침대 아래에 둔 검이 잠을 방해한 어느 밤이었다. 검집 덕분에 윈터러는 그 사악한 독니를 거의 봉인당한 상태였으나 때때로 저를 정확히 겨냥하는 불온한 한기에 눈을 뜰 수밖에 없었다. 이런 날은 으레 잠자리가 차서 불편했다. 몸을 일으켜 거실로 나간 까닭은 단지 그래서였고, 책상 앞에 불빛 한 점 밝히지 않고 가만히 앉은 실루엣을 발견하고 일순 얼어붙은 것은 마땅한 귀결이었다. 방에서 나온 사람이 루시안이었으면 비명을 지르고도 남았으리라.
전적으로 책상이 란지에의 자리였던 덕분에 그를 알아보았다. 란지에가 아닐 가능성은 곧 지웠다. 창가에 붙어 앉았기에 마른 허물처럼 얇고도 파르스름한 달빛이 머리와 어깨에 얹혀 있었고, 그 윤곽만으로 다른 이와 란지에를 분별하기 충분했다. 어두컴컴한 가운데 서로를 바라보기도 잠시, 란지에가 일어나서 성냥을 긁었다. 불그레한 빛이 확 발산하여 그들 사이를 무한히 메운 듯한 암흑을 상당히 허물었다.
“방해가 됐나?”
“아니. 다 같이 쓰는 곳인데 방해라고 할 순 없지.”
그는 밀랍 같은 낯으로 양초에 불 붙이고 갓을 씌웠다. 그리고 도로 자리에 앉아 입을 다물었다. 턱을 조금 내리고 침묵에 빠진 젊은이는 몸을 여기에 두고 정신은 다른 데 보낸 사람처럼 보였다. 보리스는 거실을 둘러보았다. 이미 제 존재는 아예 의식 바깥으로 밀어낸 줄 알았는데, 란지에가 흘긋 돌아보더니 티테이블 의자를 가리켰다.
“잠시 있을 거면 앉아. 서 있는 것도 네 자유지만.”
혼자 있게 비켜 달라도 해도 그럴 참이었던 터라 그가 권하는 자리를 거절할 이유는 없었다.
“뭐 하고 있었어?”
제게 앉으라고 했으니 적어도 대화를 거부하지 않으리라 여겨서 말을 건넸다. 란지에의 반응은 예상 외였다. 굳이 표현하자면 다소 이상했다. 그는 감정이 유리된 낯으로 저를 응시했다. 마치 질문을 이해하지 못한 사람처럼, 혹은 자기가 뭘 하는 중이었는지 잊은 사람처럼. 란지에가 눈을 느리고 길게 깜박였다.
“말하고 싶지 않아.”
여러 추측이 동시다발적으로 뇌리를 스쳤다. 하지만 상대가 말하기 꺼리는 사실을 파악하려는 노력에 무슨 의미와 보람이 있겠는가. 특별한 색깔을 지닌 눈동자에서 시선을 떼고 아래로 내렸다. 란지에는 오른손으로 왼팔을 지그시 잡아 누르고 있었다.
“잠들기 어려워서 나와 있었어.”
그건 사실로 들렸다. 불면을 앓는 사람 특유의 건조함이 감도는 까닭이다.
“네냐플을 한 바퀴 뛰는 건 어때.”
“이 넓은 네냐플을? 지극히 검사다운 처방이네.”
보리스는 어깨를 으쓱였다.
“배운 게 이런 거라서.”
저와 똑같은 사람을 떠올린 듯 그가 고개를 미미하게 까딱였다. 그러고는 다시금 묵언.
같은 빌라를 쓰는 동기인지라 란지에와 마주칠 때가 잦았다. 과거의 인연을 묻기로 약속했어도 한사코 멀리하면 되레 이상할 환경이어서 평범하게 몇 마디 오가기도 했다. 루시안이 몇 번인가 말실수를 저지를 뻔했으나 비밀은 묘지에 묻힌 관처럼 지켜지고 있었다. 덮인 흙 위에서 그들은 새롭게 적당한 관계를 쌓았다. 보리스는 평소의 란지에를 안다. 아침에 약간 가라앉은 란지에, 맨앞에서 강의를 듣는 란지에, 교수와 언쟁하는 란지에, 빌라 친구들 사이에 잠시 머무는 란지에, 홀로 책을 읽는 란지에, 올리브 절임을 입에 넣고 알알함에 눈살을 찡그리는 란지에……. 그런데 지금의 그는 무어라 형설하기 묘한 분위기를 풍겼다. 낮의 란지에 로젠크란츠와 다른 사람처럼 보이게끔 만드는 낯섦이다. 둘 다 그였다. 하지만 어느 쪽이 본연에 가깝게 느껴지는가 하면 이쪽이다.
당혹스러운 까닭은 그가 날카로우며 단단했고 동시에 무르고 박약했기 때문이다. 지하에서 올라온 백골 같으면서 첨탑에 꽂혀 빛을 번뜩이는 창날 같았다. 낡고 헤진 역사서이자 막 동굴에서 발견된 거친 수정, 바위 틈바구니를 기어이 뚫고 돋아난 유록. 그런 모순과 복잡성이 신비감을 주기보다 위태로이 형태를 유지하는 어떤 것을 보듯 아슬아슬했다.
“그러고 보니 너는?”
되돌아온 질문에 일부러 가벼운 대답을 넘긴 연유는 아마도 그래서였다.
“자는데 누가 부르는 소리가 들려서.”
괜찮은 시도였는지 란지에가 픽 웃었다. 얼굴에 감정이 번지니 훨씬 이 세상 사람 같다.
“갑자기 무서운 이야기야?”
“사람에 따라선 그럴걸. 넌 별로 무서워할 거 같지 않지만.”
“왜 그렇게 생각해?”
말문이 막혔다. 란지에가 공포를 모르는 초인이라서? 제가 알기로 그런 인간은 없다. 심지어 보리스는 때때로 그에게서 두려움의 혈색을 목격했다. 부득이 턱끝에 맺힌 물방울 같은 정념은 땀이거나 눈물이리라. 혹은 빗방울일지도 몰랐다. 저로서는 본질을 명확히 파악할 방도가 요원하지만, 최소한 그가 무언가에 젖어 있음은 알아봄직했다. 하지만 란지에가 던진 질문 앞에서 보리스는 불현듯이 깨닫는다. 자신은 그를 잘 모른다.
그에 대해 많이 안다는 믿음은 당연히 착각일 수밖에 없다. 란지에는 어린 소년이 아니었다. 비밀이 많던 소년은 더더욱 심오한 비밀을 간직한 젊은이로 자랐다. 떨어져 각자의 삶을 살아내는 동안 겪은 사건을, 그로 말미암아 생긴 간극을 피차 헤아릴 수나 있을까. 건조하게 기술하면 그들은 벨노성과 블루벨 파티에서 잠시 얽혔던 사이에 불과했다. 이곳에서 반질반질한 새 것처럼 획득한 친분도 결국 네냐플이라는 마법 장막을 벗어나면 녹이 슬 파편.
갑작스러운 자각이 뜻밖에도 상실감을 주었다. 보리스는 뱃속부터 목구멍까지 가득한 말들을 파기하고 선별하여 그저 한시적인 친구로서 대꾸했다.
“그렇게 물으려면 겁먹은 척이라도 해야 하지 않을까. 누가 봐도 무서워하는 낌새가 아니잖아.”
그건 그렇지, 하고 웃기를 바랐다. 아니면 내심 무서웠다며 참인지 거짓인지 아리송한 수수께끼라도 주든가. 란지에는 또 무언으로 눈꺼풀을 움직였다. 느리고 긴 과정을 거쳐 현재를 버겁게 인식하는 눈 깜박임 뒤에 그가 창밖을 돌아보았다.
“저 달이 보여?”
앉은 자리에선 볼 수 있는 밤하늘의 면적에 한계가 있었다. 보리스는 일어나서 란지에의 등 뒤, 창문 앞으로 걸어갔다. 위를 올려다보니 얇게 뜬 구름에 일부 가려진 달이 확실하게 부풀어 있다. 유난히 색이 차가웠다.
“보여. 상현달이군.”
“…그래. 달이 맞구나.”
기묘한 어조에 고개를 내렸다. 란지에는 달을 보고 있지 않았다. 쉽사리 불탈 듯한 저 빛이 두렵고 끔찍한 무언가라도 되는 것처럼 한사코 등진 채였다. 뻣뻣하게 펴진 어깨에 시선을 둔 보리스는 마른침을 삼켰다. 저게 달이 아니면 무엇이겠나. 다른 것으로 보일 수가 있나. 란지에의 어깨를 붙잡아 저를 똑바로 보게 하고 싶은 충동은 겨우 물음으로 전환했다.
“무슨 뜻이야?”
“무서운 얘기였지. 조금은 오싹했을까.”
농담이라면 웃음기를 담는 편이 좋았을 터였다. 보리스는 묵묵히 의자로 돌아가 앉아 란지에를 응시했다. 빈 책상에 걸쳐진 시선을 더디 올려서 눈을 맞추는 모습은 그저 여상스러웠다. 분명 내부의 어딘가는 흘러내리며 분열되는 듯한데, 그럼에도 한결같이 명료한 저이의 존재감이 되레 위화감을 유발했다. 잠이 완전히 달아났다. 이대론 윈터러 때문이 아니라도 누울 마음이 안 들었다.
“잠이 안 오면 산책하는 건 어때.”
불면의 밤을 대면한 이에게 평범히 건네는 제안을 가장했다. 그걸 란지에는 싱겁도록 빠르게 간파했다.
“날 혼자 두기 껄끄러운가 본데, 괜찮아. 내게 신경 쓸 필요는 없어. 넌 네가 하고 싶은 대로 해.”
“그렇다면 계속 신경 써도 되겠군. 내가 그러고 싶어서 하는 거니까.”
“내가 사양한다고 해도?”
“사양한다고 해도 네가 내 속마음까지 통제할 순 없겠지. 네 의사는 존중하겠어. 그래도 완전히 관심을 거두겠다곤 거짓말로도 못하겠다.”
란지에가 피식 웃더니 의자 등받이에 한 팔을 걸치고서 손에 턱을 괴었다.
“거짓말하지 않아도 돼. 너의 그런 면이, 네가 내 동지이길 바라게 했지만…….”
과거의 인연은 설령 둘만 있을 때라도 언급하지 않는다는 암묵적인 규칙을 최초로 깬 탓인가. 잠깐이나마 느슨해졌던 그는 입을 다무는 동시에 어두컴컴한 긴장 속으로 침잠했다. 란지에의 실수 때문에 보리스는 그가 지금 취약한 상태라는 판단을 더더욱 버리기 어려워졌다. 그러나 상대방은 단순한 염려조차 스며들 틈을 내주지 않았다. 란지에는 자세를 바르게 고쳐 앉는가 싶더니 아예 자리에서 일어났다.
“방금 말은 잊어 줘. 산책은 다음에 하자. 자야겠어.”
말소리, 표정, 몸짓을 비롯해 모든 요소가 그의 긴 불면을 확정하고 있었으므로 보리스는 의도치 않게 란지에를 거실에서 쫓아낸 기분이 들었다. 누워 보겠다고 들어가는 사람을 잡을 명분도, 까닭도 없어 방안의 암흑에 삼켜지는 뒷모습을 침묵으로 배웅했다.
그 밤은 그렇게 지나갔는데, 뜻밖에도 다음에 산책하자던 말은 으레 인사치레로 던진 공언이 아니었다. 얼마 후 잠들지 못하는 란지에를 다시 한 번 거실에서 만났을 때였다. 그가 파르스름한 낯으로 말했다. 같이 산책하러 가자. 보리스를 고개를 짧게 끄덕였다.
네냐플은 학생들이 통금 시간 이후로 기숙사 밖으로 나가는 걸 금했다. 따라서 그들의 밤 산책은 규칙 위반이었다. 이런 시간에 누가 점호를 하겠느냐마는, 밖을 드나드는 장면이 딱 걸렸다간 꼼짝없이 화장실 청소행이었다. 애당초 모범생은 못 되는 자신이야 그렇다손 쳐도 란지에 역시 일말의 고민도 안 하고 발걸음을 옮기는 까닭에 괜찮겠느냐 묻노라니 되레 그가 재미있는 질문을 들은 양 엷게 웃었다.
“모든 규칙에 얌전히 순응하는 사람은 나처럼 살지 않지.”
왕정제라는 가장 강고하고 거대한 규칙에 저항하는 이의 말이라 어떤 이유보다도 이해가 됐다. 어떤 의미로 란지에 로젠크란츠는 네냐플에서 최고로 반항적인 학생일 터였다. 다행히 밤 산책은 평화로웠다. 기숙사를 나갔다가 도토리 빌라에 복귀할 때까지 그들은 누구도 마주치지 않았다.
이후로도 불면의 밤과 둘만의 비밀스러운 산책은 드문드문 이어졌다. 공교롭게 잠들지 못하거나 자다 깨서 만나면 어느 날은 그대로 거실에만 있었고, 어느 날은 당연하게 걸으러 나갔다. 평범한 동기끼리 할 법한 대화를 나누는 날이 있는가 하면, 최소한의 말마디만 오가는 날도 많았다. 짧으면 며칠 간격으로 보기도 했으며 길게는 휴일이 몇 차례 지나도록 못 보기도 했다. 어느새 란지에의 불면증은 그나마 가깝게 지내는 이들이라면 익히 아는 문제가 되어 있었다. 몇몇은 늦은 시간에 둘이 산책을 다녀오는 사실도 눈치챈 것 같지만, 모른 척하거나 무관심했다.
그러는 동안 란지에는 생생하며 날카롭기도 했다가 모든 게 지겨운 사람처럼 초연하기도 했다. 어떤 밤에는 아주 괜찮아 보였는데, 어떤 밤에는 괜찮은 구석이 조금도 없어 보였다. 시간을 축적하며 길어진 머리칼을 자르는 대신 묶기 시작했다. 한 번의 승급 시험이 지나갔고, 해가 바뀌었다. 란지에와 논쟁하다가 강의실을 나간 교수가 한 명이 더 늘었고, 언제부턴가 린디즈 단골이 된 그는 올리브 절임을 입에 달고 살았다. 저 녀석 주머니에는 항상 린디즈 절임을 사기 위한 1엘소가 들었을 거라는 막시민의 추측은 여러 명의 동의를 샀다. 별안간 그는 오스틀리 교수의 연구실에 들어갔다. 연구 보조 학생이 되어 많은 수업을 뺐기 때문에 낮에는 어디에서도 얼굴 보기가 힘들어졌다. 어느새 란지에의 왼손에 딱 맞는 장갑이 생겼다.
그런 뒤에는 꽤 오랜 밤이 그저 지나갔다. 란지에를 거실에서 다시 만난 밤은 네냐플 승급 시험이 바짝 쫓아온 11월 초였다. 벽난로에서 훈기를 퍼트리던 불도 한참 전에 식은 빌라는 서늘하기만 했다. 그들이 불면 때문에 조우했던 첫 밤에서 일 년이 넘게 지났다. 근래 란지에는 막 편입했던 시기의 모습과 약간 달랐다. 혹자는 가시가 누그러졌다고 표현했지만, 보리스가 보기엔 그 반대였다. 그는 짓이겨진 안을 속수무책으로 흘리다가 차츰 겉에 둘러붙일 비늘을 되찾은 사람 같았다. 그럼에도 불 없이 노르스름한 달빛만 곁에 둔 지금의 란지에는 과거로 돌아간 사람처럼 여전한 모습이었다. 한 해에 걸친 낮의 변화조차 단지 껍데기였다는 듯이.
“오랜만에 산책할래?”
“밖은 꽤 쌀쌀할걸.”
“그래서 거절이야?”
“아니. 옷 단단히 입으라고.”
하지만 빌라를 나서고, 네냐플의 너른 부지를 걸으면서, 목깃 틈으로 파고들려는 찬바람을 거스르며 보폭만 맞추는 동안에 란지에가 오래 전의 밤과 별다름을 깨달았다. 그 변화는 취향인 간식이 새롭게 생기거나 모두가 기피하는 연구실에 자리를 트는 결정처럼 눈에 띄지 않았으므로 과거와 현재를 적확히 대조하여 설명하기도 어려웠다. 란지에는 그저 넘어가는 과정에 놓인 계절처럼 모호하고, 우화의 때를 향해 가는 매미처럼 필사적이며 비밀스럽고, 장서가 무수히 꽂힌 도서관처럼 밀도 높았다. 산책하는 중에 그는 한 번도 머리 위를 올려다보지 않았다. 그들에게 빛을 내리비치는 만월이 진정 달이라는 사실을 일절 의심하지 아니하듯이. 란지에의 눈길이 띄엄띄엄 낙엽에, 나목에, 어둠과 바람 자체에 머물렀다. 불현듯 보리스는 인과 모를 쓸쓸함을 느꼈다.
“보리스, 잠깐 앉자.”
네냐플을 거의 한 바퀴 돌 때까지 조용하던 그가 돌연 나무 벤치를 가리켰다. 선선히 그쪽으로 발길을 틀면서도 농담조도 물었다.
“벌써 지쳤어?”
“요새 앉아 있는 시간이 길어져서 운동 부족인가 봐.”
그럴 만하다고 생각했기에 잠깐이나마 진담인 줄 알고 심각해졌다. 다행히 란지에는 지친 기색이 아니었다. 벤치에 자리한 그가 잠시 느린 손길로 코트를 여민 앞섶을 가다듬다가 말했다.
“그간 밤 산책에 어울려 줘서 고맙다.”
듣자마자 알았다. 오늘 란지에는 그 말을 하고자 산책을 제의한 거였다. 한 점의 미련도 없이 실로 명쾌한 어투여서 보리스는 짧게 침묵하고 나서야 어렵사리 입을 뗐다.
“꼭 마지막 인사처럼 들리는군.”
“승급 시험이 목전이고, 끝나면 바로 방학이니 한동안 못 만나겠지.”
단순히 얼굴을 보고 말고의 의미가 아님을 이해할 텐데, 그는 짐짓 표면적인 해석으로 말을 돌렸다. 아마도 란지에 딴에는 부드럽게 에두른 긍정이리라.
“루시안이 친구들을 집에 초대하겠다며 벼르고 있던데.”
“놀랍지 않은 계획인데. 거절할 말을 미리 생각해야겠어.”
“…예상하고 있을 거야. 그래도 기대할 거고.”
가슴 한쪽이 따끔했다. 루시안의 마음에 대한 얘기였지만, 제 속내를 무의식중에 투영한 말이기도 했다. 보리스는 픽 웃었다. 둘만의 비정기적인 산책이 누구 하나가 네냐플을 떠나는 날까지 으레 이어지리라곤 스스로도 믿지 않았다. 시작은 늘 끝을 예비했다. 다른 자신은 끝이 오는 때를 가늠하지 못했고, 매번 지금은 아니리라 지레짐작했을 뿐이다. 단 하나, 전혀 몰랐던 것이 있다면 아쉬움의 크기였다.
“난 타인의 기대를 저버리는 데 익숙한 편이라서.”
한결 낮아진 목소리에서 희미한 체념을 읽고 옆으로 고개를 외틀었다. 란지에는 흠 잡을 데 없이 정돈된 자세로 앉아서 자기 왼손을 유심히 응시하고 있었다. 장갑을 끼치 않은 맨손. 하늘을 향해 느슨히 열린 손바닥과 다섯 손가락의 성긴 틈새가 사람이 본질적으로 지닌 연약을 표상하는 양 보였다.
“그렇군. 이르지만, 방학 잘 보내. 시험이야 넌 어련히 잘 보고 승급하겠지. 내년엔 학년이 달라질지도 모르겠다.”
일부러 가벼운 투로 주의를 끈 까닭은 저토록 인간적인 여백을 제 손으로 채우고 싶다는 충동 때문이었다. 이유가 뭐였든 그는 시선을 옮겼다. 눈이 마주친 직후 란지에가 내내 건조하던 입가에 웃음기를 띠었다.
“솔직해지지 못할 이유는 없겠지. 너와 걷고 얘기하는 시간이 좋았어. 지금 이렇게 말하는 순간까지도 포함해서 전부 좋은 피난처가 됐고, 그건 내가 미처 바라거나 기대하지 못한 바였지. 마음을 써 주어 고맙다. 넌 내가 말하지 않은 것들 때문에 나를 염려했을 거야. 실제로 난 꽤 힘들었지만……. 사실 어둠을 관조하던 긴 시간이 언제나 날 경계로 몰아갔던 것만은 아니야. 그러니 너무 걱정은 안 해도 돼.”
예상치 못한 진솔함에 깜짝 놀랐다. 기쁘지 않다면 거짓이나 한편으론 말문이 막힐 정도로 막막했다. 일말의 여지도 안 남기고 깔끔하게 마무리를 짓고 마는 사람에게 제가 더 무슨 이유를 덧대어 끝을 유예할 수 있겠는가. 형언하기 어려운 감상이 혼잡하게 산개하고, 응어리졌다가 갈라지고, 얽히고설켰다. 다행이라든지, 나 역시 산책이 즐거웠다든지, 적당한 대답은 얼마든지 있다. 보리스는 두어 번 입을 뗐다가 끝내 무언으로 란지에의 차가운 상냥함을 거부했다. 그런 기색을 능히 알아봄직했지만, 란지에는 담담하게 온점을 찍었다.
“먼저 빌라로 가. 난 이따 들어갈게.”
산책은 끝났다. 일어난 보리스는 둘이서 나왔던 북탑을 향해 홀로 걸었다. 걸음이 더디고 무거운 연유는 꼭 미련 때문만은 아니었다. 적어도 란지에는 솔직했으나 자신은 그러지 않았다. 처음에 권유했을 때는 순수히 염려하는 마음에서 우러났을지언정 저간에 함께였던 불면의 밤은 마냥 란지에를 위한 시간만이 아니었다. 오늘 잠들지 못한 그를 조우하고 느낀 감정이 비단 걱정뿐이었던가. 윈터러가 잠잠한 여러 밤에도 거실에서 들릴 기척에 주의를 쏟다가 잠들었다. 그를 중심으로 한 크고 작은 파동, 드러나고 가려지는 측면을 의식적으로 살피는 것도 알고 있다. 어느 날은 마땅한 우정이라고, 어느 날은 우정이 아니라고 느꼈는데 정확히 무엇이건 불명으로 존속해도 괜찮았다.
걸음을 멈춘 보리스는 이내 몸을 돌렸다. 그리고 발자취를 되짚어 갔다. 떠나온 지 얼마 안 된 까닭일까. 아까와 달리 서 있을 뿐, 란지에는 여전히 벤치 앞에 있었다. 그가 다시 돌아온 저를 발견하고 묻기 전에 먼저 말했다.
“난 우리 사이에 뭔가가 생겼다고 생각했어. 그건 착각이었나?”
당황할 법한 질문에도 란지에는 저어하는 낌새 없이 눈을 직시했다. 그의 시선으로부터 확실한 감정을 편린이라도 발견하려 주시했다. 불분명한 동의여도 좋았고 그게 말마디 하나로 끊어질 가냘픈 가닥이었던들 상관없다. 단호한 부정이어도 괜찮았다. 설령 어느 쪽도 아닌 놀라움이든 난처함이든, 망설임이든 거부감이든 건네주기를 바랐다. 무엇 하나라도 확인하지 못한 채로는 오늘 밤이 지난 후에도 자신은 이 산책로 위에 고스란히 남겨질 테니까.
란지에는 스스로 인정한 대로 기대를 잘 저버리는 사람이었다. 보리스는 그의 입술은 물론이고 그의 눈동자, 표정, 손끝에서 아무것도 찾지 못했다. 예상했더라도 낙담은 불가피했으므로 먼저 시선을 피하려는 때였다.
“보리스. 죽음과 면하게 했던 고통이 때론 삶을 추동하기도 해. 인간이 사를 생으로 전복하는 힘은 어디서 나올까. 난 그걸 알고 싶었지.”
긴 침묵을 앞세우고 나서야 흘러나온 육성은 사뭇 나긋나긋하여 보리스는 제 질문에 응한 대답으로 듣기 어려운 말에도 불만을 표할 수 없었다.
“이제는 알았다는 뜻이야?”
“늘 알았어. 내가 안다는 걸 자각했을 뿐.”
그가 발을 내디뎌 재회한 이래로 일정하게 지켜 오던 거리를 더디 좁혔다. 멀어질 의향도 없지만, 서둘러 뒷걸음질하지 않게끔 생각하고 물러날 겨를을 주려는 의지가 전해져서 더더욱 피하지 못했다. 서서히 밀려오는 광경을 목도하면서도 저도 모르게 우두커니 바라보도록 멈춰 세우는 파도는, 그러나 막상 지척까지 다가왔을 때는 한갓 사람의 손에 지나지 않았다. 왼손의 손끝이 하나하나 차례로 뺨에 닿았다.
“달빛이 따듯하네.”
둘 사이로 열브레하게 부유하는 미광은 낮 동안에 태양이 타고 남긴 듯한 잿빛이고, 얼굴은 한참 쌀쌀한 바람을 맞아 서늘했다. 아울러 살갗에 점점이 접촉해 있는 란지에의 손도 심장이 흠칫 요동할만치 차가웠다. 그렇기에 란지에가 말하는 온기는 모순적이며 명백했다. 이때에 이르러서야 보리스는 나만의 착각이었냐는 물음에 답을 얻었음을 깨달았다. 여전히 호명할 이름이 없이 모호한 것. 동시에 추위를 넘어서서 감각할 수 있는 따뜻한 것. 그걸로 충분하지 않나.
다시금 떠나려는 손을 막으려고 팔꿈치를 살며시 붙잡았다.
“잠시만 있어. 그냥, 아주 잠깐만.”
란지에는 난처한 웃음을 얼핏 보였지만, 자기 팔을 쓸어올리고 손등에 겹치는 온도를 수용했다. 잠시나마 그가 내준 여백에 조심조심 손깍지를 끼워 잡은 보리스는 눈을 감고 이 따뜻한 힘을 되새겼다. 그들은 때때로 서로 다른 불면의 밤을 지새울 테고, 추상적인 온기만으론 차디찬 어둠에 쉬이 깊은 잠을 드리우지 못한다. 하지만 어느 밤에는 지금의 기억이 통증을 전복하기도 하리라. 한갓 손, 그저 사람의 손 하나로써.