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마 누구도 우릴 축복하지 않겠지.’
‘그러니 우리가 서로를 축복하도록 하자.’
‘기쁠 때나 슬플 때나 가까울 때나 멀 때나’
‘네가 나로부터 행복하기를.’
올 겨울은 참으로 시렸지.
나는 유난히 벽난로 앞에서 자주 시간을 보내며 정성껏 손을 데웠어. 온기를 얼마든지 전할 만치 따뜻해지고 나면 미소가 절로 지어지더라. 하지만 웃음은 곧 장작 아래에 쌓여 가는 재처럼 가볍고도 씁쓸하게 사위곤 해. 내 손은 이렇게나 따스한데 감싸 잡고서 찬기를 녹여 주어야 할 네 손은 여기에 없으니까. 그래도 겨우내 부지런히 손을 데우며 지낸 까닭은 내가 그저 인간이라 미래를 예견하지 못해서야. 네가 새벽에 몰래 내리는 눈처럼 올 가능성이 지극히 희박함을 알아. 같은 날, 같은 시각, 같은 별에서 서로의 눈동자를 발견할 확률보다도 낮음을 알지만, 만에 하나 차가운 손으로 나타난 너를 만난 순간에 내게 충분한 온도가 없다면 두고두고 후회할 것 같았거든.
이런 내 노력을 가상하게 여겼을까. 아니면 무모한 희망에 전념한다며 나무라고 싶었을까. 너는 더러 꿈에서나 만나러 왔고 내가 기다렸다는 듯이 손 잡으면 화로 같은 눈으로 물끄러미 응시했지. 꿈에서도 현실처럼 과묵한 네게 조금이라도 서운치 않았다면 거짓말이지만 한편으로는 기뻤어. 우리 가운데 주재하는 침묵은 너무도 친숙한 거였으니까. 무엇보다도 너와 조용히 손을 맞잡고 있으면 반드시 떠오르거든. 그날, 그때, 그곳.
그런 꿈을 꾼 날이면 으레 말을 타고 최대한 멀리까지 나아가. 어느날은 종종 너와 더불어 보았던 일출을 쫓아 동쪽으로 갔고, 어느날은 너를 빼닮은 석양이 드리워진 서쪽으로 갔고, 동문수학했던 학교가 있는 남쪽이나 네 머리칼처럼 파란 바다가 넘실거릴 북쪽일 때도 있지. 나를 소공작이게 하는 전부를 뒤에 남기고선 더 가지 못하는 지점에 이르러서야 간신히 멈춰. 거기서 나는 오직 우리의 간격만을 열렬하게 헤아리고 어쩌면 달려온 거리만큼 네가 가까워졌다고 느껴. 일부러 하얀 입김을 오래오래 피워 올리는 이유도 그래서야. 바람이 가져간 내 숨이 완전하게 소실되기 이전에 혹여 네가 있는 데까지 도달할 수도 있겠다고 말하거든, 너는 내 허황된 상상에 미소를 머금을까.
오해하지는 마. 내가 그렇게까지 터무니없는 환상에 빠진 건 아니야. 단지 아쉬우니까, 더욱더욱 멀리 가지 못하고 되돌아가기 서운해서 주저하지. 승마 장갑을 낀 손이 시려서 못 견딜 즈음에야 결국 말머리를 돌려. 너는 입 발린 말을 좋아하지 않으니 솔직해질게. 겨울엔 너무 추워서 빨리 돌아가는 편이야. 한 번은 감기에 걸려 된통 앓았거든. 며칠이나 열이 끓어 주변을 걱정시켰어.
그래, 열 때문에 꼼짝하지 못하는 동안에도 생각은 어김없이 네게로 향해 있었지. 어찌 안 그럴 수 있겠어. 언젠가 학교에서 앓아 누웠던 때 밤이 깊도록 이마에 계속 얹어 주었던 네 서늘한 손을 생생히 기억하는데 어떻게 그립지 않겠어. 아픈 데다가 애가 끓었던 탓에 부끄럽게도 눈물이 약간 맺혔음을 고백할게. 나중에 듣고 알았는데 내가 끙끙 앓으며 네 이름을 부르며 흐느꼈다지 뭐야. 고열만 아니었던들 그토록 쉽게 눈시울을 붉히지 않았을 거야. 나는 대부분의 시간을 잘 견디고 있고, 대체로 괜찮게 지내. 나는 널 떠올리며 눈물 떨어뜨리는 사람은 아닌걸. 때론 막을 도리가 없는 애상이 폭풍으로 나를 쓸어가지만 훨씬 많은 순간이 웃음으로 채워져 있어. 웃음의 절반은 손가락에 낀 것에서 기인하고 말이야. 그날 그곳에서 우리가 손 잡고 맞보지 않았으면 어쩔 뻔했니?
물론 내 왼손 약지에서 반지를 발견하는 사람은 누구나 놀라곤 해. 심지어 여기엔 값싼 보석 한 알도 박히지 않았으니까. 여간해서는 빙그레 미소하여 그들의 의문을 정중히 흘리지. 각오했다시피 모두에게 그럴 수는 없었어. 부모님께선 나를 아주 오래 설득하셨고 내 고집에 한 발짝 물러나 주신 지금도 탐탁하게 여기시지 않아. 그분들의 눈길이 왼손에 닿을 적마다 나는 별수없이 깊은 죄책감을 느껴. 그건 내가 소공작으로서 두 분 기대에 부응하는 배우자를 데리고 오지 못해서가 아니었어. 두 분께 죄송한 마음은 진심이지만 나는 너에게 미안한 거야.
아무도 네 반지를 이해하지 못할까 봐. 누구도 네가 낀 반지를 모른 척 보아 넘겨 주지 않을까 봐. 네 왼손에 자리 잡은 반지를 흘깃거리는 눈빛에서 염려 대신 경멸과 비난이 있을까 봐. 그래서 반지가 더없이 짐스러운데 차마 빼지 못하고 있을까 봐. 혹은 빼고 나서 나한테 부채감을 갖고 있을까 봐. 너에게 그러한 번민을 떠안기고 나만 감히 행복한 것일까 봐.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두려움은 종국에 나를 사뭇 보잘것없는 사람으로 축소시켜. 너도 알다시피 내가 퍽 자신감이 부족하니까. 그럴 땐 갖가지 부정적인 감정이 마음을 갉아먹지. 후회도 포함됐을지 궁금하니? 글쎄, 맹세코 단 한 번도 후회하지 않았다고 말하기는 얼마나 쉬울 것이며 오직 낙관뿐으로 고뇌를 압도하겠다 말하기는 또 얼마나 편리한지. 나는 네게 가장 어려운 형식, 진솔함을 택하여 얘기하고 싶어. 밀어를 무작정 주워섬기거나 미몽에 빠진 애송이처럼 허풍을 떨고 싶지 않아. 따라서 난 이렇게 대답할게. 후회의 순간은 있을지언정 내겐 믿음이 있노라고.
그날 말이야, 언제 떠올려도 완벽했다고 회상할 하루를 만들 요량이었는데, 기억하니? 우리가 크게 말다툼을 했던 거. 너는 내가 어렵사리 꺼낸 청원을 섣부른 결정이라 일축했고 나는 멋대로 결별을 예정한 사람처럼 구는 건 비겁하다며 너를 몰아붙였지. 미숙했던 표현으로 서로를 상처 입히고 나서 우리는 냉랭한 얼굴로 한참 입도 벙긋하지 않았어. 나는 냉담한 네 태도가 섭섭했는데 네가 기대에 어긋나는 말을 했다고 똑같이 쏘아붙인 나도 그만큼 밉더라.
감정이 가라앉고 나서야 내가 잘못했다는 생각이 들었지. 네겐 나보다 더 많은 제약과 고난이 있을 것인데 네 의사를 묻지 않고 멋대로 굴었으니까. 바보 같이, 사과 한 마디를 건네는 것이 그날따라 왜 그토록 어려웠을까? 긴 시간을 헛되이 소비한 후에야 말할 수 있었지.
‘미안해. 내가 고집을 부렸어.’
너는 살짝 놀란 눈으로 나를 돌아보았지. 입을 달싹인 네가 꺼낸 말에 나는 더 놀랐고.
‘네 뜻대로 하자.’
네가 말을 번복하는 사람은 아니지만 믿기지 않아서 다섯 번이나 거듭 확인했는데 너는 귀찮은 내색도 없이 꼬박꼬박 답해 주었어. 너무 기뻐서 붙잡았던 네 손이 얼음장보다 차가워서 소스라쳤던 기억이 또렷하네. 내게 그 답을 돌려주기까지 넌 얼마나 고민하고 또 긴장했을까. 너를 재촉해 가며 미리 봐 두었던 사원에 도착했을 때는 벌써 별이 뜨기 시작하는 저녁이었지. 내 계획은 햇살이 가장 밝을 정오에 오는 거였는데 말이야. 왜냐하면 사원에 천장에 동그랗게 뚫린 구멍으로 햇빛이 쏟아지면 무척 아름다운 곳이었거든. 하지만 저녁이라 아쉽지는 않았어. 총총한 별빛이 눈송이처럼 고요하게 내려와 사원 안에서 졸졸 흐르는 샘물의 비늘이 되었고, 함께 밝혀 놓은 촛불이 가는 숨결에 떨리면 우리의 그림자는 몸을 겹친 채 춤추었고, 무엇보다도 너는 어스름부터 새벽까지 제일 빛나는 눈을 가졌으니 말이야. 사랑을 이뤄준다는 신을 모셨다는 거긴 참 연가(戀歌)처럼 우미한 사원이지.
우리는 거창한 의식 없이 반지를 교환했어. 여러 말과 그럴듯한 동작은 네게 허례허식에 불과할 테고, 나로서는 하나하나 의례를 챙겨서 네게 더 부담을 주고 싶지 않았으니까. 반지를 낀 너는 오래 침묵했어. 행여 후회하는 것일까? 내 기분을 좋게 해주려고 억지로 맞춰 준 것일까? 불안하면서도 묻지 못한 이유는 상념에 잠긴 네 얼굴이 내가 일생 보았던 것, 앞으로 살아가며 보게 될 것을 통틀어 가장 아름다웠기 때문이야.
‘아마 누구도 우릴 축복하지 않겠지.’
네가 그렇게 말했을 때 나는 심장이 부서지는 줄만 알았어. 그렇구나. 너도 누군가에게 축복을 바랄 수 있는 사람이었는데. 누구라도 초대할걸. 부탁한다면 친구 중 두엇은 온전히 축하하는 박수를 쳐 주었을 거고, 아니면 낯 몰라도 마음씨 좋은 사제라도 초대하면 좋았을 텐데. 안절부절못하는 나에게 네가 지어 보인 미소는 저 밤하늘에 뜬 초승달처럼 선연했어.
‘그러니 우리가 서로를 축복하도록 하자.’
‘어떤 축복?’
‘네가 나로부터 행복하길.’
너는 짐작이나 했을까. 그 말을 들은 순간, 나는 하마터면 네 앞에 무릎을 꿇을 뻔했다는 걸 말이야. 목이 메었지만 얼른 가다듬고 말했지. 너 역시 나로부터 행복하기를. 그러고는 견딜 수 없어 네 왼손에 끼워진 반지에 키스하고 말았어. 그래, 너는 어색하게 머뭇거리며 이런 건 하지 말라며 손을 거둬 갔지만, 내가 무릎까지 안 꿇은 게 어디니? 나는 서늘한 네 손을 다시 가져가서 오랫동안 잡고 있었고, 우린 그렇게 사원에서 별들과 더불어 긴 시간을 보냈지.
그게 바로 내가 가진 믿음이야. 우리가 서로를 축복했던 그 마음에 대한 믿음.
지난밤엔 가랑비가 내렸어. 언 땅은 서서히 녹고 눈 깜짝할 새에 꽃 피는 계절이 올 거야. 빗소리의 애가를 들으며 난롯가에 앉은 나는 우리의 반지를 문지르며 사원에서의 네 옆얼굴을 무수히 되새겼지. 내 추웠던 겨울이 이러한 시간으로 가득차 있음을 네가 알아 주어야 할 텐데. 네 겨울은 어떠했니. 내게서 비롯된 마음으로 기쁘기도 했고 또 슬프기도 했어? 내게 조금은 가까이 오기도 했고 어느날은 많이 멀어지기도 했을까? 나는 봄이 오면 너를 떠올리며 더 웃으려고 해. 말을 타면 훨씬 먼 거리를 나아가 네게 한 뼘이나마 가까워질 수도 있겠지.
그러니 란지에, 나뭇가지에서 새순이 움트듯 우리가 다시 한 번 서로를 축복하도록 하자.
기쁠 때나 슬플 때나 가까울 때나 멀 때나.
계절이 바뀌거나 별들이 흘러가거나 달이 이울거나 차거나.
네가 나로부터, 그리고 내가 너로부터 끝내 행복하기를.
사랑을 담아서, 조슈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