자식 왜 이러는 거지? 진의를 파악하기 위해 빤히 노려봐도 한세건은 개의치 않고 딸기 트라이플만 퍼먹었다. 서린이 눈동자를 또르르 굴려 자신과 세건을 번갈아 보더니만 슬그머니 일어나 자리를 피했다. 말은 기숙사에 들러 다음 수업 준비를 한다지만 속내는 혹 다툼이라도 일어났을 경우 휘말릴 것을 미연에 차단하려는 심산이리라. 하지만 서현도 사방에 딴 학생들이 바글바글한 자리에서 싸울 마음은 없었다.
“당신, 진짜 파트너는 어쩔 작정이야?”
“아무한테나 청해서 갈 거야.”
포크가 애꿎게 빈 접시를 찍었다. 서현은 눈꼬리를 추켜올리고 목소리를 잔뜩 낮춰 속닥거렸다.
“내가 있는데 다른 여자랑 파티에서 춤추겠다고?”
“그럼 혼자 청승맞게 칠면조 고기나 먹어?”
오히려 세건이 당당하게 반문했다. 그러나 서현은 그가 주변 시선을 의식하는 위인이 아님을 누구보다 잘 알았다. 아니, 호그와트 학생이라면 다 아는 사실이다. 그러니까 한세건은 지금 자신의 신경을 의도적으로 건드리는 거였다.
웬일로 별말 않고 아는 체한다 싶었더니 아직도 심기가 불편하다 이거지. 하지만 서현도 기분이 저조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웬 여자랑 가기만 해 봐.”
“흥, 그럼 네가 여장이라도 하든가.”
“그걸 말이라고 해?”
“왜? 궁한 건 네놈 아닌가?”
세건이 탁 소리가 나도록 포크를 내려놓았다. 못마땅한 눈빛으로 서현을 일별한 그는 벌떡 일어나 연회장 출입구로 걸어가 버렸다. 서현은 머리칼을 크게 쓸어 넘기며 한숨을 내쉬었다. 툭하면 화를 내고 등을 돌려 사라지는 행동을 일관하는 한세건이 오늘만큼 짜증 난 적이 없다. 대체 어떻게 하기를 바라는지도 모르겠다.
현관 홀로 나간 서현은 막 대리석 계단의 층계참을 돌아가려는 한세건을 발견하고 줄달음쳐서 쫓아갔다. 팔을 꽉 움켜쥐고 무어라 말할 틈도 주지 않은 채 후미진 곳으로 끌고 갔다. 뜻밖에 세건은 고분고분하게 따라왔다. 마치 쫓아오기를 예상이라도 했다는 태도다. 서현은 그를 구석으로 밀어붙이고 이를 악물었다.
“좋아. 그렇게 원하면 그까짓 여장 해줄게. 이제 만족해?”
그제야 한세건의 시큰둥한 표정에 금이 가고 당혹감이 새어 나온다.
“하, 필요 없어. 무슨 농담을 진담으로 받아들여?”
“농담이면 농담답게 끝냈어야지. 당신이 그따위로 나오는데 그럼 뭘 어쩌라고? 크리스마스 파티를 누구랑 보내든 상관하지 말고 내버려둬? 당신도 내가 누구랑 가든 관심 끌 거고?”
세건이 잡힌 팔을 부드럽게 빼냈다. 땅을 꺼뜨릴 듯 무거운 한숨이 뒤를 이었다.
“난 몰라도 넌 주최 측 대표야.”
“그게 뭐?”
“무도회가 시작하면 각 학교 챔피언들이 제일 먼저 춤추는 게 순서인 거 모르나? 거기서 너만 나가지 않는 게 말이 돼? 쓸데없는 짓 말고 누구라도 파트너로 데리고 가. 네가 그런다고 거기다가 화낼 만큼 생각이 짧진 않으니까.”
매사 비뚤게 나오는 그가 오랜만에 감정을 배제하고서 진지하게 말했다. 그의 말이 옳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언짢은 마음에 선뜻 수긍하지 못했다.
서현은 곰곰이 따져 보았다. 정말로 한세건 말대로 해야 하나? 그야 트리위저드를 주최하는 학교의 대표라는 위치상, 겉으로 보이는 면에도 주의를 기울여야 하긴 했다. 하지만 그것이 대회에 영향을 끼치거나 학교 명성을 현격히 떨어뜨릴 문제는 아니잖은가. 혼자 가면 교수들이 호들갑을 떨기야 하겠지만 자신도 세건 못지않게 자기중심적인 부류였다. 서현은 한 발짝 간격을 좁혀 몸을 밀착했다.
“확실히 말하는데, 난 당신 아니면 싫어.”
세건은 완전히 말문이 막힌 얼굴이다. 반사적으로 입술을 살짝 달싹였을 뿐이다.
“그리고 아무나 데려가면 그쪽에게도 실례 아닌가?”
“…네가 그렇게 생각해도 그때 누군가와는 춤춰야 한다는 사실이 변하는 건 아니지.”
“당신이 아니면 혼자 갈 거야. 치기 어린 협박이 아니라 진심이야. 나도 학교 체면 세워준다고 내키지도 않는 짓을 할 만큼 착한 사람은 못 되니까. 아니면…당신이 여장하고 내 파트너가 되는 건 어때?”
한세건의 얼굴이 경악과 분노로 벌겋게 물들었다. 그는 두어 차례 입을 뻐끔거린 후에야 더듬더듬 말을 내뱉었다.
“뭐, 이, 씨발, 무슨 헛소리를…미쳤냐?”
“제일 좋은 해결책이잖아.”
“꺼져! 그딴 짓을 할 거 같아?”
갑자기 세건이 소리를 지르는 바람에 서현은 깜짝 놀라 주변을 살폈다. 쉿, 하고 검지를 입술에 대자 세건이 움찔한다.
“이러고 붙어 있는 거 동네방네 보여줄 생각 아니면 목소리 좀 낮춰.”
“젠장, 네놈이 떨어지면 되잖아!”
확 밀어내는 손에 떠밀려 서현은 세건에게서 몇 발짝 뒤로 물러났다. 모처럼 성질을 죽이고 얌전히 대화하나 했더니 금세 폭발한다.
“혼자 가든 말든 네 마음대로 해. 차라리 혀를 깨물고 죽었으면 죽었지 여장은 안 하니까 행여나 기대하지 마.”
딱 부러지게 거절한 세건은 수업에 늦겠다며 서둘러 자리를 빠져나갔다. 오후 수업에 들어가야 하기는 매한가지라 그를 잡을 수 없었다. 왜 매사가 한세건이 날카로운 소리를 하고 가버리는 걸로 헤어지게 되지?
서현은 어깨를 으쓱였으나 적어도 이번에는 그가 일방적으로 화를 낼 때와는 분위기가 달랐기 때문에 그리 걱정되지 않았다. 주말에 호그스미드에 가기로 했으니 남은 이야기는 그때 나눠도 될 일이었다. 서현은 발걸음을 서둘렀다. 점술 수업이 이뤄지는 북쪽 탑 꼭대기에 제때 도착하려면 남은 시간이 빠듯했다.
*
곧 크리스마스 무도회가 시작될 시간이라 기숙사 휴게실은 유독 휑했다. 서현은 가죽 소파에 누워 책을 팔랑거리고 있었다. 두말 하면 입 아프게도 한세건은 여장을 하지 않았고, 서현 역시 누구에게도 파트너 신청을 하지 않았다. 크리스마스 무도회 역사상 파트너 없는 챔피언이 등장하기는 최초일 것이다. 교수들이 놀라 자빠지는 광경을 생각하니 꽤 유쾌했다.
어제저녁 일이었다. 서현이 기어이 혼자를 고집하자 세건은 화를 내지도, 거친 말을 쏟아 붓지도 않았다. 그는 한참이나 묵묵히 눈을 응시했다.
생각에 몰두한 표정, 순한 유니콘처럼 고요가 깃든 눈동자.
서현은 어떤 중요한 결정을 내리기 전에 한세건이 그런 얼굴로 변하는 순간을 좋아했다. 몇 번이나 고백한 끝에 세건이 사귀자고 얘기하기 전에도 꼭 그랬다. 그러나 어제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알겠다는 한마디만 남긴 채 돌아가 버렸다.
갑자기 손에 들린 책이 휙 사라지더니 눈앞에 서린의 얼굴이 나타났다. 테일 코트 연회복을 멋들어지게 빼입고 일찌감치 밖으로 나간 녀석이 기숙사에는 왜 돌아왔지?
“일어나 봐. 김성희 교수님이 형을 찾아.”
홀에 안 보여서 찾으러 온 것이겠거니 하며 기숙사 입구로 나가 보았다. 김성희는 검은 레이스로 장식한 푸른색 이브닝드레스를 입었다. 자연스럽게 주름져 떨어지는 옷자락이 우아하게 실루엣을 그렸다. 이 칙칙한 지하와는 터무니없을 만큼 안 어울렸다.
“옷이 아주 멋있구나? 세건이 부탁을 받아서 왔단다. 첫 순서에 네 파트너를 해달라던데.”
“네? 교수님이요?”
“싫으니?”
서현은 얼떨떨해서 고개를 저었다. 교수님이라면 부담가질 필요가 없으니 도리어 좋았다. 성희는 이제 시작할 때가 다 되었다며 두 형제의 걸음을 재촉했다. 부랴부랴 지하 감옥 복도를 걸으면서도 서현은 혹시나 하는 마음에 물었다.
“그런데 교수님하고 춰도 되긴 하는 겁니까?”
“꼭 학생끼리여야 한다는 법은 없어. 전례도 있고.”
“전례요?”
서린이 눈을 둥그렇게 뜨고 끼어들었다. 의미심장한 미소를 띤 성희가 한쪽 눈을 찡긋했다.
“내가 호그와트 학생이었을 때 교수님하고 춤췄지. 이번에는 귀여운 제자랑 춤추다니, 두근두근하네.”
“학생 시절에도 인기 많으셨을 거 같은데 왜 교수님하고 춤을 추셨어요? 그분을 좋아하셨어요?”
“그때 준비했던 드레스가 은색이었거든.”
모호한 대답과 함께 성희가 문을 열어젖혔다. 서늘한 겨울 공기와 파티의 열기가 동시에 훅 밀어닥쳤다. 현관 홀, 마법으로 환히 불을 밝힌 샹들리에 아래에 무도회를 기다리는 학생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었다. 누구랄 것 없이 설레서 어쩔 줄 모르는 표정이었다. 다른 학교 학생들이 들어오도록 현관문은 활짝 열렸고 연회장으로 들어가는 이중문도 마찬가지였다. 무도회 시작이 코앞이라 그들은 서둘러 연회장 입구로 향했다.
서린이 한발 앞서 달려 나가며 파트너를 불렀다. 마리아는 자그마한 키에 어울리게 하얀 레이스가 잔뜩 달려 귀여운 드레스를 입었다. 서린의 얼굴을 보자마자 눈에 띄게 화색이 돌았다. 보드라운 모피를 덧댄 적색 연회복을 입은 고든은 놀랍게도 메시아와 함께 있었다. 서현은 각각 다른 이유로 그 두 사람이 거북했기 때문에 마지못해 눈인사만 나누는 데 그쳤다. 파트너끼리 열을 맞춰 서고 나서야 한세건에게 생각이 미쳤으나 둘러보려는 찰나, 무도회가 시작되었다.
박수를 받으며 입장한 대표들은 연회장 오케스트라 앞에서 파트너와 마주 보았다. 이윽고 부드럽고 경쾌한 왈츠 연주가 울려 퍼졌다.
성희는 평균보다 키가 큰 편이고 서현도 또래 중에 큰 편에 속했다. 두 사람의 키 차이는 근소했으나 성희가 하이힐을 신은 까닭에 시선이 약간 더 높았다.
“예상외로 잘 추는구나. 연습했니?”
“어릴 때부터 어머니가 종종 서린이랑 절 붙들고 춤을 추셨거든요. 전 그렇게 좋아하지 않았지만, 서린은 어머니와 왈츠 추는 걸 좋아했죠.”
“좀 실망이네. 처음 추는 거라 서투르지만 열심히 추려고 애쓰는데 마음대로 안 돼서 실수하는 모습을 기대했는데.”
상당히 구체적인 바람을 늘어놓은 성희가 빙긋 웃었다. 어느새 주변은 춤추러 나온 학생들로 가득해졌고 둘은 잠시 분위기를 맞추다가 적당한 때에 옆으로 빠져나왔다. 서현은 답답한 보타이를 풀었다. 한겨울인데도 연회장은 후덥지근했다.
“도와주셔서 고맙습니다.”
“괜찮아. 곤란에 처한 학생을 돕는 게 교수가 할 일이고, 이 빚은 세건이가 갚을 테니까.”
부탁을 받아주는 대가로 한세건에게 뭔가 요구한 모양이다. 서현은 조금 불안해졌다. 한세건 성격에 너 때문에 안 해도 될 일을 했다며 신경질을 부릴 확률이 매우 높았기 때문이다. 성희가 커다란 얼음 조각에 쪼르르 놓인 샴페인을 한 잔 건넸다. 차고 투명한 남극 바다색이었다.
“웬만하면 혼자 있지 말고.”
“네?”
“모처럼 하는 파티니까 놀다 가라는 뜻이야. 메리 크리스마스.”
성희가 가볍게 잔을 부딪치고 연회장 중앙으로 돌아갔다. 홀로 남은 서현은 달콤한 향이 나는 샴페인을 한 입 머금고 주변을 훑어보았다. 들어올 땐 미처 못 보았던 연회장 풍경이 이제야 눈에 들어왔다.
천장에는 빛나는 수정 고드름이 달렸고 마법으로 만든 눈송이가 펄펄 내리다가 사라진다. 서리가 내린 듯 하얀 벽에는 흑진주색 베일을 넉넉히 늘어뜨렸다. 테이블마다 깔린 은빛 천은 반짝반짝 빛나고, 그 위에 아름다운 궁전 모양을 한 얼음 조각상이 놓였다. 그리고 보기만 해도 군침 도는 파티 음식이 궁전을 에워쌌다.
유리 항아리에 찰랑거리는 오색 샴페인, 빨강과 초록을 반씩 넣어 금싸라기를 얹은 젤리 푸딩, 은제 접시에 담긴 초콜릿 케이크, 노릇노릇한 칠면조 구이, 크림을 잔뜩 올리고 계핏가루를 뿌린 에그노그 등등.
서현은 딱 한입 크기로 만든 케이크를 입에 넣고 연신 연회장 안을 살펴보았다. 이쪽에는 교수님께 부탁해 기어코 춤추게 해놓고 정작 자기는 연회장에 얼굴을 내밀지 않은 건가?
칠면조 구이와 젤리 푸딩이 차례로 뱃속에 들어가는 동안 곳곳을 훑었으나 역시 머리털 한 올 안 보였다. 서현은 바깥에서 그를 찾아보려고 현관 홀로 향하며 마지막으로 에그노그를 집어 들었다.
“뭘 하느라고 안 나오나 했더니 처먹고 있었군.”
느닷없이 나타난 한세건이 연회장 입구에 서서 이쪽을 한심하게 쳐다보았다. 서현은 동시다발적으로 솟구치는 질문 가운데 무엇부터 말해야 할지 몰라 잠시 멀뚱히 그를 응시했다. 정말로 연회장에 올 마음은 솜털만큼도 없었는지 세건은 평상복에 코트를 걸친 옷차림이었다.
“…그렇게 찾을 땐 안 보이더니 오자마자 시비야? 지금까지 대체 어디 있었던 건데?”
세건이 입술을 잘근잘근 씹었다.
“저쪽 계단에 앉아서 기다리고 있었다. 됐냐?”
“들어오지 왜 거기 앉아 있었어?”
“순서 끝나면 바로 나올 거라고 생각했지, 이것저것 입에 쑤셔 넣고 있을 줄 내가 알았어?”
맙소사. 웃음이 새어 나올 것 같아 서현은 입을 앙다물었다. 곧 나오겠지, 하고 썰렁한 계단에 오도카니 앉아서 연회장 입구만 뚫어지게 주시하는 모양새를 상상하노라니 우습고 귀여워서 가슴이 간질간질했다. 세건은 기다리고 있었는데 왜 빨리 안 나오느냐며 볼멘소리를 터트리는 제 모습이 어떻게 보이는지 알기나 하는지 모르겠다.
“말은 바로 하자. 내가 언제 입에 쑤셔 넣고 있었어?”
“닥쳐, 돼지 새끼.”
“그래, 그래. 마음대로 불러라. 꿀꿀.”
기분이 좋아진 서현은 순순히 맞장구까지 쳐주었다. 그러자 세건이 되레 움찔하고 의심스러운 눈빛을 띤다.
“뭐야, 그새 술이라도 퍼마셨나? 취했냐?”
퍼뜩 짓궂은 생각이 든 서현은 샴페인 한 잔에 에그노그 몇 모금 마셔놓고 취한 시늉을 했다.
“맞아, 맞아. 취했지. 내 잘생긴 애인 한세건을 생각하면서 좀 마셨어.”
“미쳤어?”
황급히 듣는 귀가 있는지부터 확인한 세건이 다짜고짜 팔을 잡아끌었다. 보여주기 식으로 샴페인을 한입에 털어 넣은 서현은 세건의 뒤통수를 보며 씩 웃었다. 매사에 쓸데없이 치밀하고 눈치도 빠르면서 가끔 이렇게 깜빡 속으면 어찌나 귀여운지. 이런 생각을 하는 걸 들켰다간 한세건이 돌았냐고 하겠지만, 자기처럼 성격 나쁜 사람이랑 사귀려면 제정신으로는 안 된다는 사실을 그도 알아야 한다.
한세건에게 잡혀 밖으로 나간 서현은 자신의 발에 뽀드득 밟히는 것을 느끼고 깜짝 놀랐다. 고개를 들자 사뿐하게 내려온 차가운 눈송이가 입술에 닿아 삽시간에 녹아내렸다. 연회장에 내리는 가짜 눈이 아니라 진짜였다.
“눈이 오네?”
“이제 알았냐?”
안마당 가운데에도 커다란 트리가 설치되어 있었다. 마법으로 만든 빛이 주위를 둥실둥실 떠다니고 빨간색과 초록색 방울, 리본 달린 은종, 붉은 열매가 영근 겨우살이 등등 아기자기한 장식으로 한껏 치장했다. 마법으로 만들어진 작은 산타와 루돌프가 썰매를 끌며 트리 주위를 계속 돌고 있었다. 산타의 선물 보따리에서 반짝반짝 빛가루가 쏟아졌다.
둘은 회랑 난간에 걸터앉아 트리를 바라보았다. 술이라고는 맛만 보았고 밤공기는 차디찬데 서현은 진짜로 취한 기분이 들었다. 정작 밖으로 데리고 나온 당사자는 조용했다. 서현은 신발 뒤꿈치로 난간을 툭툭 쳤다.
“교수님께 파트너 부탁해준 거 고마워. 빚은 당신이 갚을 거라던데, 뭘 해드리기로 한 거야?”
“별거 아니야. 네가 알 필요 없어.”
해석하자면 신경 쓰지 않아도 된다는 소리였다. 말투가 이러하니 서현은 처음 한세건을 만났을 때 가시를 세우고 다니는 고슴도치라고 여겼다. 그 날카로운 혀를 아무에게나 푹푹 찌르는 주제에 큰 사고 없이 학교에 다니는 것이 기적 같았다.
하지만 한세건이 유독 자신과 서린에게 살차게 굴었음을 서현은 나중에서야 알게 되었다. 이유를 물었더니 본능적으로 꺼림칙한 느낌이 들었다나. 한세건이 애니마구스라면 분명 맹수 과였으리라.
“뭘 실실 웃어? 술이 덜 깼나?”
“한세건. 사실 나 안 취했어.”
“누굴 바보로 알아? 애초에 믿지도 않았어.”
이제 보니 속은 게 아니라 그런 시늉을 해준 거였다. 결국 꾀에 넘어간 쪽은 자신이라니, 서현은 실소를 터트렸다.
“당신이 연회복 입은 모습을 상상했지. 불의 잔이 당신을 뽑았으면 오늘 저기서 춤춰야 했을 거 아냐? 왈츠를 추는 한세건이라니, 정말 볼 만했을 텐데 아쉽군.”
“다 네놈이 이름을 넣은 탓이지.”
재차 그 일을 언급하며 핀잔주는 것을 보니 아직도 불만스러운 모양이다. 한세건은 뒤끝 있는 타입이 아닌데 이번 일만은 희한하게 오래 담아두었다. 불의 잔 이야기를 해 봐야 좋은 소리 듣기는 틀린 까닭에 서현은 슬그머니 말을 돌렸다.
“나 춤추는 건 왜 안 보러 왔어? 남친의 멋진 왈츠 솜씨가 궁금하지도 않았나 봐?”
“그딴 걸 봐서 뭐해? 기숙사에나 있으려다가 얼굴 비추지 않으면 나중에 시끄럽게 할까 봐 온 거니까 거만 떨지 마.”
한마디도 안 지려고 드는 태도에도 서현은 그냥 미소를 지었다. 쌀쌀맞게 내뱉는 말속에 담긴 진심을 모르고 울컥하기에는 그와 지낸 세월이 제법 두껍게 쌓였다. 번번이 이러니저러니 트집 잡고 토를 달아도 오늘처럼 신경을 써 주는 사람이다. 워낙 까다로운 성미라 걸핏하면 화를 돋워도 좋아하게 되었으니 도리가 없다. 단점은 밤 새워 말해도 부족할 만큼 많으나 괴팍한 애인을 둔 운명이라 여기고 감내할 수밖에.
“선심 쓰듯 말하기는. 당신이 나 좋아하는 거 다 알아.”
고개를 조금 숙인 세건이 눈을 흘겼다.
“흥, 잘났군. 네놈의 그런 점이 재수 없어.”
“다른 날에는 나 좋아하는 티내도 모른 척해주잖아. 크리스마스니까 좀 봐주지?”
“이 자식이…!”
세건이 발끈해서 쏘아보자마자 멀리서 인기척이 났다. 그쪽으로 주의가 쏠린 한세건이 입을 다물었다. 연회장에서 나온 일단의 무리가 안마당으로 들어오는 중이었다. 그들은 화려한 트리를 가리키며 시끌시끌하게 떠들었다. 서현은 세건의 손을 잡고 그들의 시야에 잡히지 않게 몸을 숨겼다. 가지를 넓고 낮게 뻗은 느티나무 아래로 들어가자 어둠이 두 사람을 삼켰다.
한세건의 손등은 무척 차가웠다. 서현은 단단한 그의 손을 꼭 그러쥐었다. 이내 학생들이 탄성을 지르며 트리를 둘러쌌다.
“…왜 숨는 거야?”
세건이 옆에 있는 사람에게나 겨우 들리게 물었다. 서현은 그의 첫마디가 손을 놓으라는 소리일 거라고 예상했으므로 적잖게 놀랐다.
“둘만 있는 거 보였다간 입방아에 시달릴 텐데, 당신은 그런 거 싫잖아.”
“난 상관없어.”
하마터면 숨은 것도 잊고 야단을 떨 뻔했다. 서현은 귀를 의심했다. 종종 농담 삼아 공개 연애를 하자고 얘기해도 정색하며 노려보던 한세건이었다. 무슨 바람이 불어 마음이 바뀌었을까? 장난인지 진심인지 가늠하려고 해도 너무 어두워서 그의 얼굴이 제대로 안 보였다.
한동안 트리를 보며 이야기를 나누던 학생들은 추위에 발을 동동 구르기 시작했다. 몇몇이 칭얼거린 끝에 그들은 팔을 비비며 연회장으로 돌아갔다. 안마당은 눈밭에 어지럽게 찍힌 발자국만 남기고 잠잠해졌다. 그때까지 둘은 손잡은 채 잠자코 침묵을 견뎠다.
“추우니까 들어가자.”
세건이 먼저 발을 뗐다. 서현은 순순히 몇 발짝 따라가다가 도로 멈췄고 트리의 빛으로 인해 어슴푸레하게 보이는 얼굴이 뒤를 돌아보았다.
“웬 심경의 변화야? 남들에게 알리는 거 질색했잖아.”
“그래. 지금도 썩 내키진 않아. 그냥…그렇게 되면 이런 날 너한테 파트너가 없더라도 이상하지 않을 테니까. 어차피 난 얼마 안 가서 졸업이기도 하고.”
한세건이 그런 생각을 하는 줄 몰랐다. 이번에 완고하게 굴었던 행동이 어지간히 마음에 걸렸던 모양이다. 서현은 지난밤에 자신을 만나러 와서 상념에 잠겼다가 돌아간 한세건을 떠올렸다. 그때 속으로 여러 가지 생각이 교차했던 것 같다.
그의 마음이 변한 것을 좋아해야 할지 아닐지, 서현은 잘 알 수 없었다.
“내가 예상치 못하게 트리위저드에 나가는 바람에 그런 거지, 아니었으면 파트너 없는 게 뭐가 대수야? 남들이 어떻게 생각하든 무관심하다는 건 당신도 잘 알잖아.”
“불편한 상황은 앞으로 얼마든지 있을 수 있어. 이걸 꼭 말해야 아나?”
무슨 소린지 알겠다. 예컨대, 대외적으로 사귀는 사람이 없다고 알려진 경우에 받을 수 있는 온갖 질문, 원치 않게 겪어야 하는 모든 순간을 이르는 거겠지.
“당신이 그러길 바라는 건, 내 편의를 위해서야?”
비밀스러운 관계라 어물쩍 둘러대야 하는 형편이 불편할까 그러는 거면, 솔직히 쓸데없는 걱정이다. 무엇보다 ‘널 위해 내가 감수하겠다.’ 고 말하는 한세건이라니. 마음 써주어서 기쁘고 고마운 마음과 별개로 그와 어울리지 않았다. 주변에서 뭐라고 하든지 ‘내가 싫다.’ 라고 하는 사람이 한세건이고 어떻게 보면 다분히 자기중심적인 그의 솔직함을 좋아했다. 단지 평소에 안 하던 짓을 해서가 아니라 본인 입으로 내키지 않는다고 말하니 확실히 따질 수밖에 없다.
“서현.”
세건이 한숨을 푹 내쉰 다음, 잇달아 말았다.
“가끔 네놈의 멍청함이 날 얼마나 놀라게 하는지 모를 거다.”
별안간 욕을 먹은 서현은 뭐라고 대꾸해야 좋을지 몰라 묵묵히 있었다. 그러는 사이에 세건의 말은 계속 이어졌다.
“모른 체해주길 바랄 때는 술술 말하더니 정작 이럴 땐 알아먹지 못하고 웃기는 질문이나 던지는 네 멍청함에 기가 막히고 말문이 막혀 울화가 치미는군.”
“말만 잘하네.”
“닥치고 들어. 난 네 옆자리에 이미 내가 있다는 엄연한 사실이 마땅하게 무시되는 게 불쾌하고, 마뜩잖고, 싫다고. 알겠어?”
한세건이 술을 마셨나? 일순 그런 의혹이 들었으나 금세 연기처럼 흩어졌다. 세건은 무섭도록 자기관리가 철저했다. 취하도록 술을 마실 리 없고, 하물며 취기에 아무 말이나 내뱉을 만큼 가볍고 무책임한 위인도 아니다. 그러므로 한세건은 지금 독점욕마저 느껴지는 엄청난 발언을 맨정신으로 했다는 소리다!
평상시 애인은 고사하고 앙숙 대하듯이 박정하게 굴기 일쑤면서 가끔씩 너무 무덤덤하게 관계를 재확인하고 못을 땅땅 박는다. 종잡을 데 없는 성격인 건 알지만, 이렇게 사람을 깜짝깜짝 놀라게 하다니.
“당신 진짜 별난 인간이야.”
그래서 불만이냐고 묻듯 세건이 눈꼬리를 삐죽 올리고 노려본다. 서현이 손을 내저었다.
“아니, 어떤 생각인지는 잘 알겠어. 당신이 그러길 원하면 굳이 숨기지 않을게. 하지만 이래저래 말이 많을 텐데 진짜 괜찮겠어?”
“말했잖아. 난 곧 졸업이니까 상관없다고.”
졸업. 서현은 그 텁텁한 단어를 입속에 굴려 보았다. 이듬해부터는 호그와트에서 세건을 볼 수 없게 된다. 3학년 때 그를 알게 되어서 이제 5학년, 약 2년 남짓 알고 지냈지만 사귄 기간은 오래되지 않았다. 그런데도 이제 한세건 없는 호그와트를 상상하노라니 가슴 한구석이 구멍 뚫린 양 휑하다. 그가 졸업한 후, 시큰둥한 표정으로 자신을 쳐다보는 얼굴이 그리워 잠들기 어려운 날에는 어떻게 해야 할까.
“졸업 안 했으면 좋겠다.”
“누구 마음대로.”
세건이 딱딱하게 대꾸해놓고 슬그머니 시선을 옆으로 비꼈다. 솔직하지 못하기는. 서현은 그를 와락 끌어안았다.
“갑자기 뭐야?”
그렇게 핀잔을 주면서도 세건은 코트에 손을 넣고 가만히 있었다. 몸에 닿는 코트 직물이 차가웠으나 둘의 체온이 서서히 스며들어 냉기를 녹였다. 반짝이는 트리 아래에 서서 세건을 품에 안고 있으니 예쁘게 포장된 상자를 열기 전처럼 가슴이 뛰었다.
“잘 받을게, 한세건.”
“…뭐를?”
“크리스마스 선물.”
씩 웃은 서현은 곧바로 세건에게 키스했다. 꽁꽁 묶여 있던 그의 입술이 서서히 붉은 리본을 풀어내고 천천히 열렸다. 상자에서 나온 선물은 여느 때보다 한층 뜨겁고 부드러웠다.
4. 순백의 살인자
밤늦도록 서린이 돌아오지 않았다. 열 시 즈음에는 어디서 축제 분위기를 즐기고 있겠거니 했지만, 슬슬 연회장 문을 닫고도 남을 시간이었다. 아무리 크리스마스라지만 여자애를 데리고 통금 시간이 훌쩍 지날 때까지 밤놀이를 즐길 녀석은 아니다.
자정이 넘을 때까지도 비어 있는 침대를 보니 심장이 쿵쾅쿵쾅 뛰었다. 까닭 모를 불안감이 엄습했다. 호수에서 그랬던 것처럼 이유 모를 불길함이 차디찬 혓바닥으로 목덜미를 핥는 느낌이 들었다. 뜬눈으로 누워 있던 서현은 벌떡 일어나 지팡이를 챙겼다. 당장 교수님을 찾아가려다가 곧 마음을 바꾸었다. 개인적인 일로 늦을 가능성도 아예 배제할 순 없었다.
기숙사에서 나가자마자 망설임 없이 방향을 잡았다. 어디에 있을지 알고 있었다. 달의 방이다. 막연한 감을 넘어 이토록 확신이 생길 때는 어김없이 예지였다. 서현은 자신의 직감을 신뢰하는 편이다. 심지어 서린이 관련된 일이다. 흔히 쌍둥이들은 영적으로 이어져 있다고 하는데 그 말마따나 서현은 서린과 연관이 있을 때 유독 촉이 좋았다.
세건과 헤어져 돌아올 무렵에는 하늘이 흐려 달도 잘 보이지 않았다. 지금도 어떨지 모르나 서현은 달의 방이 열릴 거라고 믿었다.
막다른 벽 앞에 도착해 아로새겨진 문양을 찾아 가만히 손바닥을 댔다. 잠시 후, 푸른색 아치형 문이 모습을 드러냈다. 서현은 안으로 뛰어들어 나선형 복도를 뛰다시피 올라가기 시작했다.
“서린!”
목소리가 좁은 통로에서 웅웅 울리며 앞으로 뻗어 나갔다. 응답은 되돌아오지 않았다. 이미 심장은 터질 듯이 뛰어댔고 서현은 가쁜 숨을 몰아쉬며 복도 끝을 향해 달려갔다. 서린! 재차 이름을 외쳤다. 이번에는 대답 대신 무언가 물에 빠지는 소리가 희미하게 귀에 전해졌다.
달의 방에 다다르자마자 싸늘한 기운이 엄습했다. 소름이 돋았다. 차고 딱딱한 돌바닥에 서린, 그가 있었다. 서현은 숨을 멈추었다. 엉망으로 헝클어진 흑발, 축 늘어진 팔다리, 떨어진 지팡이, 셔츠를 새빨갛게 물들인 피. 경악과 절망감으로 짓이겨진 목소리가 피를 토하듯 터져 나왔다.
“서린…!”
늘 잔잔하게 고여 있는 물은 거친 파문으로 인해 출렁거리고 있었다.
*
“그때 형이 범인을 쫓아갔으면 잡았을지도 모르는데.”
“죽을 뻔했던 녀석이 무슨 태평한 소리야? 내가 그때 안 갔으면 넌…”
“아니, 분명 올 거라고 믿었어.”
서린이 빙긋 웃었다. 그 말대로 서현이 타이밍 좋게 달의 방으로 간 덕에 그는 큰일을 모면했다. 조금만 더 늦었더라도 시체가 되어 있었을 것이다. 폼프리 부인의 병동 신세를 지게 되었지만 살아남은 대가로는 사소했다.
어쨌거나 학생이 학교 안에서 목숨을 잃을 뻔했던 일로 교수들은 발칵 뒤집혔다. 그로 인해 서현은 자초지종을 들을 수 있었다.
새 학년이 시작되기 전인 여름방학에 벌어진 일이었다. 덤스트랭 학생 한 명이 외진 숲에서 살해당한 사건이 발생했다. 그가 발견되었을 때, 옆에는 이런 메시지가 남아 있었다.
<SILENCE OF PURE BLOOD>
명백하게 순혈을 겨냥한 살인이었다. 마법사 세계에 극성 순혈주의자들이 있는 만큼 반감을 품은 자들도 적지는 않다. 그러나 학교 밖에서 무력하기 그지없는 미성년자를 죽이다니, 너무 잔인한 짓이었다. 그의 죽음도 마법을 사용한 흔적을 추적한 마법부 측에서 발견한 거였다. 죽기 전에 필사적으로 저항한 흔적이 사방에 남아 있었다고 한다.
마법 세계에 미칠 파급을 우려해 마법부는 당분간 이 사건을 은폐하기로 했다. 더불어 모든 마법 학교에 순혈 학생들의 안전을 위해 각별한 노력을 기울일 것을 요청했다.
문제는 올해 트리위저드 대회가 있다는 점이다. 어떤 위험한 상황에 노출될지 모르는 과제가 세 번이나 치러진다. 그 틈을 타서 누군가를 해치고자 한다면 아주 좋은 기회였다. 각 학교는 가능한 한 머글 피가 섞인 학생들이 챔피언이 될 수 있도록 애썼다.
한세건이 뜬금없이 불의 잔에 이름을 넣는 이유도 그 때문이었다. 그의 죽은 양친은 머글이니 표적에서 제외될 터였다. 교수들은 사고를 미리 방지하기 위해 완강히 거부하는 세건을 설득했고, 그도 누군가의 목숨이 위험할지도 모르는 일이라 하니 거절하지 못했다.
그러나 불의 잔이 선택했는지 어떤 외부의 힘이 작용했는지, 공교롭게도 이번 챔피언들은 죄다 순혈이었다.
그 이야기를 듣자 서현은 그간 세건이 보였던 불가해한 태도를 이해하게 되었다. 그는 순혈 가문에서 태어난 형제가 대회에 참가할 마음도 없다고 해서 안심했으리라. 그런데 불의 잔에서 나온 이름이 ‘이사카 베르게네프’ 였으니 얼마나 화가 났겠는가.
한세건이 서린을 달의 방으로 불러 나눈 비밀 얘기도 그거였다. 가능한 한 둘이 같이 다니고 매사에 조심하라고 신신당부를 한 모양이다. 트리위저드 참가자만 노린다는 법은 없으니 서린에게도 유난히 신경을 썼다. 그답지 않게 서린과 마리아의 호그스미드 나들이에 따라나선 까닭도 사고가 생길까 걱정했기 때문이다. 서현은 일련의 의문을 하나하나 돌이켜보며 한세건이 얼마나 둘에게 주의를 기울여 왔는지를 깨달았다.
“그러고 보니 세건 형은?”
“…여전하지.”
그날, 병동을 찾아온 한세건은 침대에 누운 서린을 보고 헛웃음을 치더니 대뜸 화를 냈다. 기껏 조심하라고 했더니 이게 무슨 꼴이냐고 쏘아붙였다.
사실 서린이 부주의하기는 했다. 암만 수상한 기척을 따라갔다지만 혼자 위험하게 상대하려 들다니. 그래선지 정작 당사자는 넉살 좋게 웃는데, 한창 신경이 곤두서 있던 서현이 죽다 살아난 사람을 몰아붙인다며 벌컥 화를 낸 것이 화근이었다. 한세건이 그런 식으로 걱정하는 마음을 내색하는 성격인 걸 알면서 말이다.
그는 서현을 눈빛만으로 죽일 듯 노려보며 이를 바득바득 갈았다. 그럼 뒈지든 말든 마음대로 해라, 개새끼야. 세건이 으스스하게 가라앉은 어조로 그리 말하곤 병동을 나갔다.
뒤늦게 흥분을 가라앉힌 서현은 당황했다. 그 후로 계속 사과하러 갔지만 세건의 반응은 냉랭했다. 무시는 예사요, 아직 살아있었냐며 비아냥거렸다.
“세건 형도 참, 진짜 다치기라도 하면 하얗게 질려 달려올 거면서.”
그는 서현이 병문안 선물로 가져온 개구리 초콜릿을 우물거리며 말했다. 대외적으로 서린은 서현과 재미삼아 결투하다가 사고를 당했다고 알려졌다. 졸지에 친동생을 상대로 위험한 마법을 난사한 놈이 되었으나 아무래도 좋았다. 서린이 살아 있는 것만으로도 천만다행이다. 쓰러진 서린을 발견했을 때, 발밑이 무너져 끝없는 구렁텅이로 추락하는 아득한 절망감을 떠올리면 지금도 몸서리가 쳐진다.
“걱정 마. 오늘이 시합이니까 분명 마지못해 받아줄걸?”
“그렇겠지.”
서현은 픽 웃었다. 드디어 트리위저드 대회의 세 번째이자 마지막 과제를 치르는 날이었다.
“아무튼 조심해. 애초에 그자가 노린 사람은 내가 아니라 서현이었어.”
서린의 묘사에 의하면 범인은 흰 가면으로 얼굴을 가리고 두건 달린 흰 로브를 뒤집어쓴 모습이었다. 그는 달의 방에 서 있었다. 어떻게 들어갔는지는 사소한 문제였다. 그가 바로 마법 학교에 드리운 검은 그림자의 주인공이라는 사실이 중요했다.
이사카가 아니군. 하지만 순혈이라면 누구라도 상관없다.
그렇게 중얼거린 흰 가면의 살인자가 번개처럼 공격 마법을 날렸다. 아마 서린이 미리 지팡이를 꺼내 대처하고 있지 않았다면 서현이 도착하기 전에 상황이 끝났으리라. 그는 강력한 마법으로 서린을 궁지로 몰아붙여 기어코 치명상을 입혔다. 하지만 그 자가 목숨을 앗으려는 순간, 서현의 목소리가 들렸고 서린은 그가 멈칫한 사이를 놓치지 않았다. 이를 악물고 주문을 쓰려는 찰나에 그가 지팡이를 날려버렸다. 하지만 그걸로 충분했다. 서현이 지척까지 온 까닭에 그는 서린을 포기하고 물속으로 뛰어들었다. 달의 방으로 가면서 들은 풍덩 소리가 바로 그거였다.
“무슨 일 생기거든 그냥 시합 포기해.”
“알아. 목숨을 걸면서까지 우승할 생각은 없어. 이만 갈 테니까 쉬어라.”
서현은 병동을 나오자마자 세건을 찾아가려 마음먹었으나 그럴 필요가 없었다. 아래층으로 내려가는 대리석 계단 층계참에 한세건이 있었기 때문이다. 벽에 걸린 수십 개의 초상화가 침묵하는 그를 상대로 수다를 떨고 있었다. 물론 난간에 걸터앉은 세건은 어디서 개가 짖느냐는 표정이다. 여긴 사색에 빠지기에 좋은 장소도 아니거니와 그가 이런 데 앉아 빈둥거릴 턱이 없다. 아마 자신을 기다리고 있었으리라. 서린 말마따나 오늘은 마음을 풀 요량으로 보였다.
계단을 몇 칸 내려가 일부러 인기척을 냈다. 세건은 미동도 않은 채 눈만 치떠서 이쪽을 쳐다보았다. 그는 서현이 층계참에 발을 디딜 때까지 잠자코 시선을 보내기만 했다.
“여기서 뭐해?”
“오늘도 지껄일 말이 있을 텐데? 그거 들으러 왔다.”
“음, 그래. 그날은 진심으로 미안했어.”
세건이 콧방귀를 뀌었다. 지난 며칠간의 반응과 비교하면 가히 상냥하기까지 한 태도였다. 그는 난간에서 엉덩이를 떼고 일어났다.
“서린은?”
“하루나 이틀 후면 퇴원이래.”
폼프리 부인은 서린이 일반적인 경우보다 회복력이 빠르다고 했다. 워낙 마음 편하게 잘 먹고 잘 쉬어서 그렇다나. 죽음 직전까지 갔다가 살아났다고 여기기 어려울 만큼 서린은 매우 느긋하고 긍정적이었다. 사고 당사자가 그리도 생기 넘치는 덕택에 그를 잃을 뻔했다는 충격으로 며칠 예민해졌던 서현도 평상심을 되찾았다.
회중시계를 열어 시간을 확인한 세건이 앞장서서 계단을 내려갔다. 서현은 몇 발짝 뒤에서 그를 따라가다가 곧 보폭을 맞춰 나란히 걸었다. 어디를 가느냐고 물을 필요는 없었다. 해가 서쪽 지평선 아래로 가라앉으면 마지막 시합이 시작된다.
서현은 노을에 물든 세건의 옆얼굴을 훔쳐보았다. 어제까지만 해도 죽어버리라며 저주를 퍼붓던 입술은 조용하고, 살 떨리게 싸늘하던 눈빛도 잠잠하다. 한 줌 분노도 찾아보기 어려운 표정이다. 아예 화가 풀렸거나 어쩌면 그간 골이 난 척한 건지도 모른다.
본디 한세건은 온갖 이유로 역정을 냈다가 남모르는 이유로 마음이 풀리기도 하는 성미다. 그는 수시로 바뀌는 퍼즐 같았다. ‘한세건’ 이라는 그림을 차근히 맞추어 가다가 슬슬 알겠다 싶을 즈음 갑자기 전혀 모르는 그림으로 변하곤 했다. 거기에도 일종의 패턴과 근본적인 틀이라는 게 있지만, 상당히 가까운 거리에서 지켜보았다고 자부하는 서현에게도 참으로 난해했다.
가끔 손등에 스치는 세건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마음이 동해 깍지를 끼고 맞잡노라니 흘끗 눈길을 보냈다. 아직 주변은 환했고, 지나가던 사람이 볼 가능성도 다분했다. 그럼에도 세건은 손을 그대로 둠으로써 크리스마스 무도회 저녁에 한 말이 거짓이 아님을 증명했다.
“당신, 저번에는 왜 화를 낸 거야?”
세건이 인상을 찌푸렸다. 불쾌함이 아니라 의아함 때문이었다.
“너한테 화난 날이 하루 이틀이 아닌데 언제를 말하는 거지?”
“호수에서 시합 끝나고 돌아갈 때. 내가 메시아를 보고 당신처럼 할 말만 하고 가버리는 여자라고 했더니 얼굴을 차갑게 굳히고 가버렸잖아. 당신 행동이야 늘 수수께끼지만 그래도 지레짐작은 하겠는데 그것만은 도저히 모르겠거든?”
“…모른 채로 살아.”
“왜? 말하기 부끄러운 이유인가 보지?”
떠오른 김에 물어본 터라 대답을 듣지 못해도 무방했다. 그래서 가볍게 농을 던졌는데 웬걸, 한세건이 입을 다물었다. 그가 말문을 닫을 때는 주로 긍정하거나 무시하거나 둘 중 하나인데 이건 아무래도 전자 같았다. 서현은 세건의 얼굴에 시선을 못 박았다. 그대로 한참을 바라보자 뺨을 미미하게 움찔거리더니 결국 험악하게 인상을 쓴다.
“그렇다면 어쩔 건데.”
“어쩌긴, 궁금하니까 말해 봐. 우리 사이에 부끄러울 게 뭐가 있다고.”
바로 그 ‘우리 사이’이기 때문에 말하지 못하는 거겠지만 서현은 천연덕스럽게 부추겼다. 계속 버틸 줄 알았던 세건이 뜻밖에도 순순히 속내를 털어놓았다.
“개새끼가 사람 걱정시킨 주제에 속도 모르고 신경을 박박 긁더군. 그딴 개자식이 호수 아래에서 어떻게 될까 봐 내내 애간장을 태우던 내 미련함에 화가 났었다. 됐냐?”
뜸 들인 것치고 매우 차분했다. 종종 그는 제 감정을 말하는 데 있어서 놀랍도록 뻔뻔하고 정직했다. 한세건이 수줍어서 말을 못하고 머뭇거리는 부류가 아니라 다행이었다. 매사 다혈질에 툭하면 부딪히는 세건과 연애를 해나갈 수 있는 원동력도 그 솔직함 때문이리라. 왜냐하면, 이런 말을 들을 적마다 서현은 한세건이 무슨 짜증을 부려도 다 수용하고 싶을 만큼 그가 좋아지기 때문이었다.
어느덧 하늘이 어슴푸레하게 어두워졌다. 시합 장소에는 챔피언들을 위한 대기 천막이 마련되어 있었다. 여유롭게 도착한 서현은 천막에 들어가기 전, 세건을 향해 웃어 주었다.
“멀쩡하게 돌아올 테니까 걱정하지 마.”
“말은 잘하는군. 만에 하나라도 쓸데없는 객기 부리지 마.”
“당연하지. 혹시 내가 다치기라도 하면 어쩌나 누구누구 씨께서 애간장을 태우며 목을 쭉 빼고 기다릴 텐데 무슨 객기를 부려.”
“씨발, 그만 안 해?”
아까는 눈 하나 깜짝 않고 말했으면서 서현이 놀리자 뒤늦게 부끄러운지 괜히 성을 낸다. 이러니 서린이 틈만 나면 놀려먹으려고 들지. 세건의 반응이 퍽 재미있기는 하나 적당한 선에서 자제하기로 했다. 더 건드렸다가는 터질 게 분명했다. 서현은 손을 흔들고 천막 안으로 들어갔다.
세 번째 시합 장소는 하늘 높이 솟은 탑이었다. 검은 탑은 밤과 동화되어 꼭대기까지 제대로 보이지도 않았다. 앞에 마련된 자리에 학생과 교수들이 자리를 잡았고 세 챔피언은 탑의 입구에 나란히 섰다.
시합 방식은 간단하다. 맨 위층에 놓인 트리위저드 컵을 먼저 잡는 이의 승리였다. 누군가 컵을 잡으면 그를 포함한 다른 챔피언도 자연히 바깥으로 나오게 되어 있었다. 챔피언들에겐 마법 신호탄이 하나씩 주어졌다. 도중에 시합을 포기할 경우 터트리는 용도였다. 오스왈드 교장은 안에 뭐가 있는지 자세히 설명하지 않았으나 이제까지 수행한 과제 중 가장 위험하고 어려울 것은 불 보듯 빤했다.
교장과 교수들은 긴장한 기색이 역력했다. 필시 숨은 암살자를 경계하는 것이리라. 그 때문에 세 사람은 위험한 상황을 맞닥뜨릴 경우에 지체 없이 신호탄을 쓰도록 몇 번이나 당부받았다.
들어가는 순서는 앞선 두 시합에서 일등을 차지한 서현이 첫째고 고든이 그 다음, 마리아가 마지막이었다. 서현은 고개를 추켜올리고 천천히 날숨을 흘려보았다. 서리 같은 입김이 차가운 저녁 공기 속으로 은밀히 스며들었다. 마지막으로 세건이 앉은 쪽을 한 번 쳐다본 후, 담담하게 걸음을 옮겼다.
쿵, 문 닫히는 소리가 둔중하게 울려 퍼졌다. 내부는 너무 어두워 한 치 앞을 분간하기 어려웠다.
“루모스 솔렘.”
지팡이에서 쏘아져 나간 빛이 주변을 환하게 밝혔다. 안은 굉장히 넓은데 입구가 있는 층이기 때문인지 특별한 점은 없었다. 서현은 나선형 계단을 따라 올라갔다. 앞을 경계하며 조심조심 움직여 2층에 발끝을 딛기 무섭게 탑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바닥이 빙글빙글 돌고 사방에서 그르렁대며 육중한 뭔가가 맞물리는 소리는 얼마간 이어졌다. 서현은 몸을 낮추고 기다렸다.
잠시 후, 바닥이 멈추고 모든 소음이 잦아들었을 때는 계단이 감쪽같이 사라져 있었다. 역시 목적지까지 순순히 보내주진 않을 듯하다. 탑 벽에 일정한 간격으로 문 다섯 개가 나타나났다. 아무 문이나 열고 들어가 보니 하얀 새 한 마리가 텅 빈 방안을 선회하는 중이었다.
“비페라 에바네스카.”
마법에 맞은 새가 사라지고 깃털이 팔랑팔랑 떨어졌다. 그것에 손대자마자 무형의 힘이 몸을 확 잡아당겼다. 서현은 눈을 질끈 감았다가 떴다. 그새 다른 장소로 이동한 뒤였다.
탑에는 온갖 마법이 걸려 불시에 엉뚱한 장소로 날려 보내거나 계단을 만들고 없애는 등 길을 찾지 못하게 혼란을 주었다. 도대체 지금 내려가는 중인지 올라가는 중인지도 짐작할 수 없었다. 시간이 흘러감에 따라 이렇게 꼭대기까지 갈 수나 있을지 의심이 들었다. 아니, 애초에 나가는 길이 있기나 한가?
차라리 천장을 뚫을까 하고 벽에 마법을 써 보았지만 흠집 하나도 내지 못했다. 아무래도 탑에 준비된 방법 외에는 먹히지 않는 듯했다.
“이거 공포증 생기기 딱 좋은 시합 아니야?”
탑이 몸서리치게 적막해서 서현은 일부러 혼잣말을 중얼거리기도 했다.
그렇게 한참을 헤매다가 다른 층으로 갔을 때였다. 이번에는 바닥에 빈틈없이 깔린 종이비행기가 허공으로 떠올라 일제히 날아들었다. 엄청난 속도였다. 뾰족한 부분이 스칠 때마다 살갗이 찢어졌다.
서현은 불꽃 마법을 써서 태우려 했으나 곧 후회했다. 완전히 연소하기 직전까지 끈질기게 날아오는 바람에 되레 화상을 입을 뻔했다. 결국 디핀도 주문을 써서 일일이 잘라야만 했다. 종이에 베인 상처 때문에 여기저기가 따끔따끔했다.
탑이 다시 움직였다. 이번에는 위로 향하는 계단이 생겼다. 서현은 신중하게 두드려본 다음에야 다음 층으로 올라갔다.
그곳에는 지금까지와 전혀 다른 풍경이 펼쳐져 있었다. 천장은 탑 끝까지 뻥 뚫려서 밤하늘에 휘영청 뜬 보름달이 보였다. 벽에는 수십 개의 계단이 아래에서 위까지 다닥다닥 붙어 계속 좌우로 움직이며 서로 맞춰졌다가 어긋나기를 거듭했다. 난간에 띄엄띄엄 걸린 램프가 이 어지러운 광경을 어렴풋이 비추었다. 그 모습에 시선을 빼앗긴 탓에 서현은 자기 외에 다른 자가 있음을 한발 늦게 알아차렸다.
모든 램프의 불빛이 일시에 꺼졌다. 서현은 소스라치며 인기척이 난 쪽을 돌아보고 지팡이를 앞에 세웠다. 탑 안으로 푸르스름한 달빛이 들어왔으나 아래까지 다다르지 못했다. 어두운 장막을 사이에 두고 흐릿하게 실루엣이 보였다. 서현은 자신을 바라보는 시선이 느꼈다.
“누구지?”
대답은 마법으로 돌아왔다. 마치 인사를 건네듯 가벼운 공격이나 의도는 명확했다.
“스투페파이!”
반격은 허무하도록 간단히 튕겨져 나갔다. 그 후로 대화 한마디 없이 몇 차례 공방을 주고받았다. 서현은 자신이 상대하는 자가 얼마나 대단한 실력의 소유자인지 온몸으로 실감했다. 쏟아지는 공격은 점점 강해졌고 서현은 대개 프로테고 마법을 쓰면서 겨우겨우 피하는 형국이었다. 하지만 그자는 방어 마법을 무력화할 정도로 강했다.
“엑스펠리아무스.”
다른 공격 마법으로 막아내려던 서현은 찰나의 판단으로 재빨리 지면에 몸을 굴렸다. 엄청난 힘에 떠밀려 지팡이가 저 멀리 날아가 벽에 부딪혔다. 손바닥 살이 찢어져 피가 흘렀다. 다급히 몸을 빼지 않았으면 손이 아니라 몸이 나가떨어졌으리라.
등을 돌린 서현은 지팡이가 떨어진 방향으로 달음박질했다. 뒤에서 주문 외우는 목소리가 들렸으나 몸이 변화하는 속도가 훨씬 빨랐다. 전신이 털로 뒤덮이면서 팔다리는 튼튼한 짐승의 네 발로, 입은 날카로운 이빨을 지닌 주둥이로 바뀌었다. 머리에 뾰족한 귀가 솟아났고 엉덩이에 풍성한 꼬리가 생겼다. 움푹 들어간 두 눈동자가 형형하게 빛난다.
사람과는 비교할 수 없이 견고한 다리가 강하게 바닥을 박찼다. 서현은 쏜살같이 달려 지팡이를 입에 물고 움직이는 계단으로 방향을 틀었다. 그를 마법으로 이기기란 불가능했고 신호탄을 터트려도 누가 오기 전에 죽을 판이었다. 차라리 트리위저드 컵을 잡는 편이 나았다.
짐승으로 변화한 지금, 오감은 수십 배 예민해지고 반사 신경은 더 말할 것도 없었다. 그 덕분에 금세 계단을 반이나 올라갔다. 물론 상대방도 마냥 구경하지만은 않았다. 막 착지한 앞발 옆에 폭발 마법이 터져 화상을 입었다. 서현은 얼른 옆으로 물러나 다시 변신하자마자 주문을 외쳤다.
“페트리피쿠스 토탈루스!”
뒤를 쫓던 자가 잠깐 뻣뻣하게 굳었다. 그 틈에 더 높이 올라가 간격을 벌린 후, 아래를 흘끗 내려다보았다. 석화에서 풀린 그는 공격을 멈추고서 가만히 이쪽을 응시하고 있었다.
달빛이 미치는 범위에 들어온 까닭에 서현은 그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창백한 달빛이 어려 더욱 신비롭게 보이는 금발, 은은하게 반짝이는 금안. 한낮에는 태양 같더니 밤의 품에 둘러싸이니 한없이 빛나는 별처럼 보였다. 그가 처음으로 말문을 열었다.
“애니마구스인 줄은 몰랐는데, 늑대?”
“몰랐겠지. 아는 사람은 롯시니뿐이거든, 루드비히 고든. 가면과 로브는 두고 왔나?”
잠시 침묵을 흘려보낸 고든이 입가에 미소를 띤다.
“어떻게 알았지?”
“그때 서린에게 응급처치를 하고 나서 늑대로 변해 냄새를 맡아두었지. 아무리 모습을 감춰도 거기에 남은 흔적은 바로 지워지지 않으니까. 방금 변신했을 때 네게 같은 냄새가 나더군. 여름에 덤스트랭 학생을 죽인 범인도 너인가?”
그러자 고든은 알쏭달쏭한 표정을 지었다.
“그는 아낙스다. 물론 아낙스는 고든이기도 하며 그 반대도 마찬가지지만, 완전히 같지는 않지.”
“…무슨 소리야? 이중인격이란 거야?”
“비슷할지도 모르겠군. 우린 서로가 가지 않는 길을 대신 걷는 존재라고 할까. 지금 순혈을 줄이려는 자는 아낙스이고 난 지켜보는 입장이지만, 만약 아낙스가 방침을 바꾼다면 나 역시 지금과는 다를 거야.”
헛소리할 정신병자로는 안 보였는데, 또 저런 소리를 진지하게 지껄이는 모습이 미친놈으로 보이기도 했다. 금빛 눈을 물끄러미 들여다보아도 가증스러울 만치 맑다. 서현은 천천히 발을 움직여 층계를 오르며 대화를 이어나갔다.
“고든이든 아낙스이든, 내가 알고 싶은 건 목적이야.”
“우리의 목적은 유일해. 피의 균형을 맞추는 것, 아낙스는 오로지 그걸 위해 순혈을 죽이지.”
상상했던 그 어떤 이유와도 달랐다. 서현은 그만 할 말을 잃었다. 차라리 순수하게 순혈을 증오해서 벌인 일이라면 쉽게 이해했을 텐데 균형이라니, 도저히 해석 불가한 외국어를 듣는 기분이었다.
“어처구니없군. 균형을 맞춰서 뭘 하는데?”
“적절한 피의 관리는 한층 강한 마법사를 배양하는 기름진 토지가 된다. 타고난 재능이 실력을 크게 좌우하는 마법사 세계에서 피만큼 중요한 것이 또 있나? 이는 가지치기와 유사하지.”
서현은 분노하지 못했다. 바람 소리를 듣고 화내는 사람은 없다. 지금 꼭 그런 심정이다. 너무 말도 안 돼서 아예 언어로 인식이 안 되는 수준이다. 이 자리에 서린이나 한세건이 있었다면 뭐라고 해줬을까?
“그 말이 옳고 그름을 떠나서 너는 그럴 권리가 없어. 네가 무슨 자격으로 그런 짓을 하지?”
“그런가?”
고든이 가볍게 반문했다. 서현은 그 물음이 내포한 무의미함을 눈치챘다. 그는 자신이 하는 말에 단 1그램의 무게도 두지 않았다. 애당초 대화다운 대화를 할 마음이 없는 자를 상대로 비판하고 설득하려 애쓴들 헛수고였다. 하긴, 말 몇 마디로 생각이 바뀔 사람 같았으면 그런 짓을 저지르기도 전에 알아서 마음을 고쳐먹었으리라. 서현은 이야기를 끝내기로 하고 입을 다물었다. 고든이 역시 지팡이를 쓰다듬었다.
“사실, 오늘은 널 죽일 생각이 없었어. 아낙스가 가면을 가져오지 않은 이유도 그 때문이지. 하지만 우리 정체를 알게 되었으니 보내줄 수가 없게 되었군.”
그가 말하는 방식 중 딱 하나, 네가 이해하라는 둥 허튼소리를 안 한다는 점만은 마음에 들었다. 꼭대기를 향해 내달리기 시작하자 고든은 지극히 평온한 얼굴로 금지된 주문을 외우려 했다. 무슨 수로도 막을 방도가 없기에 서현은 그가 발 디딘 계단을 노렸다.
“글리세오!”
계단이 미끄럼틀로 변해 고든은 주문을 끝맺지 못하고 넘어졌다. 고든은 제 마법이 막혀도 담담했다. 마법 실력으로나 태도나 도무지 열일곱 먹은 소년으로는 안 보였다. 그를 볼 때마다 이질감을 느꼈던 까닭이 바로 은연중에 드러나는 고든 특유의 비인간적인 분위기 때문이었다.
몸을 띄운 고든이 다른 계단에 내리자마자 마법으로 다리를 잡아챘다. 넘어져서 발목을 접질린 와중에도 서현은 얼른 옵스큐로 마법으로 고든의 눈에 안대를 씌웠다. 밧줄을 자르고 늑대로 변화해 계속해서 올라갔다. 이제 빛나는 트리위저드 컵이 손에 잡힐 듯이 가까워졌다.
그때, 갑자기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서현은 뒤를 확인했다가 기겁했다. 거대한 뱀이 계단과 벽을 새하얀 몸통으로 휘감고 자신을 집어삼키려 하고 있었다. 유물처럼 고풍스러운 금빛 홍채와 살의를 제외한 모든 감정이 제거된 눈빛. 호수 아래에서 마리아를 죽이려고 했던 그 백사가 고든이었다.
쾅―!
뱀이 머리를 들이박아 숫제 계단을 박살 내버렸다. 간발의 차로 피하며 사람으로 변했으나 부서진 계단 끝에 매달린 형편이었다. 돌 부스러기에 맞아 이마에서 피가 흘렀다. 서현은 손톱이 부러지도록 힘을 쥐어짜서 기어 올라갔다. 뱀이 다시 돌진했다.
“봄바르다 맥시마!”
벌어진 뱀의 입속에서 불꽃이 폭발했다. 괴로운 비명도 잠시, 뱀은 허탈하리만치 멀쩡한 모습으로 거듭 달려들었다. 다시 폭파 마법을 사용해 뱀의 몸통을 지탱하는 아래쪽 계단을 날렸다. 고든이 주춤하는 순간이 기회였다. 서현은 몸을 날려 트리위저드 컵을 움켜쥐었다.
눈 깜짝할 사이에 탑의 입구 앞으로 풍경이 바뀌었다. 서현은 숨을 헐떡이며 주위를 돌아보았다. 놀란 표정으로 벌떡 일어서는 교수들, 머리가 헝클어진 채로 옆에 떨어진 마리아, 웅성거리는 학생들, 그 사이에서 눈을 부릅뜨고 쳐다보는 한세건. 그러나 고든은 어디에도 안 보였다. 서현은 이쪽으로 달려온 교장에게 탑을 가리켜 보였다.
“고든을 잡아야 해요.”
“갑자기 무슨 소리냐? 그러고 보니 고든은?”
“그가 바로 순혈을 노리는 자입니다. 아직 탑 안에 있어요.”
사태를 파악한 오스왈드 교장이 교수 몇 명과 함께 탑 안으로 들어갔다.
서현은 몸을 일으키다가 힘이 빠져 그대로 벌렁 드러누웠다. 온몸이 욱신욱신했다. 만월은 탑 안에서 벌어진 싸움을 다 지켜보았으면서도 밤하늘을 어깨에 두르고 고요하게 대지를 굽어볼 뿐이었다. 남은 교수들이 뭐라고 말 거는 소리가 들렸으나 손가락 까딱할 힘조차 남아 있지 않았다. 나머지는 교수들에게 맡겨둔 채 쉬고만 싶었다. 눈꺼풀로 밤을 떠받치고 있노라니 몹시도 힘겨웠다.
5. 침묵의 방
서현이 깨어난 장소는 폼프리 부인의 병동이었다. 자잘한 상처는 치료한 후였다. 육체적 피로 때문에 잠들었을 뿐이라 접질린 발목을 고치고 나서는 더 침대에 누워있을 이유가 없었다. 때마침 서린도 완전히 회복해 자리를 털고 일어나 형제는 나란히 병동을 나서게 되었다.
트리위저드 우승자는, 당연하게도 서현이었다. 마지막 시합 날, 교수들이 탑 내부를 샅샅이 뒤졌음에도 고든은 어디론가 가버린 후였고 그의 행적은 묘연했다. 비단 고든만이 아니라 그의 동생인 소년도 함께 홀연히 모습을 감추었다. 학교는 아직 고든에 관한 사실을 함구하고 있었다. 추후 마법부의 결정에 따라 방침이 정해질 것이다.
상황이 일단락 지어진 뒤, 보바통과 덤스트랭은 학교로 돌아갔다. 그리고 호그와트는 트리위저드 대회로 미뤄졌던 2주의 크리스마스 휴일을 맞았다. 학생들은 저마다 급행 기차를 타고 집으로 돌아갔고 몇몇은 학교에 남았다. 한세건도 그 중 한 명이었다. 양친 대신 돌봐주는 후원자가 집을 비울 예정이라 오지 않아도 된다는 연락을 한 모양이다.
베르게네프 형제는 늘 그의 후원자가 궁금했지만 세건의 입은 무거웠다. 둘이 알아낸 사실이라고는 후원자가 김성희 교수와 잘 아는 사이라 그녀가 대신 세건을 신경 써준다는 것뿐이다. 둘은 세건이 학교에 남는다는 소식을 듣고 집에 다녀오려는 예정을 변경했다. 원칙상 미리 명단을 작성한 학생만 학교에서 휴일을 보내게 되어 있지만, 형제는 아직 몸이 다 낫지 않은 걸 핑계로 눌러앉을 수 있었다. 세건은 쉬는 날까지 귀찮게 군다며 볼멘소리를 하면서도 진심으로 싫어하는 기색은 아니었다.
“참, 상금은 어디다 쓸 거야?”
연회장에 앉아 저녁을 먹던 중, 서린이 눈을 빛내며 물었다. 그러고 보니 우승 상금으로 무려 1천 갈레온을 받았다. 서현은 따뜻한 치킨 스튜를 꿀꺽 삼키고 대답했다.
“그린고트 은행에 넣을 건데?”
“뭐? 그걸 하나도 안 쓰고?”
서린은 어떻게 그런 끔찍한 일이 있을 수 있냐는 듯 황망한 표정이었다. 암만 그래도 기껏해야 서현은 올리밴더스에서 새 마법 지팡이를 사는 정도밖에 안 떠올랐다. 하지만 지금 사용하는 지팡이와 호흡이 잘 맞아서 굳이 바꿀 필요성도 못 느꼈다.
느릅나무와 유니콘 털을 재료로 만든 서현의 지팡이는 나무랄 데 없이 좋은 파트너였다. 단 한 가지 흠이라면 다른 지팡이에 비해 덜 튼튼하다는 건데, 고든과의 싸움도 잘 버텨주었을 정도니 흠이랄 것도 아니다.
“그럼 뭘 해? 쓸 데가 어디 있다고.”
“와, 나처럼 방탕한 미소년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소린데? 쓸 데가 없긴 왜 없어? 늦었지만 나랑 세건 형한테 크리스마스 선물이라도 줘야지. 우리가 그동안 얼마나 고생했는데.”
“한세건은 몰라도 네가 뭘 고생해.”
“지금 편드는 거야? 어휴, 이래서 형제 있어 봐야 소용없다니깐.”
서현도 서린이 나름대로 신경 써준 걸 알면서 한 말이었다. 핏줄이니까 이런 농담도 할 수 있는 거다. 그러나 서린이 과장되게 서운한 시늉을 하며 쉴 새 없이 꿍얼거리는 통에 기어코 원하는 건 뭐든지 사주겠다는 약속을 해야 했다.
서현은 묵묵히 책을 들여다보는 세건에게 시선을 옮겼다. 그는 제 옆을 오가는 대화를 다 들었을 텐데 관심은 고사하고 눈짓 한 번 안 주었다.
“당신은?”
“뭐가.”
“필요한 거 없냐고.”
“없어. 있어도 내가 산다.”
예의상 한 번 사양할 한세건이 아니니 없다면 없는 건데…….
“아, 그래. 빗자루 최신형으로 선물해줄까?”
딱 잘라 거절하니 아쉬워서 그렇게 물었다. 한세건은 저 얌전한 얼굴로 희한하게 속도광이었다. 빠른 빗자루라면 사족을 못 쓰고 좋아했다. 오로지 빗자루를 타기 위해 래번클로 퀴디치 팀에 들어간 위인이니 말 다했다.
역시 이 제안은 솔깃했던지 세건이 슬쩍 눈을 마주쳤다. 인상을 찌푸리고 잠깐 갈등을 거친 그가 이윽고 한숨을 내쉰다.
“됐어. 네 거지 같은 옷이나 버리고 새로 사라.”
한세건이 잠깐이라도 망설였다는 건 정말로 갖고 싶다는 뜻인데 기어이 내치다니, 하여간 빚지는 건 지독하게 싫어한다. 세건이 옷을 걸고넘어지자마자 서린이 약삭빠르게 끼어들었다.
“맞아, 옷이나 몇 벌 사러 가. 내가 봐도 좀 그래.”
서현은 자신의 헐렁한 후드티셔츠와 물 빠진 청바지를 번갈아 보았다.
“옷이 뭐가 어떻다는 거야. 몸만 가리면 그만이지.”
“야만인이냐? 그럴 거면 짐승 가죽으로 가릴 데만 가리고 돌아다니지? 넌 그냥 사복 입지 말고 교복만 입고 다녀라.”
서현은 됐다며 손을 휘휘 내젓고 부지런히 스튜를 입으로 날랐다. 매번 옷 얘기만 나오면 서린이고 한세건이고 공격을 퍼부어서 진절머리가 났다.
그날 자정, 셋은 달의 방에 모였다. 고든이 물속으로 도망쳤다는 사실을 알게 된 후부터 한세건은 또 다른 통로를 찾으려 애썼다. 그는 래번클로의 수석답게 며칠간 밤만 되면 달의 방에 처박혀 수수께끼 풀기에 집중했다. 그러다 마침내 무언가를 알아냈는지 형제를 소집한 것이다.
그는 시원스럽게 설명을 생략하고 다짜고짜 따라오라며 물속에 잠수했다.
“한겨울에 벌써 세 번째 입수라니.”
서현은 투덜거리면서도 세건의 뒤를 따랐다. 루모스 마법으로 빛을 밝힌 세건이 바닥 어딘가를 비추어 가리켰다. 제대로 살펴볼 일이 없어 몰랐는데 거기에도 문자가 있었다. Per amica silentia lunae. 달의 방 돌바닥 중앙에 새겨진 것과 같았다.
같은 방식으로 글귀를 따라 쓰자 바닥 일부가 좌우로 열렸다. 작고 네모난 공간에 황금 열쇠가 들어 있었다. 세건이 열쇠를 쥐자마자 사라졌다. 포트키였다. 서현은 서린을 먼저 보내고 마지막으로 이동했다.
세 사람은 돔 형태인 작은 방에 모였다. 바닥은 발목이 잠길 만큼 물이 찰랑거렸고 천장에는 달처럼 푸르고 둥근 램프가 걸려 있다. 크기는 훨씬 작아도 달의 방과 흡사한 분위기다. 방 가운데 대리석 단상에는 휘황찬란한 금빛 관이 놓여 있었다. 서린이 조심스럽게 말문을 열었다.
“저거 내가 생각하는 그게 맞지?”
“아마도? 한세건, 당신은 열어봤어?”
“그래. 시체는 없으니까 안심해. 아니, 없는 게 더 문제지.”
세건은 거침없이 관 뚜껑을 열었다. 비어있다는 말을 들어도 께름칙해서 서현은 천천히 다가가 안을 들여다보았다. 붉은색 푹신한 누빔 쿠션이 깔린 것 외에는 머리카락 한 올조차 없다. 관 옆면에 또박또박한 필체로 글씨가 쓰여 있다. 천천히 글귀를 읊는 서린의 목소리가 나지막이 울렸다.
“테트라 아낙스가 이곳에서 긴 침묵에 빠지다.”
서현은 아연해서 세건과 서린을 쳐다보았다. 탑에서 고든과 나눈 대화를 들은 바 있는 두 사람도 심각한 표정이다.
“설마 그 아낙스?”
“벼락을 수백 번 맞을 확률로 우연히 겹친 게 아니라면.”
세건의 확언에 서린은 입술을 앙다물고 고개를 저었다.
“아무도 죽었다가 살아날 순 없어.”
“그가 부활 마법을 만들었을지 누가 장담하지? 그리고 여긴 침묵에 빠졌다고 했지 죽었다고 하진 않았어. 긴 잠이 드는 마법을 걸었다가 깨어났을 가능성을 간과할 수 없지.”
방안에 폐를 압박하는 침묵이 고였다. 어느덧 등에 식은땀이 흐르는 것을 뒤늦게 알아차렸다.
“만약 정말로 아낙스, 그러니까 고든이 여기 잠들었다가 깨어난 거라면 이곳과 달의 방을 만든 사람은…….”
“그놈이겠지.”
미약하게 신음을 흘린 서현은 이마를 짚었다. 이제는 고든이 진정 열일곱인지도 의심이 들었다. 그들의 가정이 들어맞는다면 깨어났을 때 고든은 그 모습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덤스트랭에는 어떻게 들어갔을까? 동생이라는 녀석은 또 뭐고? 파헤칠수록 골이 아팠다.
어쨌거나 이는 보통 일이 아니었다. 학생 신분인 셋이 추적하기엔 너무도 큰 사건이다.
“이거 교장 선생님께 말씀드려야겠지?”
“아마도.”
“좋아, 이 건은 어른들에게 맡기자. 당분간 신경 쓰고 싶지도 않아. 우린 남은 휴일이나 즐기자고.”
트리위저드 시합에 살인자의 등장까지, 짧은 사이에 많은 일이 있었다. 서린도 고개를 끄덕였다.
“동감이야. 으, 쫄딱 젖어서 추워 죽겠네. 여기선 어떻게 나가?”
“몰라.”
한세건이 낯빛 하나 안 바꾸고 당당하게 선언했다. 형제는 얼이 빠져서 그를 멀거니 쳐다보았다. 설마, 아니겠지.
“모른다니? 당신은 어떻게 나갔는데?”
“모른다고. 지난번에도 방법을 몰라서 헤매는 도중에 갑자기 빠져나갔어.”
“저기, 형, 그럼 우린 어떡하라고?”
서린은 숫제 울 것 같은 표정이었다. 서현으로 말할 것 같으면, 기운이 빠져 뭐라고 대꾸할 힘도 없었다. 자칫 잘못했다간 꼼짝없이 갇혀서 죽을 장소로 데려온 주제에 저 뻔뻔한 얼굴을 보라. 그는 태연하게 콧방귀까지 뀌며 되레 서현과 서린을 흘겨보았다.
“찾아보면 될 거 아냐. 왜, 자신 없나 보지? 그래도 머리가 둘이니 조금이나마 도움이 될 거라 여겼던 내가 멍청했군.”
이 와중에 도발이라니. 서현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관 뚜껑을 도로 덮었다. 고든과 아낙스에 관한 수수께끼는 한동안 침묵에 묻어 두고 당장은 여기서 나갈 방법이나 궁리해야 할 듯하다.
쿵. 육중한 금속 뚜껑이 굳게 닫혔다. 주인 없는 황금색 관은 그 무거운 입을 굳게 닫은 채, 안에 품은 비밀을 축축한 어둠 속에 감추었다. 그것이 온전히 세상에 밝혀지기까지는 더 기나긴 시간이 필요하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