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란지보리] 시월의 온도


별안간 발에 걷어차인 양 요란하게 열린 창문으로 불청객이 들이닥쳤다. 녹색 커튼을 공중으로 띄운 바람이 빌라 거실을 휩쓸었다. 네 개의 책상에서 종이가 흩날리며 필기구 따위가 바닥으로 굴러 떨어졌다. 덜커덩, 덜커덩……. 바람은 난폭한 거인을 피해 달아나는 요정처럼 계속 거실로 파고들었다. 그 때문에 창문 두 짝은 연신 밀려나며 시끄럽게 굴었다. 양탄자에 얹힌 종이들이 간간이 팔랑대며 티테이블 아래로 숨어 들어왔다. 그러는 동안 거실에 있던 두 학생은 멍하니 창문만 쳐다보았다. 먼저 정신을 차린 보리스가 떨어진 것들을 안 밟게 조심하며 걸어가 창문을 닫으려 했지만 곧 문제를 깨달았다. 걸쇠가 떨어져 달랑거렸다. 그대로 닫아 보았지만 역시나 바람 때문에 소용 없었다. 보리스는 우선 옆에서 펄럭대는 녹색을 치우기로 했다.

“루시안, 와서 창문 좀 잡고 있어.”

“왜? 안 닫혀? 고장난 거야?”

질문을 연발하며 달려온 루시안이 걸쇠 노릇을 대신하는 사이, 보리스는 양쪽 커튼을 묶고 양탄자에 떨어진 것들을 주워서 간추렸다. 조심한다고 했는데 뭘 밟았는지 신발 밑에서 뚝 소리가 났다. 보리스는 발을 치우고 부러진 펜대를 주워 들었다가 난처해졌다. 지금 빌라에 없는 사람의 소유물인데, 단지 그런 이유만으로 당황한 건 아니었다.

“보리스, 나 이거 언제까지 잡고 있어야 해?”

“잠깐만.”

뒤섞인 물건을 티테이블에 쌓았다. 정리는 나중 일이다. 보리스는 제 방에서 머리 묶는 가죽끈을 가져와 창문의 양쪽 손잡이를 감아 묶었다. 루시안이 손을 놓자 간혹 바람에 덜걱거려도 얼마간은 버틸 성 싶었다. 끈이 가늘고 짧은 까닭에 임시 방편 이상은 못 되었으므로 빨리 고쳐야 했다. 덧창이라도 멀쩡했으면 좋았을 텐데, 장마철 강풍에 떨어지기라도 했는지 여름 방학을 보내고 돌아왔을 때는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사감에게 이야기를 해놨지만 우선 순위가 낮아 한없이 뒤로 밀리고 있는지 어쩌다 누락이라도 됐는지 가을인 지금까지 이 모양이었다. 도토리 빌라 학생들에게도 덧창은 중요하거나 시급한 문제가 아니어서 차일피일 미루고 있었다. 걸쇠가 떨어진 것도 사실상 예견된 일이었다. 전조는 오래 전부터 있었다. 덧창이 날아가고 폭풍의 여파를 고스란히 받은 창문은 유리창만 안 깨졌지 여닫힘이 헐거웠다. 걸쇠도 비틀어져 제대로 잠기지 않는 통에 알아서 풀려 있기도 여러 차례였으나 시급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요컨대 작금의 사태는 언젠가 벌어질 일이었다. 하필 그때가 시시각각 하늘이 흐려지는 도중이란 사실이 불행이라면 불행일까.

“또 열릴지 모르니까 루시안 네가 지키고 있어.”

“응, 다녀와!”

언제 비가 올지 모르니 서둘러 기숙사를 나와 교내의 후미진 곳으로 향했다. 대장장이는 보리스가 막 입학했을 무렵 새 문고리와 열쇠를 만들어 갔던 일을 기억하고 있었다. 이번엔 어디까지나 바람 탓이었건만 걸핏하면 뭘 부수는 사람을 보는 눈빛이라 조금 억울했다. 그렇게 새 걸쇠와 연장을 빌려 나왔을 때였다. 보리스는 뜻밖의 인물을 마주쳤다. 대장간 벽에 기대고 선 란지에였다. 익숙한 진홍색 눈이 약간 커졌다가 손에 든 물건을 흘긋 내려다본다.

“창문 걸쇠가 고장나서.”

“네가 고치게?”

“그게 빠르니까. 날씨도 이렇고.”

란지에가 고개를 한 번 끄덕였다. 대화는 더 이어지지 않았다. 매번 같은 분위기였다. 룸메이트인데도 그들이 주고받는 말은 대부분 필요에 의거했으며 어쩌다 나누는 잡담도 짧았다. 굳이 상대방을 피하지 않지만 가까워지려 애쓰지도 않는다. 기실 둘 사이에 그런 노력은 불필요했다. 이미 그들은 남들보다 서로를 더 많이 알고, 오직 둘이서만 공유하는 추억과 약속도 있다. 일정히 유지되는 거리감의 원인이라면 오히려 내밀하게 형성된 무언의 공감대 때문이다. 다행이라고 할지, 그들의 어중간한 관계는 남들 눈에 띄지 않았다. 란지에는 노골적으로 친교를 등한시했다. 소위 ‘도토리 빌라 군단’으로 묶이는 친구들과도 잘 어울리지 않았다. 그나마 종종 이야기하는 상대도 귀족이 아니며 과거에 연이 없는 막시민, 그리고 마법학 소양이 깊은 티치엘이었다.

참 오랜만이긴 했다. 란지에가 여러 수업을 빼고 오스틀리 교수 밑에 연구생으로 들어간 다음부터 빌라에서도 얼굴 보기가 어려워졌다. 보리스는 곧장 기숙사로 발을 돌리지 않고 문득 물었다.

“여기서 뭐 하고 있어?”

“교수님께서 바람 좀 쐬라고 하셔서.”

그는 대장간에서 얼마 안 떨어진 고대 유물 연구실을 가리켰다. 알 만했다. 마지못해 나왔지만 멀리 나가서 사람들과 마주치기 싫은 탓에 대장간 옆에 붙어 시간 때우는 것이리라. 망치질 소리 때문에 시끄러운데도 란지에는 교실에 앉아 있을 때보다 지금이 편안해 보였다. 파티에서 우연히 재회했던 날처럼 느껴졌기 때문일까. 드물게 란지에와 대화를 잇고 싶어졌다. 마침 그에게 할 말도 있었다.

“아, 란지에. 미안하다. 실수로 네 펜을 밟아서 부러뜨렸어.”

“밟았다고?”

“바람에 날려서 이것저것 다 떨어진 걸 줍다가 미처 못 봤거든. 다음에 마을 나가서 하나 사올게.”

희미한 미소 띤 란지에가 퍽 무심하게 사양했다.

“괜찮아. 여분이 있으니까.”

만약 루시안의 펜이 부러졌다면 그도 ‘많으니까 괜찮아!’ 하고 비슷하게 말했으리라. 하지만 펜 한 자루 값을 푼돈으로 여기는 루시안과 달리 란지에의 태도는 물건에 실질적 쓰임 외 의미를 부여하지 않는 사람의 것이다. 사물을 무가치하게 바라보는 그의 시선은 망가진 걸쇠처럼 묘하게 비틀린 구석이 있다. 란지에가 벽에 기댄 등을 뗐다.

“그만 들어가야겠다. 빌라에서 봐.”

“그래.”

보리스는 무슨 말이라도 더 덧붙이고 싶었지만 마땅히 떠오르는 문장이 없었다. 먼저 떠나길 기다리듯 가만히 바라보는 홍색 눈을 등지고 기숙사를 향해 걸었다. 그러다가 까닭 모를 충동으로 잠깐 뒤를 돌아보았으나 란지에는 그새 창고 같은 연구실 앞까지 멀어져 있었다. 그 순간 제가 실망했음을 깨달은 보리스는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무얼 기대했는지 자신조차 명확히 설명할 수 없었으니까.

빌라로 돌아가 창문을 다 고칠 즈음에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티테이블의 물건은 주인이 알아서 찾아가게 내버려두었지만 란지에의 부러진 펜만큼은 챙겨서 책상 위에 돌려놓았다. 못 쓰게 되었어도 주인이 직접 처분하는 게 맞다고 생각했다.

저물녘에 막시민이 쫄딱 젖은 꼴로 들어왔고, 셋이 식당에서 저녁을 먹고 올라온 후로도 한참 지나고서야 남은 한 사람이 빌라 문을 열었다. 란지에는 거실에 모인 룸메이트들과 짧은 말마디를 교환했다. 자기 방으로 들어가기 직전에 그가 안전하게 닫힌 창문을 일별했으나 책상에 놓인 물건으론 눈길 한 번 스치지 않았다.

이튿날 아침에 다시 보니 펜은 깨끗하게 치워져 있었다. 보리스는 수업이 다 끝난 오후에 연장을 반납하러 다시 대장간을 찾았다. 어제처럼 란지에를 마주치는 우연은 없었다. 대장간 앞에서 연구실을 잠시 응시하다가 돌아섰는데 먼발치로 늑대개 한 마리가 보였다. 어디서든 시선을 절로 사로잡는 덩치였기에 옆에 있는 사람이 누군지 뒤늦게 알아차렸다. 자신의 개와 교정을 자주 산책하는 까닭에 오스틀리 교수는 그의 수업을 안 듣는 학생들에게도 얼굴이 다 알려졌다.

“안녕하세요.”

가까워졌을 때 인사하자 교수는 어어, 하고 고개를 대강 까딱였다. 그렇게 지나갈 성 싶었는데 대뜸 멈춰서 보리스를 휙 쳐다보았다.

“일학년?”

“네.”

“혹시 란지에 로젠크란츠라고 아니? 꽤 유명할 텐데.”

두서없는 질문에 의아했으나 보리스 역시 네냐플 학생으로 으레 이상한 구석이 있는 교수들에게 익숙해졌다.

“압니다. 룸메이트라서요.”

교수는 뭔가 깨달은 표정으로 연구실과 보리스를 번갈아 보았다.

“그럼 란지에 보고 가는 길이구나.”

“아니요. 전 대장간에 볼일이 있어서 왔습니다.”

“그래? 온 김에 얼굴 보고 가지?”

이유는 모르겠으나 교수는 보리스가 연구실에 들렀다 가기를 원하는 눈치였다. 불쑥 방문해서 인사나 할 관계가 아닐 뿐더러 란지에가 저를 반길지 의문이다. 그가 인적 드물고 조용한 곳을 원해서 일부러 남들이 꺼리는 연구실에 자원했음을 얼추 짐작하는 까닭이다. 보리스는 룸메이트라고 밝힌 종전의 제 언동을 후회했다.

“제가 가면 방해가 될 것 같은데요.”

“아니, 괜찮아, 괜찮아. 내 연구실에 와 본 적은 있니? 겸사겸사 구경이라도 하고 가.”

아무래도 그는 보리스가 방해할까 염려하는 상대를 착각한 듯했다. 극구 거절하자니 란지에와 사이가 나쁘다는 둥의 공연한 오해를 부를 것 같아서 주저하는 사이, 교수가 날아다니는 잠자리에 정신이 팔려 다른 길로 새려는 개를 당기며 연구실로 향했다. ‘스노리! 가자, 스노리!’ 어릴 적에는 저택에서 키우던 말로리가 저렇게 커다래 보였는데……. 옛 기억을 추고하며 개를 눈으로 좇다 보니까 어느새 연구실 문앞에 서게 됐다. 근처에 박힌 쇠말뚝에 목줄을 길게 묶은 교수가 문을 벌컥 열었다.

“로젠크란츠! 네 손님이야.”

가림막처럼 높은 책장 너머에서 란지에가 걸어 나왔다. 교수를 뒤따라 들어간 보리스는 저를 발견하고 멈칫하는 그의 반응에 속이 알싸해졌다. 란지에가 손에 든 상자를 작업용 책상에 내려놓으며 물었다.

“어쩐 일이야?”

대답은 오스틀리 교수가 했다.

“대장간에 왔다가 그냥 가길래 데려왔어. 룸메이트라며? 로젠크란츠, 너 점심 때부터 계속 있었지? 친구랑 나가서 산책이라도 하고 와. 네가 하도 여기에서 꼼짝하지 않으니까 고대 유물 연구실에 들어가면 종일 갇혀서 교수 보조만 한다고 소문이 나. 이런 평판이 더 퍼졌다간 지원하는 학생 씨가 마르겠다.”

이제 보니까 교수가 보리스를 흔쾌히 연구실에 초대했던 까닭에는 나름대로 계산이 깔렸던 것이다.

“연구생 지원자는 제가 들어오기 한참 전부터 끊겼던 것으로 아는데요.”

란지에가 논쟁으로 교수를 두 명이나 교실 밖으로 뛰쳐나가게 만든 학생답게 반박했다.

“아무튼 햇빛 쬐고, 점심 걸렀으면 밥도 먹고 와. 알겠지? 자, 나가. 나가서 연구실 평판을 올리고 와.”

오스틀리 교수의 무시와 무논리 대응은 효과적이었다. 란지에는 말문이 막혔는지 이렇다 할 저항도 못 하고 연구실 밖으로 밀려나갔다. 쾅! 굳게 닫힌 문을 등지고 란지에와 나란히 선 보리스는 무심코 실소를 흘렸다. 어제 그가 대장간 옆에서 시간 때우게 된 경위를 확실히 알았기 때문이다. 곁에서 얕은 한숨 소리가 들렸다. 고개를 약간 숙인 란지에가 머리칼을 살며시 넘기고 있었다. 내색은 안 하지만 난처한 듯했다. 보리스는 본의 아니게 저도 이 상황에 기여했다는 책임감이 들었다.

“미안, 오는 게 아니었는데.”

“네가 사과할 일은 아니고.”

란지에는 머리를 뒤로 젖히고 손바닥으로 목덜미를 주물렀다. 햇빛이 어려 반투명하게 연홍색을 띠는 홍채가 날렵한 눈꼬리에 걸린 채 보리스를 곁눈질했다.

“요새 계속 저러셔. 너 아니었어도 구실을 만드셨을 거야. 며칠 지나면 포기하시겠지. 그리고 아마 네가 마음에 드셨을 거야.”

“마음에 들다니?”

“겁이 없어 보이잖아. 보통 학생은 대장간에 들락거리지도 않아.”

잠깐이나마 둘러본 연구실 풍경을 떠올리고 납득했다. 보리스도 학생들이 고대 유물 연구실을 왜 꺼리는지 풍월로 들어 알고는 있다. 네냐플은 마법 학교이고, 당연히 대부분 학생이 마법사가 되기를 희망한다. 그들이 생각하기에 가나폴리의 기계 유물이나 만지작대는 작업은 그다지 근사하지 않을 터였다. 하물며 절삭기, 연삭기, 톱줄, 나사 따위가 널린 연구실이라면 더 기겁하리라.

“정말 연구생이 절실하신가 본데.”

“생각이 많으시겠지. 내가 아직 일 년차 재학생이니 언제 학업 때문에 그만둘지 모르고, 다른 분들은 조교와 연구생을 몇 명씩 두기도 하시니까 교수님도 그랬으면 싶으신 거고.”

란지에가 땅바닥에 드러누워 단잠에 빠진 스노리를 빙 둘러 연구실 뒤편으로 걸어갔다. 이만 돌아가도 된다는, 배려의 껍데기를 쓰고 선 긋는 말이 없었기에 보리스도 동행했다. 창고를 개조한 연구실은 구색이나마 갖춰 겉보기에 지저분하지 않았는데 정작 눈에 안 띄는 뒤쪽은 잡동사니가 척척 쌓여 있었다. 보리스의 아연한 시선에도 천연덕스럽게 어깨만 으쓱인 란지에는 쓰레기 더미 가운데에 덩그라니 놓인 투박한 의자를 가리켰다.

“앉을래?”

의자는 하도 오래되어 맨들맨들했다. 버려진 것치고 먼지는 쌓이지 않은 까닭에 보리스는 란지에가 종종 거기에 앉아 시간을 보냈으리라 짐작했다. 의자가 하나뿐이라 거절하니 그도 두 번은 권유하지 않았다. 둘은 벽에 등을 기댔다. 팔을 뻗으면 닿겠지만, 그렇기에 실수를 가장하고는 절대 닿지 못할 간격을 두고서. 보리스는 그 거리를 받아들였다. 란지에가 장갑을 벗어 의자에 내려두어서 도리 없이 그의 왼손으로 눈길을 주었으나 곧 의식적으로 거두었다.

어제는 비가 내리더니 오늘은 햇살이 쨍했다. 땅은 아직도 물기를 머금었고 가까운 숲에서 불어오는 바람결도 촉촉했다. 하늘이 온통 시푸르게 맑은 시월. 단풍이 선명하게 든 숲은 빨강, 노랑, 초록, 자주가 무작위로 어우러져 장엄한 조화를 이루었다. 눈 깜짝하면 지나갈 계절을 응접하려 대지가 마련한 양탄자였다. 산드러운 바람과 숲이 풍기는 풀 내음이 스며든 침묵은 세상을 구성하는 일부처럼 당연했다. 저만치 떨어진 대장간에서 쇠 두드리는 소리조차 시끄럽지 않았다. 이곳이 란지에의 공간, 그가 찾은 세계의 모퉁이였다. 보리스는 그 사실을 자각하고 불현듯 더위를 느꼈다.

그후로 보리스는 매일 오후에 고대 유물 연구실을 찾았다. 자색제를 앞두고 교내 분위기는 날개라도 생긴 양 가벼운데 그곳만은 한결같이 차분했다. 아무런 약속도 안 했지만 란지에는 늘 비슷한 시간에 연구실 뒤로 나와 있었다. 어느 날은 의자에 앉아 눈을 붙이고 있기에 잠자코 곁에 머물다 돌아왔고, 하루는 서로 소식을 모르는 동안 버텨낸 삶을 단편이나마 얘기하기도 했다. 묻지 못하는 것과 말하기 어려운 것이 얽히고설켜 때때로 정적을 자아내면 화제는 자연히 선회했다. 그들에게 비밀은 몸을 감싸는 피륙이라 제 손으로든 타인의 손으로든 쉬이 벗길 수 없음을 이해했다.

“대장장이 조수라, 어울리네. 어쩐지 창문을 뚝딱 고치는구나 했어.”

“의외로 적성에 맞더라. 거기서 롤리아니 부인의 하인이 나를 못 알아봤으면 아예 대장장이가 됐을지도 모르겠다. 그럼 어머니 유품을 되찾지 못했겠지만.”

그렇게 말을 맺으려던 보리스는 망설인 끝에 덧붙였다.

“그때 너도 못 만났을 거고.”

네냐플 신입생으로 만났을 때부터 두 사람의 지난 약속은 다소 무색해졌으나 직접적으로 언급하기는 최초였다. 란지에는 그저 엷게 웃을 뿐, 미소에 어떤 말도 더하지 않았다. 보리스도 덩달아 말문을 닫았다. 얼마 후 란지에가 연구실로 돌아갈 때까지 지속된 침묵은 이전까지와 판이했다. 불투명하며 심산한 그것은 전조 같았다. 그날 밤은 어쩐지 가을치고 후덥지근해서 뒤척거리다가 늦게 잠들었다. 꿈에서 란지에가 동그란 나무 막대에 홈을 파 부러진 펜대를 끼워 쓰는 모습을 본 탓에 보리스는 아침에 눈 뜨자마자 역시 그에게 줄 펜을 사와야 할까 고민했다.

오전 첫수업은 란지에와 겹쳤다. 통로 건너편에 앉은 그의 책상을, 정확하게는 가지런히 놓인 필기구를 무심코 흘끔거렸다. 거기엔 멀쩡한 펜밖에 없었다. 공교롭게도 란지에와 눈이 마주쳤다. 무의미한 우연이라고 못을 박는 것처럼 시선은 짧은 교차에 이어 바로 어긋났다. 형용하기 복잡한 기분이었다. 흡사 잘못된 음표로 구성된 찬트처럼 마음이 흐트러졌다. 교수가 들어오기 전 느지막이 교실에 들어온 조슈아가 뒷자리에 앉으며 한마디 건넸다.

“오늘은 머리 묶었네?”

“그냥 날이 더워서.”

“시월인데 덥다고? 음, 하긴, 여긴 남쪽이니까 그럴 수도 있겠네.”

선선히 납득하는 친구의 말소리를 들으며 보리스는 문득 신경 쓰이는 목덜미를 한 번 쓸어내렸다. 수업이 끝난 후 란지에는 잠시도 지체하지 않고 자리를 떴다. 두꺼운 책을 팔에 안고 멀어지는 뒷모습은 시종여일 지나가는 낮과 밤처럼 속절없었다. 이 다음에는 같이 듣는 수업이 없었기 때문에 그와 다시 만난 장소는 어김없이 연구실 뒤에서였다.

이날은 무언이 길었다. 멀리 떨어진 단풍나무 우듬지를 응시하는 란지에의 얼굴은 보는 이를 투영하는 물낯 같았다. 깊이 모를 상념에 잠긴 것 같다 생각하면 꼭 그렇게 보였고, 인과 없는 시선을 단지 거기에 두었을 뿐이라 여기면 틀림없이 그런 것 같았다. 사람과 무정물 사이의 불분명한 관념으로 선 란지에의 발치로 새빨간 단풍잎이 굴러왔다. 그가 눈을 내리깔더니 잎을 주웠다. 가지에서 떨어지고 긴 여정을 거쳤는지 흠집이 많았다. 보리스는 정작 단풍잎보다 그걸 든 란지에의 왼손에 더 주의가 쏠려 있었다.

“오늘은 장갑 안 벗어?”

그가 자신의 손목을 약간 비틀어 내려다보았다.

“바람이 쌀쌀하길래. 그리고 끼고 있어야 더 편해.”

보리스는 검사였다. 타인의 손동작에 민감할 뿐더러 관절의 자연스러운 유동 범위는 경험으로 배웠다. 어색하게 움직이는 저 왼손의 상태를 모르기가 어려웠다. 뇌리를 맴도는 의문은 번번이 혀 위에서 언어로 빚어졌는데 좀처럼 목소리만은 씌우기 어려웠다. 망설였지만, 이번에도 내색하지 않고 삼켰다. 지난 며칠이 정 붙일 데 없는 화려한 성에서 함께 책 읽던 시절을 상기할 만큼 내밀했을까. 뜻밖에도 란지에가 나서서 화제를 명료하게 좁혔다.

“내 손이 궁금해?”

선뜻 긍정하지 못했으나 란지에는 잇따라 장갑을 벗어 보였다.

“마디마다 뼈가 부러졌어. 그게 다야.”

담백한 설명은 펜대에 부러진 사실을 알았을 때와 별반 다르지 않았다. 보리스는 입을 열지 못했다. 그의 무감한 태도 때문만은 아니었다. 보통 사고로는 손이 으스러지는 수준의 부상을 입을 순 없었다. 란지에가 팔을 다시 가볍게 내려뜨렸다. 벽에 살며시 닿는 그의 손끝 대신 땅으로 팔랑팔랑 떨어지는 단풍잎으로 눈을 옮겼다.

“계속 비밀에 부치는 편이 좋았으려나.”

“아니. 내게 말해도 괜찮았다면, 나도 괜찮아.”

단언하는 제 말소리는 한결 침참했지만, 내적 동요가 확연하게 드러나지 않아 안도했다.

“알았어. 다행이군.”

굴곡이 많았던 삶이다. 자신을 연민할 만큼 그 모든 나날이 불행하진 않았어도 오래도록 혹독했던 것만은 진실이다. 그러나 지금만은 말을 아껴야 할 순간을 알 수 있게끔 가르친 시간에 감사했다. 보리스는 고개를 들어 란지에처럼 앞을 보았다. 새삼스레 알아차렸다. 연구실 뒤편에서 이야기했던 첫날, 팔 하나 길이만큼 떨어졌던 그들의 간격은 차츰 짧아져 오늘에 이르러서는 보잘것없는 거리만이 남았다. 바람이 쌀쌀하다던 란지에는 장갑을 오른손에 그대로 쥐고 있었다.

손끝이 톡 닿았다. 이어서 손바닥을 겹치고, 가만히 놓인 손가락 사이로 제 손가락을 느슨하게 끼웠다. 달리 말하는 가을 온도처럼 자신의 오른손과 란지에의 왼손도 온도 차이가 났다. 평행으로 선 자세도, 멀리 보내는 시선도, 굳게 다문 입술도 변함이 없었다. 오직 손만이 조심스레 맞붙어 더위와 추위를 섞었다. 종국에는 살갗이 비등하게 밍근해질 즈음에야 란지에가 말문을 열었다. 어딘가 다른 구석이라곤 전혀 없는, 여상한 어조였다.

“보리스, 너는.”

그는 여전히 자신을 보지 않았다.

“돌이킬 수 있는 건 돌이키는 편이 낫다고 생각해?”

입안이 말랐다. 친절하게 생략된 맥락을, 사실상 답을 갈음하는 질문의 함의를 전부 인지하면서도 헤아리고 거듭 고민하듯 느리게 입을 열었다.

“아마도.”

“그래. 나도 동의해.”

부드러운 말씨와 함께 란지에가 시선을 똑바로 마주했다. 선택할 것과 선택하지 않을 것을 홍명하게 판가름하는 눈동자에 비치는 자신의 얼굴. 처음인 양 서로를 들여다보길 한참. 이윽고 깍지 낀 손가락이 결합했을 때처럼 더디게 풀렸다. 그게 다였다. 란지에가 시야에서 벗어나고 연구실 문이 여닫히는 소리가 난 다음에도 보리스는 잠시간 그곳의 풍경을 눈에 담았다.

해가 넘어가고 있었으나 기숙사로 곧장 돌아가는 대신 헤이마치 마을로 나갔다. 상점가에 들렀다가 빌라로 귀환했을 때는 흔하고 질박한 펜을 한 자루 가진 채였다. 보리스는 그걸 선물 같은 포장이나 쪽지 한 장 남기지 않고 란지에 책상에 두었다. 시간을 돌이켜 자신이 부러뜨린 펜을 붙여 되돌려주듯이. 그리고 머리를 풀어 내린 후 걸쇠가 단단히 걸린 창문 밖을 내다보았다. 석양의 잿빛 침전물이 짙게 깔려 있다. 루시안이 불쑥 옆으로 머리를 내밀었다.

“여기서 무슨 생각을 심각하게 해?”

보리스는 호기심을 단순하게 드러내는 친구를 돌아보며 픽 웃어 버렸다.

“더 추워지기 전에 덧창을 달아야겠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