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란지보리] 파도

란지에 사망 소재 주의


공화국이 들어선 후의 혼란이 서서히 잦아들던 무렵이었다. 여전히 남부 전원의 칼츠 저택에서 지내던 보리스는 이엔의 편지를 받고 켈티카로 올라왔다. 약속 장소에서 기다리던 이엔은 창백하고 어두운 낯빛이었다. 그녀는 으레 나눌 법한 인사말 대신 고개를 살짝 끄덕여 아는 체했다. 심상찮은 분위기를 느끼고 보리스 또한 말을 삼갔다. 오랫동안 침묵한 끝에 이엔이 다문 입술을 뗐다.

“란지에가 죽었어.”

보리스는 그녀가 하는 말을 이해할 수 없었다. 죽다니, 누가? 란지에 로젠크란츠가? 부디 심한 농담이었기를 바라며 묵묵히 응시했으나 이엔은 입술을 앙다물고 고개를 숙였다. 도저히 현실감이 들지 않았다. 뭉게구름이 뜬 하늘, 거리를 오가는 사람들, 순찰 중인 경비대. 여상한 풍경이 산책을 나온 숙녀처럼 옆을 지나가고 어린애들이 왁자하게 떠들며 골목을 누비는 소음도 구태의연하게 귀에 들어왔다. 방금 부고를 받은 것이 맞는지 의심스러울 정도로 세상은 기름칠한 바퀴처럼 순조로이 굴러가고 있었다. 보리스는 얼굴을 쓸어내렸다.

“어떻게…….”

그 한마디만이 가까스로 흘러나갔다. 이엔이 한층 가라앉은 목소리로 설명했다. 그녀의 말은 무척 느렸다. 듣는 이를 배려하기 위함이 아니라 감정이 북받쳐서 제대로 이야기하기 어려운 탓으로 보였다. 때때로 말을 멈추었으나 보리스는 끝까지 재촉하지 않았다.

폭우가 내리는 밤, 란지에는 잠시 볼일이 있다며 나갔다가 돌아오지 않았다. 그는 신(新) 공화국에서 상징적인 인물이었으므로 말도 없이 사라진 것은 보통 일이 아니었다. 아침에 비가 그치고 나서 대대적으로 수색에 나섰고 머잖아 블루엣 강가에서 그의 소지품이 발견되었다. 그래서 하류로 내려가며 그를 찾아보았으나 허사였고, 그게 벌써 한 달 전이었다. 살아 있다면 어떻게든 연락했을 사람이다. 아무런 소식도 없다는 사실이 무엇을 의미하겠는가.

“결국 시체도 못 찾았지. 왜 거기까지 갔는지 알 수 없지만…정황상 사고사로 결론이 났어. 비 때문에 강이 범람했으니 실수로 빠졌다면 그대로 휩쓸렸을 거야.”

한 달 동안에 일어난 사건이 고작 몇 분짜리 설명에 담겨 쏟아졌다. 란지에의 죽음이 단조로운 몇 마디로 대체되었지만 여전히 생판 남의 이야기를 듣는 것처럼 무덤덤했다.

“발견된 소지품이 뭐지?”

심지어 감쳐문 입술을 비집고 나간 질문 또한 더할 나위 없이 건조했다. 문득, 보리스는 환멸을 느꼈다.

“한 달 전에 기념주화가 발행됐을 때, 내가 작은 케이스에 넣어서 줬는데 그게 떨어져 있었어.”

새로운 공화정부가 수립된 날을 기념하여 찍어낸 주화는 각 도시에 뿌리다시피 했으므로 요즘에는 누가 갖고 있어도 특별하지 않았다. 본래 란지에는 물건에 애착을 갖는 사람이 아니다. 시기가 시기인 만큼, 기념주화를 갖고 다녔다고 해서 큰 의미를 두었다고 추측하기는 어려웠다. 그러나 남은 자들에게는 그 주화가 유품이 되었다. 이엔은 그것을 란즈미에게 주었다고 말했다.

보리스는 이엔과 헤어져 블루엣 강으로 향했다. 걸으면서도 걷고 있다는 실감이 나지 않았다. 주변의 모든 것과 유리되어 그저 어디론가 떠내려가는 듯하다. 기실, 란지에의 죽음을 염두에 두고 살아온 세월은 무척 길었다. 언제 어디서 목숨을 잃을지 모를 위험 속에서 사는 사람이었으니 당연하다. 그는 독을 마실 수도 있었고, 칼에 찔려 쓰러질 수도 있었고, 왕국군에게 잡혀 고문 끝에 숨질 수도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이토록 허무한 마지막은 한 번도 상상하지 못했다. 죽음에 무게가 없다고 할지라도 그 형태가 다 같지는 않았다. 란지에가 가져야 할 죽음은 이런 모양이 아니었다.

강 둔치에 우두커니 선 보리스는 언제 사람을 삼켰냐는 양 구태의연하게 흐르는 강물을 내려다보았다. 차라리 확실하게 암살로 밝혀졌더라면 그를 죽인 자를 향해 분노하기라도 할 텐데, 시푸른 물살을 유유히 출렁거리는 블루엣 강에게 무슨 복수를 하랴. 그렇다면 슬픔은? 란지에를 데려간 것이 강이기 때문에 분노하지 못한다고 한들, 슬픔과는 무관하건만 대관절 비탄과 애통은 어디로 갔단 말인가. 생전에 란지에가 원했던 것을 줄 수 있음에도 그러지 못했으니 하다못해 강물에 눈물 한 방울이라도 더할 의무가 있었다. 그러나 보리스는 이런 순간에 이르러서도 무엇 하나 마땅히 건넬 수가 없었다.

강바람의 거친 조롱에 머리카락이 가닥가닥 나달거리며 시야를 어지럽혔다. 흐르는 강을 하염없이 관망하는 동안 왜, 라는 질문만이 계속 뇌리를 맴돌았다. 왜 지금. 왜 그렇게. 왜. 자신도 모르는 사이, 땅에 붙박인 발이 느릿느릿 강을 따라가기 시작했다. 보리스는 란지에를 마지막으로 만난 날을 똑똑히 기억했다. 체첼이 다스리는 아노마라드 왕조가 무너지고 얼마 안 지났을 때였다. 어수선한 분위기를 피해서 루시안과 평화로운 바닷가 마을에서 한가로운 휴가를 보내고 있었다. 그들은 작은 집을 빌려서 머물고 있었는데, 한밤중에 란지에가 문을 두드렸다. 네냐플을 졸업한 후, 무려 오 년 만의 재회였다.

여느 친구처럼 한 번의 악수, 한 번의 포옹, 한마디 인사가 두 사람의 이별이었다. 남달리 아름답거나 엉망진창인 면은 조금도 없이 평범했다. 다만, 그들은 친구가 아니었으므로 결코 추억으로 되새길 순간이 못 되었다. 무슨 단어로 관계를 명명해야 좋을지 오랫동안 고민했다. 하지만 졸업하고 한참이 지난 뒤에도 추상적인 이름만이 어슬렁거릴 뿐이었다.

항상 란지에가 조금 거북했으며 그는 곱절은 더 불편해했다. 그러나 그날 찾아온 란지에는 달랐다. 얼굴을 마주할 적마다 공공연하고 완고하게 내비치던 감정의 형상이 완전하게 배제되어 있었다. 시간이 그로 하여금 마음을 선명히 뒤덮었던 색깔을 바래게 하였는지, 아니면 다른 까닭이 있었는지 그것은 알 수 없었다.

보리스는 강변 끄트머리에 주저앉았다. 그날이 지나고서도 란지에가 무슨 생각으로 찾아왔는지 몰랐지만, 생의 마지막 만남이라 영원히 모른 채 살았더라도 괜찮았다. 란지에만 살아있다면 아무렴 어떻겠는가, 살아있다면. 종이에 베인 상처에서 핏물이 배어 나오듯, 가슴속에서 탄식이 희미하게 비쳤다. 무언가 목구멍으로 울컥 치밀어 올라서 무릎을 끌어안고 얼굴을 묻었다. 그러나 흐르는 물소리가 파도처럼 밀려와 제멋대로 서러움을 쓸어갔다. 모래밭에 쓰인 글씨처럼 하찮은 감정.

“저기요, 괜찮아요?”

무형의 물속으로 침잠하던 보리스는 고개를 번쩍 들었다. 바지에 장화를 신고 소매를 걷어붙인 여성이 걱정스레 내려다보고 있었다.

“아까부터 봤는데 얼굴이 안 좋아 보여서. 무슨 일인지 모르겠지만 나쁜 마음은 먹지 말고요.”

“아까부터…?”

“저기서 낚시하고 있었거든요.”

저만치 떨어진 곳에 낚싯대와 양동이가 놓여 있었다. 보리스는 몸을 일으켜 세웠다. 얼굴이 안 좋다는 그녀의 말이 고마웠다. 자신을 염려해주어서가 아니라 란지에의 죽음으로 분명히 힘들어하고 있다고 말해준 것 같았기 때문이다.

“괜찮습니다. 이제 가야겠군요.”

“아, 그래요? 어딜 가시는 중인가요?”

뜻밖의 질문을 받고 보리스는 한 가지 사실을 상기했다. 앞으로도 자신은 어디로든 갈 수 있지만 오직 란지에가 있는 곳만은 절대로 가지 못했다.

“그냥 강을 따라갑니다.”

“흠? 바다까지 가기라도 할 셈이에요?”

바다. 그 단어가 귀에 박히는 순간, 숨이 막혔다. 강은 바다로 이어진다. 그 당연한 사실을 잊고 있었다. 보리스는 입을 앙다물고 강물을 일별하고서 켈티카 시내로 돌아가자마자 무작정 마차를 타고 바다까지 블루엣 강을 따라가 달라고 요청했다.

바다. 그날 밤의 바다를 또렷하게 기억한다. 해변을 향해 의미 모를 언어를 끝없이 속삭이는 파도, 새카맣게 물들어 하늘의 별과 맞닿은 수평선. 소금기를 머금은 해풍이 파도에 떠밀려와 이마를 스치노라면 막막한 바다를 정면으로 응시하던 청년은 살며시 눈을 감았다가 떴다. 부쩍 성숙해진 그를 바라보며 한동안 침묵을 고수하던 보리스는 여기 있는지 어떻게 알았느냐고 물었다. 란지에는 민중의 벗이 속한 정보 조직을 통했다고 말했다.

‘사적으로 쓰면 안 되지만, 칼츠 상단 후계자의 동향은 기본적으로 파악하는 정보니까 무리한 부탁은 아니었지.’

‘바쁜 시기일 텐데.’

‘숨 돌릴 시간도 필요하니까.’

보리스가 아는 란지에는 심장이 터져서 죽는 한이 있더라도 결코 달리기를 멈추지 않을 사람이었다. 휴식을 말하는 입술과 무척 편안해 보이는 태도에서 란지에의 내면 어딘가가 달라졌다는 느낌이 들어서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단지 생소할 뿐만 아니라 묘하게 불길해지는 변화였다. 보리스는 그것이 때때로 자신을 찾아오는 예지가 아닌가 의심했다. 옆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노라니 그가 시선을 알아차리고 곁눈질로 눈을 마주쳤다.

‘나는 언제나 네 앞에서 안절부절못했지.’

‘그랬나.’

모른 척 대꾸하자 란지에는 엷게 웃었다.

‘이미 다 흘려보냈어. 그러니 이젠 괜찮아, 보리스.’

그 말은 과거와의 결별 선언이었다. 이제는 걷잡을 수 없는 사랑에 휘말려 예전처럼 초조한 모습을 보이지 않으리라는 이야기였다. 씁쓸한 동시에 안심이 되었다. 그가 편안해진다면 그것으로 만족했다. 란지에가 줄곧 내주었던 감정과는 성질이 다소 차이가 있어도 보리스는 진심으로 그의 행복을 바랐다. 비록 손을 잡거나 입술을 맞댄 적이 없을지라도 그렇게 란지에를 사랑했다.

바다를, 하고 란지에가 작게 운을 띄웠다. 그러고 나서 말을 흐렸다가 다시 분명하게 얘기했다.

‘너와 한 번은 바다를 보고 싶다고 생각했어. 아주 예전, 너와 네냐플에 있을 때.’

‘그래서 찾아온 건가?’

‘아니, 바다를 보니까 떠올랐어.’

그럼 무엇을 위해 이곳에 왔는지 물었다. 살갑게 오랜만의 만남을 기뻐하고 쌓인 이야기를 나누며 밤을 지새울 사이가 아니다. 다름 아닌 란지에가 사적으로 민중의 벗의 정보를 이용하면서까지 찾아냈는데 단순히 얼굴이나 보러 왔다고 믿기 어려웠다. 천천히 모래사장을 거닐던 란지에가 이윽고 걸음을 멈추었다. 그는 바다를 내다보며 입을 다물고 상념에 잠겼다. 보리스는 바람처럼 투명하게 선 란지에의 뒷모습을 응시했다. 이윽고 그들은 물보라에서 피었다가 금세 사그라지는 거품처럼 쉽게 헤어졌다. 벨노어 성에서, 이엔의 파티에서 만났을 때와 마찬가지로 길 위에 드물게 찍힌 교차점에 불과한 날이라고 여겼다.

해가 이울어 하늘이 까맣게 타들어 갔다. 보리스는 어둠에 에워싸인 마차 안에서 란지에를 되풀이해 떠올렸다. 그는 기어이 거기까지 찾아온 진짜 이유를 밝히지 않았다. 본디가 매사에 말을 아끼는 이였다. 그런 까닭에 구태여 캐묻지 않았건만, 이제는 영영 알 수조차 없게 되었고 뒤늦게 후회가 되었다. 이렇게 될 줄 알았더라면. 그렇게 생각했다가 보리스는 자조 어린 웃음을 흐느꼈다. 그런다고 선심 쓰듯이 작별 키스라도 할 그들이 아니었다. 어차피 아무것도 변하지 않았으리라. 그의 죽음도, 그가 남긴 마지막 기억도 너무 흔하고 평범해서 그 깃털 같은 가벼움에 숨질 것만 같았다.

덜컹대던 마차가 언제 멈추었는지도 모르고 죽은 듯이 고개를 숙이고 있다가 쿵쿵 두드리는 소리를 듣고서야 움찔했다. 기척을 내자 마부가 유난히 조심스러운 어투로 도착을 알렸다. 산전수전 다 겪었을 마부도 지나치게 조용하고 음울한 칼잡이 손님이 퍽 무서웠던 모양이다. 보리스는 묵묵히 값을 치렀다.

작은 바닷가 마을의 입구에 서서 천천히 숨을 들이마셨다. 눈물처럼 짠 바다 냄새가 스며들었다. 듬성듬성 주저앉은 집집이 밖으로 불빛을 조금씩 던지고 있었다. 어둠 속에서 어렴풋이 떠오른 길을 따라갔다. 먼 데서 밀려오는 파도 소리가 누군가의 목소리 같아서 정신을 차렸을 무렵에는 미친 듯이 달리고 있었다.

철썩, 철썩, 싸아아―

란지에와 나섰던 그날 밤이 눈앞에 또렷이 투영되었다. 무채색 풍경 속에서 달이 짠 빛의 베일만 찬연하게 출렁이는 수면에 닿아 있다. 부드러운 모래를 지르밟으며 물보라가 밀려오는 경계까지 나아갔다. 발에 차인 모래 알갱이가 비산하며 반짝였다. 파도에 발끝을 적시고서야 보리스는 멈춰서 숨을 몰아쉬었다.

바다. 그가 흐르고 흘러 당도한 곳. 란지에, 란지에. 이름을 작게 되뇐 목소리는 파도와 부딪쳐 산산이 부서진다. 흘려보내려면 미련만 놓을 것이지, 이젠 괜찮다고 했으면 그토록 바라던 나라에서 평온하게 살 것이지,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왜. 이지러진 내면으로 삭풍이 불어 닥쳐 부지불식간에 온몸을 난도질했다. 얼굴을 일그러뜨린 보리스는 단숨에 바다로 뛰어들었다. 발목, 종아리, 허벅지, 허리까지 금세 물이 차올랐다. 따뜻한 계절이지만 지금의 밤바다는 몸서리치게 아렸다. 파도가 몸을 지그시 밀고, 밀고, 또 밀었다. 허우적거리며 란지에, 란지에. 거듭 불러 보아도 아득한 바다는 침묵했다. 가만히 눈감은 초승달과 검은 심연은 너무도 예사롭고 아름다워 숫제 비정하다. 보리스는 고개를 추켜올리고 한숨을 내쉬었다.

풍덩, 물이 튀는 소리가 수면에 미미한 파문을 일으켰다. 그러나 다시금 파도에 쓸려서 아스라이 사라지고 바다는 늘 그랬듯이 예사롭고, 아름다우며, 잠잠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